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84)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 – ② 우리 안의 세렌디피티/ 시인, 한양대 교수 송재찬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
Daum카페 http://cafe.daum.net/csy95201155/ 가난한 소년의 점심 시간
② 우리 안의 세렌디피티
말 나온 김에 바로 그 페이스북에서 우연히 보게 된 노르웨이의 동영상 광고 한 편을 소개할까 합니다.
지금은 아마 ‘가난한 소년의 점심시간’이라 검색하면 찾을 수 있을 텐데요,
내용은 이렇습니다.
한 초등학교 교실에 점심시간을 알리는 종이 울립니다.
모두들 환한 얼굴로 도시락을 꺼내는데 한 소년만이 근심어린 표정으로 도시락을 열어봐요.
아니나 다를까 텅 빈 도시락이었습니다.
소년은 슬며시 손을 들어서 담임 선생님께 허락을 받고,
교실 밖으로 나와 급수대 물로 배를 채웁니다.
터덜터덜 교실로 돌아와 도시락을 가방에 옮겨 넣으려는 순간 뭔가 느낌이 이상해요.
묵직하단 말이죠?
무슨 일이지 하며 도시락을 열어보니 그 안에 샌드위치, 당근, 포도 등이 가득 담겨 있는 겁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친구들은 못 본 척, 무심한 척, 혹은 미소를 씩 지으면서 각자 도시락을 먹는데,
자세히 보면 앞에 친구는 당근을, 앞에 옆에 친구는 포도를,
그리고 바로 옆의 짝꿍 친구는 샌드위치를 먹고 있습니다.
마침내 소년은 아주 편안한 웃음을 지으며 빵을 한입 크게 베어 뭅니다.
이 광고는 부모가 없어 도시락도 싸오지 못하는 아이의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른바 수양가정을 확대해달라는 취지로 만든 공익캠페인 광고입니다.
전 세계인의 마음을 울린 이 광고 속 장면이 어쩐지 우리에게는 굉장히 낯이 익습니다.
그렇지 않은가요?
제가 학교에 다니던 그 시절,
웬만하면 누구나 다 가난했던 그때에는 오히려 이런 나눔이 비일비재하고 너무나 당연한 일상이었습니다.
부잣집 친구 몇몇을 빼곤 누구의 도시락도 그다지 특별하달 것이 없었고,
앞뒤로 돌려 앉아 네 사람이 한 식탁을 이루어 서로의 반찬을 공유하다시피 했지요.
아예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친구들도 있었는데,
그런 친구는 그냥 숟가락 하나만 가져오면 되었습니다.
가운데가 포크 모양으로 되어 있는 일체형 수저로 모든 급우들의 밥과 반찬을 먹을 수 있는 권리가
그에게 주어졌던 시절이었습니다.
물론, 그 친구라고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숫기가 없는 친구들은 그러지도 못하고 정말 밖에 나가서 물로 배를 채워왔을지도 모를 일입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무상 급식을 받는 시대,
이제 학교에서 남몰래 배곯을 아이는 없겠지만,
급식만으로는 뭔가 부족합니다.
분배나 나눔은 다른 법.
이 광고를 통해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교실은 ‘사람을 살리는 곳’,
‘같이 나누는 곳’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안 가르쳐줬지만 우리는 그것을 배웠습니다.
진정한 교육은 교과서보다, 학원보다, 삶과 사람을 통해서 이루어집니다.
그런 점에서 이 광고의 진짜 주인공은 빈 도시락을 가져온 가엾은 그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음식을 나누어 그의 도시락을 채운 친구들이라고 해야 할 겁니다.
특히 그 짝꿍이 단연코 주연급입니다.
당근이나 포도를 나눠준 다른 친구들은 연기가 서툴러서 자기가 줬다는 티를 감추지 못하는 반면,
저 짝꿍은 영상에서 클로즈업 한 번 없이 아주 짧게 지나가는 존재이지만,
정작 샌드위치를 뚝 떼어주고도 곁눈조차 주지 않은 채 시크하게 앞만 바라보고 있지 않습니까?
이렇게 멋진 녀석을 어디선가 또 본 적이 있는 것 같은데….
복효근 시인의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따뜻했던 저녁/ 복효근
어둠이 한기처럼 스며들고
배 속에 붕어 새끼 두어 마리 요동을 칠 때
학교 앞 버스 정류장을 지나는데
먼저 와 기다리던 선재가
내가 멘 책가방 지펴가 열렸다며 닫아주었다.
아무도 없는 집 썰렁한 내 방까지
붕어빵 냄새가 따라왔다.
학교에서 받은 우유 꺼내려 가방을 여는데
아직 온기가 식지 않은 종이봉투에
붕어가 다섯 마리
내 열여섯 세상에
가장 따뜻했던 저녁
― 《운동장 편지》(창비교육, 2016)
이 시에 나오는 선재 같은 친구가 아까 그 짝궁 같은 친구일 겁니다.
붕어빵을 나눠주는 친구,
그것도 “야, 이 붕어빵 내가 사줬다”가 아니라 “야, 네 가방 지퍼 열렸다” 하면서
가방 속으로 슬쩍 붕어빵 넣어주는 그런 친구 말입니다.
그런 친구가 없다면,
열여섯이 아니라 쉰여섯이 되어도 이토록 따뜻한 저녁은 만나기 쉽지 않을 겁니다.
눈물 젖은 빵도 이런 빵 같으면 매일 먹고도 힘이 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런 시는 분석할 필요도 없이,
그저 “하, 선재 저 자식 참…!” 하면서 눈물 반 웃음 반 지어 읽으면 그만이겠습니다만,
갑자기 머리를 스쳐지나가는 게 하나 있습니다.
하필이면 붕어빵이 왜 다섯 마리일까요?
천 원에 다섯 마리 주던 시절이었기 때문이겠죠.
선재는 먹다 남은 붕어빵을 준 게 아니라,
온전히 친구를 위해 천 원짜리 붕어빵 다섯 개를 사다가 그걸 그대로 가방 속에 넣어준 겁니다.
내친 김에 한 발짝만 더 나아가볼까요.
붕어빵이라 하면 붕어는 물고기니 고기 어(漁)요,
빵은 서양 떡이니 떡 병(餠)이요,
다섯 마리라 했으니 다섯 오(五), 합치면 오병이어(五餠二魚)와 크게 다르지 않다고 봐도 되지 않겠습니까?
성경에 나오는 예수의 이적(異蹟)!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의 굶주린 무리를 먹였다는 기적!
그렇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은 꼭 신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오히려 저 시처럼, 저 광고처럼, 한국과 노르웨이 교실의 어린 친구들처럼,
우리 누구나 할 수 있고, 실제로 해왔고,
앞으로도 해야만 하는 그런 것일 뿐입니다.
지금까지의 이 짧은 이야기 안에서도 우리는 많은 세렌디피티를 발견할 수 있을 겁니다.
노르웨이의 도시락, 대한민국의 붕어빵, 이들이 이렇게 우연히 만나다니 말입니다.
< ‘우리가 인생이라 부르는 것들, 자기 삶의 언어를 찾는 열네 번의 시 강의(정재찬, 인플루엔셜,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12.1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84) 아이를 가르친다는 것 – ② 우리 안의 세렌디피티/ 시인, 한양대 교수 송재찬|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