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공항에서.
에슬라니아행 직항로가 개설되지 않은 관계로 일행은 파리행 비행기에 몸을 싣고 있었다. 우선 그곳에 내려 일박을 한 후 다음날 아침 일찍 에슬라니아행 비행기로 갈아탈 예정이었다.
가인은 담담한 표정으로 창 밖을 내다보고 있었다. 맑게 갠 날씨여서 지상이 깨끗하게 내려다보였다. 푸른 산과 산 사이에서는 실개천 같은 강물이 흐르고, 들녘과 들녘 사이에 손바닥만한 도시가 있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지상은 그렇게 구분되었다.
김포공항에서 비행기를 탄 이후 벌써 열 시간 이상이나 하늘을 날고 있는 중이었다. 멀미는 일지 않았지만 땅을 오래 떠나 있어서인지 약간 어질어질한 느낌이 들었다. 잠이라도 들면 한결 편하겠건만 그토록 찾아헤매던 네 손가락의 뱀파이어 세피로스가 있는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니 한숨도 잘 수가 없었다.
반면 지영은 벌써 다섯 시간이나 자고 있는 중이었다. 원수를 찾아간다는 긴장감도 생기지 않는지 그녀는 가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댄 채 아주 평온하게 잠들어 있었다.
가인은 눈을 흘깃 돌려 그녀를 보고는 가벼운 미소를 드리웠다. 가슴으로 파고들 듯 기대어오는 그녀를 보고 있노라면 보호해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이 절로 들었다. 또한 살포시 미소지은 채 잠들어 있는 모습은 안아주고픈 충동을 일으켰다. 아버지를 잃고 난 뒤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잠시 지영의 얼굴에 머물러 있던 그의 눈이 이번에는 그녀 옆 좌석에 앉아 있는 루안에게로 옮겨갔다. 그는 한 점 흐트러지지 않은 자세로 등받이에 기댄 채 눈을 감고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잠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가인은 잘 알고 있었다.
김포공항을 출발한 이후 줄곧 같은 자세를 유지해 오고 있는 그였지만 가끔 눈을 뜰 때 보면 절대로 자다 일어난 사람이 아니었다.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가인은 누군가에게 궁금증을 갖는 성격이 아니었지만 루안만큼은 예외였다. 지난 하루 동안 그는 가인을 여러 차례 놀라게 만들었다. 어두운 도서관 구석에 틀어박혀 책이나 읽고 있어야 어울릴 것 같은 그가 한 마디만 하면 모든 것이 무사통과였다. 비행기를 탈 때에도 그들은 복잡한 출입구 대신 VIP 전용 통로를 이용했으며, 출국심사 따위는 애초에 받지도 않았다. 또한 무기는 기내에 절대 반입시킬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가인은 검이 들어 있는 긴 가방을 휴대하고 탑승할 수 있었다.
가인은 좌석 옆에 세워져 있는 긴 가방을 어루만지며 루안이 제시했던 조건을 다시 떠올려보았다.
-당신이 어떤 식으로 뱀파이어와 싸우든 바티칸에서는 일절 관여치 않겠습니다. 뿐만 아니라 가능한 한 모든 수단을 동원해 돕기로 하지요. 대신 바티칸에서 원할 때 단 한 번만 와주시면 됩니다. 그때는 뱀파이어와의 마지막 대 전쟁을 벌일 때일 겁니다.
‘뱀파이어와의 대 전쟁이라…… 과연 그런 일이 정말로 일어날까?’
그 동안 하루도 거르지 않고 뱀파이어를 쫓고 그들과 싸워온 그였지만 쉽게 상상이 가지 않았다. 대체 이 세상에 뱀파이어가 얼마나 많이 존재하기에 전쟁까지 벌여야 한단 말인가. 가슴이 답답해져 왔다. 이제 그의 적은 세피로스만이 아닌 것이다. 수많은 뱀파이어와의 전투…… 어쩌면 한국으로 다시는 돌아갈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어깨에 기대어 곤히 잠들어 있는 지영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가족의 복수를 대신해 줄 사내를 찾기 위해 몸을 팔아온 아픈 과거를 지니고 있는 여인. 하지만 지금 그녀의 얼굴 어디에도 어두운 그림자는 남아 있지 않았다.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던 가인은 언제부터인가 비행기가 한 지역을 계속 선회하고 있다는 느낌을 언뜻 받았다. 창 밖을 내다보니 익숙지 않은 도시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가인이 그 동안 보아온 도시의 이미지`─`거대한 콘크리트 더미의 집합체`─`와는 전혀 다른 파리 시가지의 모습이 눈 아래 넓게 펼쳐져 있었다. 방사형으로 잘 정돈된 거리, 최소한 수백 년의 역사를 지니고 있을 작고 앙증맞은 건물들, 프랑스를 상징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에펠탑……
너무 오래 사용하지 않아 가인에게는 생경해진 단어였지만 아름답다는 말이 절로 흘러나오게 만드는 풍경이었다. 잠시 창 밖을 내다보던 가인은 착륙에 관한 기내 방송이 흘러나오는 것을 들으며 안전벨트를 맸다.
가인 일행은 이번에도 VIP 전용 통로를 이용해 공항 건물에 들어섰다. 공항 직원의 안내를 받아 작은 사무실에 들어서니 그곳에는 검정 양복에 선글라스를 착용한 두 명의 요원이 기다리고 있었다. 루안은 가인과 지영을 기다리게 하고 그들에게 다가가 뭔가 대화를 주고받았다. 가인도 영어는 어느 정도 듣고 말할 줄 알았지만 불행하게도 그들의 대화는 프랑스어로 이루어지고 있어서 한 마디도 알아들을 수 없었다.
잠시 후 루안은 요원들을 먼저 내보내고 가인에게 돌아왔다.
“저들이 호텔까지 갈 교통편을 마련해 두었답니다. 나가시죠.”
“바티칸 사람들이오?”
“아닙니다. 그들은 프랑스 정부의 특수부 요원들입니다.”
“특수부 요원?”
“각국마다 뱀파이어 관련 문제를 전담하는 특수 부서가 비밀리에 존재하죠. 그들은 우리 바티칸과 긴밀한 협조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공항을 무사통과한 것도 그들의 힘이었겠군?”
“맞습니다. 뱀파이어에 관한 문제는 국가 이익에 우선하는 사안이기 때문에 각국에 존재하는 특수부의 힘은 막강하죠.”
대화를 나누며 밖으로 나오니 검은색 방탄 리무진 두 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가인 일행은 그 중 후미 차에 몸을 실었다. 이런 대접을 받아보긴 세상에 태어나 처음이지만 우쭐해지기보다는 왠지 마음이 편치 않은 가인이었다. 그러나 지영은 사뭇 마음이 설레는 듯 들뜬 목소리로 종알거렸다.
“리무진 정말 좋네요.”
“마음에 드신다니 다행입니다.”
“어느 호텔로 가는 거죠?”
“리옹 호텔입니다. 내일 아침 일찍 움직여야 하기 때문에 공항에서 가까운 곳을 골랐지요. 그리고 방은 역시 VIP룸으로 준비했으니 마음에 드실……”
지영의 물음에 답하고 있던 루안은 창 밖으로 스쳐지나는 광경을 보고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골치 덩어리들이 나타났군……”
혼자말로 중얼거리는 그의 시선을 따라 지영도 밖을 내다보았다. 공항 출입구 앞 도로변에서 작은 다툼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마에 커다란 반창고를 붙이고 있는 여자와 지나가던 청년의 다툼이었는데, 특수부 요원 차림의 사내 둘이 싸움을 말리고 있었다. 상황을 보니 여자가 기세등등하여 곧 주먹이라도 한 방 내지를 것 같은 분위기였다.
뉴욕에서 날아온 론과 시라는 특수부 요원들의 안내를 받아 드골 공항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VIP용 통로를 이용하지 않고 일반인들에 섞여 나오는 중이었다. 출입문 밖에 세워져 있는 차량이 검정 세단 한 대뿐인 것으로 보아 리무진도 제공되지 않은 것 같았다.
두 사람은 이런 경험이 벌써 여러 번 있는 듯 자연스럽게 세단으로 걸어가고 있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큼지막한 반창고가 하나씩 붙어 있었다. 복스의 조건을 수행하느라 얻은 훈장임이 분명했다. 그 밖에도 시라의 모습은 많이 변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것은 그녀가 외투를 입고 있지 않다는 사실이었다. 아마도 그녀가 비행기 안에서 난동을 피웠다가는 무고한 민간인이 다칠 것 같아서 무기를 걸고 다니는 외투를 못 입도록 바티칸에서 제지한 모양이었다.
덕분에 그녀는 여자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와 있었다. 가슴이 깊이 파인 블라우스에 팬티가 보일 듯 말 듯한 미니스커트. 그 위에 얇은 바바리를 걸친 그녀의 모습은 충분히 섹시했다.
열려 있는 바바리 깃 사이로 언뜻언뜻 드러나는 가슴은 젊음을 자랑하고도 남을 만큼 도발적이었고, 미니스커트 밑으로 늘씬하게 뻗어 있는 다리는 뭇 사내들의 눈길을 끌어모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역시 이마에 붙은 반창고였다. 그녀 또한 반창고가 몹시 신경에 거슬리는 듯 이마를 자꾸 찌푸렸다. 그때마다 반창고 자국을 따라 굵은 주름이 생겨 묘한 표정을 연출해 내고 있었다. 마침 그 곁을 지나던 청년 하나가 그녀의 모습을 보고는 킥,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순간 시라의 눈썹이 하늘까지 치켜 올라갔다.
“뭘 웃어? 이 우라질 자식아! 마빡에 반창고 붙인 거 처음 보냐?”
그렇지 않아도 화풀이 상대를 찾고 있던 참에 청년이 걸려든 것이다. 갑작스러운 그녀의 욕지거리에 청년은 뭐 때문에 화를 내는지 모르겠다는 제스처를 쓰며 프랑스어로 뭐라고 중얼거렸다. 하지만 시라는 그 말을 하나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혀 굴리지 말고 영어로 해, 임마! 알아들을 수가 없잖아.”
시라가 다시 영어로 소리치자 청년은 손을 내저으며 다시 불어를 늘어놓았다. 아마도 싸울 의사가 없음을 밝히는 중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시라는 더욱 화가 나서 이를 드러내며 으르렁댔다.
“너 내가 불어 못 알아듣는다고 욕하는 거냐? 한 번 죽어볼래?”
그녀의 기세가 더욱 등등해지자 요원 하나가 얼른 중재하러 나섰다. 하지만 그가 한 마디도 채 꺼내기 전에 시라의 입에서 욕지거리가 다시 튀어나왔다.
“애스 홀 앤드 뻑큐다, 이 개자식아!”
이번에는 청년도 상당히 화가 난 듯 프랑스어를 지껄여가며 거세게 항의하기 시작했다. 요원들이 얼른 나서서 그의 접근을 가로막았지만 시라는 마치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청년의 면전에 얼굴을 들이밀며 다시 소리쳤다.
“뭐야? 욕지거리는 잘 알아듣잖아? 그러면서 영어를 모른 척해?”
그녀의 억지가 도를 넘어서자 이번에는 론이 나서며 말했다.
“이봐, 시라. 넌 애스 홀이나 뻑큐 같은 욕을 모르는 사람이 세상에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영어 못 하면 모르는 거잖아!”
“억지 좀 그만 부려라. 왜 복스에게 당하고 엉뚱한 사람에게 화풀이야?”
“내가 뭘 어쨌다고 그래? 시비는 저 자식이 먼저 걸었다고! 지가 모른 척하고 지나갔으면 내가 왜 화를 내겠어?”
“됐으니까 그만 가자.”
“안 돼! 저 자식이 사과하지 않으면 그냥 안 보낼 거야.”
“영어도 못 하는 사람에게 무슨 사과를 받아?”
“애스 홀하고 뻑큐를 아는 놈이 아이 엠 쏘리도 모르겠냐?”
시라가 고집을 꺾지 않자 론도 더 이상 말리고 싶지 않다는 듯 손을 내두르며 세단 쪽으로 걸어갔다.
“그래, 니 맘대로 해라. 대신 걸어오든지 택시를 타든지 그건 니가 알아서 해! 나는 먼저 갈 테니까.”
“뭐라고?”
“저 차는 내가 몰고 가겠다고.”
“야! 그런 게 어딨어?”
말도 안 된다는 듯 버럭 고함친 시라는 론보다 먼저 달려가 세단의 운전석 문을 벌컥 열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운전석에 앉아 있던 요원이 놀란 표정으로 묻자 시라는 아무 소리 없이 그의 멱살을 잡아 끌어내고는 얼른 올라탔다.
“이러면 안 됩니다.”
시라는 다시 달려드는 요원의 면상에 주먹을 꽂아넣었다.
“안 되긴 뭐가 안 돼? 운전 한 번 해보겠다는데!”
요원은 퍽, 소리와 함께 얼굴을 감싸쥐며 넘어졌고 시라는 엑셀을 힘껏 밟았다.
부아아앙!
엔진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공회전하자 론은 얼른 차에 올라탔다.
“하여튼 성질머리 하고는……”
“잔소리 말고 안전벨트나 꽉 매둬. 신나게 몰아줄 테니까.”
“드라이브하는 게 그렇게 좋으면 평상시에 조심했어야지. 한 달이 멀다 하고 차를 부숴먹으니 바티칸에서도 더 이상 차를 내주지 않는 거잖아?”
“그게 어디 내 잘못이야? 길거리에 차가 너무 많은 탓이지.”
청년의 항의를 무마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던 두 명의 요원은 뒤늦게 사태를 알아차리고 달려오는 중이었다.
“멈추십시오.”
그러나 날카로운 마찰음을 내며 급출발해 버리는 세단을 그들의 발로 따라잡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끼기기긱!
타이어 태우는 연기를 뿜어내며 달려나간 세단은 그들의 시야에서 금방 사라지고 말았다.
“이런 젠장!”
요원들은 발을 구르며 분통을 터뜨렸고, 졸지에 닭 쫓던 개 신세가 된 청년은 ‘저거 완전히 돈 여자 아냐?’ 하는 눈길로 차 꽁무니를 바라보고 있었다.
“야, 이거 제법 잘 나가는걸?”
시라는 마치 경주하듯 차를 몰아나갔다. 얼마나 빠르게 달리던지 공항을 빠져나오는 사이에만 수십 대나 되는 차량을 추월해 지나갔다. 물론 그 안에는 가인 일행이 타고 있는 리무진도 포함되어 있었다.
공항을 빠져나오자 시라의 운전은 더욱 고난위도의 곡예를 선보이기 시작했다. 차선이며 신호를 완전히 무시한 채 질주하는 그녀의 차 뒤로는 급정거하는 타이어 마찰음과 욕설이 어김없이 튀어나왔다. 그러거나 말거나 시라의 질주는 멈춰지질 않았다. 그렇게 이십여 분 정도 달렸을까? 시라는 갑자기 속도를 늦추더니 론에게 물었다.
“그런데 무슨 호텔이라고 그랬지?”
그러자 론은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푹 쉬었다.
“여태껏 목적지도 모르고 그렇게 무섭게 달린 거냐?”
“말꼬리 잡지 말고 빨리 대답이나 해.”
“리옹 호텔!”
“뭐야? 그럼 아까 지나쳤잖아?”
“그래, 나도 봤다.”
“그런데 왜 아무 말 안 했어?”
“그때 속도가 120킬로미터였어. 호텔은 건너편에 있었고.”
“120이든 200이든 브레이크 밟으면 서는 거 아냐!”
“어디서 서느냐가 문제지. 그때 알려줬으면 너는 중앙선을 넘어 호텔 문으로 그냥 돌진해 들어갔을 거 아냐?”
“도대체가 이 인간은 도움이 안 돼. 에이……”
끼기기긱!
시라는 70여 킬로미터로 달리던 속도 그대로 갑자기 핸들을 꺾어 차를 되돌렸다. 물론 중앙선이나 마주 오는 차 따위는 완전히 무시한 유턴이었다. 양쪽 차선에선 차들이 급정거하느라 난리가 벌어졌고, 맞은편 차선에서 달리던 거대한 유조차 한 대는 미처 급제동을 걸지 못한 채 라이트를 번쩍이며 커다란 경적을 울려댔다.
뿌아아앙!
역방향으로 달리던 관성 때문에 아직 가속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시라의 차는 곧 유조차 밑에 깔릴 것 같았다. 그 동안은 아무리 난폭하게 운전을 해도 여유를 잃지 않았던 론도 이때만큼은 놀랐던지 버럭 소리를 질렀다.
“미쳤냐!”
하지만 시라는 대꾸할 여유도 없는지 엑셀만 힘껏 밟고 있을 뿐이다.
그와아아앙!
엔진은 금방이라도 폭발할 듯 요동쳤지만 가속은 생각처럼 쉽게 붙지 않았고, 그사이에도 유조차는 무서운 기세로 돌진해 오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지붕을 타넘을 듯한 유조차의 기세에 론은 얼굴을 하얗게 탈색시키며 소리쳤다.
“빨리 좀 어떻게 해봐, 이 웬수야!”
“하고 있잖아!”
유조차의 무지막지한 앞 범퍼는 벌써 꽁무니에 올라탈 듯 붙어 있었다.
“우아악! 깔린다!”
“제발 좀 가자, 이 똥차야!”
시라가 가속 페달을 부러져라 밟아보았지만 결국은 꽁무니를 받히고 말았다.
쿠웅!
커다란 유조차에 받힌 충격은 상상외로 컸다. 차는 제멋대로 앞으로 튕겨나갔고, 뒤를 쳐다보고 있던 론은 목이 부러져 나가는 듯한 충격을 받아야 했다.
하지만 그 충격 덕에 그들의 차는 가속을 얻어 탄환처럼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됐다!”
시라는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었지만 추돌당한 충격과 가속의 충격까지 연이어 받은 론의 목은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고 있었다. 욕이라도 한바탕 퍼부어주고 싶었지만 론은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목이 옆으로 구십 도쯤 꺾여 있으면 말이 잘 나오지 않는 법이니까……
‘끄으으…… 이 웬수와 계속 같이 다니다간 언제고 반드시 죽게 될 거야……’
끼이이익!
리옹 호텔에 도착한 시라가 그녀다운 운전실력으로 급정차시키자 정문을 지키고 있던 웨이터들은 황급히 자리를 피해야 했다.
“도대체 누구야?”
“무슨 운전을 저렇게 험악하게 한데?”
그들은 저마다 한 마디씩 중얼거리며 보닛 위로 허연 수증기를 토해 내고 있는 세단 주변으로 하나둘 모여들었다.
그때 운전석 문이 벌컥 열리며 시라가 모습을 드러내자 웨이터들의 얼굴에는 각양각색의 표정이 떠올랐다. ‘그렇게 무지막지하게 운전한 것이 여자였어?’ 하는 표정부터 ‘과격하긴 하지만 엄청 예쁘구만?’ 하는 표정까지.
시라는 서너 명의 웨이터가 자신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자 인상을 와락 구기며 제일 가까운 웨이터에게 차 키를 던져주었다.
“느끼하게 굴지 말고 차나 갖다놔, 임마!”
얼떨결에 키를 받아든 웨이터는 그녀의 거친 언사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아니면 팁을 주지 않아서인지 얼른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그러자 시라가 다시 노려보며 한마디 던졌다.
“뭐 불만있냐? 싫으면 내가 주차시킬까?”
웨이터는 시라와 세단을 번갈아 쳐다보더니 이내 고개를 저으며 대답했다.
“아, 아닙니다. 제가 잘 주차시켜 드리죠.”
괜히 그녀에게 키를 주었다간 다른 손님 차가 서너 대쯤 부서질 것 같다는 위기감을 느낀 모양이었다. 팁이 없는 것은 불만스러웠지만, 손님 성향 파악을 제대로 못 했다고 웨이터 장에게 욕먹는 것보다는 낫다고 생각한 웨이터는 얼른 차에 올라탔다.
“자식들이 당연한 일 하고 있으면서 꼭 팁이나 바라고 말야.”
팁을 주지 않은 자신이 대단히 자랑스러운 듯 시라가 씩씩하게 호텔로 걸어 들어가자 론은 다친 고개를 옆으로 비스듬히 한 채 뒤따라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젠장…… 대체 뭐가 당연하다는 거야? 신호고 뭐고 다 무시한 채 죽어라 달려대는 게 그렇다는 거야, 아니면 내 모가지가 이렇게 된 게 당연하다는 거야? 열흘 동안 삶아서 한 달 동안 널어 말려도 시원찮을 시라 같으니……”
그는 주춤주춤 다가오는 웨이터 하나에게 오 달러 지폐 한 장과 함께 짐을 넘겨주고는 호텔 안으로 들어섰다.
“당연한 건 바로 이런 거라고……”
2. 원치 않은 손님.
루안의 일 처리는 정말 깔끔했다. 어느새 체크인까지 해두었는지 리옹 호텔에 도착한 가인과 지영은 복잡한 절차를 거치지 않고 바로 객실 키를 받을 수 있었다.
“어? 두 개네? 하나는 루안 것인가요?”
지영은 자신과 가인에게 각각 하나씩 주어진 키를 보며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루안에게 물었다. 루안은 무슨 뜻인지 알겠다는 듯 옅은 미소를 머금었다.
“어떨지 몰라 두 개를 준비했으니 두 분이 알아서 하십시오.”
무심결에 말을 뱉어놓고는 괜히 루안에게 속내를 들킨 것 같아 무안했던지 지영은 얼른 손을 저으며 변명을 늘어놓았다.
“아, 아니…… 나는 방값이 비쌀 것 같아서…… 그리고 VIP룸은 넓어서 여럿이 함께 써도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아 한 말이니까 뭐……”
애써 변명하고 있는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가인이 무감정한 어투로 한마디 던졌다.
“같이 자자.”
“어…… 엉?”
“왜, 싫어?”
“아, 아니…… 그게……”
“그럼 됐어.”
가인은 잘라 말하며 루안에게 시선을 돌렸다.
“루안, 방 하나는 취소하시오. 그리고 앞으로도 숙소는 지영과 함께 쓸 수 있도록 조치해 주시오.”
가인의 말투가 강압적인 명령조여서 기분이 상할 법도 하건만 루안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대답했다.
“제가 미처 생각을 못 했군요. 곧 그렇게 시정하지요.”
지영은 단 한 마디로 자신의 자존심을 지켜준 가인의 마음씀씀이가 고마웠다.
‘차가운 것 같으면서도 이럴 때 마음 쓰는 걸 보면 참 따뜻한 사람 같단 말야.’
그녀는 사랑스러운 눈길로 가인을 올려다보았다.
가족의 복수를 대신해 줄 사람을 찾기 위해 몸을 팔아오며 수많은 남자를 겪어보았지만, 대부분은 자신의 육체만 탐내는 수컷에 불과했었다. 간혹 사랑을 호소해 오는 자들도 있었지만 그들은 한결같이 남자라고 볼 수도 없는 약골뿐이었다. 하지만 가인은 분명히 달랐다. 사랑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자신을 육체적 도구가 아닌 인격체로 대우해 주고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는 약하지 않았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 올라가지 않을 거야?”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지영은 가인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현실로 돌아왔다. 가인은 벌써 엘리베이터 앞까지 가 있는 상태였다.
‘같이 가면 발바닥에 종기라도 생기나? 저럴 땐 정말 미워 죽겠어……’
속으로 이렇게 투덜대며 그녀가 엘리베이터로 걸어가고 있을 때였다.
끼이이익!
유리창이 깨져나갈 듯한 소음이 문 밖에서 울려왔다. 프런트를 지키고 있던 호텔 종업원들은 물론이고 손님들까지 모두 놀란 시선을 집중시키고 있는 가운데 시라 녹스가 보무도 당당하게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는 사람들의 시선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프런트로 성큼 다가섰다.
“시라 녹스란 이름으로 예약된 키 내놔.”
“예?”
“키 달란 말야!”
“저…… 시라 녹스란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 없는데요, 손님.”
“여기 리옹 호텔 아냐?”
“맞습니다만……”
“그럼, 다시 한 번 찾아봐. 내 이름으로 예약된 방이 분명히 있을 테니까.”
시라의 태도가 워낙 강경했기에 프런트 직원은 예약 명단을 다시 한 번 꼼꼼히 살펴보았다. 하지만 역시 없는 모양이었다.
“손님…… 혹시 다른 성함으로……”
“시라 녹스란 이름 놔두고 왜 다른 이름으로 예약을 해?”
“하지만……”
“이봐! 나 지금 무지하게 피곤해. 얼른 샤워하고 자고 싶단 말야. 그러니 자꾸 말 시키지 말고 아무 키나 하나 내놔.”
“그럼, 먼저 체크인을 하셔야 합니다.”
“이것들이 정말…… 이미 돈까지 다 지불됐을 텐데 무슨 체크인을 또 해?”
시라가 또 억지를 부리기 시작하자 뒤에서 한심스러운 눈길로 지켜보고 있던 론이 나섰다.
“혹시 론 카즈키로 예약된 방이 있나 찾아보슈.”
“아! 론 카즈키님이라면 예약이 돼 있습니다.”
프런트 직원은 얼른 키 하나를 꺼내 론에게 건네주었다.
“683호입니다. 그리고 이미 모든 수속이 완료되어 있어서 별도로 체크인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고맙소.”
키를 받아쥔 론은 ‘봤냐?’ 하는 눈길로 시라를 흘겨보고는 엘리베이터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제 머리 모자란 건 생각 않고 그저 남만 윽박지르면 되는 줄 알아……”
빠직!
관자놀이에 굵은 힘줄이 튀어나왔지만 혼자서 괜히 설쳐댄 것은 사실이었기에 시라는 아무 말도 못 한 채 론의 뒤통수만 노려보았다. 그때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던 루안이 그들에게 걸어오며 말을 붙여왔다.
“두 분도 오셨군요?”
“어? 루안 아냐? 당신이 여긴 웬일이지?”
시라가 아는 척을 하자 루안은 가인과 지영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한국에서 귀한 손님 두 분을 모셔오는 중입니다.”
루안의 말에 먼저 반응을 보인 것은 론이었다.
“한국?”
그는 복스에게 패배한 것이 아직도 가슴에 남아 있는 듯 날카로운 눈으로 가인을 쓸어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가인의 검이 들어 있는 가방이었다.
‘검을 쓰는 모양이군…… 저자도 복스와 같은 검법을 익혔을까?’
심각한 생각에 빠져 있는 론과 달리 시라는 그들이 단지 동양인이란 사실에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꽤 잘생긴 동양인이네? 한국에서 차출되어 온 슬레이언가?”
루안이 정색하며 말을 막았다.
“이곳엔 일반인들도 있으니 말을 조심하실 필요가 있습니다.”
“하여튼 바티칸에 있는 인간들은 하나같이 까다로워.”
시라는 가볍게 투덜거린 뒤 가인에게 다가갔다.
“하이! 잘생긴 동양인.”
그녀가 반갑게 인사하며 손을 내밀자 가인도 묵묵한 표정으로 악수를 받아들였다.
“이쪽은 여자 친구인 모양이지? 아니면 부인인가? 어쨌든 반가워.”
지영도 시라와 악수를 나누었다.
“동양 여자들의 손은 정말 작고 예뻐.”
시라는 악수를 나누던 지영의 손을 부러운 듯 바라보더니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고는 지영의 볼을 살짝 쓰다듬었다.
“얼굴도 예쁘네. 남자들이 좋아하겠어.”
갑작스러운 그녀의 행동에 지영이 흠칫 놀라 뒤로 한 발 물러서려는 순간이었다. 가인이 먼저 시라의 손을 거칠게 쳐냈다.
“동양에선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함부로 만지지 않아!”
완벽하진 않았지만 가인은 제법 유창한 영어를 구사하고 있었다.
“어? 영어도 할 줄 아네? 미안, 미안…… 우리도 처음 보는 사람의 얼굴을 함부로 만지지는 않아. 이 아가씨가 예뻐서 내가 잠시 실수했던 것뿐이라고. 당신처럼 멋진 동양 사내와 함께 있는 게 질투도 나고 말이야. 하하…… 내가 너무 솔직했나? 그럼 다음에 또 보자고, 동양 남자. 나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탈 마음이 없을 것 같으니 나는 천천히 걸어 올라가기로 하지.”
시라는 자기가 하고 싶은 말을 잔뜩 늘어놓더니 찡긋, 윙크까지 하고는 계단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녀 덕에 자신까지 육층이나 되는 계단을 걸어 올라가게 생긴 론은 한숨을 푹 쉬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가인에게 시선을 돌렸다.
“시라 때문에 인사가 늦었소. 나는 론 카즈키라 하오.”
“유가인이오. 그리고 이쪽은 이지영……”
“반가워요.”
지영도 영어로 간단한 인사를 하자 론은 가볍게 고개를 숙여 답례한 뒤 가인에게 다시 시선을 던졌다.
“한국엔 훌륭한 검법이 있다고 들었는데, 혹시 당신도 검법을 익히고 있소?”
“훌륭한지는 모르겠지만 검법을 익히고 있는 건 사실이오.”
“그렇다면 언젠가 한 번 겨룰 기회가 오길 기대하겠소.”
“원한다면 언제라도.”
겉으로 보기에는 두 사람 모두 담담한 표정이어서 그저 인사를 주고받는 것 같았지만 곁에 있는 루안과 지영은 내면에 흐르는 긴장감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만약 도검(刀劍)으로 표출된다면 둘 중 하나는 크게 다치거나 죽게 될지도 모를 만한 긴장감이었다.
“그럼 조만간 다시 한 번 보기로 하고 오늘은 이만……”
론은 가볍게 미소지어 주고는 계단으로 향했고, 가인은 묵묵히 그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그때 마침 엘리베이터가 도착하자 루안은 어색함을 무마하려는 듯 가인을 재촉했다.
“그만 올라가시지요.”
VIP룸은 확실히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붉은색 조명으로 은은히 물들어 있는 침실에는 다섯 명은 충분히 누워서 뒹굴 만큼 널찍한 침대가, 그에 딸려 있는 욕실에는 대리석을 깎아만든 커다란 욕조가 놓여 있었으며, 침실과 별도로 마련되어 있는 응접실에는 최고급 소파와 융단이 깔려 있고, 진열장에는 와인과 코냑 등 갖가지 술이 늘어서 있었다.
“마음에 드십니까?”
“물론이지요.”
매우 흡족해 하는 지영과 달리 가인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다음부터는 일반실로 해주시오.”
“마음에 안 드십니까?”
“나 같은 싸움꾼에게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뿐이오.”
루안의 입가에 미소가 번져나갔다.
“역시 생각대로군요.”
가인이 무슨 말이냐는 눈으로 쳐다보자 루안은 뿔테 안경을 밀어올리며 말을 돌렸다.
“진열장에 있는 술은 얼마든지 드셔도 괜찮습니다. 에슬라니아에 도착하면 마실 기회가 별로 없을지도 모르니 원하는 대로 골라 드십시오. 특별히 생각하신 술이 있으면 따로 주문하셔도 좋고요. 저는 그럼……”
루안은 묘한 눈길로 가인과 지영을 번갈아 바라본 뒤 방을 나갔다. 그가 나가자 넓은 실내에는 금방 어색한 적막이 자리잡았다. 이미 하룻밤을 지낸 사이이기는 했지만 서로 인정한 연인 사이가 아닌 그들에게 이런 장소가 익숙지 않은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뭔가 할말이 있는 듯 지영이 쭈뼛거리고 있자니 가인이 진열대로 가서 위스키 한 병을 꺼내왔다.
“마시겠어?”
“아뇨. 나는 목욕이나 해야겠어요.”
지영은 고개를 가로젓고는 가벼운 한숨을 몰아쉬며 침실로 들어갔다. 잠시 후 완전히 닫히지 않은 문 안쪽에서 옷 벗는 소리가 사락사락 들려나왔다. 그 소리를 들으며 가인은 스트레이트 잔에 위스키를 가득 부었다.
조르륵!
잔에 남실거리게 따른 술을 단숨에 들이키고 다시 한 잔을 따르려 할 때였다. 가슴과 머리에 타월을 두른 지영이 문 밖으로 고개를 빠끔 내밀었다.
“프랑스까지 왔으니 이왕이면 코냑을 마셔봐요. 같은 도수라도 훨씬 부드러울 테니…… 값도 훨씬 비싼 술이고……”
“내 입에는 위스키도 고급이야.”
퉁명스러운 가인의 대답에 지영은 입을 삐죽 내밀고는 안으로 모습을 감추었다. 가인은 희미하게 미소짓고는 다시 술잔을 채웠다. 먼저 마신 술이 위장을 찌르르 자극하고 있었다. 이런 느낌이 좋아서 가인은 술을 자주 마시는지도 몰랐다. 평상시에는 아무런 느낌도 없던 내장에서 전해 오는 자극. 그것은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촉감과는 구분되는 감각이었고, 작은 쾌감이었다.
가인은 잔과 술병을 든 채 창가로 다가갔다. 핑크빛 커튼을 젖히니 파리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눈이 오고 있었다. 소리 없이 쏟아지고 있는 함박눈이었다. 이제 막 내리기 시작했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건물의 지붕이며 거리는 온통 하얗게 물들어 있었다.
잔을 들고 있는 가인의 손이 가볍게 떨리기 시작했다. 그는 열었던 커튼을 거칠게 닫아버리고는 연거푸 두 잔의 술을 더 비웠다. 그러나 술을 마시면 마실수록 그날의 광경은 더욱 선명하게 떠올랐다.
“세피로스, 세피로스……”
야수가 으르렁거리듯 낮게 되뇌고 있는 그의 동공은 금방 무서운 살기로 물들어갔다.
가볍게 샤워를 마치고 나오던 지영은 이상한 눈빛을 하고 있는 가인을 발견하고는 흠칫 놀라 움직임을 멈추었다.
“왜 그래요, 가인……”
겁먹은 듯한 그녀의 목소리에 가인은 언뜻 정신을 차리며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선명하게 떠오른 그날의 광경은 조금도 지워지지 않은 채 모든 사고를 지배하고 있었고 동공은 여전히 짙은 살기로 물들어 있었다.
“저 눈빛은 혹시……”
그제야 지영은 뭔가 느껴지는 것이 있는 듯 창가로 다가가 커튼을 살짝 열어보았다.
“하필이면 이럴 때……”
그녀는 커튼을 얼른 다시 닫은 뒤 그의 등에 살며시 기대며 허리를 감싸안았다.
“가인…… 지금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아요.”
“……”
“나는 그럴 때 실컷 울었어요. 그러면 가슴이 조금 후련해지거든요. 하지만 당신은 울 수 없겠죠……”
그녀는 그를 더욱 꼭 껴안으며 말을 이었다.
“대신 내가 있잖아요. 그 미칠 것 같은 울분을, 분노를, 내게 모두 쏟아부어요. 다 받아줄게요.”
그녀는 그의 등에서 떨어져 천천히 앞으로 돌아갔다. 그날의 광경을 떨쳐버릴 수 없는 듯 가인은 눈을 무겁게 눌러 감은 채 입을 꽉 다물고 있었다.
지영은 두 손으로 아주 조심스럽게 그의 양 볼을 감싸쥐며 입을 맞추어갔다. 그러나 가인은 그대로 굳어 있을 뿐 입을 열어 그녀를 맞이하지 않았다. 지영은 착잡한 심정으로 입술을 떼었다.
“눈을 떠요, 가인. 그리고 닫혀 있는 마음을 조금만 열어줘요. 내가 당신의 짐을 조금이라도 나눠가질 수 있도록……”
그녀는 다시 입술을 맞추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아주 열렬한 키스였다. 그의 목에 매달리다시피 키스를 퍼붓고 있는 그녀의 행동에는 죽어가는 야수에게 “I love you!”라고 외치던 벨의 심정 같은 애절함이 묻어났다.
‘이제 그만 아픈 추억에서 빠져나와 눈을 떠요, 제발……’
그녀의 간절한 애원이 전달되었음인지 가인의 눈이 천천히 열렸고, 살기는 더 이상 흘러나오지 않았다. 그는 이슬이 촉촉한 지영의 눈망울을 한동안 뚫어지게 내려다보았다. 그러고 천천히 입술을 열었다.
“하아……”
지영은 눈을 지그시 내리감으며 뜨거운 숨결을 토해 냈다. 그 숨결을 타고 가인의 혀가 살며시 밀고 들어왔다. 그녀는 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는 심정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가인은 한 팔로 그녀의 뒷목을 조심스럽게 받쳐들고 다른 손으로 그녀를 살며시 당기며 입맞춤을 이어나갔다. 지영도 그의 품 안으로 빠져들어 감미로움을 만끽하고 있었다.
어찌 보면 조심스러운 듯한 두 사람의 입맞춤은 오래도록 이어졌고, 창 밖에는 여전히 함박눈이 내리고 있었다.
언제까지라도 이어질 것 같은 두 사람의 입맞춤이 끝난 것은 가인에 의해서였다. 그는 팔의 힘을 풀며 그녀의 입술을 살며시 놓아주었다. 하지만 깊은 입맞춤에 심취해 있던 지영은 변화를 쉽게 알아채지 못하고 가인의 입술을 찾아 자꾸 턱을 밀어올렸다.
가인은 그녀를 살며시 안아주었다.
“피곤할 테니 그만 잠자리에 들지?”
“으음…… 안아다 눕혀줘.”
가인은 발갛게 상기된 볼을 자신의 가슴에 비비며 귀여운 투정을 부리는 그녀를 살며시 안아들었다. 침실로 걸어가는 중에도 그녀는 두 팔로 가인의 목을 휘감은 채 그의 목이며 귓불을 혀 끝으로 계속 간질여댔다. 그렇게 침대에 눕혀질 때까지만 해도 지영은 가인과의 뜨거운 정사를 생각하고 있었다. 거래가 아닌 진정으로 원하는 정사를……
그런데 지영을 눕히고 돌아서는 가인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녀의 상상을 완전히 뒤엎고 말았다.
“잘 자. 나는 저쪽에서 위스키나 한 잔 더 마시고 있을게.”
“으응…… 응?”
지영이 눈을 번쩍 떴을 때 가인은 이미 침실을 나서고 있었다.
“같이 안 잘 거예요?”
“걱정 말고 자. 나는 소파에서 잘 테니.”
“갑자기 왜 그래요?”
“그냥 그러고 싶어졌어.”
탁!
가인은 더 할말이 남은 듯한 지영을 그대로 둔 채 문을 닫아버렸다. 그리고 쫓기듯 탁자로 달려가 술잔을 집어들었다. 한 잔을 가득 채워 단숨에 마셔버린 그는 푹신한 소파에 몸을 묻으며 힘없는 미소를 흘렸다.
“후훗…… 정말 웃기는 일이군.”
그녀를 안고 싶은 욕망은 그에게도 있었다. 더구나 그녀가 원하고 있으니 안으면 그뿐이었다. 그런데 그렇게 하면 왠지 그녀가 싸구려로 취급되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가인은 그것이 싫었다. 아니, 가인은 어쩌면 마음 속 저 깊은 곳에 숨어 있는 또 다른 감정이 걱정되었는지도 모른다.
지영에게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지만 사실 조금 전 자신의 발길을 침실 밖으로 내몬 그 나름대로의 명분은 그녀와의 계약이 이미 끝났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면 그녀와 가인은 거래가 아닌 사람끼리의 만남이 되는 것이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가인은 너무도 잘 알고있었다. 집착과 구속…… 현재의 자신으로선 도저히 수용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세피로스에게 피의 빚을 받아내기 전까지는……”
이렇게 다짐해 보지만 어쩐지 가슴 한 구석이 자꾸 무너지는 듯한 느낌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욱 심해지고 있었다.
그는 긴 숨을 몰아쉬며 위스키를 한 잔 더 따라 입 안으로 천천히 흘려넣기 시작했다.
침실에 혼자 남겨진 지영은 그녀 나름대로 속상해 하고 있었다.
“대체 뭐가 그냥 그렇게 하고 싶어졌다는 거야?”
그녀는 침대 한구석에 쪼그리고 앉아 어두운 방구석을 바라보고 있었다. 한동안 그렇게 멍하니 않아 있던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손톱을 물어뜯기 시작했다. 세피로스에게 가족들이 죽임을 당한 뒤로 생긴 이 버릇은 가인을 만난 후 한동안 없어졌던 버릇이었다.
‘결국 그것 때문인가?’
치명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는 사람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이유를 자신의 약점 때문인 것으로 몰아가기 쉬운 법이다. 지영도 마찬가지였다. 가인이 몇 차례나 부인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결국 그쪽으로 결론을 몰아가고 있었다.
‘하긴…… 머리가 어떻게 되지 않고서야 거리의 여자를 사랑할 리가 없지. 하룻밤 놀이 상대라면 모를까……’
괜히 눈 앞이 뿌옇게 흐려왔다.
‘하지만…… 하지만 말야, 그냥 부담없이 안아줄 수도 있는 문제잖아? 내가 언제 사랑해 달라고 했어?’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격해지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가인이 미워지는 그녀였다.
“그렇게 부담스럽다면 두 번 다시 같이 자자는 말은 하지 않겠어.”
이렇게 다짐하며 이를 악물어보지만 가슴은 더욱 답답해졌다. 갈증을 풀어줄 시원한 무엇인가가 필요했다. 그녀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침대 옆에 있는 창문의 커튼을 확 열어젖혔다. 하얀 눈송이와 반짝이는 불빛이 어우러진 파리의 야경을 상상하며……
차르르륵……
양 옆으로 커튼이 벌어지며 유리창 전면이 모습을 드러냈다.
흠칫!
수십 개의 눈알이 희번덕거리며 그녀를 쏘아보고 있었다. 반쯤 썩어 구멍이 뚫린 얼굴에 커다란 눈알만 유독 불거졌으며 비쩍 말라 장작개비를 붙여놓은 듯한 몸뚱어리를 가진 놈들이었다. 마치 미라의 붕대를 벗겨놓은 듯한 놈들이 창문을 꽉 채우며 다닥다닥 붙어 있는 모습이 얼마나 징그러운지 온몸에 소름이 좍 돋아났다.
“꺄아아아!”
그녀는 비명을 지르며 방문 쪽으로 달려나갔다. 그 순간 놈들은 유리창을 부수며 안으로 뛰어들었다.
위스키 한 병을 거의 다 비워가고 있던 가인은 지영의 비명 소리가 터져나오자 기계적으로 검을 잡으며 튕겨 일어났다. 그러나 그가 침실에 도착하기도 전에 부서질 듯 문이 열리며 지영이 튀어나왔고, 그 뒤를 두 놈이 바짝 뒤쫓아 나왔다.
“가인!”
지영은 가인의 품으로 뛰어들었다. 가인은 한 손으로 그녀를 안아주며 뒤쫓아 나오는 두 놈을 베어나갔다.
“쓰러져라!”
슈가각!
놈들은 의외로 쉽게 가인의 검에 두 동강나고 말았다. 너무 쉽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놈들을 벨 때 손 끝으로 전해져오는, 마치 나무토막을 자르는 듯한 그 느낌은…… 언젠가 한 번 경험한 적이 있었다. 상당히 고전했던 기억과 함께 놈들의 이름이 떠올랐다.
“우디옥토퍼스!”
뱀파이어 전용 살상무기에 당해도 나무토막처럼 고통을 전혀 느끼지 않으며 몸통이 분리되어도 낙지나 문어처럼 한동안 살아 움직인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그래서 놈들은 강한 파워를 가지고 있지 못하면서도 상급 뱀파이어로 분류되어 있었다.
가인의 걱정대로 허리가 양단된 놈들은 이제 넷으로 늘어나 가인을 압박해 들어왔다. 두 눈을 끔뻑이며 바닥을 기어오는 상체도 그랬지만, 시청각을 모두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본능적으로 걸어오고 있는 하체는 더욱 징그러웠다. 그 뒤로는 침실에서 쏟아져 나온 우디옥토퍼스들이 계속 불어나고 있었다. 베는 것은 어렵지 않았지만 그래 봐야 숫자만 더욱 늘어날 뿐이었다.
“귀찮은 놈들에게 걸렸군.”
혼자라면 모를까 자기 방어능력이 없는 지영을 보호하며 싸우기에는 무리가 있다고 판단한 가인은 빠르게 뒤로 물러섰다. 그때 응접실의 창문이 와장창 깨져나가더니 십여 명의 옥터퍼스가 또 쏟아져 들어왔다. 놈들은 재빨리 가인의 후미를 차단했다. 순식간에 퇴로가 막혀버린 가인은 차가운 눈빛으로 상황을 찬찬히 살펴나갔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넓게 느껴졌던 방이 막상 싸움터로 변하니 그렇게 좁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놈들은 그다지 성급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대신 포위망을 견고히 하며 천천히 좁혀오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우디옥토퍼스 특유의 전법이란 사실을 가인은 경험으로 알고 있었다. 특별한 공격능력이 없는 그들로서는 상대에게 조금이라도 가까이 접근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게 해서 상대를 움직이지 못하게 묶어두기만 하면 싸움은 끝나는 것이다. 상대를 무력화시키기만 하면 목졸라 죽이든 뜯어먹든 그 다음은 문제될 게 없으니 말이다.
놈들의 포위망이 좁혀질수록 가인의 마음도 조급해졌다. 창문이 깨지고 비명이 울렸음에도 불구하고 방음 시설 때문에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는지 와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어차피 아무런 피해도 없이 빠져나가긴 틀렸다.’
이렇게 판단한 가인은 검을 힘껏 움켜쥐며 출입문 방향에 서 있는 우디옥토퍼스들을 무서운 눈으로 쏘아보았다. 그의 눈길에 닿은 우디옥토퍼스들이 움찔 놀라는 순간 가인은 바닥을 박차며 뛰어나갔다.
“걸리는 놈들은 모두 죽는다!”
슈가각!
검이 휘둘려지자 서너 놈의 몸통이 양단되며 바닥으로 나동그라졌다. 하지만 고통을 모르는 놈들의 입에서 비명 따위는 터져나오지 않았다. 가인은 바닥에 쓰러진 놈들을 무시한 채 달려나가며 검을 연속적으로 휘둘렀다. 검이 지나는 곳에 있는 것은 몸통이든 팔다리든 가리지 않고 베여져 나갔다. 그의 공격이 워낙 거셌는지라 우디옥토퍼스들이 구축한 포위망은 순간적으로 구멍이 생겼다. 가인은 그 구멍을 통해 지영을 힘껏 내던졌다.
“먼저 빠져나가!”
생각 같아서는 가인도 빠져나가고 싶었지만 몸통이 잘린 우디옥토퍼스 몇 놈이 그의 다리를 잡고 있어서 몸을 날릴 수가 없었다.
가인에 의해 던져진 지영은 바닥을 나뒹굴며 머리를 심하게 찧고 말았다. 제법 상처가 큰 듯 굵은 핏줄기가 이마를 타고 흘러내렸지만 이런 것에 연연할 여유가 없었다. 그녀는 재빨리 문고리를 잡으며 가인 쪽을 돌아보았다. 그는 무섭게 검을 베어내고 있었지만 아까처럼 여럿을 한꺼번에 베어내진 못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잘려진 우디옥토퍼스의 몸통이며 사지들이 그에게 집요하게 들러붙고 있어서 움직임이 점점 둔해지고 있었다. 이대로 조금만 더 지나면 잘려진 우디옥토퍼스에게 온몸이 다 뒤덮일 것 같았다.
“가인!”
그녀가 울부짖듯 외치자 가인이 힐끔 돌아보며 소리쳤다.
“빨리 가!”
“나 혼자서는 싫어요!”
가인은 덤벼드는 놈들에게 계속해서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당신이 곁에 있으면 마음대로 싸울 수가 없어.”
“하지만……”
“그러다 놈들에게 잡히면 끝이야. 어서 가!”
가인이 다급하게 외쳐도 머뭇거리고 있는 지영은 잘려진 팔 하나가 자신을 향해 기어오고 있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얼른 가서 루안을 데려올게요.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 동안 버티고 있어야 해요!”
눈물을 글썽이며 소리친 지영은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바로 그때 그녀는 발목을 잡는 차가운 촉감을 느꼈고, 흠칫 놀라 내려다보는 순간 몸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었다. 잘려진 팔이, 그것도 미라처럼 바짝 마른 흉측한 팔이 발목을 움켜잡고 있는 것을 보고도 아무렇지 않을 여자는 세상에 그리 많지 않은 법이니까.
“꺄아아아악!”
지영이 바닥에 털썩 주저앉으며 소름 끼치는 비명을 질러대자 가인이 다시 다급하게 외쳤다.
“단지 발목을 잡혔을 뿐이야. 아직 움직일 수 있을 때 어서 도망 쳐!”
지영은 그의 말에 힘을 얻어 발목을 붙잡고 있는 우디옥토퍼스의 팔을 잡아떼려 했다.
“이 나쁜 자식! 이것 놓으란 말야!”
그러나 잘려진 낙지의 다리가 어디든 달라붙으려 애쓰듯 놈의 팔은 지영의 발목을 힘껏 움켜쥔 채 놓으려 하지 않았다. 몇 번 시도하다 실패한 지영은 떼어내기를 포기하고 그냥 달아나려고 몸을 일으켰다. 그때 누군가 그녀의 어깨를 와락 움켜쥐었다. 흠칫 놀라 고개를 들던 그녀는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듯한 눈알을 번들거리며 씩 웃고 있는 우디옥터퍼스의 얼굴을 대하고는 기절할 듯 놀라 비명을 질렀다.
“아아아악!”
그러자 우디옥토퍼스는 인상을 흉측하게 일그러뜨리더니 그녀를 바닥에 힘껏 내동댕이쳤다.
“크르르…… 너부터…… 죽여주마……”
놈은 거칠면서도 어딘가 바람이 새는 듯한 목소리로 그르렁거리며 다가섰다. 발목에 팔을 매단 채 엉덩이를 끌며 뒤로 물러서던 지영은 섬뜩한 느낌이 들어 옆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또다시 비명을 질러대야 했다. 어느새 몰려왔는지 잘려진 옥터퍼스의 잔해들이 잔뜩 몰려와 있었기 때문이다. 이빨로 융단을 물어뜯으며 기어오는 놈부터 메뚜기처럼 튀어오는 다리까지…… 놈들은 비명을 지르는 지영에게 무수하게 들러붙기 시작했다. 지영은 들러붙는 놈들을 떼어내려 몸부림쳐 봤지만 그럴수록 놈들은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물어뜯을 뿐이었다.
“으아아악! 이거 놔! 놓으란 말야!”
몸부림치는 그녀 위로 멀쩡한 우디옥토퍼스가 올라타더니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맛보게 되는…… 신선한 피…… 한 방울도…… 남김없이……”
놈은 지영의 목을 한 쪽으로 꺾으며 입을 쩍 벌렸다. 군데군데 썩어 구멍이 뚫린 얼굴이었지만 하얀 송곳니만큼은 무서우리만치 길고 강해 보였다. 지영은 어떻게든 위기를 모면해 보려고 두 손을 휘저어 놈의 얼굴을 할퀴어보았지만 놈은 아랑곳하지 않고 그녀의 목에 이빨을 들이댔다.
“가인, 가인!”
애타게 불러보았지만 가인에게선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이윽고 놈의 날카로운 송곳니가 목에 닿았고, 끈끈한 타액이 목을 타고 흘러내렸다.
‘이렇게 끝낼 수는 없어……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도와줘요!’
지영은 마음으로 애절하게 원하며 눈을 질끈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