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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1일 목요일 성 베네딕토 아빠스 기념일
제1독서 : 호세 11,1-4.8ㅁ-9
복 음 : 마태 10,7-15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7 “가서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8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9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10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1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12 집에 들어가면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
13 그 집이 평화를 누리기에 마땅하면 너희의 평화가 그 집에 내리고,
마땅하지 않으면 그 평화가 너희에게 돌아올 것이다.
14 누구든지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거든,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에 너희 발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5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심판 날에는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종종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을 때, 스마트폰을 뒤집어 찍는 분을 볼 수 있습니다.
그 이유를 물으니 그래야 키가 커 보이고 날씬하게 찍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뒤집어 찍으면 자연스럽게 카메라 렌즈가 아래에 위치하게 되어서 그렇다고 합니다.
어디에 렌즈가 위치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집니다.
하긴 한 때 얼짱 각도라는 것이 있어서 셀카를 찍을 때
팔을 45도 정도 올리고 나서 15정도 몸을 틀어서 촬영하는 것이 인기였지요.
이 역시 시선의 차이를 이용한 것이었습니다.
이를 생각해 보니 우리 세상도 그렇지 않을까 싶습니다.
즉, 우리의 시선에 따라 세상도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나의 시선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지 않고,
세상이 또 상대방이 잘못된 것으로 착각합니다.
나의 시선이 중요했습니다.
주님의 뜻을 따르는 시선을, 특히 사랑을 담은 시선을 가져야 했습니다.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결과물을 얻고자 한다면 나의 시선을 바꿔야 합니다.
그래야 후회의 삶이 아닌 기쁨과 희망의 삶을 살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바라는 우리의 시선은 어떤 것일까요?
이를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는 장면을 통해 알 수 있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라고 하시면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고 하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어떤 대가를 바라고 병자를 고쳐 주고, 마귀를 쫓아내는 것이 아닌
주님께서 보여주신 사랑의 마음으로 행동하라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아무것도 지니지 말라고 하시지요.
그리고 사람들에게 인사하는 것은 평화였습니다.
단순히 입으로만 평화를 비는 정도가 아닌,
사람들이 평화를 느낄 수 있는 말과 행동을 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지금을 사는 우리에게도 하시는 명령이 아닐까요?
이런 시선을 가지고서만 하느님 나라를 세상에 선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의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만을 쫓아서는 하느님 나라를 말할 수가 없습니다.
하느님의 나라는 세상의 그 어떤 것도 필요하지 않은 곳이고,
대신 사랑과 평화만이 필요한 곳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사람을 받아들이지 않는 사람이 어떻게 될지를 심판 날에 소돔과 고모라 땅이
그 고을보다 견디기 쉬울 것이라는 말씀으로 전해주십니다.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지 않고, 또 그런 말도 듣지 않으면
그 집이나 그 고을을 떠날 때 발에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십니다.
아무런 미련 없이 떠나라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주님께서 주시는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이고 있을까요?
우리가 그 사랑과 평화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기 위해서는
먼저 그 사랑과 평화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제대로 된 우리의 시선입니다.
근본에 충실하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마태10,9-10).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철저한 무소유를 가르치셨는데
그것은 제자들이 헛된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않도록 하신 것입니다.
오직 근본에 충실할 것이지 말단을 걱정하지 말라는 가르침입니다.
특별히 성직자, 수도자, 선교사들은 돈에 구애받지 않고 일합니다.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지 않을 때 사람들의 마음에 주님의 사랑을 불태울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저는 부끄러움이 많습니다.
“말타면 종 두고 싶다.”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습니다.
아홉을 가지면 열을 채우고 싶어 합니다.
우리 믿는 이들도 철저한 무소유를 통해 가진 사람들을 이길 수 있는 힘을 간직해야 하겠습니다.
사실 재물을 소유하는 것 자체가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사용해야 할 때에 제대로 써야 합니다.
많은 사람이 물질 때문에 하느님을 소홀히 합니다.
배부르고 등 따뜻하면 아쉬울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이 다 뭐냐’고 합니다. 그리고 돈이면 뭐든지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야말로 하느님께서 우리를 내셨으며
물질에 앞서 사람이 먼저라는 사실을 한순간도 잊어서는 안 됩니다.
세상에서 내가 누리는 모든 것이 스스로 노력해서 얻은 것 같지만
가만히 생각해 보면 우리는 모든 것이 하느님께서 주신 것을 활용하는 것뿐입니다.
성경 말씀을 기억합니다.
“저를 가난하게도 부유하게도 하지 마시고 저에게 정해진 양식만 허락해 주십시오.
그러지 않으시면 제가 배부른 뒤에 불신자가 되어 ‘주님이 누구냐?’하고 말하게 될 것입니다.
아니면 가난하게 되어 도둑질하고 저의 하느님 이름을 더럽히게 될 것입니다”(잠언30,8-9).
“하늘에 보물을 쌓아라.
거기에서는 좀도 녹도 망가뜨리지 못하고, 도둑이 뚫고 들어오지 못하며 훔쳐 가지도 못한다.
사실 너의 보물이 있는 것에 너의 마음도 있다”(마태6,19-21).
나의 삶에 있어서 참으로 보물로 생각하고 있는 것은 무엇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신앙이 보물일 수 있고, 부모나 배우자, 자녀나 어떤 물질이 보물이 될 수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물을 잘 간수하고 빛나게 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마더 데레사 수녀님은 “쌓아놓으면 쌓아놓을수록 줄 것이 없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면 줄수록 줄 수 있는 능력이 생기는 법입니다.
그야말로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야 합니다.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 무엇이든 그것은 주님께서 주신 것이니만큼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잘 사용해야 하겠습니다.
남에게 무엇을 준다는 것은 보통 돈과 물품만을 주는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이상입니다. 금전적인 도움은 즉각적으로 수혜자에게 도움이 될 수 있지만,
받은 돈이 떨어지면 또 다른 도움을 원합니다. 근본적인 해결이 되지 않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상대의 마음을 공감해 주고 베풀 수 있는 마음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은 물질보다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요즘은 재능기부도 많이 합니다.
더 많이 사랑하고 자기의 경험과 지식, 삶의 경륜을 나눌 수 있어 행복한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줄 것이 없다고 말하지 마십시오. 여러분 자신을 주십시오.
그렇지만 기왕이면 물고기를 잡아 주지 말고, 물고기를 낚는 법을 가르쳐 주십시오.
그리고 결코 물질 때문에 하느님께 소홀히 하는 일은 없기를 기도합니다.
제발, 가진 것에 의지 하지 말고 주 하느님께 의지하고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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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춘추전국시대 송나라 학자였던 장자(莊子)는 집이 가난했다.
참다못해 이웃 위나라를 다스리던 문후(文侯)를 찾아가
곡식을 사기 위해 돈을 빌려달라고 했다.
위 문후는 흔쾌히 승낙 하면서
영지에서 수입이 들어오면 그때 은 삼백냥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하지만 당장 하루가 급한 장자는 이렇게 말했다.
"수레바퀴 자국의 고인 물에 붕어 한 마리가 퍼덕이고 있었습니다.
동해에서 온 붕어는 길 가던 이에게,
제게 물을 한 바가지만 갖다주면 살 수 있다고 했습니다.
저는 남쪽 오나라와 월나라 왕을 찾아가는 길인데,
그곳 서강의 강물을 끌어다가 살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붕어는 화가 나서 말했습니다.
'선생이 강물을 끌어다 준다지만 (나는 이미 죽었을 테니)
건어물 가게에서 나를 찾는 편이 나을 것이오'라고 했습니다.“ ***홍인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살아가면서 서로가 무엇인가를 주고받으며 살아갑니다.
곧 타자와의 교제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줍니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우리는 주기보다는 받기를 더 좋아하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속을 들여다보면, 받고 싶은 것은 잘 받아들이고 받기 싫은 것은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예를 들면 욕이나 모욕, 꾸중이나 비판은 받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는 것에 있어서도 사실은
자신을 내어주는 것, 시간과 노고, 마음을 내어 주는 것은 어렵습니다.
이 ‘주고받음’이라는 놀이 속에는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되어 있습니다.
‘자기 자신’이 한 가운데 떡 버티어 서 있음을 봅니다.
그런데 오늘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말씀하십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마태 10,8)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는 것은
남이 가진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진 것을 내어주는 일입니다.
그런데 여기에는 우리가 먼저 꼭 알아야 할 것은
우리가 '가진 것'은 우리가 만들거나 획득해서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선사 받아서 가지게 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곧 선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는 우리가 어떤 존재이고, 어떻게 살아야 할지를 가르쳐주는
존재의 원천적이고 본질적인 깨달음에 해당합니다.
곧 우리가 '거저 주어라'라는 사명을 실행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것을 '거저 받아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먼저' 하늘나라를 '거저 받아들여야'만이 내 안에 하늘나라를 지니게 되고,
다름 아닌 바로 받은 그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이 비로소 가능해지게 됩니다.
이처럼 하늘나라는 바로 이렇게 하느님의 자애로 우리에게 거저 주어진 선물입니다.
그렇습니다.
결국 우리는 주시는 분이 있기에 받아들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먼저’, 주신 그분을 만나야 합니다.
‘먼저’, 그분의 사랑을 만나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그 사랑으로 우리도 ‘거저 줄’ 수가 있게 됩니다.
예수님께서는 ‘거저 받은 것, 바로 그것을 거저 주라’고 하십니다.
그러니 결코 ‘받은 것이 아닌 다른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곧 우리가 만든 것을 주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참으로 조심해야 할 일입니다.
그러기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주기에 앞서, 먼저 ‘거저 받은 것’, 그것을 제대로 아는 일입니다.
또한 그것이 ‘거저 받은 것’임을 명확히 아는 일입니다.
이토록 신앙은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받아들여지게 되면, 그 어떠한 방식으로든 선포되고 증거됩니다.
그러나 만약 실제로 받아들이지도 않은 것을 선포하고 증거한다면,
그것은 그릇되게 선포되거나 거짓 증거가 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분명 우리는 이미 이 선물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곧 예수님을 받아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러기에 우리 안에는 예수님의 생명이 흐르고 숨쉬고 있습니다.
그러니 이제 우리는 우리 안에 흐르는 이 생명을 건네주어야 하는 일을 사명으로 받았습니다.
거저 받은 것이니 거저 주되, 그분께서 목숨까지 거저 내어주셨듯이,
우리도 목숨까지도 거저 내어주어야 하는 사명을 받은 것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마태 10,8)
주님!
당신은 거저 주시는데도 제가 받지 못함은,
제 그릇이 가득 차 있어 주어도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입니다.
나누지 못해 비워지지 않은 까닭입니다.
더러는 비워져도 엎어져 있어 담을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아니, 잘못 기울어져 있어 다른 데서 오는 것을 담고 있는 까닭입니다.
이제는 제 자신을 비우고, 당신을 향하여 있게 하소서.
목숨까지 내어주신 당신 사랑을 따라 거저 내어주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교구사제모임 프로그램 중에 ‘성극 다니엘’이 있었습니다.
동부에 사는 신부님들은 이미 성극을 보았기 때문에 다른 프로그램을 마련했습니다.
‘루레이 동굴’ 관람이 있었습니다.
저를 포함해서 동부에서 온 신부님 7명이 동굴 관광에 다녀왔습니다.
태고의 신비를 간직한 아름다운 동굴이었습니다.
동굴도 인상적이지만 제게 더욱 인상적이었던 것은
저희를 안내해 준 기사 겸 가이드분이었습니다.
열심한 개신교 신자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목사님이었습니다.
숙소에서 동굴까지 2시간 정도 거리였습니다.
자칫 지루할 수 있는 시간이었는데 저는 목사님과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사제들의 ‘안식년’에 대해서 관심이 있었습니다.
안식년을 지내는 동안 비용은 어떻게 하는지 물었습니다.
저는 2018년에 안식년을 했으니 사제생활 27년 만에 했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깜짝 놀랐습니다. 안식년은 7년에 한 번 하는 줄 알았다고 합니다.
안식년 계획서를 제출하면, 기본적인 생활비는 교구에서 지원한다고 했습니다.
목사님은 그것에 대해서도 좋은 제도라고 이야기했습니다.
이번에는 목사님이 제게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는 ‘이판과 사판’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이판 스님은 부처님의 가르침을 공부하고, 참선을 통해서 깨달음의 길을 찾는다고 합니다.
사판 스님은 불자들과 함께 지내면서 사찰의 운영과 행정을 담당한다고 합니다.
때로 사판의 스님들 중에 물의를 일으키는 경우가 더러 있지만
이판 스님들이 있기에 불교는 사부대중들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그러면서 가톨릭에도 수도 사제와 교구 사제가 있다는 걸 이야기했습니다.
수도회의 깊은 영성이 있기에 일부 사제와 교회가 물의를 일으킬지라도
가톨릭은 2,000년 역사를 이어올 수 있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불교에도 있고, 가톨릭에도 있는
이판의 치열한 정진과 수도회의 깊은 영성이 부럽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저는 2006년에 캐나다 토론토에서 이냐시오 영신수련 40일 피정을 했던 경험을 나누었습니다.
당시에 영신수련에는 목사님도, 함께 했었습니다. 교회 다니는 분도, 함께 했습니다.
저는 옥한흠 목사님의 제자 훈련 프로그램이 좋았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법정 스님이 명동성당에서 대림 특강을 했던 이야기도 했고,
김수환 추기경님이 길상사 개원식에 축하 인사를 했던 이야기도 했습니다.
예전에는 신분제도가 있었고, 정보가 소수에게 독점되어 있었습니다.
정치와 종교가 구분되지 않았던 적도 있었습니다.
정치권력에 의해서 종교가 정해지기도 했습니다.
특정한 종교가 다른 종교를 탄압하기도 했고, 종교적인 신념 때문에 전쟁도 있었습니다.
종교가 권력에 편승하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외면하기도 했습니다.
종교라는 제도는 있지만,
종교가 지니는 보편적인 사랑과 공동선을 위한 연대가 무력해진 적도 있습니다.
종교가 세상을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종교를 걱정하는 때도 있었습니다.
우리는 계몽주의 시대를 지나왔습니다.
산업혁명과 과학혁명으로 우리는 검색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40억 명 이상의 인구가 매일 인터넷을 검색하면서 살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나의 종교만이 최고이며, 최선이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집니다.
민주화된 시대에, 자아를 잃어버리고 사는 시대에
무엇이 희망을 주고, 무엇이 위로를 주며, 무엇이 용기를 줄 수 있을까요?
내가 원하는 것을 그만큼 남에게 해 줄 수 있는 ‘황금률’을 지키는 겁니다.
우리 모두가 잠시 머물다 가는 지구의 환경과 생명을 위해 함께 연대하는 겁니다.
적자생존, 양육강식, 승자독식이라는 ‘틀’을 벗어버리고,
홍익인간, 인내천, 자비와 사랑이라는 ‘옷’을 입어야 합니다.
“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이다.
나는 네 가운데에 있는 ‘거룩한 이’ 분노를 터뜨리며 너에게 다가가지 않으리라.
가서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 하고 선포하여라.
앓는 이들을 고쳐 주고 죽은 이들을 일으켜 주어라.
나병 환자들을 깨끗하게 해 주고 마귀들을 쫓아내어라.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거저 주었으니, 거저 주어라.
조욱현 토마 신부
예수께서는 하늘나라를 선포하라고 권능을 주시어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우선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8절) 하신다.
주님께서 지니신 모든 권능이 사도들에게 주어졌다.
한때 세속적이던 이들이 이제 하늘 중심의 사람들이 되었다.
그들은 하늘나라를 선포하고 병든 이를 고치고 죽은 이를 되살리고 악마를 쫓아낼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의 모습이 되도록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리고 하신다.
만일에 그들이 보상을 바라고 영적인 선물을 베푼다면
그것을 더럽히는 것이므로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탐욕을 단죄하셨다.
주님께서 그 권능을 제자들에게 거저 주셨으니,
제자들도 그 복음의 은총이 더럽혀지지 않도록 하여야 한다.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9절) 라고 하신다.
보수를 바라지 않는다면 금과 은과 돈을 지닐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잘못해서 그들이 하는 선교 활동이 인류 구원이 아니라,
경제적 이익을 위한 일로 보여서는 안 된다.
사도들은 하느님의 섭리를 가르치면서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를 걱정하지 않았다.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10절)
이는 세속의 물건에 관심은 버리고, 참된 보물을 찾으라는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리스도라는 옷만 있으면 된다.
마음의 악행 때문에 이단 같은 다른 옷을 걸쳐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다.
신발은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신 것처럼(탈출 3,5 참조)
거룩한 땅에서는 맨발로 확고히 서서 그리스도께 받은 것 말고는
어떤 신발도 신지 말아야 한다.
지팡이는 외적인 힘을 도구로 사용하거나 자격도 없이 권위를 사용하려는 모습을 말한다.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10절)
필요한 음식과 옷만 받으라고 하신다.
“어떤 고을이나 마을에 들어가거든,
그곳에서 마땅한 사람을 찾아내어,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1절)
사도들이 묵는 집은 사람들의 평판이 좋은 집에 머무르라고 하신다.
나쁜 평이 도는 사람이면 자칫 말씀이 더럽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존경하는 사람을 찾아야 했다. 그리고 거기에 머물렀다.
“그 집에 평화를 빈다고 인사하여라.”(12절)
평화를 빌어주라고 하신다.
그러나 평화를 누리기에 합당하지 않은 집에는 평화가 내려서는 안 된다고 하신다.
하늘나라의 복음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는 자들은
우선 평화가 주는 혜택을 받지 못한다는 것이고 그들의 끝은 멸망이라는 것이다.
그들 앞에 발의 먼지를 털어 버리라고 하신다.
나는 지금 어떻게 살고 있는가?
김준수 아오스딩 신부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10,8)
예전 공동체를 방문하셨던 손님 신부님이 강론 중에 느닷없이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동사는 무엇이라고 생각합니까?”
생각하느라 꾸물대는 저희에게 가장 중요한 동사는
바로 ‘come & go: 와라 그리고 가라’고 하셨던 기억이 아직도 강한 인상으로 남아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와라, 보라, 고 부르셔서 당신과 함께 머무르도록 하셨잖아요.
그런데 오늘은 제자들을 이제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가라’ 하고 하십니다.
열두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예수님은 다음 세 가지를 당부하셨습니다.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
전대에 금도 은도 구리 돈도 지니지 마라,
여행 보따리도 여벌 옷도 신발도 지팡이도 지니지 마라.
일꾼이 자기 먹을 것을 받는 것은 당연하다.” (10,8~10)
하늘나라 구원의 기쁜 소식을 전함에 있어서,
“너희가 거저 받았으니 거저 주어라.”(10,8)라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가르치신 것은
물론 유대인들의 관습을 따르는 말씀이었지만,
그것보다는 가르침을, 필요한 민중들의 가난한 현실적인 상황 판단에서
기인하고 고려한 가르침이었다고 봅니다.
지금껏 갖가지 질병으로 가난과 고통으로 짓눌려 살아온 이들에게
무엇을 요구한다는 자체가 사치이자 무거운 짐을 지우는 것일지도 모릅니다.
시대에 따라 다른 적응이 있겠지만, 본질적으로 복음을 선포할 때,
복음 선포자가 주님으로부터 거저 받았으니 그 풍부한 가르침이나 능력을 베풀 때
가난한 이들에게 거저 주어라, 하신 것이며,
또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이 주님을 선포하는 사람의 특권이자 특은입니다.
가르치고 전하면서 복음 선포자가 느끼고 깨달은 삶의 기쁨과 보람을
어찌 물질과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전대 곧 돈을 지니고 다니지 말라고 주님께서 가르치신 의도는
복음 선포자가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할 때,
세상적인 것에 의존하지 말라는 뜻으로 새겨들어 봅니다.
복음 선포자의 필수 항목은 세상적인 물질이나 물건으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과 하느님 나라의 은총과 사랑을 선포하는 것임을 강조하신 것이라고 봅니다.
마치 다윗이 골리앗과 싸우러 나갈 때
“칼과 표창과 창이 아닌 오직 오직 하느님의 이름으로 나아간”(1사17,12~54) 것처럼
복음 선포자도 세상적인 것이나 인간적인 것이 아닌 하느님께 대한 믿음
곧 하느님께서 모든 것을 손수 마련해 주신다는(야훼이레 창22,14참조) 마음으로
하느님만을 온전히 신뢰하고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라는 가르침이라고 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 나라를 선포하는 일꾼이 먹을 것을 제공받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일꾼이 자신의 역할에 충실하고 공동체의 성장을 위해 봉사할 수 있도록
그의 생활을 뒷받침해 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생활의 안정이 되지 않는다면 이 집 저 집으로 전전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말이 생겨나서 공동체 내 갈등과 불화를 초래할 수 있기에,
예수님께서도 어느 고장에 가거든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10,11)라고 당부하셨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당부하신 배경에는 두 가지 측면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즉 하느님의 사람은 물질적인 것에 결코 마음을 빼앗겨서는 안 된다, 는 점과
하느님의 백성은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을 합당하게 돌봐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는 것입니다.
그러기에 하느님의 일을 하는 사람은 무릇 하느님의 섭리에 기꺼이 자신을 내어 맡기고,
오직 자기 소임에 충실하면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채워 주시고 이끌어 주신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떠나가야 하리라고 믿습니다.
에디트 슈타인은
“하느님이 인간에게 무슨 일을 원하실 때는
반드시 그 일을 할 수 있는 힘도 주신다.”하고 하였습니다.
“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마르1,15)
그리스도의 얼굴이 없는 교회는?
박상대 마르코 신부
많은 제자들 중에서 12명이 특별히 선발되어 사도로 임명되었다.
베드로와 안드레아, 제베대오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 필립보와 바르톨로메오,
토마와 마태오,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와 타대오,
가나안 사람 시몬과 가리옷 사람 유다가 뽑혔다.
사도행전은 추가로 유다를 대체한 마티아(사도 1,16-26),
그리고 바울로와 바르나바(사도 13,2)를 사도로 소개한다.
그들은 학생의 신분과도 같은 弟子였다가 이제는 전권대사의 의미를 가진
使徒로 임명되어 파견되는 것이다.
어제 복음에서 보았듯이 사도들이 파견되는 이방인들이 사는 곳도 아니고,
사마리아 사람들의 도시도 아닌,
오직 이스라엘 백성 중에서 길 잃은 양들에게로 국한되었다.
그들에게 가서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라는 것이다.
여기서 마태오복음의 讀者가 우선적으로 유다인,
또는 유다인 계통의 그리스도인임을 알 수 있다.
물론 부활하신 예수께서는 열한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모든 사람과 세상 끝까지를 대상으로 한
복음 선포를 지상 최대의 명령으로 주실 것이다.(마태 28,19)
사도들에게 대한 예수의 파견 설교(10장)가 계속된다.
제자들이 나가서 할 일은 스승인 예수께서 해오시던 일과 같다.
우선 하늘나라의 도래와 그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며,
그 표지로 구마기적과 치유기적을 행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행하게 될 기적의 능력은 예수께서 거저 주신 것이므로 그들도 거저 베풀어야 한다.
그들은 성과도 얻겠지만, 실패도 맛보아야 할 것이다.
아눌러 예수께서는 아주 엄한 旅裝規則을 제시하신다.
이 규칙에 의하면 어떠한 여벌의 것은 아무것도 허용되지 않는다.
그저 있는 그대로 가야 하는 것이다.
예수께서는 복음을 선포하는 사람의 철저한 淸貧을 요구하신다.
그러나 동시에 복음을 받아들이는 공동체의 의무도 암시하신다.
일하는 사람은 자기 먹을 것을 얻을 자격이 있다는 것이다.
그 자격은 철저히 복음 선포에 메여있다.
복음은 하느님의 선물이다.
예수의 제자들을 받아들이는 것은, 하느님의 복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복음을 수용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주시는 평화의 선물을 얻는 것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비는 평화의 인사는 단순한 예의의 표현이 아니라
복음의 수용과 같은 맥락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오늘 복음의 핵심적인 내용은 초창기 그리스도교의 성장 시기에는
절대적인 의미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2000년이 지난 오늘날 현대의 그리스도교에도 똑같은 의미를 가질까 하는 의문이 든다.
사실 그리스도교의 전성기를 맞이한 중세 시기 이후 교회 안에서는
오늘 복음이 제시하는 宣敎規則을 언급하기를 꺼려하고 있다.
그 원인은 전적으로 교회 안에 있다.
교회는 거저 받은 것을 거저 주기는커녕 거저 받은 것을 미끼로 富를 축적하였다.
가난하고 길 잃은 양들을 찾기보다는 있는 자의 편을 들어
그들의 정치와 경제에 크게 관여하였다.
사도행적의 기록이 보여주듯이 신약성서 시대까지 있었던
병자를 고치고, 마귀를 몰아내며, 시지어 죽은 사람까지 살려내는 능력도 사라져 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권력에 복종하지 않는 무리들에게는 단호한 입장을 취하였다.
발에 묻은 먼지를 터는 일만큼은 잘했다는 것이다.
단죄하고 파문하는 일이 교회의 日常이 된 셈이다.
현대 교회의 모습도 중세기 이후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다.
첫째, 오늘날 대부분의 복음 선포자들에게 구마의 능력도 치유의 능력도 없어 보인다.
둘째, 선교상의 철저한 無所有원칙이 자기 합리적인 이유로 去勢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우리 가톨릭교회의 2000년 역사를 통틀어
이 원칙을 신중하게 받아들였던 사람은 몇 안 된다.
셋째, 복음을 거부하는 자들에 대한 ‘발에 묻은 먼지를 털어 버릴 정도까지의 斷罪’는
더 이상 통용되지 않는다.
오늘날 선교 방법은 선교 대상의 문화적 수용과 더불어 타협적으로 이루어지며,
오히려 교회 안에 머물러 있는 信者들과 ‘冷淡者’들에 대한
내부 지향적 사목에 더 관심을 보이고 있는 형편이다.
그래서 교회는 자신에게 물어야 한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교회이며, 누구로부터 파견된 교회인지?”
교회는 오늘 복음의 선교 규칙을 無用之物이 되지 않도록 다시금 깨우쳐야 한다.
교회는 오늘 복음에 자신의 방향을 다시 설정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복음을 입에서 입으로 전하기보다는 손에서 손으로 전해야 하며,
병자를 고치고, 죽은 사람을 살리려는 기적보다는 인간을 존중하고 생명을 사랑하며,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려는 노력으로
가진 바를 서로 나누면서 세상에 정의와 사랑의 기적을 일으켜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교회는 그리스도의 얼굴을 잃게 될 것이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