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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스크를 한 입안으로 파고드는 시꺼먼 모래 바람, 지치고 병들고 때로는 속이기도 했지만 (그래도) 순박한 이라크 환자들, 사탕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이라크 아이들...'
의료부대인 제마부대 2진으로 이라크 남부 나시리야에서 2003년 10월 중순부터 6개월간 의료활동을 펼치다 올해 4월29일 귀국한 해군 여성 간호장교 김명자 대위(31).
김 대위가 31일 국방부 홈페이지에 전후(戰後) 이라크에서 현지 환자들과 함께 한 이야기들을 실어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김대위는 국방부 사이트에 올린 글에서 제마부대의 의료시설과 진료능력이 뛰어나다는 사실이 입소문으로 퍼지면서 나시리야 시내에서 도보로 3시간 이상이 걸리는 제마부대에는 하루 150명이 넘는 이라크인 환자가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내용을 전했습니다.
그는 또 나시리야 뿐 아니라 바사르, 나자프 등 인근 지역에서 3박 4일을 걸어온 환자, 200㎞ 이상을 걸어서 온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며 모두 진료를 위해 2∼3개월씩 기다린 사람들이라고 소개했습니다.
김대위는 특히 이 글에서 지난해 11월 초, 가스폭발로 전신에 중화상을 입고 제마부대로 실려온 30대 이라크 여성의 이야기를 소개했습니다.
제마부대 의료진의 지극한 치료에도 결국 세상을 떠났다는 이 환자는 숨을 거두기 직전 '한국인에 너무 감사하고 두 아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은혜의 나라 한국에 꼭 가볼 수 있도록 하라'고 남편에게 유언을 남긴 것으로 전해져 안타까움을 더했다고 김대위는 회고했습니다.
김 대위는 제마부대원의 파병활동에 대해 '이라크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고 생각한다'며 '적어도 나시리야의 이라크인들에게 우리 한국군은 점령군이 아닌 그들과 함께 한 친구들이었다고 확신한다'고 말했습니다.
1992년 간호사관학교 36기로 입학해 1996년 소위로 임관한 김대위는 현재 해군 포항병원 외과 간호장교로 복무중입니다.
[연합뉴스]
▼글 전문▼ 마스크를 한 입안으로 파고드는 시꺼먼 모래바람, 지치고 병들었으며 때로는 나를 속이기도 했지만 순박한 이라크 환자들, 사탕 하나에 세상을 다 얻은 듯 기뻐하는 이라크 아이들……제마부대 2진으로 이라크에서 6개월 남짓 근무하면서 내가 본 것들 중 살아가면서 다시는 볼 수 없을지 모르는 것들이다. 지난 해 10월 15일. 우리 제마부대 2진은 특전교육단에서 3주간 파병 전 교육을 받은 후 이라크로 출발했다. 이라크에 첫발을 대디딘지가 엊그제 같은데, 어느덧 귀국을 하고서도 3개월이라는 적지 않은 시간이 훌쩍 지났다. 이라크에서 있었던 일들을 글로 써보려 하니, 미지의 황무지 속에서 부여된 임무완수를 위해 혼신의 노력을 다하며 그야말로 생사고락을 같이 했던 제마부대원들과 그리고 물심양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았던 든든한 서희부대원들이 새삼 그립다. 친한활동 하루에 24시간씩 부대 내에서만 지내면서, 때로는 눈도 뜨지 못할 모래 바람소에서 때로는 발목까지 빠지는 흙탕물 속에서도 결코 임무수행을 멈추지 않고 서로가 서로를 위하며 미소를 잃지 않았던 우리 제마부대원들. 온갖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묵묵히 각자의 소임을 다한 우리 모두가 너무도 대견스럽고, 무엇보다도 전원이 아무 탈없이 건강한 모습으로 귀국하게 된 것에 다시 한번 감사한 마음을 가져본다. 지금은 내가 이라크에 나가 있을 때보다 훨씬 더 상황이 좋지 않지만 당시 이라크 현지도 미군 등 동맹국에 대한 테러공격이 매일 발생하고 있어 불안한 상황이었다. 특히, 이라크 저항세력의 공격이 날로 거세지면서 이라크 전역으로 그 공세가 확산되고 있을 시기였으며, 이에 맞선 미군 등 동맹국도 강경대응을 펼치고 있었다. 더욱히 11월 12일 이탈리아군에 대한 나시리아 시내에서의 대규모 폭탄 테러로 인해 전 부대원들의 기지외부 출타가 전면 금지 되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혼란 속에서도 한 가지 다행스러운 것은 우리 한국군이 주둔하고 있던 나시리아가 비교적 안정적인 지역이었다는 것이다. 이라크 전쟁 당시에는 치열한 격전이 벌어지기도 했지만 미군이 종전을 선언한 시점에서부터 내가 귀국을 할 때까지 더이상의 큰 사건은 없었다. 또한 나시리아는 사담후세인이 걸프전 직후 흉흉한 민심을 잠재우기 위해 6,000여 명의 주민을 학살했을 정도로 후세인에게 미움을 받고 있던 지역이라는 이유 때문인지 후세인 정권을 종식시킨 다국적군에게 대체로 관대한 것 같았다. 나시리아 시내에서 한국군 서희-제마부대가 주둔하고 있는 탈릴 공항으로 들어오는 길목에 위치한 제마병원 환자 접수창구인 인포메이션 센터에서는 매일 아침이면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 또 다른 전쟁 아닌 전쟁이 처러졌다. 그 이유는 제마병원이 탈릴 공항에 주둔한 동맹국들 중에서 이라크 현지인들을 대상으로 진료를 펼치는 유일한 의료시설이며, 나시리아에 있는 병원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진료능력과 시설이 뛰어났기 때문이다. 우리 한국군이 누구에게나 친절하고 무료로 치료해 준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시내에서 도보로 세 시간이 더 걸리는 인포메이션 센터에는 하루에도 150명이 넘는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원활한 환자진료를 위해 제마부대 환자 등록장교와 특전사 경비요원들이 매일 아침 인포메이션 센터로 파견을 나가 이들 중 진료 가능한 100여 명의 환자를 선별하는 예약제 진료를 실시하였는데, 환자가 3,000여 명을 넘기도 했다고 한다. 진료를 위해 찾아온 사람의 대부분이 나시리아에 사는 사람들이지만 바사르, 나자프 등 인근의 다른 지역에서 3박 4일을 걸어 온사람, 200km 이상을 걸어서 온 사람도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은 모두가 진료를 위해 2~3개월이라는 긴 시간을 기다린 사람들이었다. 그곳 환자들은 열악한 의료환경과 잘못된 생활 습관으로 인해 대부분이 만성질환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총상과 파편상 등 전쟁으로 인한 상처를 치료 받기 위해 오는 환자도 많았다. 만성질환 환자들이 호전되고, 상처가 심각하게 감염된 환자들이 치유되면서 현지인들의 입소문을 타고 제마병원의 치료능력이 신뢰를 쌓아감에 따라 나시리아의 종합병원에서 조차 치료 불가능한 환자들이 마지막 희망으로 제마병원을 찾아왔다. 사고를 당해 오는 경우도 있지만 열악한 의료실정으로 작은 상처나 질병이 걷잡을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오는 경우도 허다하였다. 어린이 총상 환자 이들 환자 중 몇몇은 아직도 내 기억에 있다. '03년 11월 초, 가스 폭발로 인해 화상을 입는 30대 중반의 여자환자는 부대원 모두가 잊을 수 없는 환자다. 사고 당시 등과 다리를 제외한 전신에 2~3도 화상을 입은 그 환자는 병원에 이틀 동안 입원하여 치료를 받았으나, 환부감염 등 상태가 심각해져 가망이 없다는 이야기를 듣자 우리 병원을 찾아왔다. 우리부대에는 일반외과 군의관이 없었지만 성형외과,정형외과, 응급의학과, 피부과, 안과 군의관을 포함한 병원 내 전 의료진이 화상 부작용을 막기 위한 수술과 매일 매일의 화상상처 소독 등 최선을 다해 치료하였다. 10명의 간호장교들은 환자를 간호하는 것 외에도 매일 퇴근 후에는 모여 앉아 화상환자용 소독 거즈를 만들었는데, 일손이 모자라 단장님까지도 우리와 함께 거즈를 만드는 일을 거들어야 했다. 우리의 정성에 알라신도 감동했는지 어느덧 환자는 안정을 찾아 위급한 상황을 넘길 수 있었다. 2주가량 우리 병원에서 치료를 받은 후 그 화상환자는 더욱 세밀한 치료를 위해 미 공군 병원과 협조하여 바그다드에 있는 이탈리아 종합병원으로 후송을 주선해 보내 주었다. 그러나 그 후 바그다드에 날아온 환자의 사망 소식은 부대원 모두를 안타깝게 했다. 세상을 떠나기 전 환자는 한국인에게 너무나도 감사하고, 자신의 아들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쳐 은혜의 나라 한국에 꼭 가볼 수 있도록 하라고 했으며, 우리 병원에 찾아가 꼭 인사를 하라고 유언으 남겼다고 한다. 우리가 철수하기 전날 그의 남편이 찾아와 이야기를 전해 주었으며 10살 정도밖에 되지 않은 그녀의 두 아들까지 우리들에게 고맙다고 했다. 인근부족 초청행사 '04년 2월 중순에는 차량이동 중 종족간의 분쟁으로 총격을 당한 이라크인 일가족을 치료해 준 사례도 있었다. 등과 목 부위에 총상을 입은 4세와 7세의 딸 둘은 당일 응급으로 수술을 받았으며, 11세의 아들은 차에 부딪쳐 부러진 턱뼈를 맞추는 수술을 받앗다. 이들은 모두 치료경과가 좋아 퇴원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며칠 후 인근부족장 초청으로 제마부대원 몇몇이 식사를 하러가게 되었는데, 거기에 그 부족 경비대장 쯤 되는 그 아이들의 외삼촌이 있었다. 외삼촌은 아이들을 간호한 나를 기억하며 사진을 찍자고 했고 자신의 총까지 들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이라크에서 자신의 총을 그것도 외국인 여자에게 주는 일은 상상도 하기 힘든 일이다. 그들이 얼마나 우리를 고맙게 생각하는지 알 수 있었다. 제 2진 철수 준비로 현지인 진료가 종료된 후에도 퇴원하지 못하고 입원해 있는 환자가 있었다. 20대 중반의 젊은 여자인데도 불구하고 그 환자는 혈당이 좀처럼 조절되지 않는 당뇨와 당뇨 합병증에 시달리고 있었는데, 발에 난 상처를 제때 치료하지 못해 발이 썩어 들어가 나시리아 병원에서 온 중환자였다. 입원해 있는 20일 남짓 매일 수술실에 들어가서 상처소독을 시행해 겨우 상처 확대를 막았었는데, 만약 이 환자가 당시 이라크 내 다른 병원으로 갔었다면 발목을 절단해 평생 불구로 살았어야 했을 것이다. 그래서 철수하기 바로 전날까지 퇴원도 못 시키고 간호를 해야 했기에 마지막까지 힘들긴 했지만 제마 2진의 마지막 현지인 환자가 잘 치료되어 기뻤다. 구순열 환자 우리 부대에서 시행한 수술로 새로운 삶을 찾은 경우도 있었다. 선천성 구순열(언청이)로 매사에 자신감도 없고 말도 잘 못하며 수줍어하던 소년, 코끝의 탁구공만한 종양으로 다른 아이들의 놀림을 받던 소녀, 선청성 뇌성마비로 오른손으로는 물건을 잡을 수가 없었던 아가씨 등등……. 이들은 모두 처음 병원을 찾았을 때는 우리 의료진와 대화도 피하고 사진 찍는 것도 싫어했는데,수술 후에는 환한 미소롤 먼저 다가오고 같이 사진을 찍자고 먼저 제안하기도 우리를 기쁘게 해주었다. 그 밖에 총상환자들, 어린이 환자들, 고협압 환자들, 당뇨환자들, 화상환자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환자들이 제마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건겅과 웃음을 되찾았다. 이라크에서는 한국과 달리 병원 내 지원부서가 제대로 없기 때문에 환자들에 대한 모든것을 간호장교가 다 해 주어야 한다. 의무물자 관리 등 행정업무는 물론이고 환자복과 시트 세탁, 환자 식사준비, 병원청소 용변 보조 등등… 심한 경우 성인인데도 샤워실에 보내는 것만으로는 씻지 않기 때문에 씻겨 주어야 한다. 이라크에서 나는 한국에서는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중환자실 근무를 하게 되었다. 그 곳 중환자실에 오는 환자들은 국내 병원 중환자실에서 만큼의 중환자는 아니었고, 수술전후 환자들,어린이 환자들,일반병실에서 간호하기에는 손이 많이 가는 환자들이었다. 여섯 달 밖에 되잖은 아이 기저귀도 갈아보고, 군병원에서 좀처럼 볼 수 없었던 꼬마 환자들에게 정맥주사도 주었다. 내가 중환자실에서 본 이라크 아이들의 보호자들은 날짜 관념이 없어서 아이가 몇 살인지도 잘 모르고 생일도 몰랐다. 하긴 자신들의 주민번호도 외우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래도 그들의 마음은 우리네 시골 할머니처럼 푸근하기만 했다. 한 끼 연명하는 것도 힘든데, 가지고 온 이라크 음식은 꼭꼭 나눠 먹으려 한다. 내가 먹지 않으면 섭섭해 하기 때문에 입에 맞지도 않는 이라크 음식을 그들이 보는 앞에서 맛있게 먹어 주어야 한다. 그날 밤 배앓이를 하는 한이 있더라도. 중환자실의 명패 이제 병원업무가 아닌 부대생활을 이야기 해 볼까 한다. 이라크에서 부대원들은 단장님을 포함해서 전원 텐트생활을 했다. 우리 텐트에는 간호장교 다섯 명과 육군 특전사 요원 한 명이 살았다. 개인 공간이 없고 혼자 있기는 힘들었지만 밤마다 서로 많은 이야기도 나누고 서로를 다독이며 이해하는 좋은 시간을 가졌다. 사막의 수해 사막이라 비가 오지 않을 것이라는 우리의 생각과는 달리 제마 2진이 가 있었던 기간이 이라크 우기라 가끔씩 비가 왔다. 처음 이라크 비를 맞이한 날 새벽은 빗소리 때문에 씨끄러워 잠에서 깼는데, 사막의 비라는 것이 신기하면서도 당일 점호를 하지 않을 것이는 기대감에 텐트내 사람 모두가 좋아했다. 그런데 얼마 후 빗물이 숙소내로 들어왔다. 놀란 우리는 모두 일어나 빗물을 집수장으로 퍼날랐다. 지휘통제실은 아예 물에 잠겼다. 전기는 모두 끊겼다. 오후에 우리는 그날 아침 내린비가 18미리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땅이 물을 흡수하지 않기 때문에 비가 오면 땅 위로 고이기만 하기 때문이란다. 그 후로도 수차례 비가 왔지만 그 다음에는 그에 대처하는 우리들도 조금은 탄력적일 수 있었다. 이라크에서 생활하면서 가장 좋았던 날 중 하루는 대변을 태우는 재래식 화살실에서 유원지에 있는 이동식 화장실로 바꾼 날이다. 매일 화장실에 갈 때마다 심한 악취와 낮에 변을 태우는 병사들에게 미안한 마음으로 볼일 보기가 불편했는데 맘 편히 일을 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참, 그리고 가끔씩 있었던 부대원 단합대회와 생일자들을 위한 생일파티, 새해맞이 연합군 초청 행사도 기억이 난다. 환송파티 파병을 가기 전 교육을 받으면서 여러분 개개인이 한국을 대표하는 외교관이란 말을 많이 들었다. 나름대로 열심히 근무했으며 이라크인들에게 한국에 대한 좋은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적어도 나시리아 인근 사람들에게 우리 한국군은 단순히 자기네 땅에 주둔한 점령군이 아니라 그들과 함께한 친구들이라고 확신한다. 이라크 환자를 치료 할 때마다 그들 한 사람 한사람은 "굳,꼬레", "슈크란 자질란(매우 감사하다는 의미의 아랍어), 꼬레"라고 외쳤다. 이미 때를 놓쳐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를 설득해 되돌려 보낼 때처럼 가슴이 아픈 때도 있었고, 부대원들과 아옹다옹 지내면서 피곤한 때도 있었지만, 작게나마 이라크인들을 돕고 돌아왔고 한국의 이미지를 드높였으며, 나 자신도 성숙해졌다는 것에 대해서 다시 한 번 자랑스럽고 고맙게 생각한다. "인샬라 띠말라('신의가호가 있기를, 안녕히'를 의미하는 아랍어) 이라크" |
첫댓글 정말 원츄요...나쁜 면만을 보고 파병반대는 저도 반대합니다...파병이 나쁜 쪽으로만 흘러가나요?
이런 좋은쪽으로만 흘러간다면 파병반대하는 사람들이 없을것이오... 동물원에 가야할 원숭이가 대통령을 해먹고 우리나라에 강요를 해오니 원..
파병된부대들 다른나라 군대한테 인기짱이래요 상관말도 잘듣고 부하들 아껴서 타부대들이 엄청 부러워한댑니다(딴말중;)
후미 글자의압박;;;
문제는 우리가 주민을 잘해준다고 해도 어차피 아랍이 가장 증오하는 미국편에서 오는 것임을 누구나 안다는 것! 그리고 전투가 벌어지면 우리군인은 이라크인들을 향해 쏠 것이라는 것을 이라크와 아랍인들은 안다는 것이죠.
아랍국가에선 미국의 이미지는 우리가 일본만큼이나 증오하고, 어차피 우린 증오하는 미국의 말을 듣고 세계 3위의 파병을 하는 것이니.. 문제가 발생하면 미국과 더불어 한국을 욕하거나 총뿌리를 겨눌 것은 뻔한 일이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