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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탔던 바이킹라인은 면세점과 식당 유흥을 위한 공간들이 구비되어 있는 큰 배이다.
우리는 바다가 보이지 않는 안쪽 라인으로 방안에 샤워실까지 있기는 하나 좁아서 트렁크 두 개를 들여 놓으면 비좁아서 문을 여닫기도 불편하다.
침대는 2층 침대로 2층에 있는 사람이 자다가 떨어지지 않도록 줄로 묶도록 되어 있다.
처음에는 줄이 왜 있는지 몰랐었는데 나중에 보니 그랬었는데 용도를 모르는 사람들도 많았다.
바이킹라인...5층에서 배를 내린다.
배를 타면 방의 번호가 적힌 카드를 두 장을 주는데 이 카드로 문을 열 수가 있으며 식당에는 이 카드를 보여 주어야 입장을 할 수가 있다.
노르웨이의 물가가 비싸다고 하여 맥주 등을 사거나 면세품을 사기도 하였는데 우리는 외국여행에서 가능하면 아무것도 사지 말자는 주의여서 아무것도 사지 않는다.
그리고 술도 별로 좋아하지 않으니 맥주 같은 것에도 별로 관심이 없다.
그리고 우리 일행 중에 서울에서 올 때 팩 소주를 사 왔는데 일정이 빡세다가 보니 저녁에 모여서 술 한 잔 먹을 시간도 없어서 소주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이기도 하다.
배 안에 있는 면세점...
식당에서 술을 마음대로 먹을 수 있었으니 와인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 때다 싶어서 마음껏 마시는 사람은 마음껏 마신다.
앞으로 술이 비싸서 사먹기가 힘들다고 하니....
밤이 되어도 밖이 어둡지는 않지만 밖에 보이는 풍경이 그 풍경이 그 풍경이어서 배안의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일찌 잠자리에 든다.
아직 시차 적응이 제대로 되지 않아 이곳 시간으로 새벽 세기가 되면 저절로 잠이 깨기 때문에 바깥 풍경이 궁금해서 카메라를 들고 갑판위로 올라가니 아직 사진을 찍을 정도로 밝지는 않다.
좌우로는 섬들과 육지들이 보이는데 이곳은 스웨덴 땅이다. 경치 좋은 곳을 골라서 사진을 찍는데 일행들이 올라온다.
저녁 식사는 시간을 정해 놓았는데 아침 식사는 정해진 시간이 없어서 편한 시간에 식당에 갔더니 중국 사람들이 많이 있기는 했지만 그리 복잡하지 않아서 가이드가 말한 것처럼 밀리고 자시고 할 것이 없었다.
여명에 보는 주변풍경
그림엽서와 같은 풍경이 지나간다.
아침을 먹고 하선하기 전에 휴게실에서 일행들
9시에 하선을 하는데 비행기처럼 트랩이 설치가 되고 그리고 걸어 나가면 바이킹라인 선착장에서 주차장으로 연결이 된다.
승객이 나가기도 전에 노란 셔츠를 입은 서양사람들과 빨간 셔츠를 입은 동양사람들이 줄을 지어 들어오는데 배를 청소하는 사람들이다.
배가 정박하면 청소하는 사람들이 제일 먼저 들어온다.
동양사람들은 빨간 옷을 서양사람들은 노랑옷을.....청소하는 사람들
배가 정박해 있는 동안 스톡홀름 항구의 사진을 많이 찍기는 했으나 날씨가 좋지 않아서 쓸만한 사진이 없다.
오전 중에 감라스탄과 바사박물관 그리고 노벨상이 시상되는 스톡홀름 시청사를 구경하고 오후에는 노르웨이로 가는 일정이다.
배 위에서 찍은 스톡홀름 항구 사진들
스톡홀름은 스웨덴의 수도로 1200년도부터 도시로 개발이 되었다고 하며 통나무(Stock) 섬(Holm)이라는 의미라고 한다. 이 지역을 처음 발견한 사람들이 통나무를 띄워 도시를 만들면서 이렇게 이름을 지었다고....
철광개발이 이루어지면서 수송의 요충지가 되면서 도시로 성장하여 1634년 수도가 되었으나 1700년부터 1721년까지 발트 해의 주도권을 놓고 벌인 대북방 전쟁에서 패하므로 인해 스웨덴과 함께 도시가 몰락하였으나 스웨덴이 2차 세계 대전 때 중립을 지키면서 피해를 입지 않고 전후 복구 사업에 참여하여 엄청난 경제성장을 이루게 되면서 다시 도시도 성장하게 되었다고 한다.
나무백과에서 빌려온 스톡홀름 사진...감라스탄 지구인 듯
그리고 이 도시는 우리의 인식과는 달리 치안이 그리 좋지 않다고 하는데 북구의 다른 도시들과는 달리 절도 강간 폭력사건 등의 발생비율이 OECD 2위로 한국의 열배 이상 치안이 불안하다고 하며 성폭력 범죄도 OECD 2위로 유럽의 최고수준이라고 한다.
이곳도 조직폭력배들이 있어서 집시들을 집단으로 수송해 와서 소매치기 사고가 많이 늘어나고 있다고 하니 우범지대는 조심하는 것이 좋다고....
스톡홀름 안내 비디오...유투브에서 크게 보려면 유투브를 통해서
남미에서는 여성 한두 명이 배낭을 메고 돌아다니면 자빠뜨리고 배낭을 채어가기도 한다니 혼자 여행하는 사람은 무조건 조심을 할 일이다.
실제로 브라질의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카메라를 앞에 메고 있었더니 거기에 살고 있는 한국인이 강도의 표적이 되니 절대로 카메라를 보이지 말라고 주의를 주기도 하더만....
그래서인지 이곳은 우리가 아는 스톡홀름 증후군의 유래가 된 곳이기도 하는데 스톡홀름 증후군이란 인질로 잡힌 사람이 범인과 같이 오래 있거나 학대를 오래 받다가 보면 범인이나 학대하는 사람에게 동화되고 감화되어 그들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1973년 은행 강도가 인질들을 6일간 붙잡고 있는 과정에서 범인과 동화가 되어 범인을 감싸는 사람들이 생겨나는 현상을 보고 범죄심리학자가 붙인 현상이다.
배와 연결되는 다리...비행기트렙처럼 건물에서 나와서 연결되나.
관광객을 기다리는 버스들... 이 버스를 타고 덴마크에서 비행기를 탈 때까지 관광을 한다.
대부분이 동구 사람들로 우리 기사는 폴란드 사람이었는데 한국말들을 곧잘 하면서 한국 사람들이 태리고 탈 때 마다 '아이구' 소리를 대신 해 준다. ㅎㅎ
내리고 탈 때마다 다리가 아파서 아이구 하는 소리를 하기 때문에
처음에 가는 곳이 감라스탄으로 가는 도중에 있는 스톡홀름 항구가 잘 보이는 언덕에 잠깐 세워서 항구를 구경하고 사진을 찍게 한다.
날씨가 맑지 않아서 아쉽기는 하나 스톡홀름에서 이곳이 제일 높은 곳이어서 스톡홀름 항구의 전체가 잘 보이고 관광객들은 이곳에서 사진을 찍는다.
관광을 가면 반드시 자신의 얼굴을 넣어서 사진을 찍는 사람들이 있는데 나이가 들어서 이미 보기 싫어진 얼굴을 구태여 넣어서 찍는 이유를 알 수가 없다.
사진에 왜 꼭 자신이 들어가야 하는가...
그 경치를 자신이 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것이지. 다른 사람 누가 그 자신을 봐 줄 것이며 관심을 가진다고 이미 추해져 버린 얼굴이 사진 속에 들어가야 하는가..
나이가 든 사람들은 생각들을 해 보기 바란다.
그렇지만 원하는 사람들은 열심히 찍어 주기는 했다.
조그만 언덕에서 보이는 스톡홀름 항구의 사진들
감라스탄(Gamla stan)은 스웨덴의 수도인 스톡홀름의 구 시가지로 스웨덴어로 "옛 도시"를 뜻한다고 한다. 감라스탄은 스톡홀름의 여러 섬들 중의 하나인 13세기부터 형성되었으며 중세 시대에 건설된 도로와 거리, 오랜 역사를 가진 건축물들이 들어서 있는 곳이다.
스톡홀름의 주요한 관광지..시간이 있었다면 아바박물관을 한 번 가보았어야 하는데
감라스탄 중심부에 위치한 스토르토리에트 광장(Stortorget, 대광장)에는 스톡홀름 증권 거래소를 비롯한 옛 건축물들이 있는데 이 광장은 1520년 11월 덴마크의 크리스티안 2세 국왕이 이끄는 덴마크 군대가 스웨덴의 귀족들을 학살한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이 일어난 곳으로 이 사건으로 인해 폭동과 내전이 일어나면서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고 구스타프 1세 바사가 스웨덴의 국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고 한다.
칼 14세 요한의 청동기마상...현제 스웨덴 왕가의 시조라고 한다.
스톡홀름 궁전의 앞마당
벽면의 장식들
감라스탄에는 스톡홀름 대성당, 노벨 박물관 외에 스웨덴 왕실의 묘소로 사용되고 있는 리다르홀름 교회(Riddarholm), 18세기에 건설된 바로크 건축 양식의 왕궁이자 스웨덴 왕실의 거주지인 스톡홀름 궁전(Stockholms slott)이 있는데 시간관계상 스톡홀름 궁전과 스토르토리에트 광장만 구경하고 다음코스로 갈 수밖에 없다.
스토르토리에트 광장(Stortorget)으로 광장에서 스톡홀름 대학살이라는 일이 있었기에 피의 광장이라고도 불리 운다고 한다
덴마크의 주도하에 결성된 스칸디나비아 3국의 칼마르 동맹을 탈퇴하려고 하는 스웨덴 사람들을 달래기 위해서 1520년 당시 덴마크의 왕 크리스티안 2세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 대포를 대포를 쐈는데 불발이 되었다고 ...
크리스티안 2세가 스웨덴 귀족을 이곳에 초대하여 연회를 베푸는 척 하면서 네 귀퉁이를 막아서 도망을 가지 못하게 하고 1520년 11울 8일과 9일 양일간에 80여 명이 넘는 스웨덴 귀족들을 목을 잘라 죽이고 그 머리들을 이 곳 우물에 묻었다고 한다. 이 광장이 피로 흥건하여서 피의 광장이라고 불렸고 우물을 해골의 샘이라고 부른다고.....
가운데 보이는 것은 우물이다.
피의 광장
노벨 박물관...안에는 들어갈 시간이 없었다.
그 때 쏜 대포알이 벽에 박혀 있는데 그대로 두고 있다고...
스톡홀름을 찾는 관광객들은 반드시 들리는 곳이 감라스탄과 바사박물관 그리고 시청사(市廳舍)로 우리도 주마간산(走馬看山)격으로 이곳을 거쳐 가고 있는데 어차피 시간이 넉넉하다고 하여도 이 도시의 역사를 다 알 수는 없는 일이니 이 분야에 관심이 그리 많지 않은 사람이라면 이곳이 그런 곳이구나 하고 지나갈 수밖에 없다.
감라스탄 거리...
가장 좁을 골목...사람 하나만 지나갈 수 있다.
성 조지(게오르그)의 괴물 퇴치상...괴물인 용은 외세(덴마크)를 상징하고 오른 쪽에서 쳐다보는 공주는 스웨덴을 상징한다고
골목과 골목사이로 통하는 길...이 길만 막으면 적이 들어 올 수 없을 것
슬로트스바겐 거리에서 본 건너편
스톡홀름에서 두 번째로 간 곳이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戰艦)인 바사(Vasa)호(號)를 전시해 놓은 곳으로 바사박물관이라고 하는 곳이다.
전함 바사호는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으로 바사왕가의 스웨덴에서 가장 오래된 전함으로, 바사왕가의 구스타브 2세(Gustav II)가 재위하였던 1625년에 건조되어 1628년 8월 10일 처녀항해 때 침몰하였는데 당시 스웨덴은 북유럽 발트해 주변 제국 건설에 분주해 막강한 해군력이 절실히 필요해서 전함을 건설하게 되었다고 한다.
바사 박물관 가는 길
노르딕 박물관 지붕이 보인다.
바사호 박물관...배의 원형을 복원하고 배에 맞추어서 건물을 지었다고,,,
바사호는 그 당시 건설된 전함 중의 하나인데, 길이 69m, 높이 48.8m, 탑승 가능 인원 450명, 탑재 가능 대포 수량 64개에 이르는 거대한 배로 제작되었으며, 동시에 300kg 이상의 포탄을 발사할 수 있는 강력한 화력을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국내외 귀빈 등 많은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진수식을 하고 만으로 나가자 말자 돌풍이 불어 배가 기울어 열린 포문 사이로 물이 스며들어 수(數)분 만에 침몰하고 말았다. 이 사고로 배에 승선하고 있던 150여 명 중 30여 명이 익사했다고....
배의 실제 모습...복원하는데 20여년이 걸렸다고
포문(砲門)..소위 포문을 열다 처럼 포문이 열려 있다.
뱃버리 보우 스피릿에 붙어 있던 사자상...구스타프2세를 상징한다고
배가 기울어서 가라앉게 된 것은 이렇게 큰 배를 만들어 본 적이 없어서 무게 중심을 잡지 못해서라고 한다니.....침몰한 바사호는 1956년 해양고고학자인 안데스 프란첸에 의해 발견되어 333년 만인 1961년에 인양되었는데 바사호는 1962년부터 임시 박물관에 있다가 1988년에 새로운 현재의 박물관으로 이전하여 1990년 바사박물관으로 개관하였으며 이곳은 스칸디나비아에서 관광객들이 가장 많이 찾는 박물관이라고 한다.
관람객들은 배의 선박 바닥을 받치는 재목인 용골(keel)에서부터 꼭대기까지 총 6 곳의 서로 다른 위치에서 바사를 감상할 수 있다. 박물관은 총 4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각 층에서는 바사의 준공, 취항, 침몰, 인양의 각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데 바사호의 인양과정을 설명하는 영화관이 있고 각 나라의 관광객들을 위해서 그 나라의 말로 해설을 하는데 한국어로도 설명을 하는 영상이 있다.
이 전함을 만들 당시의 발틱헤의 각 나라들의 전함들의 상황을 그린 그림들
생활상과
배를 건조하는 모습의 그림들
한국어로 영화감상을 하고
참고로 이 배가 바다에서 안 썩고 이렇게 오래 있었던 것은 스톡홀름 항구의 염분이 옅고 수심이 앝은 뻘 속에 박혀 있기 때문이라고 한다.
뻘 속에 박혀 있으면 목선을 갉아먹는 좀조개가 접근을 할 수 없고 펄이 냉장고 역할을 해서 미생물의 번식을 막기 때문이라고...
바로 옆에 있는 노르딕 박물관..지붕이 화려하다. 겉모습만 보고 지나간다.
바로 옆에 있는 스웨덴의 세계적인 혼성그룹 아바의 박물관...있는 줄도 몰랐다.
피의 광장
바사호
첫댓글 핀란드 투르크에서 스웨덴 스톡홀름으로 건넜네요.
찾아보았습니다.
긴여행기?많은즐거움을 느끼게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