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왕호(王號)의 의미와
변천
신라의 왕호는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의
순으로 변천되었다. 왕호의 변천은 신라 사회의 성장 과정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거서간, 차차웅, 이사금, 마립간 등은 순수한 우리의
말을 후에 한자로 옮긴 것이다.
거서간은 불구내, 즉 태양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으로 '신령한 제사장,
군장, 대인'이라는 뜻이다.
차차웅은 무(巫)라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제정
일치 시대의 군장 칭호에 주술적 성격을 담은 말이 그대로 사용된 것이다.
이사금은 '잇다'라는 뜻을
내포한 것으로 '연장자', '계승한 왕'으로 선거 또는 세습에 의해 군장의 지위를 이어받은 대왕이라는 칭호이다.
마립간은 우두머리를 뜻하는 마리의 이두식
표현으로 대수장이라는 정치적 의미를 나타내며. 위계에 따라서 좌석을 표시하는 말뚝으로 그 자리에 앉은 사람을 부르는 칭호라고도
해석한다.
즉 마립간은 왕권의 성장을 잘 나타내 주는 것이다.
이후 지증왕, 법흥왕 때를 전후하여 왕권이 강화되고 율령 제도가 차차
갖추어짐에 따라 중국식으로 왕이라 부르게 되었다.
이처럼 왕호의 변천은 부족의 화백회의에서 선거에
의해 군장을 추대하던 단계에서 세습적 군장제로 바뀌고, 다시 부자 상속에 의한 왕제로 전제화되어 가는 정치적 발전 과정을 나타내 주는
것이다.
신라 중기 전제 왕권의
발달
신라 중대에 왕권이 전제화될 수 있었던 배경과 왕권이
강해졌음을 알려주는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무열왕 계통의 직계 자손이 왕위를 독점 세습하였다. 원래 신라의 왕족에는 성골과
진골이 있었는데, 상대에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진덕여왕을 끝으로 성골의 대가 끊기면서 진골도 왕이 될 자격이 주어졌다.
이때 진골 출신으로 처음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김춘추(무열왕)이다. 김춘추는 몰락한 가문의 소외된 진골이었다. 그러나 그는
가야 출신의 진골 귀족인 김유신을 끌어들여 그의 무력을 빌렸고 진덕 여왕에게 집사부를 설치하도록 건의하여 자신이 초대 시중이
되었다.
집사부는 귀족적인 전통보다는 왕권의 지배를 받는 행정부적 성격이 강했다. 따라서 시중은 정치적으로 상대등보다 중요시되고
있었다. 시중을 하며 권력 기반을 다진 김춘추는 다른 진골 귀족들을 물리치고 왕위에 올랐다. 이후 다른 진골 귀족들을 제치고 중대의 마지막 왕인
혜공왕까지 모두 무열왕의 직계 후손이 왕위를 물려받을 만큼 왕권이 전제화 된 것이다.
둘째, 문무왕의 삼국 통일 완수가 왕권의
전제화에 더욱 기여하였다. 통일 전쟁 과정에서 중심 역할을 수행한 왕실의 권위가 그만큼 높아질 수 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셋째,
신문왕의 귀족 세력 숙청과 제도 정비 등이 왕권의 전제화를 뒷받침하였다. 신문왕 때 다른 진골 귀족들이 무열왕계의 왕위 독점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신문왕은 이 반란을 성공적으로 진압하면서 많은 진골 귀족들을 제거하였다. 또 그는 국학을 설립하여 유교 정치 이념을
보급함으로써 왕권의 전제화를 사상적으로 정당화하려 하였다.
그리고 중앙의 집사부를 중심으로 병부, 창부, 예작부 등 14개의
관청을 정비하고 전국을 9주 5소경으로 나누어 통제하였으며, 중앙군으로 9서당을, 지방군으로 10정을 두는 등 전제 왕권의 발달을 제도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넷째, 상대등의 지위가 약화되고 집사부 시중의 지위가 강화되었다. 이러한 변화도 왕권의 전제화를 뜻한다. 상대등은
화백 회의의 의장으로서 진골 귀족의 이익을 대변하며 왕권을 견제하는 자리이고, 집사부 시중은 왕에 의해 임명되어 왕권의 행사를 행정적으로
보필하는 자리이기 때문이다.
다섯째, 신문왕 때 만파식적이 나타난 사실도 왕권의 전제화를 뜻한다. 이것은 전제 왕권 아래에서의
평화를 상징하였던 것이다.
여섯째, 행정 관청의 명칭을 중국화하였다. 이것은 신라의 왕을 중국의 황제와 동격으로 격상하려는 의도가
내포된 것으로서, 전제 왕권의 발달을 보여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