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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0일 연중 제14주간 수요일
제1독서 : 호세 10,1-3.7-8.12
복 음 : 마태 10,1-7
그때에 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
2 열두 사도의 이름은 이러하다.
베드로라고 하는 시몬을 비롯하여 그의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
3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스와 세리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4 열혈당원 시몬, 그리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
5 예수님께서 이 열두 사람을 보내시며 이렇게 분부하셨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6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7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조명연 마태오 신부
보잉에서 30년 넘게 일하던 멀덜리는
포드모터컴퍼니 설립자의 증손자인 빌 포드로부터 전화를 받게 됩니다.
위기에 있는 포드모터컴퍼니 대표를 맡아 사회 회생 작업을 도와 달라는 부탁이었습니다.
2006년에 멀덜리가 포드를 맡았을 때,
그 해에만 20조 가까운 손실을 예상할 정도로 상황이 안 좋았습니다.
처음 최고위 임원들과 사업 계획 검토를 위한 주간 회의를 진행하면서,
특별히 각 임원이 맡고 있는 주요 프로젝트 5개씩을 3가지 색깔로 표시해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녹색은 프로젝트가 문제없이 잘 진행되고 있다는 뜻이고,
노란색은 일부 문제가 있으나 해결책을 찾아 작업중이라는 뜻이고,
빨간색은 문제가 생겼고 해결책도 찾지 못한 상황이라는 뜻이었습니다.
다음 회의에서 임원들의 프로젝트 보고에서 제일 많은 색깔은 무슨 색이었을까요?
그 해만 20조 가까운 손실을 보고 있었으니 당연히 모두 빨간색이라고 예상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모든 색깔이 녹색이었습니다. 아무 문제 없이 잘 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과는 잘못된 것이 많다고 이야기하고 있는데, 임원들은 문제없다고 말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신임 대표에게 잘못 보이면 안 된다는 임원들의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문제를 찾아야지만 해결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 자체를 숨기려 할 때가 참 많습니다.
직장만이 아니라 이웃과의 관계 안에서, 무엇보다 주님과의 관계 안에서도
나의 옳음만을 드러내려고 하지 않았을까요?
문제를 발견한 사람만이 빨간색을 녹색으로 바꿔놓을 수 있습니다.
우리 교회도 많은 문제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제, 수도자 성소는 점점 줄어들고 있고,
새영세자의 숫자보다 냉담자의 숫자가 압도적으로 늘고 있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물질주의와 세속주의는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어떻게 변화되어야 할까요?
이를 오늘 복음의 제자들을 파견하는 모습에서 방향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신 것은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즉, 악을 철저하게 거부하고 선을 실천할 수 있어야 하며,
우리의 관심사는 고통과 시련 속에 있는 사람을 향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야 했습니다.
실제로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 하나 어기지 않고 철저하게 따랐고
성공적으로 전교 여행을 마칠 수 있었습니다.
우리의 관심사가 과연 어디에 있어야 우리 교회가 더 주님께서 원하는 공동체가 될 수 있을까요?
어렵고 힘든 사람의 편에 서야 하고, 세상의 뜻보다 주님의 뜻을 향할 수 있어야 합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나를 불러주신 분을 기억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가까이 부르시고 그들에게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선택한 이들에게 당신의 능력을 주시어 당신의 일을 할 수 있도록 안배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뽑아 세웠다.
너희가 가서 열매를 맺어 너희의 그 열매가 언제나 남아 있게 하려는 것이다”(요한15,16).
하신 말씀대로입니다. 능력 있는 사람을 뽑은 것이 아니라 뽑아서 능력을 주시는 주님이십니다.
제자들이 예수님을 스승으로 모신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그들을 제자로 삼았듯이
오늘 우리도 우리가 예수님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주님께서 먼저 우리를 불러주셨음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내 삶의 자리는 언제나 주님께서 마련하신 꽃자리입니다.
상황에 구애됨이 없이 흔들리지 않는 믿음의 소유자로 서 있기를 희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통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자 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의 선택받은 자녀임을 잊지 않길 바랍니다.
주님께서는 언제나 우리를 지켜주십니다.
내가 느끼든 그렇지 않든 언제나 나와 함께 하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을 열어 주님을 바라봅시다.
열두 사도의 명단을 보면 죄인으로 낙인찍힌 마태오라는 사람도 있고,
급진적인 열성 당원인 시몬도 있으며 요한 세례자의 제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있습니다.
다양한 사람이 뒤섞여 있습니다. 이렇게 보면 선택이 실패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들이 회개하고 성령의 불을 받게 됨으로써
죽음을 불사하는 증거자들이 되었고 교회의 초석이 되었습니다.
사실 "주님께서는 우리를 성공으로 부르신 것이 아니라 최선으로 부르셨습니다"(성녀 마더 데레사).
우리가 사도직 활동을 하면서 명심해야 할 것은
“얼마나 많은 활동을 하느냐, 또는 얼마나 널리 영향력을 미치느냐가 아니라
하느님께서 정하신 범위 안에서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을 행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고 싶은 일을 우선 하기보다는 해야 하는 일을 먼저 해야' 합니다.
주님께서는 나를 통하여 무슨 일을 하고자 하시는지를 알아챘으면 좋겠습니다.
무엇을 하든 나를 뽑아주신 분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악령들을 제어하는 권능을 주시어 ...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어제까지 마태오복음 8장과 9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메시아적 권능을 드러내준 기적 이야기들을 들어왔습니다.
이제 오늘부터 듣게 되는 말씀은 제10장의 '파견 설교'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부르심 받은 제자들 중에서 열둘을 또 다시 '부르십니다.'
그리고 그들을 사도로 파견하기에 앞서,
'먼저' 당신의 일을 하는 데 합당한 권위와 힘을 부여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다.'(마태 10,1)
이는 제자들의 사도적 권위를 확증해 주시는 동시에,
그 권위와 능력이 그들 자신으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부터 온 것임을 일깨워줍니다.
그러니 그들이 받은 신적 권위와 능력, 곧 마귀를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일은
메시아와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알리는 징표가 됩니다.
이처럼 '사도'란 ‘파견받은 자'이기에 자신의 주장을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파견한 분의 뜻을 전파하는 것이 그 사명입니다.
그래서 사도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곧 파견하신 분이신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파견받은 자의 재능이 아니라,
누구에게서 파견받았는지가 중요하게 됩니다.
그러니 그들은 예수님께로부터 파견받았다는 사실 때문에 중요하게 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러 가야 할 곳을 말씀해 주십니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
(마태 10,5-6)
이러한 전도의 대상 지역을 이스라엘로 제한시키는 것은
민족적 편견이나 영원히 지켜져야 할 지침이 아니라,
복음의 선포가 하느님의 경륜에 따라, 먼저 이스라엘로부터 시작됨을 말해줍니다.
곧 아직 이방인들에게 복음을 전파해야 할 때가 이르지 않았음을 말해줍니다.
사실 <사도행전>에 따르면,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본격적으로 전파되기 시작된 것은
스테파노가 순교한 후라 할 수 있습니다(사도 11,19-20).
우리는 오늘 복음에서 두 가지의 우선순위를 볼 수 있습니다.
하나는 당신의 제자들을 사도로 뽑으시면서
'먼저' 사도에 합당한 당신의 권위와 힘을 주셨다는 사실로,
이는 우리가 부르심을 받았다는 사실 그 자체로,
이미 이곳에 모여 살기에 합당한 은총을 받았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또한 우리가 어떤 직무나 소임을 받았다면, 이미 그에 합당한 힘이 주어졌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그를 수행하고 있다면, 그것은 우리의 힘이나 재능이 아니라 바로 그분의 능력임을 말해줍니다.
또 하나는 사도로 파견하시면서 '먼저' 그 복음 전파의 대상을 정해주셨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 자신부터 ‘먼저’ 복음화 되어야 함을 깨우쳐줍니다.
‘먼저’ '우리 안에' 예수님이 선포되고,
'우리 안에' 하늘나라가 흘러넘쳐야 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그러니 '우리 안에서' 그분의 모습을 드러내고, 그분의 나라, 그분의 지배를 드러내는 것이
바로 우리가 그분의 제자요 사도임을 드러냅니다.
이는 동시에 우선순위를 분별하는 일이 아주 중요하기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그 우선순위를 결정하시는 분임을 말해줍니다.
그분이 바로 우리를 파견하신 예수님이요, 우리는 그분의 제자요, 사도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어김없는 예수님의 사람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마태 10,7)
주님!
어디를 가더라도 저의 길동무가 되어 주시고, 저의 길이 되어 주소서!
누구를 만나더라도 저의 파트너가 되어 주시고, 저의 언어가 되어 주소서!
무엇을 하더라도 저의 동료가 되어 주시고, 저의 일이 되어 주소서!
제가 언제 어디서나 당신의 나라를 선포하며, 당신과 함께 있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27대 사목회가 시작되었습니다.
코로나 어려운 시기에 함께하였던 26대 사목회에 깊이 감사드립니다.
제가 이곳 댈러스에 온 지도 5개월이 되었습니다.
27대 사목회 회장단의 이름은 이렇습니다. “서 요셉, 박 에드워드, 김 다윗, 홍 고스마”
본당에는 회장단과 더불어 여러 분과가 있습니다.
전례, 구역, 친교, 선교, 새 신자, 청소년, 교육, 홍보, 정보기술, 여성, 사회 사목 분과가 있습니다.
세대별 모임도 있고, 주일학교와 한국학교 담당자도 있습니다.
사목회와 함께 종신 부제, 수도자, 성직자가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 공동체를 위해서 봉사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27대 사목회가 해야 할 사명을 명확하게 말씀하십니다.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어, 그것들을 쫓아내고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 주게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집안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고 하셨습니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하고 선포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습니다. 더러운 영을 쫓아내는 겁니다.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고쳐 주는 겁니다.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음을 선포하는 겁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더러운 영’은 무엇일까요?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욕망을 따르려는 마음입니다.
아직 오지도 않은 근심 때문에 지금의 기쁨을 느끼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나의 뜻을 관철하기 위해서 이웃의 의견을 무시하는 마음입니다.
변화와 혁신을 두려워하고 현실에 안주하려는 마음입니다.
해보지도 않고, 가보지도 않고 쉽게 포기하는 마음입니다.
이웃의 기쁨을 함께 기뻐해 주지 못하는 시기와 질투의 마음입니다.
나보다 못한 이를 도와주지 못하고, 무시하는 교만한 마음입니다.
어떻게 해야 더러운 영을 물리칠 수 있을까요?
예수님께서는 그 길도 알려 주셨습니다. 하느님의 뜻에 의탁하는 겸손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겸손을 이야기하셨습니다.
첫째가 되려는 사람을 꼴찌가 되는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잔치에 초대받으면 낮은 자리로 가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다고 하셨습니다.
십자가를 기꺼이 지고 가는 희생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십자가를 말씀하셨습니다.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몸소 십자가를 지고 가셨습니다.
모든 걸 내려놓을 수 있는 가난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하셨습니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지나가기가 더 쉽다고 하셨습니다.
가난했던 라자로는 아브라함의 품에서 영원한 생명을 시작하지만,
부자는 지옥에 있다는 비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재물과 하느님을 함께 섬길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재물을 하늘에 쌓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세상의 부자들이 가난한 이들에게 기꺼이 나눌 수 있다면 하늘에 재물을 쌓은 것이고,
그들은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부자라서 하느님의 나라에 못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재물에 대한 욕심 때문에 하느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기 때문에 못 들어가는 겁니다.
주님께서 함께하시니 아쉬운 것이 없다는 믿음의 마음입니다.
엘리사벳도 마리아에게 이렇게 축복했습니다.
“주님의 말씀이 이루어지리라 믿으셨으니 여인 중에 복되나이다.”
예수님께서는 하혈하던 여인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여인아! 너의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
제자들에게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겨 바다로 넣을 수 있다.”
그렇습니다. 신앙의 출발은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 이루어지리라는 믿음에서 시작합니다.
우리가 겸손한 마음을 지닌다면, 희생의 마음을 지닌다면, 가난한 마음을 지닌다면,
굳건한 믿음의 마음을 지닌다면 우리는 능히 악한 영을 물리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는 주님의 제자가 되어 병자와 허약한 이를 고쳐 줄 수 있습니다.
27대 사목회가 눈앞에 보이는 일을 해결하려고 하면 분명 갈등과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27대 사목회가 성과와 결실을 먼저 얻으려고 하면 시련과 고통이라는 장애물을 만날 것입니다.
27대 사목회가 더러운 영을 먼저 물리칠 수 있다면 겸손과 희생
그리고 가난과 믿음의 마음으로 무장한다면 하느님께서는 함께하실 겁니다.
주님! 27대 사목회를 축복해 주시고,
믿음과 희망 그리고 사랑이 넘쳐나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이 되게 하소서.
“너희는 정의를 뿌리고 신의를 거두어들여라. 묵혀 둔 너희 땅을 갈아엎어라.
지금이 주님을 찾을 때다, 그가 와서 너희 위에 정의를 비처럼 내릴 때까지”
예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당신의 사명을 수행하시기 위해 비천하고 멸시받는 이들을 선택하셨다.
그리고는 제자들에게도 치유 권한을 주셨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이름으로, 예수님의 권능으로 그 일을 해냈다.
예수님께서도 당신의 구원 사업을 계속하도록 열두 사도를 선택하신다.
열둘이라는 숫자는 구약을 완성하시는 예수께서 새로운 백성을 이끌어갈 열두 사도를 부르신다.
제자들의 신분을 보면 오늘의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의아한 선택이셨다.
어부, 세리, 열성 당원과 같은 학식이나 사회적 지위로 볼 때 지도자급에 속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모든 것을 잘 아시고 꿰뚫어 보시는 주님이 이런 부류의 사람들을 제자들로 선택하셨는가?
이것이 바로 우리 인간과 하느님 지혜의 차이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을 제자로 뽑으실 때, 지금 그가 무엇을 하는 사람인가를 보신 것이 아니라,
그를 어떤 사람이 되게 하여 그가 어떠한 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인가를 보시고 그들을 선택하셨다.
즉 자신의 모든 능력을 겸손되이 하느님을 위해서 쓸 줄 아는 사람을 택하셨다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신다.
“다른 민족들에게 가는 길로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들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마라.”(5절) 하신다.
이 말씀은 다른 민족들에게는 복음을 전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행실과 생활양식을 제자들이 피하게 하기 위해서이다.
주님께서는 사마리아 여인을 치유해 주셨다. 이 말씀 바로 이단자들의 집회에 가지 말라는 경고이다.
이 분부는 또한 자신을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하는 우리가
다른 민족들과 이단자들의 길을 가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그들은 신앙만이 아니라, 삶의 방식도 우리와 다르기 때문이다.
예수께서는 먼저 “이스라엘의 길 잃은 양들에게 가라.”(6절) 하셨다.
그리고 이스라엘 다음으로 다른 민족에게도 복음이 전해지게 되어있었다.
결국은 유다인들이 부름을 받고도 회개하기를 거부하여 다른 민족들에게로 복음이 선포되었다.
이는 다른 민족들이 더 큰 은총을 차지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렇게 제자들은 하늘나라와 그것이 뜻하는 모든 것을 선포하였다.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7절)
복음이 전해지면 세상은 변화한다.
세상은 하느님의 뜻과는 반대로 살아가려 하므로 복음이 전해지면
하느님의 뜻대로 살아가는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세상을 그렇게 변화시키는 우리가 되어야 할 것이다.
고해가 성사가 아니라 상담이 되어가는 이유
전삼용 요셉 신부
오늘 복음에 예수님께서 악한 영에 대한 권한과 병자와 허약한 이들을
모두 고쳐주게 할 힘을 주시고 제자들을 파견하십니다.
누구에게는 주시고 누구에게는 주시지 않은 것이 아닙니다.
모든 죄를 용서할 권한을 가지고 파견받는 제자들에게 주신 것입니다.
교회의 가장 큰 능력, 혹은 하늘나라의 열쇠는 죄를 용서하는 권한 입니다.
교회는 하느님 자녀를 탄생시켜야 합니다.
그런데 하느님 자녀는 세례 때 하느님 자녀가 되었다는 믿음을 가지고
그리스도처럼 살려고 노력하는 이들입니다.
여기서 죄란 그리스도처럼 하지 못하는 게 죄입니다.
아기들의 죄는 무엇일까요?
아이가 때가 되었는데 말을 하지 못하고 걷지를 못한다면 그것이 죄입니다.
아이는 부모처럼 두 발로 걷고 말도 할 수 있다고 믿고 그렇게 노력해야 합니다.
이 과정에서 옹알이도 하고 넘어지기도 합니다.
걸음마를 시작할 때 2천 번을 넘어진다고 합니다.
이때 부모의 역할은 왜 넘어졌느냐고 하며 상담해 주는 일이 아니라
양식을 주며 다시 한번 노력해 보라고 하는 역할입니다.
같은 죄를 지었더라도 2천 번씩 그냥 용서하고 보아주고 용기를 북돋아 주지 않으면
결국 이 세상에서 그 죄에서 벗어날 수 없게 됩니다.
그리스도는 이 역할을 하라고 당신 제자들을 파견하신 것입니다.
그런데 왜 같은 죄를 계속 짓느냐고 뭐라 하고 또 그러한 죄를 꼬치꼬치 캐물으며
고해하는 이를 지나치게 불편하게 하는 것은
더는 그러한 노력을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리게 됩니다.
사제가 고해 성사할 때 그냥 죄를 용서해 주지 않고 야단을 치거나
반복해서 짓는 죄에 대해 자신이 무언가 할 수 있다고 믿어 마치 상담가처럼 행동하는 이유는
자신 안에 죄를 용서할 권한이 있음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내 스스로 무언가 더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고
이것이 신자도 힘들게 하고 사제 자신도 힘들게 만듭니다.
여기에서 벗어나는 길은 나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내가 믿는 것입니다.
이를 믿기 위해서는 외적인 표징을 자신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빈센트 반 고흐는 하루에도 몇 개씩의 그림을 그렸고
자신도 분명 그림을 잘 그릴 능력이 있다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그 그림을 사 가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자신을 잃게 되었고 결국 그림 그리는 의미를 잃고 자살하게 됩니다.
우리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있음을 믿는 표징은
악령을 쫓아내고 병을 고치는 것을 보는 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에게 죄를 용서하는 권한을
하느님께서 주셨음을 보여주시기 위해 중풍 병자를 고치셨습니다.
같은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를 고치는 것을 보시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까지 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사제는 마치 병을 고치는 능력이나 악령을 몰아내는 능력을
특정 사제에게만 주었다고 여겨서는 안 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미국에서 한 아기의 머리에 입맞춤 했을 때 뇌종양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럼으로써 당신 안에 성령께서 함께하심을 봅니다.
그러니 다른 사제에게 고해성사를 하기도 하고 당신도 사제들에게 고해성사를 줄 때
경찰이 심문하듯이 물어보지 말라고 권하십니다. 그냥 용서해 주라는 것입니다.
사제가 악령을 내쫓고 병자를 고치는 시도를 계속해야 하는 이유가 이것입니다.
이것을 통해 사제 자신의 믿음도 증가하기 때문입니다.
이 능력은 마치 임금이 암행어사에게 주는 마패와 같습니다.
마패를 잃어버렸다면 암행어사는 어떻게 할까요?
자신이 임금으로부터 파견되었음을 증명하기 위해 노력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암행어사로서의 직무를 수행할 수 없게 됩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신자들은 모든 사제에게 악령을 쫓아내고 죄를 용서하는 권한이 주어졌음을 믿고
아프면 무조건 안수 받아야 합니다.
그러는 중에 반드시 성령께서 함께 하심을 서로가 느끼게 될 것이고
그러면 사제가 자기가 무언가 할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고 온전히 성령께 의지하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큰 부끄러움을 무릅쓰고 예! 하고 외치며 주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양승국 스티파노 신부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예수님께서 직접 이름을 한명 한명 호명하면서,
당신 가까이 부르시는 장면을 묵상해봅니다.
그분으로부터 선택받은 제자들 입장에서 얼마나 큰 기쁨이고 영예였겠습니까?
저희 사제나 수도자들도 비슷한 체험을 했습니다.
종신서원 때, 사제수품식 때, 신학교 학장 신부님이나 수도원 양성 책임자는
회중들 앞에서 저희의 이름을 크게 부릅니다. 잔
뜩 긴장해 있던 저희는 이름이 불려지면, 네 여기 있습니다! 하고
일어나 주교님 앞으로 나아갑니다.
이토록 부족하고 나약하며, 허물과 죄투성이인 저를 당신 가까이 불러주신 하느님께
깊은 감사의 눈물을 흘리며 그분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내 이름을 직접 불러주신다는 것, 얼마나 놀랍고도 은혜로운 일인지요.
오늘도 아무것도 아닌 나, 정말이지 보잘것없는 나, 내세울 것이라고는 쥐뿔도 없는 나를
불러주신 그분께 백번 천번 감사드리면서, 또 다시 그분 앞으로 나아갑니다.
사실 하느님의 인류 구원 사업이란 대 명제 앞에
때로 거추장스럽고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우리 인간들입니다.
그러나 과분하게도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구상하는 위대한 사업에
별 효용가치도 없는 우리를 끌어들이십니다.
참으로 은혜로운 초대요 너무나 분에 넘치는 초대가 아닐 수 없습니다.
예수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열두 제자들에게 있어 부르심 그 자체가 구원에로의 초대였습니다.
그분의 부르심에 기꺼이 응답하고 따라나서는 그 자체가 구원되는 길이었습니다.
하느님의 구원 사업은 예수님을 통해 정점에 도달합니다.
용서하고 해방하며 구원하시는 하느님의 참모습이
예수님을 통해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너그러우시고 겸손하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사업 여정에 우리를 참여하라고 부르십니다.
우리 같은 소자본 주주들 당신이 구상하는 큰 사업에 별 도움 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파트너가 되어 줄 것을 바라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통해 인간 본성을 취하신 하느님께서 우리를 신성하게 만드셨습니다.
필멸의 운명을 지닌 우리를 당신 나라의 영원한 생명의 문으로 인도하셨으며,
썩을 몸인 우리를 불변의 존재로 만드셨습니다.
참스승이신 예수님께서는 오랜 세월 우리 인간이 지니고 온
고통과 죽음을 말끔히 가져가지 않으셨습니다. 당신 스스로 고통의 길을 걸어가셨습니다.
당신이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통해 고통과 죽음을 대하는 올바른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뚫고 나아가시면서 고통을 변화시키신 것입니다.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그 옛날 의기소침해 있던 제자들을 부르셔서
당당한 당신 사업의 파트너로 부르셨듯이 오늘 우리도 부르십니다.
우리에게 죽음을 대면하도록 부르시고, 죽음의 두려움 앞에 나를 세우기 위해 부르시고,
부활에 대한 신뢰로 두려움을 넘어서라고 부르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할 일이 뭐가 뭔지, 돌아가는 분위기 파악도 제대로 못 하는
무책임한 제자를 원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분의 삶 전체, 십자가 죽음 앞에
자신의 온 삶으로 응답하는 제자를 원하십니다.
구원은 과거가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늘 새롭게 일어나야 하는 현실입니다.
부르시는 주님의 초대에 시시각각으로 응답하는 일,
고통과 두려움을 딛고 일상적으로 일어서는 일이 오늘 내 하루를 구원합니다.
이제 우리가 할 일은 하느님의 구원과 해방, 사랑의 힘이 우리 안에 자리 잡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 힘으로 내가 변화되고 성장해야 합니다.
분열과 방황, 죄와 타락의 세력 앞에 담대히 맞서 오늘 내가 구원되는 하루가 되길 빕니다.
12사도 선발의 기준은 무엇인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께서 많은 제자들 가운데 12명을 선발하여 그들을 사도로 명하고,
이들에게 권능을 주어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을 주제로 한 내용이다.
갈릴래아 무대로 본격적인 전도 활동을 시작하시던 예수께서는
곧바로 사람들을 당신 곁으로 부르셨다.
그것은 예수님의 인류 구원사업이 예수님 단독으로 이루어지는 사업이 아니라
인간의 협조가 있어야 함을 암시하는 것이다.
물론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신 예수님이시다.
그러나 구원의 대상이 인류, 즉 사람이라는 점이 그리스도 강생의 핵심이다.
인간의 구원 협조는 하느님의 소명 아래 천지창조 때부터 구약시대와 시약시대를 거쳐
오늘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 모양으로 수행 되어 왔다.
하느님 소명의 절정은 두말할 것 없이 성모 마리아의 소명이다.
성모 마리아를 어머니로 모신 교회의 소명은
갈릴래아 호수에서 고기를 잡고 배를 손질하던
어부 출신 시몬 베드로와 동생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이 네 사람을 사람 낚는 어로 부르신 것(마태 4,18-22)으로 시작되었다.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마태 4,17)는
예수님의 복음과 수많은 병자 치유의 기적을 귀로 듣고 눈으로 본 사람들이
갈릴래아와 데카폴리스와 예루살렘과 유다와 요르단강 건너편에서 몰려와
무리를 지어 예수님을 따르게 된다.(마태 4,25)
이로써 사람들은 예수님의 제자로서의 길을 걷기 시작한 것이다.
오늘은 예수께서 그 많은 제자들 무리 중에서 정예부대를 선발하셨다.
제자들은 많았지만 사도로 뽑힌 사람은 열둘이었다.
열둘은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의미한다.
그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왜 많은 제자들 중에 오늘 복음에 거명된 사람들만 사도로 선발하였는가?
그 이유는 예수님의 마음에 물어보아야 할 것이지만,
마태오 복음사가의 의도 또한 수긍해 볼 만하다.
사도 선발의 기준은 어떤 특별한 조항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앞서간 복음에 들어있다.
그것은 바로 산상설교(5-7장)와 기적사화 집성문(8-9장)에 있다는 말이다.
즉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닫고,
또 이들을 통하여 예수님께 놀라움 이상의 믿음을 마음에 간직한 사람,
적어도 이 믿음을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 놓을 수 있는 사람,
자신을 돌보기보다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가르침과 행적을 지속적으로 돌보고 전파할 수 있는 사람,
바로 그런 사람이 使徒로 선발되는 것이다.
그들 가운데는 배반자도 포함되어 있다.
예수께서는 가리옷 사람 유다가 당신을 배반할 것을 뻔히 알고 계시면서도 왜 사도로 선발하셨을까?
이렇게 따지자면 베드로도 멀리 못 간다.
베드로도 유다에 못지않게 스승을 배반 하였다.(26,69-75)
그러나 유다는 뉘우치면서 스스로 목숨을 끊어 잘못에 대한 대가를 치렀지만(27,3-5)
베드로는 회개의 눈물을 흘린 후 다른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는 이상의 가치를 지닌 殉敎로 스승을 따라갔다.
결국 선발은 예수께서 하시지만 사도로서의 실존은 스스로의 태도에 의해 좌우되며,
사도로서의 眞價는 삶의 마지막인 죽음이 밝혀 줄 것임을 우리가 배우게 되는 것이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세례성사와 견진성사를 바탕으로 제각기 그리스도의 사도직에 참여한다.
사도로서의 진정한 태도는 세상의 악한 세력에 항거하여 이를 물리치고,
병자와 노약자, 가난한 자와 억압받는 자 등 세상의 소외된 자들의 편에 서서
그들에게 위로와 용기를 베풀며, 길 잃은 양을 찾아 세상 끝까지라도 가서
그들에게 예수 그리스도와 하늘나라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다.
이런 일을 소홀히 하는 사도는 그에게서 이름만 있을 뿐 아무 의미도 없음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