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드 셀카>는 그가 직접 대본을 썼다. ‘양승걸 작 양승걸 연출’이라 쓰는 게 낯간지럽다는 이유로 팸플릿에는 ‘양지월’을
필명으로 내걸었지만 말이다. ‘양지월’이란 이름은 <품바>로 유명한 고 김시라 선생으로부터 받은 이름. 지난 배우생활을 돌이켜보며
한줄 한줄 기록해간 그의 노트가 대본의 바탕이 됐다. 아마도 그 노트의 첫장에 씌어진 말은 ‘초등학교 4학년 때부터 한번도 버리지 않은 이름,
배우’가 아닐까.
광주에서 나고 자란 양승걸은 어렸을 때부터 끼가 있었다. 이소룡이 출연하는 영화 <정무문>이나 <당산대형>이라도
보고온 날이면 동네 조무래기를 모아놓고 그는 “꺄오옷~~” 하는 이소룡 특유의 괴성을 동작과 함께 흉내내곤 했다. 대사와 함께 선보이는 극적인
장면들이 하도 실감나는지라 코흘리개 친구들은 집에서 몰래 집어온 부침개며 닭다리 한조각 등을 그에게 건네며 “승걸아, 한번만 더 보여줘봐” 하기
일쑤였다. 이런 그의 못 말리는 끼는 어쩌면 집안 분위기 탓인지도 모른다. 그의 부친은 한국 추상미술의 선각자 고 양수아 화백. 어머니 역시
그림을 그리는 분으로 양승걸은 3남1녀 중 막내. 지금 큰형과 작은형은 각각 화랑운영과 애니메이션 감독 일을 할만큼 예술적 재능이 넘치는
가정이었다.
“당시 제가 광주교대 부속초등학교에 다녔어요. 4학년 때 특활활동으로 동극반(童劇班)에 가입했어요. 그런데 학예회 때면 나보다 연기도
못하는 애들이 엄마 치맛바람에 주연을 맡는 게 그렇게 화가 나는 거예요. 그러다가 5학년 때 난생 처음 3인극의 주연으로 뽑혔죠. 그때의 벅찬
경험이 절 배우로 이끈 거 같아요.”
연극 제목은 <나비를 따라가는 소년>이었다. 주인공이 죽는 장면을 연기하던 어린 양승걸. ‘아, 내가 죽는구나’ 천장을 보고
누워있는데 너무나 슬퍼지면서 눈물이 나왔다. 긴 한줄기의 눈물은 그대로 흘러 귓바퀴에 차갑게 닿았다. ‘카타르시스’에 가까운 그 느낌을 지금도
잊을 수 없다는 그다.
“그때 마음 굳게 먹어버렸죠. 난, ‘이걸 할거야’ 하고 말이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도 줄곧 그의 꿈은 연극배우. 그러나 중앙대 연극영화과를 지망했다가 내리 고배를 마시면서 결국 전문대로
진학해야 했다. 다시 중앙대 진학을 준비하려는 찰라 영장이 날아왔고 그는 곧 국방의 의무를 다하기 위해 입대했다. 제대후 돌아온 그에겐
연극배우가 되는 길은 요원하게만 보였다. 당시 광주지역에는 극단이 드물었고, 있다고 해도 제대로 된 극단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실망한
그는 잠시 회사에 몸을 담기로 한다.
“면접 전날 술에 취해 오토바이를 타다가 미끄러져 얼굴과 어깨를 심하게 다쳤어요. 너무 어깨가 쓰라려서 와이셔츠를 입을 수가 없었어요.
그래서 가슴이 파인 누나의 보라색 티를 빌려입고 갔으니 사장 보기에 얼마나 황당한 놈이었겠어요.”
당연히 낙방일 거라 생각했던 그는 요행히도 특기란에 써둔 ‘축구부’ 경력이 ‘축구광’인 사장의 눈에 들어, 예상을 뛰어넘고 면접을
통과했다. 그렇게 해서 1주일간의 회사 연수를 하루 앞둔 날이었다. 우연히 중앙 일간지를 집어든 그의 눈에 조그만 박스 광고가 눈에 띄었다.
‘극단 맥토 단원 모집.’ 그 다음날 서울로 무작정 올라가버렸다. 물론 회사연수도 내팽개친 채였다.
“어머니는 1주일간 회사 연수를 간 걸로만 아시고 계시다가 나중에 서울에 있는 시집 간 누나로부터 전화를 받고는 ‘옴마, 갸가 왜 거길 가
있디야’ 깜짝 놀라셨지요, 뭐.” (계속)
쉐프로 등장했던 연극 [맛술사]포스터 입니다~
4050 우리세상 님들이 첫날 40명 이상 오셔서 힘을 빡빡~~실어줬던 기억이 새롭네요~^^

첫댓글 오빠~~~~
사랑합니다 ㅎ~~
그려~
사랑할라믄....소문내고 공개적으로다가 사랑하자~~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