뜬금없는 버선 이야기라고 할지 모르겠으나 내게는 버선에 관한 몇 개의 추억이 있다. 그렇다고 내가 버선을 신어본 것은 아니고 엄니의 버선 이야기다.
지금은 거의 사라진 버선이지만 옛날에는 없어서는 안 될 용품이었다.
누이한테 물었더니 어릴 때 자기도 버선을 신은 기억이 있다고 했다. 양말이 귀했던 시절이다.
이 양말이란 단어도 서양에서 온 버선이란 뜻으로 버선 말(襪)자를 써서 洋襪(양말)이다. 양복, 양장, 양식, 양배추 등처럼,,
엄니는 버선을 보선이라고 했고 양말을 대비라고 불렀는데 대비는 일본의 버선인 다비(足袋)에서 온 말일 것이다.
그래선지 당시 부잣집 여학생들이 신었던 스타킹을 내 고향에서는 살대비라고 했다. 살대비를 신은 여학생들이 고무줄 놀이를 하던 풍경이 지금도 아련하다.
버선은 시집 올 때 가져오는 혼수이기도 했고 시누이 많은 집으로 시집 가는 신부는 여러 켤레의 버선을 준비해야 했을 것이다.
보통 하얀 버선이 많았는데 나중 오일장에서 파는 색깔 있는 누비버선을 신기도 했던 것으로 안다.
언제부터 버선을 신었는지는 몰라도 양말이 없던 시절 겨울에는 발의 보온을 위해서라도 남녀 모두가 버선을 신었을 것이다.
버선마저 없던 사람도 추위를 견디기 위해 천 같은 것으로 발싸개를 했는데 거기에서 거지발싸개란 비속어도 탄생했으리라.
엄니가 일을 할 때는 맨발이거나 양말을 신었지만 오일장에 갈 때면 꼭 버선을 신었다. 평소 검정 고무신을 신다가 하얀 고무신을 신을 때도 장에 가는 날이다.
엄니는 장에 다녀 온 후에는 하얀 고무신을 씻어 말린 후 종이에 싼 다음 마루 위 선반 한쪽에 고이 모셔 두었다.
몸뻬만 입던 엄니가 도화색 한복 저고리를 입는 날도 오일장에 갈 때다. 옷고름 대신 보라색 브로치가 제비꽃처럼 달린 어머니의 복장도 생각난다.
가끔 버선이 벗겨지지 않아 난감할 때도 있었다.
엄니는 남의 집 품팔이를 해서 자식들 먹여 살리느라 지독한 노동의 댓가로 허리가 부실했다.
밥상을 들 때나 허리를 옆으로 돌릴 때면 가끔 아얏! 하는 작은 신음이 나오기도 했는데 꽉 쪼인 버선 벗기가 쉬웠겠는가.
어느 날 장에 다녀온 엄니가 버선을 벗다가 도저히 안 되겠던지 마당에 놀고 있는 나를 불렀다.
"막둥아, 이리 와서 버선 좀 벗겨 봐라."
나는 엄니의 버선을 잡고 힘껏 당겼고 버선이 벗겨짐과 동시에 엄니와 나는 뒤로 넘어져서 한참을 깔깔거리며 웃었다.
시골 일에 진저리가 난 누이가 서울로 도망쳐 공장을 다녔는데 명절에 고향 내려올 때 사 오는 것도 버선이었다.
어느 해인가 누이는 꽃무늬가 들어간 버선을 엄니한테 선물했는데 하얀 버선을 사다가 누이가 직접 자수를 놓았다고 한다.
그게 무슨 대단한 거라고 엄니는 이 버선을 특별한 날에만 신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누이가 만든 꽃버선은 엄니가 먼 곳으로 떠날 때도 신었다.
엄니는 수의 준비하는 것을 한사코 마다했는데 팔순을 넘긴 어느 해인가 윤달에 누이가 나서 수의를 마련했다.
누이는 나중 수의에다 분홍색 꽃무늬 자수를 새겼다고 했다. 엄니는 88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밤에 주무시다 돌아가신 것을 아침에야 형수가 발견했다.
입관을 할 때 엄니가 신고 있는 꽃버선을 보고 누이는 실신을 할 정도로 서럽게 울었다.
지금도 엄니는 누이가 만들어 준 꽃버선을 신고 소풍을 다니고 계시려나? 엄니가 장에 가면 나는 동네 입구 언덕배기에 있는 바위턱에 앉아 하염없이 엄니를 기다렸다.
장에 가면 꼭 찐빵이나 국화빵 같은 것을 사 왔기에 나의 기다림은 더욱 간절했다.
멀리 신작로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서는 엄니의 한복 자락이 보이면 나는 강아지처럼 달음박질쳐서 엄니한테 뛰어갔다.
신작로에 늘어선 미루나무들은 이런 나를 보며 깔깔 웃기도 했으리라. 이래저래 엄니의 꽃버선이 아른거리는 날이다.
첫댓글 돌아가시기 직전에도
누이가 만들어 드린 꽃버선을 잊지않고
신고 가신 엄니..
꽃버선 신으시고 이 세상 소풍 즐거웠노라고~떠나셨으리라!
동네 어귀 바위턱에 올라
하염없이 엄니를 기다리던 현덕아이의 모습이 그려져
어릴 적 나의 모습인 양
빙긋이 웃고 갑니다~ㅎ
ㅎ 점잖고 감성파이신 모렌도 선배님,,
엄니의 꽃버선은 저보다 누이가 훨씬 더 사무쳤을 테지만 누이 대신 제가 먼저 새치기해서 글거리로 삼았습니다.
그때는 장에 간 엄니를 기다리던 시간이 왜 그리 길던지요. 엄니 오는 시간이 대개 늦은 점심시간쯤으로 정해져 있었지만 훨씬 일찍 나가 기다리곤 했었네요.
번쩍 흘러가버린 세월임에도 그때의 추억은 뇌리에 각인되어 지금까지 남아 있습니다. 모렌도 선배님, 늘 좋은 시간 되세요.ㅎ
어제 오늘은 정말 조용해서
일터에서 책 보다가, 음악 듣다가, 야구 보다가
카페는 그냥 화면 고정해 두고 있습니다.
유현덕님이 도대체 몇 살이신지 다시 회원 정보를 봅니다.
저랑 별반 차이 없구 만 저는 모르는 시대상이 나오는데 놀랍니다.
하얀 버선에 새겨진 분홍색 꽃 버선....
저희 엄마도 외출에 돌아오시면 늘 '자야' 나 '뽀빠이' 등 과자를 공평하게
남매 수 대로 다섯 개 사오셨어요.
이상하게 나이가 들어 갈 수록 그리워지죠?
철이 들어가는 건가? 생각해 봅니다.
담백하고 코끝 찡긋 해 지는 글 잘 읽고 오후 업무 시작 해 봅니다.
커쇼님, 제가 촌놈 출신이라 더 오래전의 추억을 간직하고 있지 싶습니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터라 문명 혜택은 또래보다 늦게 받았지만 추억마저 늦은 것은 아닌 모양입니다.
저도 뽀빠이나 자야 등을 기억하지요. 직접 사 먹은 적은 거의 없고 하교길에 동무들이 사 먹을 때 맛보기로 얻어 먹곤 했었네요.
요즘 책 읽기에도 음악을 듣기에도 좋은 시절인데 야구까지 포스트 시즌이라 저도 눈이 바쁘답니다. 한국은 세 팀이 남아 있고 미국은 네 팀이 남아 야구팬들은 즐겁습니다.
놀러 다니기에도 좋은 시절인데 모쪼록 커쇼님의 풍성한 가을을 기원합니다.ㅎ
저도 엄마 버선 땡겨서
벗기던 기억이 납니다
버선. 하면 엄마 생각이 나지요
아하~ 리야님도 어머니 버선을 벗겨드린 추억이 있나 봅니다. 저도 버선 하면 엄니 생각이 먼저 나지요.
엄마에 대한 추억은 생을 마칠 때까지 잊지 못할 겁니다. 노년을 슬기롭게 잘 즐기고 계시는 리야님, 항상 건강하세요
울지 않으려고 했는데.. 요즘 눈물이 툭하면 나와서 이번 만큼은 참으려 했는데..
그래도 울게 해주셔서 감사하네요.
10월은 이래저래 저에게 감사한 달이라 여기며 살고 싶어요.
유현덕님.
저랑 찐빵.. 국화빵.. 같이 드실 수 있으려나요?
저도 오늘 이 글을 쓰면서 엄니 생각에 잠시 눈동자가 촉촉해졌습니다. 때론 눈물이 가슴에 맺힌 것을 풀어주기도 하고 막힌 곳을 뚫어주기도 하지요.
저도 10월은 무한히 감사한 달인데 너무 빨리 지나가 버려서 늘 아쉽답니다. 벌써 중순을 넘어 가니 올해는 더욱 짧을 듯합니다.
제가 워낙 빵돌이라서 찐빵이든 국화빵이든 모든 빵을 다 좋아합니다. 언제 기회되면 홀리님과 함께 먹을 날도 있지 않을까요. 빵은 제가 사겠습니다.ㅎ
@유현덕 그러실래요?
그럼 어묵 꼬치 들어간 우동은 제가 살게요.
버선은 족의(足衣) 라고도 하고 말씀처럼 한자어로는 말 (襪)
이라고 한다지요
저는 어렷을 적 부터 양말을 신고 자랐기에 버선에 대한 추억과
기억은 전혀 없습니다
서울태생 이기도 하고 버선 신고 등교하는 학생은 1도 없었으니요
왜냐면 구두나 운동화가 대다수 였기에~
유현덕님과 나이차가 그리 많이 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님의 글은 TV 문학관에 나오는 단편 소설 한 권 읽은 느낌 이랄까
기억과 추억이 공존하는 그런 세상 속 입니다
점심먹고 오후 근무하려니 몸이 근질근질 하네요
블랙커피 한잔 마시고 쉬엄쉬엄 달려야 겠습니다..
하늘 색깔이가 차암 좋아요 ㅎ
국화 빵 하니까 생각 나는게 초등학교 들어 가기전
할머니 댁 옆에 국화 풀빵 장수가 있었는데
제가 그걸 좋아했어요
풀 빵 사 먹고 할머니 댁에 들어가면
할머니는 머리가 아프다고 누워 계십니다
저는 한겨울 ~ 고사리 같은 작은 손으로
손을 부러 차갑게 만들어서 할머니 머리 위에
갖다 대곤 했지요
아련한 기억입니다..
ㅎ 버선의 역사도 아시고 역시 해박한 칼라풀님이십니다. 버선을 족의라고 표기했다면 뜻 그대로 발옷이라는 목적에 딱 맞는 말이네요.
지금이야 버선 신는 사람이 거의 없지만 주로 짚신을 신어야 해서 신발이 부실했던 옛날엔 버선의 역할이 보온뿐 아니라 발을 보호하는 목적도 있었을 겁니다.
지금의 흔해 빠진 양말에 비하면 이런 문명혜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를 실감합니다. 칼라풀님이 서울 출신이면 고무신을 신지는 않았겠군요.
저는 버선을 신지는 않았으나 고무신에 대한 추억은 참 많답니다. 달음박질할 때면 벗겨지는 고무신을 그냥 양손에 쥐고 뛰기도 했으니까요.
그래도 국화빵에 관한 추억은 함께 가지고 있어 다행입니다. 빛깔 고운 요즘의 가을 하늘처럼 늘 좋은 날 되세요.ㅎ
유현덕님 글을 구독신청 해놨더니 놓치지 않고 접할 수 있었네요..
어머님 이 세상 소풍 다녀가시는 길에
한 땀 한 땀 수놓은 버선
신겨 떠나 보내신 누님 생각에 가슴이 아립니다.ㅠㅠ
변변치 않은 글임에도 샤론님께서 구독신청까지 하셨다니 감사한 마음이네요.
제 누이는 어릴 때 남의 집 애보기로 가는 바람에 글을 배우지 못해 평생 문맹으로 살았답니다.
어머니가 원망스럽기도 하련만 엄니를 향한 누이의 애정은 어떤 딸보다 깊었었지요.
지금도 엄니 살아 생전에 제대로 못해 준 것이 한이 된다며 탄식하곤 하네요. 평온한 가을밤 되시기 바랍니다.
그 엄니의 강아지 현덕님의 모습과 오직 모정이 생애에 최고의 신념으로 사셨던 어머니 모습을 어찌 잊겠나요 정다운 우리의 따스함이 넘치는 우리네 옛 가정의 모습이 너무도 정답게 그리움으로 다가옵니다
ㅎ 가을 타는 운선님,,
실제 엄니가 저 어릴적에 불렀던 호칭은 이름보다 내 강아지 내 강아지 했더랬지요.
막내인 제가 여섯 살까지 젖을 먹었다는데 그때까지 엄니 젖이 나왔는지가 궁금하긴 하답니다. 하도 젖을 먹으려 들어서 씀바귀 즙을 묻혀서 젖을 뗐다고,,ㅎ
가난한 그 시절을 돌아 보면 참으로 초라하고 궁핍하지만 어머니의 사랑 만큼은 궁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배 고픈 엄니의 사랑이었지만 그게 제 정서의 밑바탕이기도 하구요.
하얀 버선에 꽃수를 놓았으니
그 버선이 엄니께는 얼마나 귀하고
예뻤을까요.
엄니께서는 따님이 한땀한땀
수놓은 수의와 꽃버선을 신고
먼 길을 떠나셨군요.
눈물납니다.
오일장 가실 때 입으셨다는
엄니의 도화색 저고리.
얼마나 고우셨을까요.
제가 기억하는 저의 엄마의 한복 입은
모습은 제가 초등학교 입학식 때였답니다.
보편적으로 8세에 초등학교 입학을 하는데
7세였던 저는 엄마한테 초등학교 입학
시켜 달라고 울고불고 떼를 썼지요.
입학식 하러 갔던 아이들이
입학식을 마치고 집으로 올 무렵에
엄마는 검정치마에 흰저고리를
입으시고 제 손을 잡고 학교로 가셨지요.
옛날 우리들의 엄니들은
참으로 버거운 생을 살다 가셨지요.
88세에 주무시다 돌아가신
엄니는 그래도 복이 많으신 분 같습니다.
사진으로 뵈었을때
인상이 넘 좋으셨던 유현덕 님.
엄니께서는 저 세상 어딘가에서도
누님이 수놓은 수의와 꽃버선을 신으시고
막내 아드님을 흐믓하게 지켜보고
계실 겁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이베리아님의 긴 댓글이 한 편의 수필처럼 읽히며 공감 백 배입니다.
당시 온통 먹는 것만 보였던 저는 꽃버선이 어땠는지는 확실히 몰랐으나 엄니한테는 장날에 사치를 부리는 패션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버선 신은 발등을 내려다 보면 딸이 수놓은 꽃무늬가 엄니의 마음을 흐뭇하게 했을려나요. 엄니는 유독 분홍색을 좋아했던 모양입니다.
분홍색 치마 저고리에다 블라우스나 쉐타도 분홍색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런 엄니를 위해 누이는 먼 길 떠날 때 입을 수의 버선에다 분홍색 꽃무늬를 수놓았을 테지요.
저도 여덟 살에 학교를 갔는데 가끔 한해 일찍 들어온 아이가 있었더랬지요. 저는 학교 다닐 땐 몰랐다가 나중 졸업하고 나서야 알았답니다.
어릴 때 기억이 많지 않은 저도 국민학교 입학식 날의 몇 장면이 어렴풋이 생각나는데 엄니가 무슨 옷을 입었는지는 기억이 없네요. ㅎ
부족한 글 좋게 읽어주신 이베리아님 감사합니다.
글을 읽다가 돌아가시기 전에 꽃버선을 신고 주무셨다는 대목에서 사나이는 웁니다.
엄마 버선 벗겨드리다가 버선 잡고 힘껏 힘을주고 잡아당기면 뒤로 벌러덩...엄마도...
나는 어려서 검은색 바지에 흰저고리 검은색 쪼끼를 입고 국민학교를 다녔는데 하하
바지 엉덩이 부분이 툭 튀어나와서 놀림도 많이 받았고 ㅎㅎ
소싯적 기억을 되살려 울다가 웃게해준 작가님 고맙습니다.
코알라 선배님께서 우셨다면 어머니에 대한 비슷한 추억이 있기 때문일 겁니다. 예전의 유행가에도 사나이를 울리는 가사가 가끔 나오지 않던가요.
엄니의 버선에 관한 추억 중에 버선 벗기다 벌렁 뒤로 넘어져서 깔깔 웃던 기억이 가장 뚜렷합니다.
남편 복과 자식 복이 없는 팔자가 사나웠던 어머니도 그때 모처럼 시름을 잊고 잠시 웃을 수 있었을 겁니다.
개구장이였던 저는 엉덩이뿐 아니라 바지 무릎에 자주 구멍이 나서 바쁜 엄니가 매일 밤 바느질 하느라 고생하셨지요. 저는 눈이 침침한 엄니 대신 부지런히 바늘귀를 꿰드리곤 했답니다.
옛 추억을 코알라님과 돌아볼 수 있어서 참 좋습니다.ㅎ
우리 엄니 생각에 눈물이 날라합니다
오일장에서 온갖 잡동사니를 펼쳐 놓고 천막을 치고 장사를 하셨던 엄니,아부지
막둥이를 업고 신작로에서 하염없이 기다리던 이유가 저도 맛있는 단팥빵이었습니다
가끔은 따라가기도 했지요
10원에 먹는 전라도식 팥죽은 죽어도 못 잊습니다
분홍색 꽃무늬 버선~
어머니는 그 버선을 신고 사뿐히 가셨을겁니다
가리나무님의 부모님께서 오일장에서 장사를 하셨다면 그 고생이 얼마나 많았을지 짐작이 갑니다. 제가 막둥이라 님의 등에 업혔다는 동생 분에게 동질감도 생기네요.
저도 엄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울고불고 떼를 쓰면서 오일장을 두어 번 따라갔는데 그때 봤던 시장 풍경은 온통 요지경 세상이었지요.
저도 님처럼 엄니가 사 준 오일장 국수를 잊지 못합니다.
두 그릇아 아닌 한 그릇을 시켜 놓고 당신은 반찬으로 나온 물김치를 자주 들이켰는데 그때 엄니는 얼마나 허기가 졌을지를 훗날 커서야 알았답니다.
가리나무님의 추억이 저와 닮아서 더욱 애틋하네요.
버선 이야기도 좋지만 ㅡ카페 총론적인 야그도 하시죠
ㆍ
카페 총론적인 야그가 어떤 것인지는 모르겠으나 그런 이야기는 찐빵님에게 양보하고 저는 이런 글이나 쓸랍니다.
제 그릇이 작고 능력이 부족하니 더 배우도록 하겠습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아휴 찐빵님
이러실 때가 아닙니다
남은 술 마져 드시고 오세요 ㅎㅎ
저는 이런 글이 좋습니다
버럭~!하시는군요
한고조 후예이신 유비선생께서요
대사님의 첫 홍보는 실패인듯 하옵니다
심기일전 하시어 좀더 너그러운데부터 둘러치심이 어떨지요
폐 일언하고,
노고가 많으신만큼 언젠가 가치를 인정받을때 있지싶습니다
망극이 성은하옵니다~♡
버선이 잘 안벗겨 지는것은 신축성이 없으니 발목부분이 넓으면 저절로 벗겨지니 그부분을 좁게 만들어서 벗을때 발이 조금만 부으면 벗기 힘들지요
그때문에 엄니는 신을때 뒷축에 신문지를 끼워서 신더라구요
신문지가 제습역활을 했던거 같아요..
중학교때 운동회에 한복을 입기위해 가정시간에 버선을 만들어 신은적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저도 많이 늙었네요
이젤님도 버선에 대한 추억이 있으시군요.
울 엄니는 양말보다 버선이 더 편해서 장날마다 신었는지는 몰라도 오랜 기간 버선을 신었던 것으로 압니다.
이젤님 말씀처럼 버선은 신을 때보다 벗을 때 더 힘들 수밖에 없겠네요. 요즘 신발도 오래 걸은 날은 아침에 헐렁했다가 저녁엔 딱 맞는 경우도 있으니까요.
제 엄니는 버선뿐 아니라 비녀를 꽂는 쪽진 머리도 환갑이 훨씬 넘도록 하셨더랬지요. 여름 장마와 태풍을 잘 이겨내고 핀 가을꽃 같은 이젤님, 항상 건강하시기 바랍니다.
제가 중학시절...가사 시간 한복입고 예절수업이 있었는데
한복은 친구 큰언니꺼 빌려입고 버선은 할매꺼로 신었는데
그때는 제가 작아서 버선이 어찌나 크던지...
친구들과 버선 밟기하면 훌러덩 벗겨지고 ... 많이 웃고 그랬던 기억이 나네요
뒷집 친구 언니도 공장에 다녔는데
명절이면 선물 보따리에 친구 옷도 구두도 사오고
멋쟁이 친구가 되었지요
그런 언니를 둔 친구가 넘 부러웠했어요
글 재미있게 잘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ㅎ 둥근해님 반갑습니다.
더구나 버선을 신어 보셨다니 옛날 분들의 생활상도 간접 경험한 셈이네요.
엄니 말에 의하면 당신 어릴 때는 버선도 기성품이 아닌 직접 바느질을 해서 만들어 신었다고 합니다. 양말이 없을 때는 당연 남자들도 버선을 신었구요.
예전 명절 때면 도시로 간 농촌의 처녀 총각들이 고향에 내려와 시끌벅적했더랬지요.
공장을 다니던 제 누이도 각종 선물 보따리를 들고 고향에 왔는데 얼굴도 하얗게 변하고 예뻐진 모습에 나도 빨리 커서 서울 가야지 이런 생각을 했답니다. 아주 오래전 이야기입니다.
둥근해님 평온한 주말 되세요.ㅎ
꽃버선 신으신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에 혼절할 지경으로 통곡하신 그 따님의 마음이 고스란히 전해져서 이 아침에 눈물이 핑 돕니다.
속 깊은 아드님의 회고담도 깊은 울림이 느껴지고요.
이런 글을 읽을 수 있음이 내 삶의 소확행이라 생각하며 이곳이 제 쉼터라서 감사하고 있답니다.
저는 저와 평생을 함께 사신 우리 엄마께 고마움보다 원망이 컸던 나쁜 딸년이예요.
딸들은 나이들어 본인도 엄마가 되면 비로소 자신의 엄마를 이해하는 것이 정상인데,
저는 외려 제가 엄마가 된 후에 원망이 더 깊어졌어요.
나는 내 딸들에게 절대로 그렇게 못할 텐데, 절대로 그렇게 안할 텐데,
그때 우리 엄마는 왜! 왜! 왜! 나한테 그러셨지? 이런 원망이 쌓여갔어요. ㅠㅠ
훗날 엄마가 극도로 쇠잔해지셔서 요양원에 들어가신 뒤에야 그 원망을 털고 눈물로 하나님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ㅠㅠ
지금의 제 나이이실 때 우리 엄마께서는 제 딸들 거두시느라 고생이 자심하셨는데,
제가 이 나이 되어보니 우리 엄마의 그 당시 고생이 비로소 체감되어 뒤늦은 자책으로 뼈가 아픕니다ㅠㅠ
현덕님 글 가슴으로 읽고 갑니다. 감사해요!
달항아리님 다녀가셨군요.
부족한 제 글에 달린 달항아리님의 고운 댓글이 흡인력 있게 다가와 두 번을 연속 읽었습니다. 이런 댓글 보면 제가 쓰길 잘했구나 용기가 생깁니다.
제가 보기엔 가족 중에 엄마와 딸 사이가 가장 가까우면서도 얽힌 애증관계가 복잡하다고 생각하네요.
제 누이들도 자랄 때 딸이라는 이유로 천대를 받아서 서운한 일이 많았다고 합니다.
형제끼리 저도 마냥 화목한 것만은 아니어서 반목이 생겨 서로 만남이 조금 길어질 정도로 냉각기가 있기도 했답니다.
지나고 나면 다 후회되는 일이건만 그때는 상대의 잘못만 보였기 때문일 겁니다. 그런 세월 엄니와 누이 덕분에 무사히 지나온 것이지 싶네요.
달항아리님도 대부분의 가족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은 표준형이니 너무 자책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어느 가정이든 들여다보면 몇 가지 숨은 사연 다 있을 겁니다.
누군들 지난 세월이 아쉽고 후회가 없겠는지요. 그래도 서로 공감하며 토닥일 수 있는 이런 카페가 있어 다행입니다.
닉처럼 감성도 마음씀도 보름달 만큼이나 충만한 달항님 평화로운 토요일 저녁 되세요.ㅎ
버선! 참 오랜만에 들어봅니다.
버선을 깁던 누나가 생각나고 신고 벗으면서 낑낑 대던 모습도 눈에 선합니다.
제 기억이 희미하긴 하지만 어른 남자들도 버선을 신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야 어려서부터 빵구난 나이롱 양말을 신었습죠.
ㅎ 저도 버선은 신어본 적 없고 빵꾸난 나이롱 양말을 신었던 사람이니 곡즉전님과 저는 동시대 사람입니다.
세한삼우 중에 제가 대나무를 좋아하는데 곡즉전님도 대나무 같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꼿꼿하대 숙여야 할 때는 구부릴 줄 아는 인생 철학,,
버선이 여자들의 전용품이라 생각하지만 예전에는 남녀 구분 없이 신었던 필수품이었다지요.
버선이 신을 때보다 벗을 때 더 힘들었던 것처럼 우리네 인생 또한 올 때보다 갈 때가 더 중요한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