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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위에서의 생각 - 류시화 집이 없는 자는 집을 그리워하고 집이 있는 자는 빈 들녘의 바람을 그리워한다 나 집을 떠나 길 위에 서서 생각하니 삶에서 잃은 것도 없고 얻는 것도 없다 모든 것들이 빈 들녘의 바람처럼 세월을 몰고 다만 멀어져 간다 어떤 자는 울면서 웃을 날을 그리워하고 웃는 자는 또 웃음 끝에 다가올 울음을 두려워한다 나 길가에 피어난 풀에게 묻는다 나는 무엇을 위해 살았으며 또 무엇을 위해 살지 않았는가를 살아 있는 자는 죽을 것을 염려하고 죽어 가는 자는 더 살지 못했음을 아쉬워한다 자유가 없는 자는 자유를 그리워하고 어떤 나그네는 자유에 지쳐 길에서 쓰러진다 |
8월에는 안암교당 청년들이 2박 3일간 훈련을 나고 가셨습니다. 식당에서 우연히 김제원 교무님께 제가 출가한 과거이야기를 스스럼없이 흘렸다가 이 단상에 서는 기연이 되었습니다. 처음 의뢰에 기쁘기도 하고 부담도 되었습니다. 기쁜 것은 제가 출가한지 올해로 10년인데요, 그때 영산대와 총부 반백년기념관에서 출가감상담을 한 이후로 조금은 잊혀지고 퇴색된 불씨를 돌아보게 되고 살려주는 고마운 오늘이 아닌가 싶어서입니다.
출가서원식을 할 때 좌산님이 하신 말씀이 지금도 귀에 아련합니다. “출가란 이웃과 세상과 교단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소중하다. 그 소중함을 가지고 현장에 임하면서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당당히 나서라. 아무리 현실이 어려워도 교법 정신으로 극복해 가라. 타력과 자력을 함께 활용해서 모든 과제를 풀어가라.” 그 말씀을 다시 생각게 하는 시간이었고요, 저의 출가 이전을 돌아보면 인생의 방향로를 잡지 못해 방황하던 때가 생각납니다.
2. 원불교와의 만남
제가 원불교를 처음 접한 것은 남들보다 일렀습니다. 충청도 궁촌에서 고등학교 1학년 때 원불교를 만난 것은 조금은 이른 편이 아닌가 합니다. 인연은 고1때입니다. 윤수남 교무가 고향 친구입니다. 그 친구의 인연으로 고1 1학기 때 충주교당에 처음 다녔는데 입교는 못하고 6개월 다니다가 공부한답시고 그만뒀어요. 그때는 공부보다는 탁구 치는 재미로 다녔습니다.
그 뒤에 고3이 되었을 때 제 친구 윤수남은 교당도 열심히 다녔고 교무님이 된다고 늘 말했습니다. 그런데 고2 때 이 친구가 폐가 안 좋아서 1년을 쉬는 바람에 졸업이 1년 늦어졌어요. 제가 대학을 갈 때 사실은 충북대나 다른 곳을 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오직 제 눈에는 원광대가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어요. 친한 친구 수남이가 전무출신을 해서 원광대를 간다고 하니까 ‘그럼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리겠다. 너는 뒤에 와라.’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원광대 공대에 제가 입학한 과는 현재의 컴퓨터공학과인 전자계산기공학과였습니다. 그때는 컴퓨터나 전자계산기가 뭔지도 모르고 취직이 잘 된다니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저는 군대를 가고 그 친구는 간사근무를 떠났습니다. 당시 삼동원 초창기 공사를 할 때 거기로 갔죠. 제가 첫 휴가를 가기 전에 전화를 받았는데, 이 친구가 9개월 만에 나갔다더라고요. 그때 너무 화가 나서 탈영할 뻔했어요.
저는 대학에 가서 부정적이었습니다. 데모도 많이 했고요. 그래도 처음 익산에서 찾았던 곳은 교당이었습니다. 몇 가지 이유가 있지만 충청도 촌놈이 전라도 익산에 인연이 아무도 없으니까 과거에 맺었던 인연을 따라서 간 곳이 교당이었고요.
북일교당 청년회에 처음 갔을 때 지금 원남교당의 주임교무인 광타원 황대원 교무님이 계셨어요. 한 달 동안 매일 교당을 갔습니다. 교당 바로 앞이 자취방이었거든요. 법회가 시작하고, 법회를 보고, 끝나고 헤어지고 하는 반복이었어요. ‘새로 온 나를 좀 알아주겠지.’했는데 미처 소개할 시간도 없이 법회만 보고 끝이더라고요. 한 달 뒤에 청년회장이 “혹시 새로 오신 분 계십니까?”하기에 손을 들었습니다. 의아해하더라고요.
“엥? 원래 다녔던 분 아니에요?” 하길래 “아니에요. 한 달 전에 왔어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교당에서 인기를 끌었습니다. 느닷없이 4,50명의 관심이 저에게 쏠렸어요. 또 교당과 자취집이 가까워서 청년들이 제 방에 자러, 먹으러 많이 왔거든요.
2학년을 마치고 철원에서 군복무를 했어요. 아마 그때부터 생각이 조금씩 변했던 것 같아요. 아버지가 성남의 한일시멘트를 다니셨는데, 첫 휴가에 아버지 자취방에 가서 밥도 해드리고 했습니다. 그런데 군 복귀 일주일쯤 뒤 새벽에 외삼촌과 사촌형님이 전방에 찾아와서 저를 깨웠어요. “아버지가 다쳤다.” 듣는 순간 느낌에 ‘아, 일이 나셨군.’ 했습니다.
차에 타고 병원으로 가면서 마음의 준비를 했습니다. ‘아버지가 다쳐서 나를 여기까지 부르러 온 것은 아니다.’ 마음을 잡으니까 사람이 냉정해지더군요. 그때는 앉아서 염불만 계속 했습니다. 전방에서 나오면서 눈감고 염불을 계속 했죠.
성남에 있는 병원에 갔는데 병실 쪽으로 저를 안내하는 것이 아니라 돌더라고요. 보니까 영안실이었습니다. 처음에는 믿지 않으려고 했지만 상황을 보니까 믿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게 전부였다면 생사에 대한 생각을 많이 안 했을 텐데 그 후 6개월 단위로 큰아버님, 할머니, 큰어머님까지 네 분이 2년 사이에 줄줄이 사탕 사건 사고로 가시는 일을 겪었습니다. 마음이 굉장히 아프면서도 아픔에 그치지 않고 생사에 관한 문제에 대해서 마음이 쏠리더군요. 운명을 받아들이긴 했지만 마음이 힘들었어요. 눈감으면 영들의 세계에 시달렸어요. 영들이 왔다 갔다 했습니다. 그럴수록 저는 교당에 다녔어요. 북일교당에 다니면서 거의 결석을 해본 일이 없습니다. 내일 당장 중요한 시험이 있어도 법회는 꼭 갔습니다. 오후에 시험이어도 교무님이 뭘 하라고 하면 달려갔습니다. 이유는 몰라도 마음이 그래야 할 것 같았어요.
청년회는 4,50명 정도 되었습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들을 했겠지만 제가 보기에 좀 친목 위주였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그래요. 탁구치고, 사람들 만나서 봉사하고 하는 위주가 아니었나 싶습니다. 안암 청년들을 보면 공부하는 분위기가 부럽습니다. 공부 속에 단련되는 부분이 지금 굉장히 부럽네요. 그 시절에는 그런 면이 약했습니다.
그렇게 북일교당 청년회 때를 보내고 대학 졸업식 날 교당에 인사를 갔는데 다들 다녀가고 제가 마지막이라고 하더라고요. 정덕균 교무님이 청년회 담당이셨는데 차와 함께 선물을 주셨어요. 목탁과 염주였습니다. 저는 사실 청년회 활동은 했지만 ‘도서상품권이나 주시지 왜 이런 목탁과 염주를 주실까?’ 생각했습니다. ‘보통 주고받는 물건들이 아닌데 이걸 주는 의미가 뭐지?’ 했는데 말씀도 안하시고 “축하해.” 하고 웃으십니다.
‘나보고 도대체 어쩌란 얘기야? 출가를 생각해 보란 얘기야? 나는 지금 3남 1녀의 장남이고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졸업하자마자 가정을 돌봐야 하는 막중한 책임이 있는데 어머니와 어린 동생들을 봉양하고 교육 뒷바라지를 해야 하는데...’ 잠깐 고민스럽더라고요. 출가를 해서 교역자의 삶을 살라는 뜻인지 재가교도로서도 출가자 못지않게 열심히 살란 의미인지 미묘한 감정이 오갔습니다. 그 순간에 ‘그래 지금은 내가 출가를 생각할 겨를은 아니다. 당장 내 눈앞에 펼쳐진 현실 상황에서 책임이 있으니까 돈을 벌자.’고 생각했습니다. ‘좋아. 하지만 내가 집으로 돌아가서 또 다른 교당에서 교도가 될 때 전무출신 못지않게 하겠다.’ 다짐했습니다.
3. 전무출신 지원서를 내기까지
충주에서 바로는 취직을 못했어요. 무늬만 컴퓨터공학과를 나왔죠. 대학 때 전공공부보다는 엉뚱하게 도서관에서 되지도 않는 법학을 공부한다고 공부를 했어요. 검찰사무관, 7급 법원공무원 시험을 보고 했습니다. 네 번인가를 떨어져서 9급공무원시험까지 떨어졌습니다. 제 스스로가 비참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충주교당에는 다녔습니다. 처음 갔을 때 일반법회를 봤습니다. 교무님이 오시더니 “청년회를 한번 만들어봐.” 하셨습니다. 무조건 만들어보라 하시기에 “네!” 했습니다. 대답할 때 조금 얼굴이 붉어지면서 했던 것 같아요. 동생 둘과 동생의 친구들, 동생의 여자친구, 주변에 과거에 교당에 다녔던 형님들, 당구치던 형님들, 회사에 다니는 형님들을 쫓아다니고 전화하면서 1년을 공들였더니 20명 정도가 채워졌습니다. 저는 일을 벌이는 스타일이라 이것저것 하게 되었던 것 같아요.
그렇게 교당을 열심히 다니니까 직장이 생기더라고요. 아는 분이 전화해서 건설회사에 다녀보면 어떻겠냐 하셨어요. 저는 생각지도 않았지만 노는 것보다 낫다 싶어 들어갔습니다. 9개월 정도 열심히 다니다가 퇴직한 후 한화콘도를 4년 다녔습니다. 근무하면서 교당-집-직장밖에 몰랐습니다. 직장에 있다가도 교무님이 일이 있으니 오라고 하면 그때 3교대로 9시부터 5시까지 근무였는데 언제든지 출동대기 상태로 달려갔습니다. 쉬는 시간에는 무조건 교당에 가있고, 청년들도 교당에 제가 있어서 편했는지 수시로 오갔습니다. 그렇게 3년 정도 있다 보니까 주변에서 “출가하세요. 출가하면 참 좋겠네.”라며 어른들이 잘할 거라고 저를 부추겼어요. 그렇지 않아도 직장생활도 재미없고, 삶에 대한 것도 친구들을 보니 대학 졸업해서 적당한 직장 얻고 결혼해서 사는 모습이 제가 보기엔 딱딱하고 재미가 없었어요.
교당에 오면 즐겁고 행복하고 하던 와중에 주변에서 출가를 권하고 후원하겠다는 얘기가 들리니까 솔깃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와 가정을 생각하니 그럴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가정을 꾸려야하니까요. 그 상황에서 혼돈이 많이 왔어요. 나만 살겠다고 출가하겠다고 했을 때 주변 사람들이 받을 충격에 많이 고민이 되었습니다. 저는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아버지께 못다 한 효를 어머니께 하겠다고 평소 노래를 불렀습니다. 평생 모시고 살겠다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배반 아닌 배반을 하고 출가를 하겠다는 마음이 나니 혼돈이었습니다. 그 와중에 주변 친구들의 생활에 비교도 되고 참 힘들었습니다. 어느 순간 고민을 막 하다 보니까 ‘진짜 내가 행복할 수 있는 일, 행복해지는 삶은 뭘까?’ 하는 생각이 왔어요.
얼마나 고민이 혹독했냐면 그때 대학교 1학년 2학기부터 배운 술도 많이 마시고, 담배도 거의 하루에 두세 갑씩 피웠습니다. 월악산 줄기 송계개울을 밤낮없이 울며 방황했어요. 그것도 밤에 산에 갔죠. 의심과 고민이 생기니까 주변에 무서운 게 없더라고요. 어느 날에는 “좋아, 출가하자!”하고 결단을 내리자 좋아서 춤을 추다가도 집에 들어가서 보면 ‘글쎄, 이건 아니지.’ 싶고요. 그 천당과 지옥을 오가는 내 마음 때문에 집에 들어가기 싫더라고요. 어머니 얼굴 보기가 괴로웠어요. 집에 들어갈 때는 소주 2홉들이 두병씩 먹고 들어갔습니다. 두 병이면 글라스로 네 잔 나오거든요. 담배도 두세 갑을 피고 하는 생활을 친구가 보더니 꼭 폐인 같다고 하더라고요. 손도 떨렸고요. 그렇게 굉장히 고민하는 가운데 독한 술, 담배와 삼교대 근무로 잠도 못자고 하니까 그런 상황이었습니다. 몰입하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기도 하거든요. 그러다가 ‘그래, 속는 셈치고 한번 써보자.’ 결단을 내렸습니다.
교당에서 교무님께 “저 출가하겠습니다.” 말씀드렸더니 눈이 이만해 지셨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이자식이 할까 말까 하더니 드디어 결정했군.’ 싶으셨겠죠. 신나서 교구에 연락을 하시더라고요. 저는 마음이 무거운데 교구청에 빨리 다녀와라 하시더라고요. 청주에 있는 충북교구청은 비탈길을 올라가는 길이에요. 그 앞에 내려서 올라가는데 갑자기 발이 무거워지면서 어머니가 생각나는 이유는 뭘까요. 천근만근입니다.
안되려고 하니까 그랬던지 문을 밀었는데 아무도 문을 안 열어줘요. ‘때가 아닌가보다.’ 바로 원서를 찢어버렸습니다. 울며 집으로 돌아와서 실신상태까지 밤새 술 담배를 했습니다. 너무 마음이 괴로워서 다음날 밤 9시 쯤 교무님께 연락을 했죠. 그때는 삐삐를 쓰던 시절이었는데 많이 실망을 하시더라고요.
그때 알았어요. ‘누가 시켜서, 해보라고 해서 하는 건 역시 아니다. 내가 소원이 없는 가운데 교당 열심히 다니면서 일도 하고 다른 사람 돕고 하다가, 누가 하라고 해서 하는 출가는 아니다.’ 내가 매해서 놓지 못하는 것들이 너무 많더라고요.
2차 원서접수 때도 여러 교무님들이 저를 많이 응원해주셨어요. 1차는 실패지만 2차는 성공하리라 하는 마음에 원서를 덜레덜레 써서 갔죠. 그때는 버스를 타고 교구청으로 향하다가 도중에 그만뒀어요. 반쯤 가는데 뻔히 아는 길인데도 그때는 길을 막 헤매게 되었어요. 20분 거리인데 한 시간을 넘게 헤맸습니다. 날씨도 안 좋고, 다리도 아프고, 쓰레기통 옆에서 찢어버렸습니다. 아닌가보다 했습니다. 그러면서 내가 나를 돌아봤을 때 ‘내가 믿는 건 원불교 신앙이지만 내가 교무될 인연은 아닌가보다. 좋아. 난 출가 기연은 있는 것 같아도 원불교 교무는 아닌가보다. 스님이 되어야겠다. 진짜 기연은 내가 스님이 되는 거고, 전생에 스님이었을지도 몰라.’
그때부터 기웃거린 게 송광사, 속리산 법주사, 해남 대흥사였습니다. 그런데 송광사에 갔더니 너무 답답한 거에요! 산 속에 있다 보니 솔직히 속에 불이 나더라고요. 밤에 야반도주를 해서 스님들이 잠든 몰래 걸어서 벌교까지 울면서 갔죠. 도망치듯이 올라왔어요.
(김제원 교무님: 허허, 주로 밤에 뭔 일이 벌어지네요?
박청화 교무님: 그때는 별로 무서운 것도 없더라고요. 억울하고 답답한 생각이 가슴에 꽉 차있었기 때문에요.)
우리나라는 ‘삼 세 판’이라고 하죠. 3차 접수 때는 이렇습니다. 교당을 내 집처럼 드나들고 교무님도 저를 믿고 많은 일을 맡겨 주셨습니다. 저는 특히 천도재를 지내는 것을 좋아해요. 그날은 직장에 갔더니 교무님께 전화가 왔어요. “열반하신 분이 있는데 네가 빨리 와야겠다.” 직장 조퇴하고 갔습니다. 어머니가 갑자기 입원했다고 뻥치고요.
갔더니 가톨릭대 장성숙 상담교수님의 어머님 상이었습니다. 장 교수님은 고향이 충주라서 오빠가 있고 어머니는 여관을 크게 하셨는데, 그 어머니가 돌아가셨던 거에요. 교도님들이 안계시다고 해서 제가 달려갔죠. 5일장을 하는데 3일째 날 발인을 했습니다. 독경을 마치고 식장 정리를 하느라고 경종, 휘장 등 수거를 해야 하잖아요. 휘장을 접어서 가방에 넣고 나가려는데 상여꾼들, 관 들러 오는 사람들이 들어왔습니다.
그게 충청도 관습인지 몰라도 여섯 명이 관을 들고 동서남북으로 돌면서 “짐이요!” 외쳤습니다. 일종의 의식 같더라고요. 저는 동쪽에 서있는데 처음 제 쪽으로 확 밀면서 “짐이요!” 하는데 모든 육근이 순간 멈춰졌습니다. 그때 생사에 관한 문제가 탁 들어오면서 ‘우리 사람이 올 때와 갈 때가 너무 다르구나. 처음에는 탄생과 함께 환영과 축복 속에 오지만 마무리하고 갈 때면 하다못해 고깃덩이처럼, 짐처럼 어쩔 수 없이 갖다 버리는구나.’하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그런 모습에 전율이 느껴지면서 순간적으로 멈춰졌습니다.
거기에서부터 고민이 온 거에요. 그리고 그 시절에는 그렇게 선몽이 많이 왔어요. 어느 날은 대통령들, 중국 총통들, 그런 사람들과 함께 대산 종사님이 일주일 정도 선몽으로 나타났습니다. 지금도 선명합니다. 제 손을 꽈악 잡으면서 신신부탁을 하셨어요.
‘앞으로 통일이 된다. 그러니 금강산에 일류 훈련장을 만들어라. 그 일을 주축으로 해낼 사람은 너다.’ 하시면서 일류 훈련장을 만들어서 세계 교화를 하라는 신신절절한 부탁을 하신 거어요. 그때 가슴에 뭔가가 툭 하고 잡히는 것 같은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야 이것이 내가 불교도 아니고 원불교로 온 인연이다. 이것은 우연이 아닌 필연이다. 출가를 꼭 해야 하겠다. 이제는 미루지 말고 지금 꼭 해야 되겠다.’ 이 마음이 숙명처럼 가슴에 탁 들어왔습니다. 그러면서 힘이 생겼습니다. 그때 주변에서도 윤수남 친구가 건대 건축과를 나와 같이 저랑 직장생활을 삼사년 하고 있었는데 “우리 출가할까? 출가하자!” 하는 전화가 온 거에요. 충북대 건축과를 나온 이성근 교무라고 또 다른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도 출가하자고 꼬시는 거에요. 그때는 ‘이제 진짜 때가 왔나보다. 좋다.’ 했습니다. 대산 종사님의 영몽과 친구들이 꼬임이 큰 힘이 되었습니다. ‘이제는 내가 선택해서 한다. 누가 하라고 해서, 떠밀려서 하는 서원이 아니다. 내가 지금까지 살면서 늘 하라는 대로만 했기 때문에 무엇 하나 스스로 선택한 적이 없는데, 이 길만큼은 내가 선택한다. 내 생애 최고의 선택을 하겠다.’ 마음을 탁 잡았습니다.
교무님께 가서 “빨리 용지를 주십시오.” 말씀드렸습니다. 제 마음이 급했습니다. ‘너 또 찢어버릴라고?’ 하실까봐 빨리 달라고 해서 일사천리로 썼습니다. “부모님 동의서가 필요한데...” 하시길래 “필요 없어요!” 대답하고 어머니 이름으로 막도장을 새겨서 딱 찍고 출가하겠다고 했어요. 청주까지 마음으로는 5분밖에 걸리지 않았습니다. 얼른 내고 잘했다 칭찬을 듣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렇게 무난히 원서를 냈습니다.
이제 제 마음은 정해졌지만 남은 어머니가 문제였습니다. 교무님과 상의했습니다. “어머니는 어쩌죠?”/ “그건 네가 알아서 해라.”/ “저 간사근무 꼭 하고 싶어요.”/ “그래? 그럼 네 성정으로 봐서는 농사꾼 체질 같으니까 수계농원으로 가라. 거기에는 대산 종사님도 계시고 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리로 가겠다고 했습니다.
대산 종사님과 거기 교무님께 인사드리는데 어머님이 쓰러지셨다는 급보가 날아왔습니다. 황급히 집에 가보니까 꾀병이었습니다. 다시 교무님과 상의했습니다. “교무님, 간사를 꼭 수계농원에서만 해야 합니까? 제 생각에는 출가를 한다고 해서 가족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고 척지게 하고 가는 것은 출가자의 길이 아닌 것 같아요. 기회를 주시면 충주교당 간사도 열심히 하고 어머니 불공도 잘 해서 마음을 편안하게 해 드리고 출가를 더 잘 할게요.”/ “그러면 교구장님과 상의를 좀 해보자.” 하셨습니다. 그래서 “좋아. 너를 믿는다. 변하지 않겠지?” 하시더군요. 저는 눈을 부릅뜨면서 “죽어도 변하지 않습니다!” 대답했습니다.
낮에는 교당에서 간사로 있고, 밤에는 8시부터 어머니가 하는 야식가게에서 배달을 열심히 했습니다. 어머니는 저를 원수처럼 보셨죠. 그러다가 변산으로 간사훈련을 갔습니다. 어떤 교무님이 오셔서 설교를 하시는데 첫마디가 “출가한다니 대단한 결심을 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시는 말씀이 “출가는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였습니다. 그 말씀을 듣는 제 마음이 얼마나 충격으로 들어오면서 가슴이 벅차던지요. 주먹에 힘이 들어가면서 이를 악물게 되고, 가슴에 오는 전율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10분간 쉬겠습니다.
4. 출가의 길
참고로 말씀드리면 제가 술 담배를 10년 하다가 출가 결단을 내린 순간부터 탁 끊었습니다. 끊으려고 몇 백 만원을 쓰고 노력해도 못 끊은 적도 있지만, 출가를 결심하고는 일언지하에 끊어졌습니다.
아까 이야기 계속 이어가겠습니다. 간사훈련에서 들은 그 말씀을 듣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잘할 수 있다. 내 스스로, 내 마음으로 결심했으니까.’ 태진아의 ‘동반자’라는 노래가 있죠? 그 가사를 좀 빌리자면 ‘내 생에 최고의 선물~ 원불교 만남이었어♪’라고 생각합니다. 제 최고의 선택은 전무출신 서원이었습니다.
그렇게 교무님과의 상의 하에 교당 일과 어머니의 일을 도우며 생활할 때 저도 굉장히 많이 불편 아닌 불편이 있었습니다. 어머니가 저에게 밥도 안주고 눈길도 안주면서 배신감에 원수처럼 하셨지만 그럴수록 저는 ‘나는 내 할 도리만 한다. 어머니가 당장 할복을 한다 해도 내 갈 길을 간다.’는 원이 커졌습니다. 저는 어려서 아버지께 눌려 산 기억이 있어서 강압적인 일이 있으면 더 치성하게 이기려고 하는 힘이 강해요. 어머니는 저를 회유하고 못 가게 누르려고 온갖 방법을 쓰셨지만 그럴수록 저는 원이 커지고 좋았습니다. 겁나는 것도 없고 이 길에 대해 확신이 섰습니다.
그러다가 정말 날짜가 되었습니다. 날짜가 가까워지니 어머니가 일도 안하시고 “돈을 벌어서 내가 어디다 쓰게!”하시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갑자기 우울증이나 다른 감당 못할 일이 생기지는 않을까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제 어머니가 키는 작아도 다부진 데가 있으세요.
날짜가 되고 가야할 때가 되자 5층 아파트의 4층에 살던 저는 짐을 꾸렸습니다. 짐이래봤자 옷가지 조금을 배낭에 담았습니다. 등산을 좋아해서 등산 배낭에 담았는데 그것도 다 채우지 못하고 남았습니다. 아침을 먹고 배낭을 메고 “저 갈게요!” 했더니 소리를 버럭 지르셨습니다. “가긴 어딜 가!”/ “어머니, 저 이제 진짜 가야 합니다.” 눈에 독기를 품고 저를 때릴 것처럼 하시는 어머니께 절을 넙죽 올렸습니다. 그리고 돌아서는 저의 바짓가랑이를 어머니가 잡으셨습니다. 저는 무심결에 툭 찼는데 어머니가 넘어지셨습니다. 저는 현관을 나서 계단을 내려오는데 제 뒤로 급하게 계단을 내려오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발소리가 마지막 계단을 내려올 즈음 내려지는 기척과 함께 와당탕 구르는 소리가 콰당 들렸습니다. 그 전에 어머니께서 “이 독한 놈!” 하셨습니다. “에미와 동생을 다 버리고 지 혼자 살겠다고 뛰쳐나가는 독한 놈! 이 나쁜 놈!” 온갖 독한 말씀을 다 하신 뒤에 우당탕탕! 퍽! “아이구야, 사람 죽네!”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발소리가 어머니였나 봐요. 느낌에 펙 하는 소리와 함께 사람이 숨 막혀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때 멈춰섰는데 몸이 살살 떨리더라고요. ‘이러다가 정말로 큰일 나면 어쩌지’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이런 마음이 들었어요. ‘내가 지금 저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서 그게 어머니인 것을 확인하면 내 마음이 변할 거다.’ 잠깐의 고민이 생기는 거에요. 고개를 돌릴까, 말까, 돌릴까, 말까.
'내가 지금 세 번째 시도해서 겨우 나가려는데, 저 모습 때문에 여기서 내 인생일대사를 망친다면 그 누구도 원망할 수가 없다.' 싶었습니다. 내 인생은 내 인생이니까 그 모습을 두고 또 그 마음이 들어서 주저앉는다면 그건 인생 포기일 것 같았어요. 울며불며 방황하고 갈피를 못 잡던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이를 깨물고 아랫배에 힘을 주고 한 발을 내딛었습니다. 앞에 택시가 섰습니다. 그때 어머니의 앙칼진 소리를 들었습니다. “이놈아! 이왕 하려면 목숨 걸고 해라! 이놈의 새끼야!”
의외였습니다. 그 순간 마음이 얼마나 마음이 좋은지 몰라요. 그때 가슴에서 눈물이 흐르던 그 마음은 마치 폭포수가 시원하게 떨어지는 듯한 기분이었습니다. 택시 문을 열려는데 앙칼진 소리가 고래고래 들려왔습니다. ‘이건 보통 소리가 아니다.’ 하는 엄청난 책임감이 들었습니다.
그것은 어머니가 저를 놓아주시는 무언의 소리였습니다. 저놈이 결국 변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변하지 않으니까 뭔가 하려고 나서는 아들에게 무언으로 놓아주려는 표현이 아니었는가 생각합니다. 마음이 좋았지만 저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택시를 타고 20분을 타고 터미널에 가는데 저도 모르게 달기똥 같은 눈물이 떨어졌습니다. 택시기사가 자꾸 봅니다. ‘미친 사람인가?’ 배낭 메고 택시를 타더니 갑자기 우니까요. 그동안 어머니로부터 받은 설움, 그러나 결국 내가 선택한 길로 보내고 놓아주는 용서와 사랑의 표현에 눈물이 났습니다.
5. 출가자로서의 공부길
그렇게 청주행 버스를 타니까 또 바로 잊어버렸습니다. 이제 영산만 생각났습니다.
제가 잘 잊어버려요. 하하. 광주와 법성을 지나서 가는데 영산은 또 왜 이렇게 먼지요. 일부러 영산성지고등학교 전에 내렸습니다. 이 숭고한 터에 차로 들어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마을 저쪽 어귀에 일부러 내려서 걸었습니다. 산천을 보면서 가는데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습니다.
가다가 대각터에 인사하고 옥녀봉을 올려다보았습니다. 예전에 방황하고 기도하고 할 때 간간이 갓을 쓴 노인이 내려다보는 모습이 나타나곤 했는데, 그 산이 옥녀봉이더라고요. 대종사님이 나를 부르신 것이었다 생각했습니다. 박씨 일가로 따지면 대종사님은 제 아버지뻘이 됩니다. 그러니 이건 필연이다, 제 스스로 의미를 지었습니다.
또 한 번은 삼밭재를 밤새 갔더니 선배들이 앉아있었어요. 삼밭재를 보는데 과거에 보던 그 자리였습니다. 어떤 모습이 떠올랐던 적이 있냐면 어떤 스님과 동자승이 있는데 스님이 바위에서 동자승을 밑으로 집어던지는 거에요. ‘니가 여기서 뛰어내려야 산다. 떨어져야 산다.’고 자꾸 해요. 그런 모습이 떠오르곤 했어요.
‘그 꿈에서 본 바위가 이 마당바위로구나. 아무래도 그 동자는 내가 아니었는가. 어머니라고 하는 꿈을 과감하게 놓아야 내가 가야 하는 그 길을 갈 수 있다는 뜻이 아니었는가.’ 하고 그때 스스로 의미를 지었습니다.
그렇게 3학년으로 들어가 중간치기로 공부를 하다 보니까 욕속, 빨리 뭔가 이루고자 하는 마음이 발동이 되는 거에요. 1학년부터 순차적으로 하면 체계와 기본이 잡힐 텐데 저는 나이도 있고 중간치기니까 선배대접은 받지만 아는 것은 적어 창피했습니다. 실력을 갖춰야 뭔가 되지 않겠는가, 남들은 기본부터 했으니 남들이 잘 때 나는 뭔가 해야 한다는 욕속심이 났어요.
그래서 기도가 시작되었습니다. ‘만고일월’해서 만일기도를 동지와 선배들이 함께 이미 구성해놓고 있었습니다. 그 만일기도 회원에 저도 동참해서 만일기도를 했어요. 그때만 해도 체계가 잡혀있진 않았어요. 그때가 만일기도 시작이었을 때입니다.
심고가 끝나면 옥녀봉 아래 구간도실 앞에서 천의를 감동시키겠다는 마음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노래를 부르고 할 때 보면 눈물이 나고 가슴에서 눈물이 절절절 나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낮에는 이곳에서 방언공사를 하시고 밤에는 호롱불 켜고 공부하던 모습을 상상하며 공부할 때, 늘 가슴이 절절했습니다.
그래도 양에 차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도 따로 기도를 해보겠다고 구인봉을 늘 낫 들고 다니면서 길을 내고 기도했습니다. 구인봉 외에 마당이 넓은 곳을 보면 터를 닦아서 ‘여긴 내 기도터!’ 했습니다. 저는 밤에 활동을 많이 했어요. 왜냐하면 낮에는 일과를 지켜야 하니까요.
9시 30분 저녁심고가 끝나고 제 시간입니다. 중앙봉, 대파리봉 등 제가 정해놓은 터에 가서 앉아서 나름대로 선과 염불, 기도를 하고 하면 너무 좋아요. 무서운 건 없었던 것 같아요. 무서움을 타지는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그런 공부가 문답감정 없는 상태에서 방황하는 독공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대종사님이 내놓은 교법대로만 하면 되는데 나는 그 속에 들어갔어도 그것을 채우지 못하고 과거 전생의 습관대로 행동을 했던 듯합니다. 기도하고 선하고 하면 뭔가 팍 열릴 거라는 나름대로 생각을 가지고 신앙과 구도를 했던 것 같아요. 스승님들이 옆에 계셨지만 치심과 자존심이 세서 스승님 앞에 가서 세세곡절 얘기하기가 자존심이 상했어요. ‘고작 이런 걸 가지고 가서 스승님께 지도받는 게 좀... 내가 어떻게 출가해서 여기 있는데... 나이도 있고 사회경험도 있고...’ 이런 마음에 문답감정이 잘 안됐어요.
이처럼 그 속에 살면서도 나름대로 또 다른 방황 아닌 방황이 있었습니다. 그럴 때 저는 과감하거든요. 제가 마음에 안 들 때는 몽둥이를 들고 서원관 교무님께 찾아가서 “저 좀 때려주세요.”했습니다. 그럼 교무님은 황당해서 “왜?” 하십니다.
“무조건 저 좀 때려요.”/ “아니 왜 때리는데?”/ “제가 아버지한테 맞고 자랐는데 지금은 때려줄 사람이 없어요. 좀 때려주시면 정신이 차려질 것 같아요.”/ “그래? 맞아서 정신 차린다면 때려주지.” 살살 하실 줄 알았는데 거의 반 뻗도록 사정없이 때리시더라고요. 그때도 머리를 깎고 다녔는데, 밖에서 사람들이 저를 보면 깡패인 줄 알더라고요. 목욕탕에 가면 종아리에 멍이 시퍼렇게 들어서 사람들이 다 쳐다봐요.
그렇게 영산에서 나름대로 구하는 것이 있었습니다. 4학년이 되었는데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크게 공부한 것은 없고 힘은 장사고 패기는 넘치고 그런데 고시가 코앞입니다. 패기는 넘치는데 사리연마나 집중 탐구는 약했어요. 독공을 해야 했습니다. 어떤 선배는 어디 봉우리에서 텐트치고 공부하더니 고시에 합격하더라는 소리를 듣고 솔깃해서 등산장비가 있던 저도 해봤습니다.
공부하면서 기도도 늘 빼놓지 않았습니다. 좌선 끝나고 꼭 기도를 했어요. 안 되면 기도라도 열심히 해서 마음을 탁 잡고서는 ‘뭔가 되겠지.’ 했습니다. 아침마다 쏜살같이 뛰어올라가서 옥녀봉에서 기도하고 다시 내려와서 일과를 했습니다. 일과는 무조건 다 지킵니다. 일과에는 피해 없이 제 개인적인 일도 다 했습니다. 그래서 ‘원칙은 지킨다. 그 다음은 내 자유다.’ 하는 마음이 있었어요. 원칙도 지키지 못하면서 자유를 찾는 건 용서가 되지 않았습니다.
이놈이 틈만 나면 어딜 갔다가 쪼르르 돌아오니까 사감님이 궁금하셨던 모양이에요. 제 뒤를 몰래 쫓아오셨어요. 저는 다른 날과 마찬가지로 “일원상 어쩌고...” 중얼중얼 기도를 하는데 뒤에 후끈한 열기와 인기척이 느껴졌습니다. 사감님이 계시더라고요. 씨익 웃으시더니 “사회생활 할 때 버릇 못 잊고, 나는 니가 술 담배 감춰놓고 매일 하는 줄 알았다?” 하시더라고요. 그때부터 사감님이 저를 지도해 주셨습니다. 덕분에 아슬아슬 고시도 통과했습니다.
대학원에 진학해서 공부한 이야기 한편 들려드릴게요. 대학원생들은 교화실습을 나가요. ‘변산공동체학교’라고 충북대 철학과의 윤구명 교수가 운영하는 곳에 실습을 갔어요. 거길 자원했더니 주변에서 그래요. “그렇게 독한 선배도 거기서는 3일을 못 버티더라.”
저는 생각했습니다. ‘그래? 3일? 나는 그럼 4일은 버티겠어. 3일이 한계면 나는 4일 하겠어. 버티는 데는 나도 일가견이 있다고.’ 이산님께 말씀드렸습니다. “거기에 저 좀 보내주세요. 거기가 어떤 곳이길래 3일 만에 오는지 제가 가서 확인해보고 올게요.” 이산님은 씨익 웃으시며 “그래볼텨?” 말씀하시고 써주셨어요.
갔는데 순 노가다더군요. 거기가 생명공동체라고 해서 그 교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공동체를 만들어 요즘으로 치면 유기농이죠. 농약 안치고 농사를 짓고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살더라고요. 그때 제가 갔을 때 28일 정도 있었는데 그동안 비가 한 번도 안 왔어요. 정말 그렇게 하늘이 원망스러울 때가 없어요. 제가 처음 갔더니 처음 시키는 일이 똥 푸는 일이었어요. 처음에 갔으면 그래도 저는 앞으로 교역자가 될 사람이고 하니까 좋은 일, 함께하는 일도 시키면 좋겠는데... 코를 납작하게 하려고인지, 시험해보는지 몰라도 그래요. 게다가 수세식도 아니고 퐁당식으로요. 왜냐하면 퇴비를 쓰니까요.
화장실 가려고 했더니 “자네는 밭에다 누게. 도시에서 온 사람들 똥은 썩지 않아서 거름도 못 써.” 합니다. 그래서 자존심이 상했어요. “제 똥 무공해에요! 제 똥도 잘 썩어요!”
그런데 설상가상 갑자기 똥지게와 똥통을 갖다 주니 더욱 어이가 없었어요. ‘아니, 저 사람들이 나를 뭘로 알고! 확 가버려?’하는 마음이 났는데 3일을 참았다는 선배가 떠올랐어요. ‘내가 실습하러 왔지 대우받으러 왔냐?’
그리고 다시 생각했습니다. 먹어서 똥이 되고, 다시 똥이 퇴비가 되고 입으로 돌아옵니다. 그래도 똥은 더럽습니다. ‘똥은 더럽지만 그걸 더럽다고 하는 네 생각이 더 더러운 거야’ 하는 생각이 드는 순간 정말 기뻤습니다. 똥이 더럽다는 생각을 버리니 너무 신났어요. 장화랑 똥지게를 들고 노래 부르고 춤추면서 밟았습니다. 그 사람들이 얘가 미쳤나 의아해했어요.
그때 그 마음, 그 한 생각이 들었을 때 제 마음이 너무 기뻤던 것은 왜였을까요. 출가를 해서 그동안 영산대학에서 쭉 공부를 할 때 보면, 나이도 있다 보니 남에게 모범이 되어야 하고 남보다 더 잘해야 하는 중압감이 늘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남에게 잘 보여야 하는 그런 삶, 내 삶이 아니라 출가해서도 내 삶이 아니라 보여주기 위한 삶을 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건 내가 아니다. 내가 출가하는 것은 자유롭게 거침없이 살려는 것인데 남의 눈치를 보는 건 아니다. 교무님이 보니까, 또 저 사람이 보니까 잘해야지 하는 생각이 드는 건 안 되겠구나.’ 했습니다. 그때부터 제가 좀 자유로워진 것 같아요. 그때부터는 이렇게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저 사람이 나를 그렇게 보는 걸 어떡해! 그래도 나는 나인데 뭘.’
보여지는 대로의 삶. 그렇게 살면서 28일간 거기서 잘 생활을 마무리하고 왔더니 이산님이 그러세요. “거기 가서 자네가 원불교를 알리고 얘기를 하고 그러라고 보낸 것이 아니네. 다른 집단과 그런 세계의 삶도 느껴보고, 거기서도 자네가 원불교 예비교무로서 그들에게 모범적으로 잘 생활할 수 있는지 보라고 보냈네.”
출가 전에 제가 소주 댓 병씩 마시고 그랬다고 말씀드렸죠. 가장 큰 고통은 이거였어요. 똑같이 일을 하는데 그 사람들은 막걸리를 통째로 갖다놓고 매일 한통씩 말통으로 먹어요. 그리고 저한테 그러죠. “예비교무님도 좀 드셔보실래요?”/ “아닙니다.”/ “아니 먹을 줄 모르세요?”/ “아뇨 아닙니다.” 심지어 담배도 권해요. 화이불류 화이부동(和而不流 和而不同). 같이 어울려도 자존심은 잃지 않으리라 했습니다. 저도 과거에는 그들보다 더했지만 따라하지는 않겠다는 오기와 자존심이 생겼습니다. 거기서 백초효소만 한 컵씩 주는 것만 마셨습니다.
그리고 28일을 버티니 뭐든지 할 수 있겠다는 자신감이 붙었습니다. 욕심도 생겨서 빨리 교화현장에 나가서 교도님들을 만나고 싶은 생각이 치성했습니다. 거만하게 그런 생각이 들었죠. 대학원 돌아와서 가장 먼저 한 일이 있어요. 영산에서 오솔길을 지나 대각터로 가는 길을 걸었습니다. 좌타원님께서 하도 옛날 길을 말씀하셔서요. 대학원 뒤쪽 소나무 있는 곳에 잡풀만 무성했습니다. 치워야지 생각만 했는데 누구도 안하더라고요. ‘내 첫 사업으로 저걸 해야지.’ 제가 S자로 예쁘게 길을 만들었죠. 그 길을 달빛 속에 맨발로 저녁마다 걸으면서 마음을 챙기던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대학원 때 부산대법회 도우미로 참석했는데, 그때 현장교화에 나가서는 이렇게 살아야지 하는 마음을 내게 된 일이 있어요. 어떤 교도님이 “예비교무님~”하고 자꾸 불러요. 여자교도님이어서 혹시 제가 마음에 들었나 싶었는데 할 얘기가 있대요. “저희 교당은 교무님이 자주 바뀌어서 불안한데, 교무님이 되시면 꼭 제 부탁을 좀 들어주세요. 교무님이 되시면 교도들을 자식이다 하고 생각해주시면 좋겠어요.” 이 양반이 뜬금없이 왜 나한테 이런 얘기를 하실까 생각하며 계속 들었습니다. “교무님이 6개월이나 1년 살다 나가시면 교도들이 불안해합니다. 어린이나 학생 청년들은 특히 더 불안해해요. 그러니까 꼭 자식처럼 생각하고 교화를 해주시면 좋겠어요.” 그 말씀을 들으니 죄송스럽기도 하고 ‘그래, 나도 버티기에는 둘째 가라면 서러우니 해보자!’ 했습니다. 그때 더 버티기가 강해졌어요.
서청주교당에 있을 때 2년이 지났더니 주임교무님이 “한번 옮겨보지?”하시더라고요. “같이 왔으니까 같이 옮깁시다.” 하고 함께 4년을 보내고 나왔어요. 오덕훈련원도 올해로 6년째, 두 번 유임하면서 버티고 있습니다.
6. 오덕훈련원에서의 삶
서청주교당에서 4년 근무를 하고 옮기면서 개척인 곳의 교당으로 가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습니다. 그것도 가장 열악하다는 충북교구에서 살았으니까 젊었을 때는 큰 도시에서 세련되게, 좌충우돌하며 해봐야지 하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서울교구에 나를 써줄 만한 곳이 없을까 생각했습니다. 개인적인 마음에 교당은 좀 힘들 것 같고, 변두리지만 ‘굉장히 힘들어서 누가 안 가려고 하는 곳이 있으면 저 좀 보내주세요’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당시 오덕훈련원이 골조만 해놓고 힘들어했죠. 발령을 내도 안 받고 인사를 거부하고 가는 상황이었습니다. 대개는 거부하는데 저는 너무 좋았습니다. 전화를 해서 “교무님, 사람 안 필요해요?”하고 옆에 계시던 분께도 거기 좀 가게 해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분은 “자네 나랑 살았으면 좋겠는데 정말 가야겠나? 그럼 내가 강타원님께 전화를 넣어 주지.” 하셨습니다.
처음에 강타원 정인신 교무님이 저를 모르시고 하니 시큰둥했어요. 소개해주신 분이 “일도 잘하고, 그저 일주일에 산 한 번씩만 보내주면 열심히 할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셨다더라고요. 제가 오덕훈련원에 갈 때 두 개를 결심했어요. 첫째는 과거의 이미지를 떨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복잡한 걸 싫어하는 성향을 고치려고 결심했습니다. 둘째가 산에 꼭 일주일에 한번은 가야하는 것을 버리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산에 안 쫓아갈 거라 다짐했습니다.
축령산은 산세와 기운이 좋다고 하니까 3년 내에 현재 불사가 성공하지 못하고 내가 원하는 깨달음을 얻지 못하면 죽겠다고 마음을 다졌습니다. 꽤 극단적인 생각이죠? 하하. 그런 마음으로 갔습니다. 강타원님은 일부러 그러세요. “산에 갔다 와. 꼭 가야한다며?” 네 하고 답은 했지만 입을 꼭 깨물고 참았습니다. 맨 처음에 오덕훈련원에 갔던 날, 골짜기 마다 산신령님께 인사드린 날을 빼고는 끝이었습니다. 그 날조차 뛰어다녔더니 오히려 시간이 남았습니다.
오덕에서의 삶이 녹록치는 않았습니다. 원불교 교도님들만 오시는 훈련원이 아니라 칠팔할은 외부인들이 오는 시대입니다. 또 본관 벽돌을 쌓고 건물을 완성해야 하는 긴박한 상황이었던지라, 옆을 돌아볼 틈이 없었어요. 교도님들이 다녀갈 때는 청소를 해주셔서 도움이 되지만 일반인들은 난장판이거든요. 그 뒷수발로 매일 쓸고 닦는 일을 이를 악물고 하다가도 3개월 지나니 걸레를 패대기치게 되었어요. ‘내가 이러려고 출가했나!’ 이런 생각이 팍 들어요. 모두가 저를 교무가 아닌 일꾼으로 보니까요. 땀범벅이 되어 일하다가 샤워하고 법복을 입으면 그제야 “응? 교무님이네?” 하니까요.
그러나 어느 순간 ‘아, 그냥 즐기자!’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너무 즐거워요. 이래도 즐겁고, 저래도 즐겁고, 노래도 부르고 했습니다. 훈련원 건물도 서울교구 교도님들의 협력으로 완공이 되었죠. 지금은 여러 사람들이 이용하는 훈련원이 되었습니다.
7. 맺는 말
마지막으로 꼭 드리고 싶은 말씀이 있습니다. 조지 버나드 쇼의 묘비명은 유명하죠. ‘우물쭈물 하다가 이럴 줄 알았지.’ 과거에 내가 한 번, 두 번, 다 지나 세 번째에 성공했지만 우울증이 오는 것 같았어요. 뒤의 얘기지만 이왕에 원광대를 갈 거면 왜 취미도 없는 컴퓨터공학과를 가서 시간낭비를 했나 싶어요. 그때 제정신이었으면 지금쯤 주임교무로 가있을 텐데 지금 이 나이에 이러고 있다니 억울하다는 그런 생각이 들기도 하는데, 이만큼만 해도 샛길로 새지 않고 여기 있는 것이 다행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제 이야기가 별 것은 아니지만 여기에 출가를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또 출가자녀를 두고픈 분들도 계실 것입니다. 지금은 아니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도 한번 출가를 해볼까’ 그런 불꽃을 세우는 분도 계실 겁니다. 출가를 생각하다가도 ‘다시 생각해봐야지’ 하는 분도 계실 겁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출가를 떠밀려서, 엄마가 원하니까, 주위에서 자네 했으면 좋겠다 하니까... 그렇게 해서 뭔가 서원을 세워도 그 뒤는 본인이 채워서 더 강하게 할 수도 있겠죠. 그 방법도 좋겠지만 그래도 이 선택은 다른 선택과 다릅니다. 다른 직업은 뭐 이것도 해보다가 저것도 해보다가 하죠.
그러나 다른 선택이 아닌 출가만큼은 내가, 정말로 내가 선택을 해서, 이 세상 그 어떤 것보다도 내가 이 출가의 길을 감으로 인해서 인생이 최고로 행복하고 최고의 선택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 때 해야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출가를 해야 주위에, 주변에 그 어떤 어려움과 흔들림이 있더라도 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흔들림이 있더라도 잠시의 바람이고 금방 원점으로 회귀가 될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출가하는 당사자는 물론, 출가하겠다는 형, 누나, 언니, 자녀를 가진 가족들. 저 사실 지금도 그래요. 자녀가 최고의 선택이라고 하면서 하는 출가라면 부모님이라도 막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전 강력한 반대 속에서 살았죠. 저의 경우에는 그 반대가 오히려 서원에 일조했지만, 적어도 자녀의 선택을 존중하고 응원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응원이 안 된다면 방치라도, 즉 반대는 안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것이 너의 선택이고 너의 길이라면 그냥 그대로 놔두기만 해도 신명이 나서 그 길을 잘 갈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웬만하면 가족이 반대를 하더라도 열심히 불공하고 노력해서 축복 받으면서 격려 속에 출가를 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겠고, 또 재가에 있을 때도 충분히 출가 이상의 마음과 수행으로 공부하고 이 길을 함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본인의 선택에 있어서는 이것만이 나의 길이라고 생각하고 출가의 길을 가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월간 <원광> 9월호에서 30명의 출가자를 배출하는 것이 원이라는 김제원 교무님의 말씀이 실린 기사를 읽었어요. 그걸 보면서 나는 5명만이라도 서원에 도움을 줘야지 생각했습니다. 안암교당은 출가자들의 텃밭입니다. 벌써 9명이 출가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앞으로도 최고의 선택을 해서 더 많은 출가자들이 나오셔서 본인뿐만 아니라 회상과 세상이 원하는 그 길에 동조해서 함께 이 공부 이 사업을 하는 분들이 배출되었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이렇게 제 이야기 마칩니다. 궁금한 점이 있으시면 질문 해주세요.
Ⅲ. 질문과 답변
1. (황원공 교우)
질문: 출가하시기 전에 재가로 계셨던 교당 얘기를 많이 해주셨는데요. 교무님의 지도에 신심 있게 대처하신 것 같거든요. 경계라든지 없지 않았을텐데, 어떤 힘이 있었는지 궁금합니다.
답변: 충주교당 청년회에 있을 때 순응만 한 것은 아닙니다. 제가 마음에 자존을 갖고 있어서요. 청년회에서는 제가 청년을 대표하다 보니까 청년들의 의견을 많이 교무님께 어필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그러고 보면 내 의견만을 얘기해야 하는데, 교무님께 강하게 ‘꼭 들어줘야 합니다’ 하는 식으로 나도 모르게 주장을 하게 되더라고요. 나는 그게 의견이라고 생각하는데 나도 모르는 가운데 주장이 되는 거에요. 교무님과 맞설 때도 있고 했습니다. 되질리면 법당에서 혼자 울면서 천배를 했습니다.
두 가지 마음입니다. 하나는 미안함이고 하나는 분함이죠. 두 마음입니다. 그리고 빨리 죄송합니다 합니다. 매를 적게 맞으려면 한 대 맞고 잘못했다고 하는 게 최고입니다. 고집 피워봤자 손해입니다. 이 꽉 물고 누가 이기나 보자 이런 마음으로 천배를 하고 나면 참회가 되었습니다. 영산에서도 천배 겁나게 했어요. 저는 주로 몸을 학대하면서 하네요. 남는 게 힘이라서. 하하.
그런데 저는 안암교당에서 무척 느껴지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뭐냐면 우리 안암교당 청년 교도님들이 참 행복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청년회 시절 북일교당, 청주교당에 있을 때 공부를 잘 해서 법으로 질박아야 하는데 그때는 숫자와 친목 위주였어요. 함께 행사를 하고, 찻집이나 시화전 하고, 불우이웃 돕기, 봉사 다니고, 풍물하고, 막걸리나 마시고 그랬던 것들이요. 심지가 굳지 못하다 보니 때가 지나면 뿔뿔이 흩어지고 그 뒤에 주인이 되는 교도들이 되지 못해서 뿌리가 약해요.
여기 안암교당은 교무님께서 그냥 공부만 시키죠? 훈련할 때 보니 바로 느끼겠더라고요. 이런 것들이 기본입니다. 제가 맨 처음 직장생활을 한 곳은 삼성건설의 하도급 업체였는데요, 거기는 기본에 충실하지 못해 회사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어디서나 기본에 충실하자는 생각을 합니다.
2. (오(중환) 교우)
질문: 저는 이곳에 오늘 처음 왔는데 귀한 말씀과 와 닿는 얘기 감사합니다. 이런 질문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행복을 위해 출가하셨다고 하는데 10년간 어떤 행복을 느끼시는지 궁금합니다. 또 앞으로 지금보다 더 큰 행복을 추구한다면 어떤 것인지 궁금합니다.
답변: 과거에 저는 불행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행, 불행이 같이 있었지만 서른이 되기 전에 방향로를 찾지 못해서 갈등하고 독한 술로 몸을 혹사시키고 했습니다. 제가 최고로 행복했던 것은 제 스스로 출가를 선택해서 마음이 섰을 때인데, 정말 세상 언제보다 행복했습니다. 어머니가 “목숨 걸고 해라, 이 자식아!”하셨던 때도 참 행복했고요.
교당에 살면서도 무슨 일을 하고 후회는 잘 안하려고 합니다. 잘 했든 잘못 했든 그 일을 함으로 인해서 행복한가, 그걸로 끝입니다. 제가 행복하면 그걸로 끝입니다. 지금도 행복과 불편한 점이 여러 가지 있습니다. 최근 불편한 것은 제원 교무님이 출가감상담을 말씀해달라고 했을 때로, 그 후부터 굉장히 고민스럽고 불행했습니다. 하하. 그러다가 정리가 되고 또 다시 십년이란 저의 출가생활을 돌아보는 지금 저는 행복합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대산 종사님께서 영몽으로 제게 해주신 말씀을 저는 목숨 걸고 할 겁니다. 다른 기타 어떤 사명들이 다 있을지 모르지만 제게 가장 큰 사명은 금강산에 일류 훈련장을 만들어서 세계 교화의 중심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원입니다. 그것을 만든다고 생각하면 사실은 즐겁습니다. 행복하고요. 아직은 가시적으로 잡히지 않지만 그렇습니다.
3. (송종원 교우)
질문: 개인적인 질문입니다. 훈련원에 정 원장님이 인자하시긴 하지만, 함께 일하다 보면 갈등이나 경계가 올 텐데 어떻게 6년이나 진득하게 붙어계시는지 그 심법이 궁금합니다.
또 머리는 어디서 깎으시는지요.
답변: 저는 늘 모든 것이 자기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출가를 해서 남자 교무들에게만 주어지는 특권이 하나 있죠? 결혼입니다. 해서 특별할 것도, 하지 않아서 특별할 것도 없는, 그저 하나의 선택일 뿐입니다. 저는 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이고요.
머리는 도루코 면도기를 들고 제가 직접 깎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합니다. 과거에 밀었을 때 질겁하는 사람들도 있었죠. 한 번은 제 동기 결혼식 때 입구에서 쫓겨났습니다. 문을 밀고 교수회관에 들어가려고 했더니 신랑이 “형... 진짜 부담스러운데 바깥에 좀 있으면 안될까.” 하더군요. 편하게 해줄게 하고 말하고 밖에 있었습니다.
강타원님과는 6년째 사는데 두 번 유임을 해서, 원칙대로 하면 8년 살아야 합니다. 제 특기가 버티기입니다. 강타원님이 성질나면 “자네 그렇게 내 말을 안 들으려면 가게. 일할 곳은 다른 데도 많아.” 하십니다. 그러면 저는 콧방귀도 안 뀌어요. “저는 원장님이 가라고 해서 가고, 있으라 해서 있을 사람이 아니에요.”하고 버팁니다. “저는 대종사님의 혜명을 밝히러 온 사람이니까 교단의 명이 있고 제가 가고 싶을 때 가는 거지 개인의 명으로는 움직이지 않아요!” 합니다.
이번에도 실은 제가 말을 안들은 것이 있어요. 제 주장을 강하게 하니 충돌이 생겨요. 방도 원장님과 마주보며 앞방을 쓰니 더욱 불편해요. 또 “지금이라도 가라. 일터는 많다.” 하시더라고요. 그래도 안 갑니다.
한 번은 겁을 좀 내시라고 짐을 다 싸서 있는데 막상 가려니 갈 곳이 없어요. 집으로 가요? 어머니는 목숨을 걸고 하라고 하셨는데? 인연 맺은 곳이 없어서 진짜 갈 데가 없어요. 결국 도망간 것이 앞 본관건물입니다. 조금 거리를 두면 충돌이 적을까 해서요. 저도 개인적인 욕심이 생기죠. 예전에는 가있으려고 해도 원장님이 또 “거긴 추우니까 건너와라.” 하셔서 풀리고 그래요.
실은 더 가까워져야 하고 더 잘 모셔야 합니다. 정말 큰 스승님이세요. 제가 뭘 한다고 하면 응원과 지원을 아끼지 않는 분이십니다. 뭔가 하려고 하면 “그래, 해봐라. 참 잘한다!” 하십니다. 항상 저의 후원인이세요. 이번에 제가 이상한 고집을 피워서 잠시 건너편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큰 건물도 지켜야 될 것 같고 여러 가지 다른 이유들도 있죠. 그렇게 혼자 가니까 너무 좋아요. 거기서 크게 북을 치면서 염불을 하고, 여기저기 뛰어다녀도 제가 건물 대장입니다. 좋더라고요. 달빛도 좋고요. 그렇게 지냅니다. 지금 버티기 6년인데 2년 더 시한이 남아있어서 고민 중에 있습니다.
Ⅳ. 보너스
박원진 교무님이 제가 시와 노래를 좋아한다고 소개해 주셨죠? 제가 원서를 쓸 때 1차, 2차, 3차까지 방황하는 마음이 잘 표현된 노래가 있습니다. 도종환 님의 ‘흔들리며 피는 꽃’이라는 시에 곡을 붙인 노래입니다. 제가 잘은 못 부르지만 이것이 제 마음을 대변하는 것 같고, 여기저기 마음에 흔들림이 있으신 분은 다 그렇게 조금씩 흔들리면서 자기의 서원을 생각하시길 바라면서 부르겠습니다. 눈이 마주치면 쑥스러워요. 그냥 무반주로 부를게요.
흔들리며 피는 꽃 -도종환 흔들리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아름다운 꽃들도 다 흔들리면서 피었나니 흔들리면서 줄기를 곧게 세웠나니 흔들리지 않고 가는 사랑이 어디 있으랴. 젖지 않고 피는 꽃이 어디 있으랴 이 세상 그 어떤 빛나는 꽃들도 다 젖으며 젖으며 피었나니 바람과 비에 젖으며 꽃잎 따뜻하게 피웠나니 젖지 않고 가는 삶이 어디 있으랴 |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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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캄샤합니다...~!!! +_+/
고맙네 고마워
감사합니다 늦은밤 덕분에 다시 훈훈한 기운을 느껴봅니다^^
감사합니다-^^ 앞부분을 놓쳤는데 덕분에^^;;헤헤
잘 정리해 주셔서 더욱 좋습니다. 출가한 이야기가 생생하게 느껴지네요.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