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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새 오월
달마다 말일이면 달력을 넘기는 즐거움이 있다. 사람들은 달이 바뀔 때마다 노랫말 후렴구처럼 세월이 너무 빨리 흘러간다고 아우성이지만, 그래도 통과의례는 가능하다. 성큼 거침없이 내딛는 세월의 바쁜 행보(行步)에 동의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내일은 언제나 태양’이라는 희망의 관점에는 공감한다. 다만 빠른 시간을 제대로 성찰하지 못한 채 언제나 배웅하는 입장에 선 자신이 아쉽다.
4월 30일 자정을 맞으면서 나만의 의례를 한다. 방방마다 다니면서 달력을 떼거나, 넘기는 일이다. 그 순간만큼은 떠나보내는 심경을 담아 사뭇 진지해진다. 나만의 월삭제(月朔祭)를 치룬 달까? 보내는 시간에 대한 서운함보다 맞는 시간에 대한 기대감이 더 절실하다. 성경은 일 년에 열두 번의 새로운 시작을 한다. 그 출발을 ‘로쉬 호데쉬’라고 하는데 ‘달의 머리’라는 뜻이다.
워낙 달력을 좋아하다 보니 방방마다 몇 개씩 달력을 둔다. 숫자로 표기된 날자에 대한 강박감 때문이 아니다. 종이 달력에 의미를 붙이다 보니 달력부자로 산다. 오죽하면 5월에 들어서도 달력을 선물한다. 스위스에서 온 후배에게 마치 시렁에 고이 둔 꽂감 빼주듯 ‘2025 날마다 십자가’ 달력을 주었다. 5월에 달력이라니? 세월 가는 줄 모르는 철없는 선배처럼 느끼지 않았을까?
가장 자주 들여다보는 것은 책상 곁 가장 가까이 매달린 ‘고난함께 천달력’이다. 1990년부터 이어온 고난모임의 대표브랜드인데, 올해는 ‘이 꽃 하나만 같지 못하였느니라’(마 6:29)라는 손글씨와 푸른 꽃송이 하나와 함께 12달의 숫자로 가득 채웠다. 단촐하지만, 가장 요긴한 달력이다. 벌써 35년째 내 마음의 아랫목을 차지하는 중이나, 유일하게 월삭제에 참여할 자격이 없다.
교회력을 비교하려고 시선이 머무는 데 둔 한국정교회 탁상용 달력은 이콘이 담겨있어 목사의 방을 더 경건하게 만든다. 식탁 위에 둔 교우들의 생일 달력, 작년에 해외에서 구한 작은 달력들은 소품일망정 이국적 풍경이 좋다. 색동가족 중 해마다 개인용 달력을 만드는 분들이 있어, 방방마다 적절히 걸어 두고 감탄한다. 나도 달력 작업을 하는 입장이라서 소홀히 여길 수 없는 동업의식이 있다.
달이 바뀌어도 언제나 그 순간에 머문 달력도 있다. 2024년 1월을 채운 주인공은 어머니와 함께 선 나 자신이다. 유화로 그린 모자(母子)의 모습은 해와 달의 흐름과 상관없이 언제나 그 자리에 멈추어 있다. 나로서는 차마 넘길 수가 없었다. ‘2023년 거룩한 골똥품’이나, ‘2021년 날마다 십자가’ 52주 주력(週曆)도 연도와 상관없이 월삭제에 동참한다. 적어도 내게 있어 명품 달력이기 때문이다.
달력을 넘기는 즐거움은 상상 이상이다. 시간은 쓰고 버리는 소비재이지만, 그러나 기억을 통해 언제나 재활용이 가능하다. 넘길 수 없는 달력에는 눈이 시릴 만큼 추억으로 가득하고, 미련이 남은 시간들은 여백으로나마 부요하다. 언젠가는 일력(日曆)을 만들어 볼 참이다. 날마다 넘기는 번거로움은 시간을 더 촘촘하게 가꿀 것이다. 디지탈 시대의 사람들에게는 불편할 테지만, 시간만큼은 아날로그로 남겨두고 싶은 욕망일 터! 그때가 되면 밤마다 자정제(子正祭)를 치루는 의식을 할 것이다.
<차라리 침묵하게 하소서>는 이면주 목사가 1990년 봄부터 쓴 크리스천신문의 ‘금주의 기도’란에 실린 것을 묶은 책이다. 그가 쓴 기도문은 날과 시간, 곧 숱한 때들로 가득하다. 이 목사는 주마다 마음의 달력을 넘기면서 역사를 헤아리고, 인간의 마음을 다독였다. 세월이 흐르고, 필자 또한 세상에 없지만, 종종 손때를 묻히는 이유이다. 그가 부른 시간의 찬가는 눈부신 기도였다.
이렇게 시작한다. “묵은 해의 달력 끝에 드리운/ 절망의 그림자 속을 방황하며/ 시간을 구걸하다 지친 내게/ 햇살 가득한 새 날을 주심을 감사드립니다.”(1998년 새해) 그러다가 가슴을 졸이며 읽는다. 기도문의 제목은 ‘5월이 없습니다’이다. “같은 세월을 살면서도/ 우리의 달력엔 언제나 5월이 없고/ 저들의 달력은 넘겨도 넘겨도/ 한맺힌 5월 뿐입니다/ 주님”(1990.5.19.) 비뚤어진 달력을 새롭게 고쳐 바라보니, 어느새 5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