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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122 살림교회 주일공동예배(주현절 후 셋째 주일)
송구영신- 낡은 지도에서 새 지도로
사9:1~4; 고전1:10~18; 마태4:12~23
오늘 우리는 설날 아침, 계묘년 설날 아침에 주일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다시 한번 새해 인사를 전합니다. 올해 하나님의 크신 돌보심을 온전히 느끼며 우리의 삶을 새롭게 인도하시는 성령의 이끄심을 받아 살아가는 복된 한 해가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우리가 공동기도문으로도 기도했지만, 매일매일 “송구영신”하는 한 해가 되시길 기원합니다. 생각해 보니, 송구영신은 새해 한 번 하는 것이 아니라 매일매일 하는 것이었습니다. 더 이상 쓸데없는 것, 옛 것, 낡은 것은 그때그때 떠나보내고, 꼭 필요한 것, 새 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송구영신입니다. 우리가 들숨과 날숨을 쉬면서 탁한 공기는 내보내고 신선한 공기를 들여 마시는 것처럼, 우리의 생각, 감정, 계획, 감각들도 보낼 건 보내고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는 삶이 되어야 건강하게 살 수 있습니다.
송구영신을 하지 않은 삶은 업그레이드 하지 않은 지도와 같습니다. 업그레이드 되지 않은 네비에 의존해서 운전을 하게 될 때 목적지에 제대로 도착하지 못합니다. 낡은 지도에 의존해서 여행을 한다면, 여행은 엉망이 되겠지요. 저와 여러분은 어떤가요? 여전히 낡은 지도로 고생을 하고 있지는 않나요? 왠만큼 고생을 했으면 알아차리고 지도를 업그레이드를 해야 하는데, 고생을 죽도록 하고도 왜 그런 줄 몰라요. 그러니까 죽도록 고생할 때는 내 지도가 잘못되었나? 생각해 볼 때입니다.
Portia Nelson의 다섯 장으로 된 자서전이라는 짧은 시 아시지요?
1. 나는 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 깊은 웅덩이가 있다. 나는 빠진다. 나는 당황하여 어찌할 바를 모른다.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영원히 길을 찾지 못할 것이다.
2. 같은 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 깊은 웅덩이가 있다. 나는 그것을 못 본 척한다. 나는 다시 빠진다. 내가 같은 곳에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내 잘못이 아니다. 빠져나오는데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3. 같은 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 깊은 웅덩이가 있다. 나는 그것을 본다. 그런데도 또 빠진다. 습관이 되었나 보다. 나는 눈을 뜬다. 내가 어디 있는지 안다. 그것은 내 잘못이다. 나는 즉시 빠져나온다.
4. 같은 길을 따라 걷는다. 길가에 깊은 웅덩이가 있다. 나는 그 웅덩이를 비켜 걷는다.
5. 나는 다른 길을 걷는다.
여러분, 우리의 지도가 어떻게 업그레이드 되는지를 잘 보여주는 지혜시입니다. 1. 웅덩이에 빠지고, 아주 당황하지만, 그러나 내 잘못은 아니고.... 2. 길가 웅덩이가 있는 걸 알지만 못 본척 하고, 그러다 또 빠지고, 그러나 내 잘못은 아니고, 3. 같은 길에 있는 웅덩이에 습관적으로 또 빠지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 알고 내 잘못인지도 처음 알게 됩니다. 그때는 빠져 나오는 일이 좀 쉽겠지요. 4. 길가 웅덩이를 비켜 갑니다. 5. 다른 길로 가지요.
우리의 지도가 낡은 지도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알까요?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한다면 낡은 지도입니다. 새로운 지도는 우리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의식의 지도가 너무 낡아서 자꾸 옛날 지도로 지금을 보려고 한다면, 현실을 똑바로 볼 수가 없겠지요. 이렇게 되면 우리는 자꾸 환영(illusion 망상, 착각)을 갖게 되고, 우리는 현실과 동떨어진 삶을 살게 되지요. 있는 그대로의 삶을 사는 것이 아니라, 이래야 하는데 저래야 하는데 하는, 당위의 삶을 살게 되지요. 이건 현실을 사는 것이 아니라 생각 속에서 사는 거지요.
또한 우리가 자신의 삶에 원망하고 불평하는 일이 잦다면, 낡은 지도일 가능성이 큽니다. 남에게 책임을 떠넘기고 남 탓을 자주 하게 되면 낡은 지도일 가능성이 큽니다. 내 잘못은 아닌 것입니다. 옛날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를 지나면서 원망과 불평이 잦았고, 일이 생기면 모세 탓을 하곤 했지요. 출애굽은 했지만, 아직 이집트에서 살던 지도를 그대로 가지고 있어서, 그들은 현실이 힘들고 어려울 땐 자주 이집트로 돌아가자고 소리쳤습니다. 그들은 한참 더 고생을 해야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가 읽은 복음서 본문에 보면,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추었다”, 하는 말씀이 나옵니다. 어둠과 그늘진 죽음의 땅에 빛이 비추었다는 것은 지도가 바뀐다는 거지요. 또한, “회개하여라. 하늘 나라가 가까이 왔다.”라는 예수님의 공식적 첫 말씀이 나옵니다. 이 말씀이야말로 지도를 바꾸라는 요청이자 초대입니다. 또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부르셨을 때,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는 말씀이 나오는데, 제자의 삶은 낡은 지도를 놓아두고 새 지도를 따라가는 삶이라는 것을 보여줍니다. 이것이 진정한 송구(낡은 것은 떠나보내고) 영신(새 것을 받아들인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서 말씀을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봅시다.
오늘 마태복음의 본문은 예수님의 공적 활동(공생애)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후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셔서 시험을 받으셨다는 이야기 다음에(여기까지는 예수님의 공생애 준비라고 할 수 있겠지요), 드디어 예수님의 공생애가 어떻게 시작되었고 예수님의 활동의 내용이 무엇이었는지를 밝히는, 일종의 총론에 해당하는 말씀을 전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호수 북쪽 해안 마을 가버나움에 살면서 그곳에서 그의 공생애를 시작하셨는데, 그곳이 어떤 곳인가를 전하고 있습니다. 갈릴리 지역이라고 하면 갈릴리 호수 서쪽 지역의 땅을 일컫습니다. 이 지역은 구약시대에는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일컬었는데, 유다와 예루살렘과는 가장 떨어져 있는 최북단 변방에 위치해 있었습니다. 옛날 우리나라로 치면 함경도나 만주 땅에 해당하는 지역이라고 할 수 있지요.
그러면서 오늘 마태복음은 옛 이사야 예언자의 글을 빌어서 이 땅이 어떤 땅인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이사야서 9:1,2절에 나오는 말씀인데, 마태가 그 말씀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활동의 장소와 그 의미를 전해주고 있지요.
“스불론과 납달리 땅, 요단강 건너편, 바다로 가는 길목, 이방 사람들의 갈릴리, 어둠에 앉아 있는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었다.”
어둡고 미개하고 버려진 곳에 빛이 비추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사야 말씀은 이렇게 되어 있지요.
“어둠 속에서 고통을 받던 백성에게서 어둠이 걷힐 날이 온다. 옛적에는 주님께서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으로 멸시를 받게 버려두셨으나, 그 뒤로는 주님께서 서쪽 지중해로부터 요단강 동쪽 지역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이방 사람이 살고 있는 갈릴리 지역까지, 이 모든 지역을 영화롭게 하실 것이다. 어둠에 헤매던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죽음의 그림자가 드리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빛이 비쳤다.”
종살이하던 땅, 어둠에 싸여 있던 땅에 빛이 비추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이곳을 해방시키시고 그곳 사람들을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마태는 오래된 이사야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예수님의 활동의 의미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의 일성을 전합니다. “이때부터 예수님께서는 ‘회개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고 선포하기 시작하였다.”
그 다음 단락에서는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어부들을 제자로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그런 다음 23절에는 마태복음이 전하는 예수님의 활동 사역을 한 마디로 요약하지요.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시며, 백성들의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 주셨다.”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했다”는 말씀을 동일한 내용이라고 본다면, 마태가 말하는 예수님의 활동 사역은 단 두 가지로 요약되지요. 가르치고, 고쳐주셨다! 무엇을? (하늘나라의 복음을) 가르치고/선포하고, 어떻게?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
이것은 마태복음의 전제 구조가 됩니다. 이제 5장 이후부터는 예수님의 가르치는 말씀과 질병을 고쳐주는 치유 기사가 번갈아 가면서 등장합니다. 가령 5~7장의 산상수훈 뒤에 8~9장의 병자를 고치는 이야기...
다시 말하면, 마태는 예수님의 이 세상 활동을 “어둠 속에 빛이 비치는 사건, 그늘진 죽음의 땅에 앉은 사람들에게 빛이 비치는 사건”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은 가르치시는 일, 즉 하늘나라의 복음을 선포하는 일이었습니다. 그 복음 선포는 공허하고 추상적인 이야기가 아니라 실제로 가난하고 소외된(어둠에 앉아 있는) 사람들이 질병에서 치유 받고 아픔에서 해방되는 구체적인 삶의 사건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앞에서 우리가 한 말로 한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우리의 지도를 바꾸어 주러 오신 분입니다. 어둠 속에 있는 아주 낡은 지도, 종살이 하던 지도, 그래서 어둠을 헤매고 죽음의 그늘 아래 있던 사람들에게 빛나는 삶을 사는 지도로 바꾸어 주시기 위해 오셨습니다. 낡은 지도는 사람을 병들게 하고 고통 받게 합니다. 낡은 지도로 고통 받고 있는 사람들, 그들은 몸과 맘이 병들어 고통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질병과 아픔을 고쳐주셨다는 말씀은 그들을 새로운 지도로 바꾸어 놓으셨다는 말씀이지요.
예수님은 “회개 하여라, 하늘나라가 가까이 왔다!”로 하늘나라의 복음(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이 말씀은 “너희의 지도를 바꾸어라.”라는 말씀입니다. 지도를 바꾸라는 말씀은 “너희 스스로 알고 있는 너희의 생각을, 신념을 바꾸어라”라는 말씀이고, “너희의 행복의 방향을 바꾸어라”는 말씀이고, “작은 나를 넘어 큰 나로 나아가라!”는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회개는 자신의 생각을, 신념을 바꾸는 것이고, 행복의 방향을 바꾸는 것이고, 작은 나를 넘어 큰 나로 나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생각 하나 바꾸는 것이 그렇게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자꾸 빠지는 함정에 다시 빠지는 이유입니다. 이는 근본적으로는 성령님의 도우심이 필요합니다. 우리가 오랫동안 믿음 생활 했지만, 우리의 의식의 지도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세상이 주는 소리에 너무 입력이 잘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말씀에 귀기울이지 않으니까요. 당장 내 앞에서 벌어지는 일들에 겁먹지, 그 이면에서 활동하시는 하나님과 성령님의 활동에는 아주 무디니까요.
우리의 가장 중요한 생각, 신념은 우리는 거의 무의식적으로 하나님이 안 계신다는 의식/착각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너무 자주 침묵은 나님의 부재라고 생각하며 살고 있습니다. 믿는다고 하는 사람조차도 그렇습니다. 그래서 아빌라의 테레사는 “기도하는데 따르는 모든 어려움은 우리가 마치 하나님이 안 계신 것처럼 기도하는데 있다.”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영적 여정이란 한 마디로, 하나님이 (나와는 상관없이) 멀리 계시거나 안 계신다는 환상/착각에서 벗어나는 과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일상의 삶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지향이 끊임없이 필요한 것입니다. 작은 메타노이아, 작은 회개가 필요합니다. 세상살이에 정신없이 살다가도 자주 돌아옴이 필요합니다. “주여 어서 오사 절 도우소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시여, 저를 불쌍히 여겨 주십시오.” 하나님의 자비를 구해야 합니다. 자비를 구하는 사람은 회개하는 사람입니다.
이 승복 가운데 우리의 지도가 바뀌는 것입니다. 승복이 없으면 지도는 바뀌지 않습니다. 승복이 없으면 회개는 불가능합니다.
오늘 본문 가운데에는 예수님께서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제자들을 부르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따라 오너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삼겠다” 부르시자, “그들은 곧 그물을 버리고”(마4:20), 또 “그들은 곧 배와 자기들의 아버지를 놓아두고 예수를 따라갔다”(마4:22)고 했습니다. 승복하는 거지요. 우리는 이 장면을 한 순간에 일어난 일로 보게 되지만, 우리 자신 안에서는 한 순간에 일어나지는 않습니다. 이것은 오랜 영적 여정 가운데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우리는 다섯 장이 아니라 쉰 장 아니, 오백 장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길을 꾸준히 걸어가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을 따르는 것은 한 순간의 기분이나 용기로 되는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꾸준한 인내와 끈기 있게 나가려는 결단, 그럴 수 있는 은총을 주리라는 하나님에 대한 신뢰와 끊임없는 기도로 되어지는 길입니다.
버리고 혹은 놓아두고 따르는 것! 이것이 지도를 바꾸는 길이지요. 옛날 아브라함이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고, 그는 믿음의 조상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따라가는 사람, 즉 영적 여정에 오른 사람의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여기서 자신의 생업 수단인 그물을 버렸다는 것은 자신이 그동안 의존하던 것들을 버렸다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배와 자기 아버지를 놓아두었다는 것은 자신의 안전의 기반이 되고 자신이 이 사회가 가르쳐준 가치관을 다시 검토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것이 지금도 나에게 맞는 지도인지를 검토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물을 버리고 배와 자기 아버지를 놓아두었다는 말을 너무 크게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네가 끈질기게 붙잡고 있는 생각을 좀 놓아두고 그냥 내 안에서 좀 쉬렴”, 그것도 안되면 “그렇게 맘 졸이지 말고 심호흡 한번 크게 내쉬어 보렴.” 어쨌든 기본적인 원리는 이것입니다. 송구영신! “버리고 따라가기! 놓아두고 지향하기! 염려를 기도로 바꾸기!” 이렇게 하는 것이 메타노이아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