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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너희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최한나)
33. 너희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을 더럽히지 말라 피는 땅을 더럽히나니 피 흘림을 받은 땅은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가 아니면 속함을 받을 수 없느니라. 민수기 35:33 말씀 아멘!!
오늘 날 우리가 거주하는 이 땅을 보면 여러 가지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고 있다. 그 중 요즘 가장 많이 일어나는 “묻지 마 폭행 살인사건의 흉기난동으로 인해 피해자들은 늘어나고 있고 또 이유도 모르고 칼에 찔려 피를 흘리며 부상당하고, 피를 많이 흘려 골든타임을 놓쳐 숨을 거두시는 분들도 있다. 오늘 본 절의 말씀에도 피는 땅을 더럽히게 한다. 라고 기록하였다. 특히 히브리인들은 피를 생명으로 여겼으며, 따라서 피흘림은 곧 생명을 잃는 죽음으로 간주했다. 피를 흘리는 것은 그 땅을 더럽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본문에서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서 그 땅에 피를 흘리지 말라고 하셨다. 더러워진 땅이 속함을 받기 위해서는 그 피를 흘리게 한 자의 피로만 가능하기 때문이고, 또 그들이 사는 땅은 바로 하나님과 함께 하는 땅 이였다.
구약 레위기 17:11절에는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에 뿌려 너희의 생명을 위하여 속죄하게 하였나니 생명이 피에 있으므로 피가 죄를 속하느니라” 라고 기록되어 있고, 신명기 12:23 “다만 크게 삼가서 그 피는 먹지 말라 피는 그 생명인즉 네가 그 생명을 고기와 함께 먹지 못하리니” 그런데 이 죽음은 죄의 결과로 빚어진 부정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로마서 6:23에 “죄의 삯은 사망이요 하나님의 은사는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영생이니라” 결국 피흘림(죽음)은 의식법상 부정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그리고 레위기 17:15-16 “또 스스로 죽은 것이나 들짐승에게 찢겨 죽은 것을 먹은 모든 자는 본토인이거나 거류민이거나 그의 옷을 빨고 물로 몸을 씻을 것이며 저녁까지 부정하고 그 후에는 정하려니와. 그가 빨지 아니하거나 그의 몸을 물로 씻지 아니하면 그가 죄를 담당하리라” 그러므로 살인자를 죽이지 않고 방임하는 것은 곧 땅을 계속적으로 부정케 하는 것이 된다. 따라서 피흘린 땅을 정결케 하기 위해서는 ‘피는 피로’ 창세기 9:6절 말씀처럼 “다른 사람의 피를 흘리면 그 사람의 피도 흘릴 것이니 이는 하나님이 자기 형상대로 사람을 지으셨음이니라” 라는 보응의 원칙에 의해 그 살인자의 피 역시 요구되었다. 즉 살인자를 피흘린 땅에서 처형함으로써 그 땅의 부정을 일소할 수 있었다. 창 4:10절에 기록된것처럼 “이르시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네 아우의 핏 소리가 땅에서부터 내게 호소하느니라”라고 기록되었다.
창세기 4장 10절의 호소하느니라의 원뜻은 ‘날카로운 소리를 지르다’. 즉 ‘사람 살려!’라고 부르짖는 비명과 같은 것을 의미한다. 때로는 억압받는 약자가 자신의 정당한 권리를 보호받기 위해 법에 간절히 호소하는 것을 가리키기도 한다(왕하 8:3). 그러므로 ‘핏 소리가 하나님께 호소한다’는 것은 그분께서 무죄한 자의 피흘림을 친히 아시고 그것을 절대 간과치 아니하신다는 뜻이다(시 37: 12-15). 한편 인간 생명은 하나님께서 수여하신 것으로 그분만이 홀로 좌우할 수 있다(9:5, 6). 따라서 인간이 타인의 생명을 해하는 것은 하나님의 권한을 침해하는 중요한 도전 행위이니 비록 인간 측의 호소가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께선 응당 이 일에 대해 신원하실 것이다(살전 4:6).
땅은 창조와 함께 시작된다. 하나님은 창조 셋째 날에 땅과 바다를 나누시고, 땅에서 각종 식물들을 내도록 하셨다. 여섯째 날에 흙(땅)으로 동 물들과 아담을 창조하셨고(창 2:7, 19), 땅위에 각종 동물들과 인간을 창조하심으로써 온 땅에 생명체가 가득하게 되었다. 하나님은 모든 생명체와 인간에게 복을 주시며, 생육하고 번성하고 땅에 충만할 것을 말씀하셨다. 땅은 생명체에 대한 계획을 이루는 터전이요 다시 돌아가야 할 본향이다.
또한 에덴에서 쫓겨난 아담과 하와는 토지(땅)를 갈며 살아야 했다. 가인은 땅에서 농사를 지었고, 아벨은 땅에서 목축을 시작했다. 가인이 아벨을 쳐 죽였을 때 땅은 아벨의 핏 소리를 하나님께 고하였다. 땅에서 인류를 번성하기 시작하지만 그들은 최악이 관영한 땅을 만들었고, 그 결과는 홍수 심판이었다. 노아 홍수 이후 하나님은 다시 땅에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도록 은혜를 주셨다. 그러나 후세대들은 시날 평지 땅에 모여 하나님의 창조의 목적과 반하여 흩어짐을 면하기 위해 바벨탑을 쌓아 하나님께서 언어가 혼잡하게 하심으로 전 세계 땅으로 흩어지게 되었다.
38. 거룩한 성 새 예루살렘
9.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가 나아와서 내게 말하여 이르되 이리 오라 내가 신부 곧 어린 양의 아내를 네게 보이리라 하고
10. 성령으로 나를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가 하나님께로부터 하늘에서 내려오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보이니
11. 하나님의 영광이 있어 그 성의 빛이 지극히 귀한 보석 같고 벽옥과 수정 같이 맑더라
12. 크고 높은 성곽이 있고 열두 문이 있는데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그 문들 위에 이름을 썼으니 이스라엘 자손 열두 지파의 이름들이라 요한계시록 21:9-12 말씀 아멘!!
계 17:1과 계 21:9에서 “이리 오라 … 네게 보이리라”는 동일한 표현을 썼고, 계 17:3과 계 21:10에서도 비슷한 표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계 17:1의 천사와 계 21:9의 천사는 동일한 천사로 보인다. 계 17:3에서 그 천사는 요한을 성령으로 광야로 이끌어갔다.
마찬가지로 계 21:10에서는 천사는 성령으로 요한을 데리고 크고 높은 산으로 올라간다. 처음에 요한에게 영적 바벨론이 받을 심판을 보여준 존재가 재앙을 담은 천사였으며, 이제 그 동일한 천사가 요한에게 새 예루살렘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것은 바벨론과 하나님의 백성들을 운명을 대조하여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린 양의 아내는 거룩한 성 예루살렘을 가리킨다(10절). 19:7의 말씀에도 기록되었다. 거룩한 성은 계 21:3에서 하늘의 음성은 거룩한 성과 “하나님의 장막”을 동일시한다. 새 예루살렘에는 성전이 없다(계 21:22).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로 인해 그 도성은 바로 성전의 역할을 한다. 그러므로 요한은 이후의 본문에서 새 예루살렘을 구약의 성전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 전체적인 묘사는 겔 40-48장의 회복된 성전에 기초되어 있다. 즉 거룩한 성은 성전의 모든 특성들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구약 성전의 주요 특징은 하나님의 영광이었다. 그 영광은 하나님의 임재를 가리켰다(출 40:33-35, 레 9:23-24, 겔 43:4-5). 새 예루살렘에서의 하나님의 영광은 하나님의 영속적인 임재를 의미하며, 하나님의 영광의 빛은 매우 밝아 해가 더 이상 필요 없게 된다(계 21:23).
“우리는 다 같이 구름 속으로 들어가서 7일 동안 유리 바다를 향하여 올라갔다. 이 때 예수께서 면류관을 가지고 오셔서 당신의 오른손으로 친히 우리 머리에 씌워 주셨다. 그분은 또 우리에게 금거문고와 승리를 상징하는 종려나무 가지를 주셨다. 유리 바닷가에는 144,000 명이 정사각형의 모양으로 서 있었다. 그 중의 어떤 이들은 매우 빛나는 면류관을 쓰고 있었고 다른 이들의 것은 그렇지 못했다. 어떤 이들의 면류관은 많은 별들이 달려 있어서 무거워 보였고 어떤 이들의 면류관에는 별이 몇 개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두가 자기의 면류관에 대해 아주 만족해했다. 그리고 그들은 모두 다 어깨에서 발까지 내려오는 영광스러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가 성문을 향하여 유리 바다를 행진할 때에 천사들이 우리를 에워싸고 있었다. 예수께서 당신의 힘차고 영광스러운 팔을 드시어서 진주문을 잡으시고 번쩍이는 돌쩌귀에 걸려 있는 그 문을 뒤로 밀어 제치셨다. 그러고는 우리를 향하여 ‘너희들은 나의 피에 너희 두루마기를 빨았고, 나의 진리를 위하여 굳게 서서 견디었으니 안으로 들어가라’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모두 다 안으로 행진해 들어갔으며 그 때 우리는 그 도성에 들어갈 당당한 권리가 있는 것처럼 느꼈다.” (초기문집, 16-17)
크고 높은 성곽 또한 새 예루살렘 도성에 대한 요한의 묘사는 고대 도시들의 양식에 따른 것이다. 고대 도시들은 원수들로부터의 보호를 위해 문들이 있는 성곽들로 둘려 있었다. 에스겔에 나오는 회복된 성전은 높은 담으로 둘려 있었다(겔 40:5). 이것은 새 예루살렘 성이 성전의 특징을 가지고 있음을 더욱 확증해 준다. 새 예루살렘의 성곽은 원수들로부터 보호하는 목적으로 서 있는 것이 아니다. 원수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이 성곽은 구원과 안전과 안정에 대한 상징으로 서 있다(사 60:18, 슥 2:5).
열두 문도 성곽의 각 방향에는 각각 3개의 문들이 있다. 이곳의 새 예루살렘은 에스겔의 묵시에 나오는 회복된 열두 문의 예루살렘과 그 방식에 있어 같아 보인다(겔 48:31-34). 여기서 말하는 열두 문은 보편성을 나타낸다. 예수께서는 “사람들이 남동서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눅 13:29)라고 말씀하셨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곳이 바로 이 새 예루살렘이다. 열두 문들 위에는 열두 지파의 이름이 쓰여 있고, 열두 기초석 위에는 열두 사도의 이름이 쓰여 있다. 하나님의 교회는 구약의 열두 지파와 신약의 열두 사도의 기초 위에 세워져 있다. 하나님의 보좌 주위에 24 장로들이 있는 것은 구약의 12 지파와 신약의 12 사도들을 대표한다고 볼 수 있고, 144,000 인도 12 x 12 x 1000 으로 이루어진 것은 이와 같은 의미를 나타내고 있다. 문에 열두 천사가 있고,, 새 예루살렘은 확실하게 보호되며 허락된 자만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키고 있다(계 21:27). 각 시대를 통하여 구속받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들은 새 땅에서 더 할 나위 없는 안전을 경험할 것이다. 하나님께서 영속적으로 그리고 완전하게 그곳에 임재 하여 계시기 때문이다.
39. 생수의 강
1. 또 그가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내게 보이니 하나님과 및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2. 길 가운데로 흐르더라 강 좌우에 생명나무가 있어 열두 가지 열매를 맺되 달마다 그 열매를 맺고 그 나무 잎사귀들은 만국을 치료하기 위하여 있더라
3. 다시 저주가 없으며 하나님과 그 어린 양의 보좌가 그 가운데에 있으리니 그의 종들이 그를 섬기며
4. 그의 얼굴을 볼 터이요 그의 이름도 그들의 이마에 있으리라
5. 다시 밤이 없겠고 등불과 햇빛이 쓸 데 없으니 이는 주 하나님이 그들에게 비치심이라 그들이 세세토록 왕 노릇 하리로다 요한계시록 22:1-5 말씀 아멘!
19:1-22:5는 대 종말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계시록 중에서도 예수의 재림과 백보좌 심판 및 신천신지의 도래로 이어지는 예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이다. 그 가운데서도 21:1-22:5는 현우주와 역사의 종결이요 일면으로는 영원히 지속될 천국 역사의 개시이기도 한 이중성 을 가진 대종말 사건의 절정 중의 절정인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계 21:1-8)와 새 하늘 과 새 땅의 중심이 될 새 예루살렘의 황홀한 정경(계 21:9-27), 그리고 새 예루살렘 중심부를 관통하는 생명수 강의 정경(계 22:1-5)으로 점차 그 범위를 좁혀가며 성도 만인이 그토록 대망하는 천국의 공간적 배경을 묘사한다.
새 예루살렘 성을 흐르는 생명수 강에 대한 묘사는 '또 저가••보이니 (Kal tBelEey, 카이 에데의 센> 란 표현으로 시작된다. 여기서 '저가••보이니' 로 번역된 '에데익센'은 '지시하다', '설명하다, '지적하다' 라는 뜻을 지닌 '데익뉘오(BElKYiw)' 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 능동태로 요한에게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을 보여준 존재가 계 21:9에 언급된 '일곱 대접을 가지고 마지막 일곱 재앙을 담은 일곱 천사 중 하나' 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가 요한에게 보여준 '수정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은 이미 본서에서 여러 차례 언급된 바 있다. 계 7:17에서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실 것' 이라는 동일한 종말론적 전망을 미리 제시한 바 있으며, 계 21:6에서도 하나님께서 친히 "나는 알파와 오메가요 처음과 나중이라 내가 생명수 샘물 로 목마른 자에게 값없이 주리니" 라고 말씀하신 바 있다.
본 절을 경유하여 17절에도 성령과 신부가 "원하는 자는 값없이 생명수를 받으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므로 생명수 강에 대한 자세한 사항 은 계 7:17 및 21:6. 한편, 새 예루살렘의 모티브는 에덴동산 모티브 및 성전 모티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계 21:19.20). 계 21:16.22 등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 모티브와 연관된다면, 본 절은 명백히 에덴 동 산 모티브와 관련된다. 실제로 에덴동산에도 생명 샘의 근원이 있었다. "강이 에덴에서 발원하여 동산을 적시고 거기서부터 갈라져 네 근원이 되었으니"(창 2:10). 이와 마찬가지로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에도 수정같이 맑고 반짝거리는 생명수 강이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수정 같이 맑은 생명수의 강, “생명수”는 생명이 있는 물을 의미한다. 이 강은 하나님과 어린 양의 보좌로부터 나와서 길 가운데로 흐른다. 우선 이것은 에덴에서 발원한 한 강을 보여준다(창 2:10). 또한 이 강은 성전에 발원하여 모두에게 생명을 주는 강으로써 에스겔의 묵시에서 가져온 것 같다(겔 47:1).
요엘서와 스가랴서에도 생명수의 강을 언급하고 있다(욜 3:18, 슥 14:8). 이 강은 많은 물 위에 앉아 있는 바벨론과 분명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계 17:1). 그리고 이 강은 역사적 바벨론을 관통한 유프라테스 강을 떠오르게 한다. 시편 137:1-6에 의하면 하나님의 백성들이 포로로서 예루살렘을 그리워하며 울면서 앉아 있었던 곳은 바로 이 유프라테스 강가였다(시 137:1). 이제 바벨론의 유프라테스 강은 사라졌다.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고 괴롭히던 바벨론은 멸망하였다. 이제 하나님의 백성들이 영원히 살 곳은 유프라테스 강변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나오는 생명수의 강변이다. 또한 생명수의 강은 성령을 가리키기도 한다(요 7:37-39).
“이 세상의 우물에서 그 갈증을 풀려고 하는 자는 다시 목마를 것을 마실 뿐이다. 도처에서 사람들은 만족을 얻지 못한다. 그들은 영혼의 필요를 공급할 수 있는 무엇을 갈망한다. 오직 한 분만이 그 필요를 채우실 수 있다. 세상의 필요 곧 만국의 소망은 그리스도이다. 그분만이 나누어 주실 수 있는 하늘의 은혜는 생수와 같아서 영혼을 순결하게 하며, 소성시키며 활력을 준다.” (시대의 소망, 187)
40. 모세의 마지막 설교
29.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한 사람이로다 여호와의 구원을 너 같이 얻은 백성이 누구냐 그는 너를 돕는 방패시요 네 영광의 칼이시로다 네 대적이 네게 복종하리니 네가 그들의 높은 곳을 밟으리로다 신명기 33:29 말씀 아멘!
신명기 모세가 출애굽 제2세대, 곧 광야 세대에 속한 이스라엘 자손을 향해 설교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실제로 신명기에서 세편 정도의 설교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첫 번째 설교는 1:1에서 4:43까지로서 이스라엘 자손이 호렙산(시내산)을 떠나 가제스 바네아를 거쳐 아모리 왕 시혼과 바산 왕 옥을 멸하기까지의 여정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다.
모세의 두 번째 설교는 4:44에서 26까지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들에 대하여 설명하고 있다. 신명기 법전이라고 불리는 것으로서 남왕국 유다의 왕 요시아가 종교개혁(왕하 22-23)을 추진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모세의 세 번째 설교는 27장에서 마지막 31장까지로 언약 갱신 의식의 구체적인 내용을 가지고 있다. 부록적인 성격을 갖는 나머지 32장 34장은 모세의 노래와 그의 축복기도 및 죽음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다.
29절을 보면 모세는 "이스라엘이여 너는 행복자로다"라고 선포했다. 그리고 계속 해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것은 세 가지이다. 첫째, 세상에서 그들처럼 하나님의 놀라운 권능으로 구원을 얻은 백성이 다시없기 때문이다. 둘째, 하나님이 그들 의 방패와 칼이 되어 그들을 보호해 주실 것이기 때문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그들로 대적에게서 승리를 거두게 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이 이러한 복을 누릴진대 어찌 행복자라고 아니할 수 있겠습니까? 참 으로 그들은 행복한 자들이었다. 그와 마찬가지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영적 이스라엘로 부름 받은 우리 모두들 역시 행복자이다. 왜 그렇습니까? 그것은 첫 째, 우리는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의 노예 상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사역을 통한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다(요 3:16,17). 인생의 가장 절박한 문제는 죽음의 문제이다. 세상에서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리는 사람도 죽음의 문제 앞에서는 행복을 좌절당하고 만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로 말미암은 죄 사함을 통해 죽음의 문제를 극복하고 다시는 눈물과 고통이 없는 영원한 삶을 살게 되었으니 어찌 행복하다고 아니하겠습니까(시32:1)? 이 사실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세상 의 어느 누구보다도 행복한 사람들이다. 둘째, 하나님께서 우리의 보호자와 돕는 자가 되시기 때문이다. 사람은 누구나 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시련과 어려움에 처하기 마련이다. 게다가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처지에 놓여 있는 자신을 도울 힘이 없기 에 절망하여 낙심하게 된다. 그러나 우리 에게는 우리를 돕는 자가 계신다. 그분은 바로 하나님이시다(시 28:7). 그리고 그 분은 전능자이시다. 따라서 그분은 우리가 직면한 어떠한 문제도 능히 해결하실 수가 있다(시 46:1). 그러므로 우리는 진정 행복한 사람들이다.
셋째, 하나님께서 우리로 승리케 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필연적으로 우리를 대적하는 대적을 만나게 된다. 그것은 이 세상 공중 권세를 사단이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엡 2:2). 하지만 아 무리 많은 대적이 우리를 에워싸고 공격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하나님만 의지하면 승리하게 되어 있다. 그것은 무한한 능력과 권세를 지니신 하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친 히 싸워 주시기 때문이다(출 14:13,14; 신 31:3,4). 그러므로 우리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다.
“여호와를 경외하며 그 도에 행하는 자마다 복이 있도다” 시편 128:1편 말씀
“이러한 백성은 복이 있나니 여호와를 자기하나님으로 삼는 백성은 복이 있도다” 시편 144:15편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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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와우! 또 1등 하셨습니다.
주님 앞에서도 1등 하시기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