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일
산미을고 야학.
교육부 규칙상 이사는 수업을 할 수 없다고 해 그만두려니 아쉬워 강의료 안받고 봉사로 하면 되느냐고 물어 간신히 허락을 받았다. 강화에 와서 밥값도 못하고 있다는 자책감에 시달릴 때 산마을고 수업한다는 게 작은 위안이 된다.
오늘은 자존심에 대한 얘기. 우리 교육은 끊임없이 상대평가를 해 비교를 통해 잘못된 우월감이나 열등감에 빠지기 쉽다.
오늘의 키워드 Don’t mind what others think of you(다른 사람들이 너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쓰지 마라)
요즘 아이들은 다른 아이들을 무슨 蟲(충-벌레)으로 부른다 해 경악했다. 한 학생이 자기는 호기심이 많고 인생의 의미를 중시해서 진지하게 묻고 말하는 경향이 있는데 다른 학생들이 자기를 진지충이라고 부른다 했다. 다른 학생도 자기는 모든 일이 좀 서툴러 잘못하는데 그래서 급식충(밥벌레)이라 불리운다 했다.
사람은 벌레가 아니다. 사람은 그 어떤 일로도 누구에게 멸시받을 존재가 아니다. 나는 수운 선생의 사람이 하늘이라는 말씀을 해주었다. 어떤 이유로든 하늘 같은 사람을 멸시하거나 함부로 대하는 사람은 저질 중의 저질이다. 가장 성숙한 사람은 이웃을 하늘처럼 섬기는 사람이다. 이것이 얼마나 힘든지는 나 자신이 매일 경험하는 일이다. 자기를 존중하고 남을 존중할 줄 알면 사람 교육은 끝이다.
15-18일 봄나들이
15일
하루살이 인생으로 믿고 매일 오늘만 잘살다 죽으면 된다고 살려하지만 그게 쉬운 일은 아니다. 그래도 십년은 더 살거라고 믿고 돈 쓰는 것도 염두에 두며 살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년에 몇 번은 정말 오늘만 살고 죽는다는 마음으로 거룩한 낭비를 하며 여행을 떠난다.
아침에 강화에서 출발해 네시쯤 노고단 입구에 도착.
내가 여행을 떠나면 제일 먼저 가고 싶은 곳이 지리산이다.
노고단에 서면 하늘이 너무 가까워 땅과 나와 하늘이 하나라는 느낌이 든다. 나는 한참이나 두 팔을 벌리고 서서 땅과 나와 하늘을 연결시켰다. 하늘의 푸르름이 나를 물들인다.
天地人 合一(천지인 합일)
하늘은 내 본성이고 땅은 내 몸이다.
어둑할 무렵 뱀사골로 내려와 한잔. 지리산의 계곡 물소리를 들으며 한잔 하는 기쁨이 크다. 산 속에서 듣는 바람 소리와 물소리처럼 청량한 음악은 없다.
뱀사골 펜션에 누웠는데 잠은 오지 않고 無 한자만 불덩이처럼 달아오른다. 이번 여행의 화두는 무. 나는 무라는 제목으로 삼행시 한수를 지었다.
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
무무무무무
無자 한자에 무라는 불칼로 다 잘라버려야할 내가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다. 나는 나의 목부터 쳐야 한다(無我 무아). 그러면 내가 귀하게 여기는 모든 것들도 사라질 것이다. 마지막 련의 끝자 무는 진짜 無, 이것 마져 목을 쳐야한다. 무자 삼행시를 중얼거리며 잠들었다.
16일
새벽에 깨어 문득 섬에 가보고 싶어 통영항으로 갔다. 한산도등 여러 섬이 있는데 나는 들어본 적도 없고 한 시간 반이나 배를 타고 가는 섬, 매물도를 택했다. 뱃머리에 앉아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을 가르고 나가는 기분이 상쾌하다. 바다에 사는 섬들은 완만하게 늘어져 있는 것이 착한 우리 할머니 가슴 같다.
매물도 가는 배 안에서 거기서 나고 살고 있다는 할머니 한분을 뵙고 이런 저런 얘기. 매물도에는 20 가정 정도 산다고 한다. 섬에 도착해 등대가 있는 또 다른 섬까지 산길 따라 산책.마니산의 소사나무가 여기도 많아 반갑다. 물푸레나무(이런 아름다운 이름을 지을 줄 아는 우리 조상들은 다 시인이다), 동백나무등이 양편으로 서 있는 사잇길로 바다를 보며 3키로 정도걷는 길이 환상이다. 동백꽃은 어찌 그리 붉은지, 금방이라도 내 마음 속 붉은 정열이 피처럼 솟구쳐 나올 것 같다.
등대가 서있는 섬에 가려면 바닷물이 빠져 100미터 정도 되는 자갈길이 열려야 한다. 이 길을 열목개라 한다. 열목개를 건너 산 위에 올라 등대에 서니 홍도까지 20키로 대마도까지 50키로라고 쓰여있다. 나는 쓸데없이 왜구에 시달렸을 섬 사람들 생각을 했다. 착한 사람들이 평화롭게 살기도 힘든 세상, 인간은 잔인한 동물인가?
아무튼 이 외딴 섬에는 밤마다 불을 밝히는 멋진 등대가 서있다. 등대지기를 해보고 싶던 소년은 평생 뭘 하고 살았는지. 인생이란 뜻대로 되는 일은 없고 누구 말대로 하느님의 발길에 차여 여기 저기 헤메는 것 같다. 지금 이 매물도 등대 위에 서있을 줄 어찌 알았겠는가? 나는 이런 뜻 밖의 행운이 좋다. 이웃사촌 중에 몰상도가 있는데 그게 그런 뜻이란다.
나이들어 뒤돌아보는 삶은 다 기적 아닌 것이 없다. 내 은혜가 족하다. 살아갈 날도 그러하겠지. 아니 그럴거라고 믿는 믿음과 그렇게 볼 줄 아는 눈만 있으면 심지어 고난이나 죽음도 축복 아닌 것이 없을 것이다. 배 기다리며 부둣가에서 할머니가 파는 멍게에 소주 한잔. 그냥 취해서 이 섬에서 잠들고 싶었다.
섬을 보고 나니 그 유명한 남도의 해금강이 보고 싶어 거제도 장승포로 왔다. 부둣가 모텔에 숙소를 잡고 부둣가를 어슬렁거리다 보니 박정현 간장게장 집이 보인다. 정현씨가 언제 여기 와서 이런 식당을 냈는지 반가와 들어가서 또 한잔. 한잔 후 비틀거리며 밤 바닷가 거닐며 무 삼행시 낭송. 나를 자르고 나니 하느님도 부처님도 없고 너도 없고 세상도 없다. 없이 있는 나! 취하면 이래서 좋다.
17일
장승포항에서 유람선 타고 해금강 관람.
섬들이 기기묘묘하다. 선장은 섬들의 모양새에 온갖 상상력을 부여해 전설 같은 얘기를 들려준다. 나는 듣는둥 마는둥 푸른 바다와 푸른 하늘이 좋아 뱃머리에서 바닷 바람을 즐겼다.
배가 외도에 정박해 두 시간 정도 관람. 나무들의 전지가 심해 나무 조차 자연 같지 않고 인공물 같았다. 나는 이쁘게 가꾼 꽃이나 나무들 보다 아무렇게 자란 대나무 숲이 더 좋았다. 그러나 천국의 계단이라고 양쪽에 나무들이 거룩하게 서있는 오솔길을 걷는 느낌은 거룩했다. 나는 세속의 신발을 벗고 사랑의 맨발로 계단을 오르며 천국으로 가는 길은 맨발의 사랑뿐일거라고 생각했다. 아니 천국은 가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만드는 것이다. 천국을 만드는데는 맨발의 사랑이면 족할 것이다.
십여년전에 이곳을 만든 남편 이장호님이 돌아가시고 그 부인이 쓴 추모사가 감동적이다.
‘님은 내 곁에 오실 수 없고 내가 그대 곁에 가는 일만 남아 있으니 다시 만날 그날까지 편히 쉬세요.---’ 아직도 살아계신 이 할머니 뵙고 한번 안아드리고 싶었다.
아침부터 오후까지 유람하고 영덕의 대게가 먹고 싶어 몇시간 걸려 영덕 강구항에 도착했다. 대게집 천지다. 우연히 어느집에 들르니 방금 막 잡아왔다는 싱싱한 대게를 보여줘 값을 물으니 제법 비싸다. 오늘만 살고 말텐데 아까울 게 없다. 생전 처음 먹어보는 대게에 소주 한잔. 김치찌개랑 먹는 소주맛과 다를 것도 없는데 기분에 취하니 술맛이 그렇게 좋을 수 없다.
강구항 부둣가를 무 삼행시 중얼거리며 비틀거렸다. 무무무무무. 기가 막힌 시다. 無자 한자 통과하면 바로 열반이다. 그러나 나는 바로 열반에 들고 싶지는 않다. 있어도 없는 듯 없어도 있는 듯. 성철스님은 산은 산이 아니고 물은 물이 아니다(색즉시공)라고 하시고 다시 산은 산이고 물은 물이라고 하셨다(공즉시색). 나는 有의 목을 자르고 다시 無의 목을 잘라 여기 이렇게 낯선 바닷가에서 술에 취해 웃고 있다. 무무무무무. 진짜 좋은 시다.
동해안 바닷가를 따라 울진의 백암온천에 왔다. 캄캄한 밤인데 호텔들의 불이 대낮처럼 환하다. 무인텔에 가고 싶었는데 무인텔이 없어 그냥 호텔로 들어왔다. 이곳 온천물이 관절염에 좋다고 하여 나는 열탕에 들어가 다리를 삶았다. 확실히 좋은 온천인가 보다. 물이 매끄러워 온천후 피부를 만져보니 우리 손녀 볼처럼 보드랍다. 이럴 땐 사랑을 해야하는데--
무 삼행시를 외워도 잠이 안와 노래방에 가서 맥주 마시며 조용필을 불렀다. ‘친구여, 꿈은 하늘에서 잠자고 추억은 구름 속에--’ ‘ 허공, 꿈이었다고 생각하기엔 너무나도 가슴이 아파--’
18일
늦잠을 자고 삼척을 거쳐 설악산에 가려다가 도중에 태백을 지나다가 악마의 유혹에 빠져 정선 카지노에 들렸다. 내가 좋아하는 경주는 룰렛. 주사위를 던져 36개의 번호 중에 하나를 맞추면 36배를 준다. 나는 미신을 믿기라도 하는 듯 내 생년 월일에 해당되는 1,5,7에 배팅을 했다. 날리기로 작정하고 온 돈 십만원을 다 날리면 끝이고 십만원을 따도 끝이다.
두어 시간 재미있게 놀고 나는 자제력을 발휘해 더 이상 하지 않고 나왔다. 물론 다 날렸다. 그럴 수 있는 내가 신기하다. 사람은 해볼 수 있는 일은 다 해봐야 한다. 다만 종교중독이나 일 중독이나 돈버는 중독처럼 중독에 빠지지 않으면 된다. 카지노에서 나오며 외우는 무 삼행시는 더욱더 실감이 났다. 무무무무무.
저녁 네시에 집으로 출발했는데 열시 가까이 도착했다. 이런 나른함이 좋아 여행을 하는 것인가?
첫댓글 저희 가족도 지난 주, 통영 거쳐 거제도 소매물도 다녀 왔어요.
아 그러셨어요. 정말 좋았습니다
하이고 좋으셨겠습니다....다음엔 제가 옆에서 운전이라도 ㅋ..카지노까지 섭렵하시공 ㅎㅎ
남한 일주를 거의 하셨네요...
방랑시인 한 분 나셨습니다.
제 동네도 다녀오셨네요. 외도는 너무 자연을 잃어 바로 곁에 있지만 고개만 들어 볼 뿐...가시는 줄 알았다면 자연의 섬 , 동백의 섬 지심도와 외도 옆 내도를 추천해 드렸을 터인데...내도 앞에는 공곶이라는 수선화 마을이 있는데 유상옥 감독의 작품, '종려나무 숲'의 주요 촬영지입니다. 지금 허드레지게 핀 수선화가 장관일 터인데,...자연을 잃지 않은 섬, 지심도와 내도는 외도와 차별을 두고 있습니다. 모두 우리 마을 언덕에서 눈에 잡히는 곳들입니다. 공곶이는 중학교 소풍지의 단골 레퍼토리였구요...참 좋은 여행하셨네요.
공곶이 갔었어요.
수선화도, 시금치도 사 왔어요.
할머니 얼굴에 웃음 주름이 참 예쁘셔서
딸이 두고두고 얘기 하고 있지요.
공곶이 앞에 내도는 배로 십 분 거리인데 바라만 보고 와서 아쉽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