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집 꿈나무들이 바라던 철대문이 있는 이층집으로 이사했다. 넓은 거실에 방이 여섯 개나 되었다. 이층을 세놓고도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는 아늑한 보금자리였다. 늦둥이 막내도 태어나 2남 2녀인 여섯 식구가 살기에 충분했다. 이사 오기 전의 집과 비교하면 천국이었다. 봄이면 아이들의 키가 훌쩍 자라 마당에 있는 꽃들이 깜짝 놀라 꽃잎을 열곤 했다. 아이들과 함께 까르르 웃는 봄꽃에 우리 부부는 귀를 씻으며 봄을 맞이했다.
자목련이 마당에서 활짝 웃던 어느 날이었다. 법원으로부터 우리집이 가압류됐다는 결정문이 느닷없이 날아왔다. 어머니 회갑 때 수산물을 잔뜩 사온 여동생 부부는 나에게 연대보증인이 되어달라고 부탁을 했다. 여동생네의 사업이 잘되기를 소망하며 서류에 서명을 했다. 하지만 여동생의 형편이 어려워지자 어렵게 마련한 우리집이 경매에 넘어갈 청천병력 같은 사건이 시작이었다. 다른 보증인들은 물론 여동생 시부모까지도 사건 해결에 조금의 성의도 보여주지 않았다. 급전을 융통하려고 지인들을 찾았으나 돈 떼일 까 겁이 났던지 도와주지 않았다.
우리 부부는 돈을 아끼기 위해 아이들이 좋아하는 텔레비전을 없앴다. 하루하루를 혼합곡밥으로 연명하면서 최소한의 한 달 생활비인 오만 원으로 버티며 살았다. 길을 가다가도 어깨를 짓누르는 아픔에 더이상 걸을 수 없어 주저앉아 아무도 몰래 울었다. 날마다 눈을 떠도 오늘의 서러움만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이들이 영양실조로 쓰러졌다. 아이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것 같아 우리 부부는 정신이 멍해졌다. 더이상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었다. 밥을 먹다가도 기가 막혀 눈물이 쏟아졌다.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고 밥상에 그대로 쏟아졌다.
하루는 법원과 등기소, 보증보험을 너무 많이 찾아다녔는지 기진맥진하다 못해 혼절할 지경이었다. 매제 부친의 토지 근저당 설정 문제로 목포지방법원에서 함평 등기소로 가는 한 시간 동안은 정말 피를 말리는 시간이었다. 다행히 사흘 빠른 접수로 안도의 한숨을 쉴 수 있었다. 하지만 은행에서 무리한 대출을 받아 경매를 막고 이자와 원금을 갚느라 견디기 힘든 나날들을 보내야했다. 급기야 여동생 부부를 원망하고 미워하다가 건강이 나빠지기 시작했다. 분노와 미움이 내 목덜미를 움켜잡더니 이제는 목숨줄까지 잡고 흔들어댔다.
분노가 극에 달하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부부는 원망과 미움 대신 동생 부부를 위해 기도하기로 마음을 바꿨다. 용서하기로 마음을 먹으니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우리의 기도가 닿으면 여동생네의 마음도 조금은 편안해질 것 같았다. 마음이 편안해지면 빚 문제도 잘 해결될 거라 믿었다. 기도 덕분인지 시간이 지나자 우리 부부의 몸도 많이 회복되고 마음도 편안해졌다. 그렇게 모진 십 년이 지나자 빚도 거의 갚아갔다. 기도 덕분인지 부도낸 매제 살림도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여동생네는 승승장구하여 서울에 아파트 두 채를 소유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동안 여동생네는 우리 부부를 찾아와 사과를 한 번도 하지 않았다. 네 명의 아이들을 모두 대학에 보낼 때까지 단 한 번의 등록금도 해결해 주지 않았다. 지금까지 고생한 일을 생각하면 너무나 서운하고 어쩌면 저럴 수 있을까 의아했다. 긴 시간 기도를 했지만 분노와 미움은 마음 깊숙한 곳에서 여전히 또아리를 틀고 있었다. 간혹 가다 불쑥 튀어나오는 미움이 나를 집어삼키기도 했다. 혈육이지만 여동생을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마음 한켠에는 여동생이 짠하기도 했다. 나는 부모님 덕분에 대학을 나왔지만 여동생은 딸이라고 중학교도 못 나왔다. 여동생의 그 설움이 조금은 이해되기도 했다. 여동생은 혼자서 슬픔과 아픔을 끌어안은 채 까마득한 벼랑길을 아슬아슬하게 걸어갔을 것이다. 내가 감당해야 했던 연대보증 빚을 중고등학교에 보낼 학자금과 여동생의 인생 공부 등록금으로 부담했다는 생각을 하며 스스로를 위안 삼았다. 그렇게 여동생 부부에 대해서 깊은 용서를 다시 한 번 했다. 이런 말이 있다. "용서할 수 없는 자는 사랑을 할 수 없고, 용기 있는 사람은 용서할 줄 아는 사람이다." 돌아보면 단독주택에 살았던 지난 25년 동안 내 몸 건강하고 가족들 건강하니 그것으로 족하다. 단독주택을 정리하고 아파트로 이사한 지도 벌써 16년째다. 아이들 모두 결혼해서 아들딸 낳고 잘살고 있으니 아무것도 부럽지 않다. 요즘 같은 코로나 불경기에도 우리 가족들 모두 건강하고 일할 수 있는 직장이 있으니 이 또한 큰 행복이 아닐까 싶다. 그토록 힘들었던 지난날이었지만 뒤돌아보면 추억은 늘 아름다웠다. 뜨거운 불 속에서 백 번 넘게 단련한 검처럼 젊은 날의 고생이 있었기에 지금의 행복이 있는 것이다. 힘든 시절을 견디게 해준 '용서'라는 두 글자가 있었기에 오늘도 추억을 반추하며 행복의 미소를 지을 수 있게 된 것 같아 감사의 기도가 절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