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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근길이다. 산업물류의 국도는 차들로 홍수처럼 이어진다. 하루 종일 공장과 물류창고를 오가는 화물차들이 도로를 메우고, 그 사이로 승용차들이 쉴 새 없이 흘러간다. 국도변에 자리한 사무실에서 도로로 빠져나오는 일은 생각보다 쉽지 않다. 주차장 입구에서 기다리다 달리는 차들 사이에 생긴 짧은 틈을 찾아 들어가야 한다.
그럴 때면 묘한 고마움을 느낀다. 멀리서 달려오던 차가 나오는 차를 보고 속도를 줄여준다. 조금 전까지 빠르게 달리던 차가 내 앞에서 잠시 멈칫하며 길을 내어준다. 나는 얼른 점멸등을 누른다. 고맙다는 표시다.
불과 몇 초의 일이다. 그러나 그 몇 초가 하루의 마음을 바꾸어 놓는다. 누군가가 나를 위해 속도를 늦추었다는 사실이 고맙다. 여유란 어쩌면 이런 것인지도 모른다. 조금 늦춰주는 것, 조금 기다려주는 것, 내 앞의 길만 바라보지 않고 옆 사람의 사정을 한 번쯤 살펴주는 것.
얼마 전 동생의 차에 함께 타면서 또 하나의 여유를 배웠다. 예전과 운전하는 모습이 달라져 있었다. 급하게 가속하지 않았고, 앞차와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 신호가 바뀌어도 서두르지 않았다. 차선을 바꾸거나 앞차를 추월하는 일도 많지 않았다.
“왜 이렇게 천천히 운전해?” 동생은 안전운전 점수를 이야기했다. 안전운전 점수가 일정 수준 이상이면 보험료를 줄일 수 있어서 운전 습관을 바꾸었다는 것이다.
나는 조수석에 앉아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게 편안했다. 나도 안전운전 점수를 올려보기로 했다. 특별한 기술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불필요한 가속을 줄이고, 신호를 지키고, 속도를 조금 낮추었을 뿐이다. 그런데 운전이 편안해졌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일찍 출발하면 된다. 굳이 앞차를 추월할 필요도 없다. 발에서 힘을 빼니 세상이 보이기 시작했다. 창밖의 건물이 보이고, 산의 능선이 보였다. 하늘에 흘러가는 구름도 보였다. 늘 그 자리에 있었지만 내가 서두르느라 보지 못했던 것들이었다.
삶도 이와 같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자주 힘을 주고 산다. 더 빨리 가야 하고, 더 많이 가져야 하고, 남보다 앞서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 말이 옳다는 것을 증명하려 하고, 상대방보다 한발 앞서려 한다. 그러다 보면 사람의 마음까지 추월하려 한다.
상대가 말을 끝내기도 전에 내 생각을 내놓고, 상대의 사정을 알기도 전에 판단한다. 꼭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한마디 더 하고, 이기지 않아도 될 일에서 이기려고 한다.
사람의 마음에는 정지선이 없다. 그렇다고 앞차를 추월하듯 다른 사람의 마음을 앞질러 갈 수는 없다. 사람마다 살아온 시간이 다르고, 마음이 움직이는 속도도 다르다.
기다려야 할 때는 기다려야 한다. 조금 늦게 이해해도 되고, 내 생각과 달라도 한 번 더 들어볼 필요가 있다.
골프에서도 비슷한 이치를 배운다. 공을 멀리 보내려고 힘껏 휘두르면 오히려 공이 생각만큼 날아가지 않는다. 어깨에 힘을 빼고 자연스럽게 스윙해야 공이 멀리 날아간다.
인생도 그런 것 같다. 더 멀리 가고 싶다는 욕심 때문에 온몸에 힘을 주면 오히려 앞으로 나아가기 어렵다. 지나치게 움켜쥐면 손안에 있는 것마저 놓칠 수 있다. 힘이 많이 들어간 사람에게는 주변의 반작용도 커진다. 자기 뜻을 관철하려고 할수록 그 뜻에 저항하는 사람이 생긴다.
퇴근길에 나오는 차 한 대를 위해 잠시 속도를 늦추는 것처럼, 사람의 마음 앞에서도 속도를 늦출 수는 없을까. 내가 조금 늦는다고 세상이 무너지지 않는다. 앞차를 추월하지 않아도 목적지에는 도착한다.
더 세게 밟는 것이 더 빨리 가는 방법은 아니다. 더 힘을 주는 것이 더 멀리 가는 방법도 아니다. 때로는 마음에서 힘을 빼야 한다. 그러면 보이지 않던 것이 보인다.
구름이 보이고, 길가의 나무가 보이고, 옆자리에 앉은 사람의 얼굴이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가 보인다. 여유는 시간이 남아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마음에서 불필요한 욕심을 조금 덜어낼 때 생기는 것이다.
모든 사람보다 먼저 도착할 필요도 없다. 모든 사람에게 내가 옳다는 것을 증명할 필요도 없다. 모든 것을 내 손에 쥐려고 할 필요도 없다. 조금 기다리고, 조금 양보하고, 조금 천천히 가면 된다. 종이 위에 남겨진 빈칸이 미처 다 적지 못한 문장들을 품어 안듯, 우리 마음에도 여백이 있을 때 세상의 결이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