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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롬 5:1-11)
할렐루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박 5일간, 라오스의 가장 오래된 도시 중 하나인 루앙 프라방에서 잘 보내고 왔습니다. 가는데 하루가 걸리고, 오는 데 하루가 걸리는 길고 긴 여행이었습니다.
루앙 프라방은 라오스의 수도인 비엔티안으로부터 기차를 타고 2시간 이상 걸리는 북쪽에 위치한 도시였습니다. 오래된 모든 건물들이 문화유산이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날씨는 40도가 넘었고, 수도인 비엔티안은 45도가 넘는 아주 더운 나라였습니다.
며칠간 더운 날씨 속에서 보내다가, 인천 공항에 들어서는 순간, “춥다”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되돌아 오는 날, 라오스 공항에 도착했는데, 그곳에는 우리나라에 계절 노동자로 들어오는 사람들이 출국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그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그들을 떠나보내는 가족들이 총동원되어 나와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 모습이 예전 우리나라 노동자들이 독일로, 중동으로 일자리 찾아 떠나는 모습을 보는 듯 하다고 했습니다.
그 나라와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지금 우리나라는 너무나도 많은 것을 가졌다고 하는 것을 새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만큼 행복한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의 사는 모습은 우리나라 70-80년 대처럼 형편없었지만, 그들의 얼굴에서만은 행복한 미소가 떠나지 않았습니다.
여러분! 어떤 형편 속에서도 행복하고, 늘 감사가 넘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고린도전서 13:13절 말씀입니다. 우리들이 너무나도 잘 알고 있는 말씀입니다.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의 제일은 사랑이라”
이 말씀처럼, 우리에게 믿음과 소망과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어야 할 것입니다. 하나라도 빠지면 안됩니다. 그 중에 제일이 사랑이라고 해서, 사랑만 하면, 안됩니다. 믿음이 있어야 하고,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이 세 가지가 다 있어야 정상입니다.
오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라는 제목으로, 그 중에 제일인 사랑에 대하여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우리끼리;의 사랑이 아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요한일서 4:16절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는 사랑을 우리가 알고 믿었노니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사랑 안에 거하는 자는 하나님 안에 거하고 하나님도 그의 안에 거하시느니라”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누가복음 15장을 보면, 양을 돌보는 목자는 양 무리에서 이탈한 양 한 마리를 모른 척 하지 않으셨습니다.
한 마리 잃어버린 양을 찾아,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셨습니다.
또 찾았을 때, 너무나도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돌아와,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고 말하며, 큰 잔치를 열었습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면서, 양을 향한 목자의 사랑을 느낄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 목자이신 하나님은 바로 그러한 사랑을 우리에게 베풀어 주셨습니다.
목자가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니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 양은 어떻게 되었을까요? 생각하기도 싫습니다. 그 잃어버린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닌 그 목자의 사랑을 어떻게 말로 다 표현할 수가 있겠습니까? 그 사랑이 없었다고 한다면, 그 양은 무서운 짐승에게 죽임을 당하였을 것입니다.
목자는 양에게 관심을 가져 주었습니다.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리하여, 목자는 잃어버린 양을 찾았습니다. 목자는 양을 찾고서는 너무 기뻐하였습니다. 목자는 무리를 이탈한 양을 나무라지 않았습니다. 그 이탈한 양을 향하여 분노하지 않았습니다. 그 이탈한 양에게, “너 때문에, 내가 시간을 낭비했다. 내가 고생했다. 이제 너는 더 이상 밖에 나오지 말고, 우리 안에만 있으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또닷기 길을 잃어버릴까봐, 이전보다도 더 많은 관심을 가져주었고, 더 큰 사랑으로 돌보아 주었습니다. 바로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왕이 된 다윗은 밧세바를 범하고, 그의 남편을 죽음의 자리로 내몰았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큰 죄를 범죄했습니다. 모든 것이 감추어졌는 줄 알았는데 결국 드러나고 말았습니다. 나단 선지자의 지적을 받았을 때, 그는 통회자복하면서, “주의 얼굴을 내 죄에서 돌이키시고 내 모든 죄악을 지워 주소서”(시 51:9)라고 외쳤습니다. 하나님의 용서함을 직접 경험한 다윗은 “여호와는 은혜로우시며 긍휼이 많으시며 노하기를 더디 하시며 인자하심이 크시도다 여호와께서는 모든 것을 선대하시며 그 지으신 모든 것에 긍휼을 베푸시는도다”(시 145:8-9)라고 고백했습니다.
어찌 다윗뿐이겠습니까? 어찌 다윗만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경험했겠습니까?
요엘 선지자도 하나님을 떠나,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이스라엘을 향하여,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욜 2:13)라고 외쳤습니다.
앗수르의 수도인 니느웨에 가서,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을 선포하기를 거부했던 요나 선지자는 “주께서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는 하나님이신 줄을 내가 알았음이니이다”(욘 4:2)라고 말했습니다.
“사십 일이 지나면 니느웨가 무너지리라”
그러나, 요나는 그들이 회개하면, 하나님께서는 뜻을 돌이켜, 그들을 멸망시키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니느웨에 가라고 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했노라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요나서의 마지막 말씀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께서 요나 선지자에게 “이 큰 성읍 니느웨에는 좌우를 분변하지 못하는 자가 십이만여 명이요 가축도 많이 있나니 내가 어찌 아끼지 아니하겠느냐”(욘 4:11)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방 민족인 앗수르의 니느웨 사람들도 사랑하셨습니다. 그들을 아끼셨습니다. 그들을 구원하기를 원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유대인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방 민족인 우리들도 사랑하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들만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라오스도 사랑하십니다.
라오스는 공산당이 지배하는 공산국가이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복음을 전할 수도 없거니와 교회를 세울 수도 없습니다. 이번 라오스에서는 그곳에서 18년 동안,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는 선교사님과 함께 모든 일정을 함께 했습니다. 선교사님과 함께 하루는, 라오스 각지에서 와서, 성경을 공부하고 있는 라오스의 목회자들을 보았습니다. 공식적으로 교회도 존재하지 않고, 신학교도 없기 때문에, 어느 한 지역에서 먼저 믿는 사람이 목사가 되어, 교회를 세워가고, 복음 사역을 감당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 그들이 먼 길을 마다하지 않고, 일주일씩 한 곳에 머물면서, 성경공부를 한다고 했습니다. 그 날은 미국 선교사님 한 분이 오셔서, 그들에게 성경을 가르쳐주고 있었습니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오래 전, 우리들이 교회에서, 또는 기도원에서, 함께 기도하고, 성경 공부하고, 함께 자곤 했던 일들이 떠올랐습니다. 라오스의 복음 사역이 아직은 너무나도 미약하지만, 훗날, 크게 부흥하리라 믿어집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로 그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만을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만을 위하여, 죽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만을 구원하지 않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롬 3:29)라고 말했습니다.
오직 한 분이신 하나님은 모든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그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바로 우리 자신을 보면, 알 수가 있습니다. 유대인에게 있어서, 이방인이었던 우리들이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십자가의 보혈로 죄사함을 받았다고 하는 사실이야말로, 하나님이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신다고 하는 것을 증명라기 때문입니다.
6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기약대로 그리스도께서 경건하지 않은 자를 위하여 죽으셨도다”
8절 말씀입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10절 말씀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가 아직 원수되었을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위하여,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주셨고,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습니다. 그럼으로, 우리는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라오스에 나가 있는 동안, 우리나라 축구대표팀이 인도네시아와의 경기에서, 승부차기로, 충격패를 당하여, 40년만에 올림픽 출전이 불발되었습니다. 피파 축구 순위가 우리나라는 23위이고, 인도네시아는 134위인데, 우리나라가 지고 말았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았습니다. 지금은 축구에 패배했지만, 나중에는 무엇으로 패배하게 될지 모를 일입니다. 앞서 간다고 항상 앞서 가는 것은 아닙니다.
자만하거나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우리만 이기려고 훈련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누구나, 자신의 현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지기 실력만 믿고, 상대방을 얕보거나 귀찮다고 훈련을 하지 않았거나 하면 질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무너뜨리지 않아도 스스로 무너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남들보다 앞서 간다고 자만하거나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믿음의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야 합니다,. 날마다 자기 자신을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라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품 안에 머물러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많이 받았다고, 자만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은 우리만 사랑하시는 것이 아닙니다. 아직 하나님의 사랑의 울타리 안에 있지 않는 사람들도 사랑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눅 13:29-3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라오스는 공산 국가입니다. 공산당의 손 안에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북한도 공산 국가입니다. 역시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왜 아직도, 공산당의 지배 아래에 있습니까? 우리는 그때를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의 손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정하신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자유 민주국가라고 해서, 모든 것이 잘 돌아가고, 모든 사람들이 불행을 맛보지 않고, 행복하기만 합니까? 행복의 파랑새는 우리 곁에 있지만, 우리는 아직도 먼 곳에서 행복의 파랑새를 찾아다니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만큼, 그렇게 행복하지가 않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정치만 봐도 그렇습니다. 여야를 막론하고 마음에 들지가 않습니다.
대통령과 야당 대표와의 만남이 예정되어 있지만, 그 만남으로 인하여, 지금껏 해결되지 못하고 쌓이고 쌓인 여러 가지 문제들이척척 해결되고, 모든 백성들이 행복해지리라는 것을 바라는 것은 큰 착각입니다. 어쩌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내일 만남을 통하여 또다른 문제가 발생하게 될지도 모를 일입니다. 물가는 어떻습니까? 한 번 올라간 물가는 내려올 생각을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우리나라를 사랑하십니까? 하나님의 사랑과 은총이 있기에, 이 정도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에 우리를 있는 모습 그대로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완벽하고 완전한 인간이었기에, 우리의 모습을 보고, 만족하시면서, 우리를 사랑하신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 곁을 찾아오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되었을 때,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 우리의 모든 죄를 깨끗하게 씻어주셨습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과 원수되었을 때, 우리에게 먼저 구원의 손을 내밀어 주셨고, 우리를 구원해 주셨습니다. 우리를 죽음에서 살려주셨습니다.
아가서 8:6-7절 말씀입니다.
“너는 나를 도장 같이 마음에 품고 도장 같이 팔에 두라 사랑은 죽음 같이 강하고 질투는 스올 같이 잔인하며 불길 같이 일어나니 그 기세가 여호와의 불과 같으니라 많은 물도 이 사랑을 끄지 못하겠고 홍수라도 삼키지 못하나니 사람이 그의 온 가산을 다 주고 사랑과 바꾸려 할지라도 오히려 멸시를 받으리라”
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강하며 아름다운 것은 사랑입니다. 하지만 이런 사랑에도 문제가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것, 사랑이 변하는 것, 사랑의 거짓, 사랑의 오해, 사랑의 불신 등이 바로 그러한 것입니다. 사랑에 관한 온갖 이야기들을 담은 “사랑과 전쟁”이라는 드라마가 있었습니다. 막장 중에 막장 이야기가 사랑에 관련된 이야기들입니다. 이처럼 세상적인 사랑은 문제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은 변하지 않으며, 막힘이 없습니다. 믿을 수 있습니다. 영원무궁합니다. 거짓되지 않습니다. 아주 분명하고, 확실합니다.
신랑과 신부가 결혼을 하면서 결혼의 증표로 예물을 교환합니다. 다이아 등 고급 선물을 교환하기도 하지만, 일반적으로, 금반지를 선물할 것입니다. 아마, “금이 변하지 않는 것처럼, 나도 당신을 영원히 사랑합니다”’라는 뜻으로 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런 사랑도 변합니다. 쉽게 식어버립니다. 거짓된 사랑으로 결혼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연약할 때에”,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연약할 때”라는 말은 “부족할 때”라는 말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뭔가 많이 부족할 때도 사랑하셨습니다.
여러분은 언제부터 하나님의 사랑을 받으셨습니까? 예수 믿고 난 후 부터입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지도 듣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할 그 때에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하셨습니다.
우리가 아주 형편없을 때, 아무 보잘 것 없고, 뭔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할 때, 정말로 멸망의 자식으로 지옥으로 달려가고 있을 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마 9:13)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우리를 대신하여 죽으셨습니다. 우리가 처음부터 사랑받을 만한 자격이 있는 의인이어서가 아니라,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사랑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도 전에는 어리석은 자요 순종하지 아니한 자요 속은 자요 여러 가지 정욕과 행락에 종 노릇 한 자요 악독과 투기를 일삼은 자요 가증스러운 자요 피차 미워한 자였으나 우리 구주 하나님의 자비와 사람 사랑하심이 나타날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딛 3:3-5)라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사도 바울이 말한 대로 하나님의 공의 아래서 진노를 받아 마땅했으며, 멸망 받을 수밖에 없을 때에, 하나님은 예수님을 보내사, 우리를 위해 죽게 하심으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하여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우리를 사랑해주셨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고 하는 것은 우리가 가는 방향과 하나님이 원하시는 방향이 전혀 반대 방향을 향하고 있음을 뜻합니다. 하나님께로 향하는 어떤 중간 지점이 아니라, 반대 방향을 향하여 가고 있는 우리를 사랑해 주셨습니다.
생명의 길이 아니라, 멸망의 길을 향하여 달려가고 있는 우리를 붙들어 주시고, 우리에게 사랑을 보여주시고, 우리의 방향을 멸망이 아닌 생명의 길로 바꾸어 주셨습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을 잡으려고, 다메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주여 누구시니이까”
“나는 네가 박해하는 예수라”
예수님을 박해하는 사울,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사울을 사랑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런 사울을 크게 사용하여 주셨습니다. 그러할진대, 우리에게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습니까? 하나님의 사랑을 의심할 필요도 없습니다.
여러분! 연약할 때도 사랑하신 하나님, 죄인 되었을 때도 사랑하신 하나님, 원수였을 때조차도 우리를 사랑하신 하나님이 아니십니까? 하물며 하나님의 자녀인 저와 여러분을 하나님께서 왜 사랑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지금도, 변함없는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고 계십니다. 그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 속에서, 항상 기뻐하며, 행복한 삶을 살아갈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합니다.
주여, 우리와 항상 함께 하여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하나님의 곁에 가까이 있을 때에도, 멀리 있을 때에도 우리를 떠나거나 버리지 않으시고 변함없는 사랑을 베풀어 주심을 감사드립니다.
주여, 이제는 주님만을 바라보겠습니다. 주님만을 사랑하겠습니다.
이 마음 변하지 않도록 주님의 능력의 손으로 붙들어 주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