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3.14.-15일간 임진왜란 노량해전 전적지 관광 이야기 1부.
(3.14일 임진왜란시 노량해전 관광계기)
임진왜란의 명장 성웅 이순신장군을 생각하면 가슴이 뭉클해진다. 왜 이순신 장군에게는 성웅이란 말이 붙었을까. 예수 석가모니 공자님 등의 성인 반열에 속하는 장군이라는 뜻으로 쓰인 것 같다. 또 왜 이순신 장군의 추모시설을 현충사라는 이름으로 아산시 탄생지에 다시 세웠을까. 그것은 우리나라 역사상 가장 훌륭한 장군이라고 공인을 받은 장군이라는 뜻일 것이다. 이렇게 위대한 이순신 장군이 임진왜란 당시 전사한 곳이 바로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의 현재 위치)
그 노량해전의 노량은 위치가 어딘지는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필자는 최근에야 그 노량이 경상남도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와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 사이에는 있는 노량해협의 바다가 노량바다이고 이 바다에서의 해전이 노량해전임을 알았다. 그리고 이 노량해협에서 임진왜란 때 일본군과 조.명연합군이 일전을 겪었던 전쟁이 바로 노량해전이다.
그리고 노량리라는 마을은 이렇게 하동군 금남면과 남해군 설천면의 2개 면에서 노량바다를 사이에 두고 서로 마주보고 있는 마을이다. 이렇게 2개의 마을이 노량리라는 1개의 마을로 호칭되고 있는 것은 아마도 같은 생활권의 마을이라서 노량리라는 마을이름으로 부르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금남면 노량리와 설천면 노량리 사이에는 노량대교와 남해대교라는 2개의 다리가 동서로 약 500미터의 거리를 두고 설치되어 있다. 서쪽에는 노량대교가 있고 동쪽에는 남해대교가 있다. 이 2개의 다리가 한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채색되어 노량해협 바다위에 떠 있다.
(이순신장군의 전사지를 찾아가는 접근 경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전사지를 꼭 한번 둘러보고 싶어서 금번 관광에 나섰다. 그런데 접근로는 (1)광양시에 있는 이순신대교라는 다리를 직접 눈으로 보고 싶어서 먼저 광양시를 거쳤다. 그리고 뒤를 이어 (2)광양시 태인면 섬진강포구의 수변공원 (3)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의 정병욱교수 가옥에 전시된 정병욱교수와 윤동주 시인의 인간관계 기록물 (4)하동군 노량항과 노량대교와 남해대교. (5)남해군 설천면 노량리의 이순신장군 충렬사 (6)남해군 고현면 차면리 관음포 앞바다의 이순신장군의 전사지를 둘러보자고 여행에 나섰다.
(3.14일 광양시 이순신대교로 이동 사전준비와 이동로 및 이순신대교 홍보관 풍경)
전적지 관광을 위해서 도상연구를 많이 해서 이동경로를 정했다. 관광날짜는 반드시 날씨가 좋아야 해서 날씨앺을 열어서 주간날씨를 관찰하여 잡은 날짜가 3.14-15일 이틀간이다.
3.14일 새벽 05시25분에 도봉동 아파트단지를 출발했다. 이동경로는 100번고속도로-경부고속도로-천안논산고속도로상의 공주시 정안알밤휴게소에 도착하니 시간은 07시35분이다. 이 휴게소 주차장 차속에서 김밥으로 조식후 키피 한잔씩하고 다시 출발했고 여기서부터 핸들은 집사람이 잡았다.
이어서 익산분기점-완주분기점-순천분기점-동순천ic를 통과한 뒤 다시 핸들은 내가 잡았다. 이순신대교 도로표시판을 보면서 광양시내로 접어 들었다. 내비 안내를 따라 이순신대교 도로표지판을 보면서 찾아갔다. 그런데 내비가 이순신대교를 안내하지 않고 엉뚱한 곳으로 안내했다. 무엇이 잘못된 것인지 알길이 없어서 광양시내를 한참 헤메다가 겨우 이순신대교를 찾아 달렸다.
이순신대교 북단쪽에서 남단쪽을 향해서 달리니 여수시 묘도섬 북단에서 이순신대교는 끝이 났다. 이렇게 이순신대교는 대교 남단에서 다시 묘도섬을 횡단해서 묘도대교로 이어졌다. 이순신대교 남단끝 우측으로 이순신대교홍보관으로 빠지는 샛길이 나타났다. 이 샛길을 따라가니 이순신대교 홍보관 주차장이었다. 이순신대교 홍보관을 대충 둘러봤다.
이곳 이순신대교홍보관 내부에 전시된 사진들은 모두가 이순신대교 교량공사 건설공법의 특수성을 설명하는 내용을 전시하고 있다.
(이순신대교 홍보관 모습)
(이순신대교 홍보관 전망대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이순신대교 모습)(대교 북쪽은 광양시고 대교 남쪽은 여수시 묘도입니다.)(이 묘도에서 다시 묘도대교를 건너야 여수시 적량동임.)
(이순신대교 홍보관 야외에 설치된 이순신장군 전사지)(사진에서 빨간 별표가 전사지임)
(3.14일 이순신대교 홍보관 야외공원에 설치된 노량해전사 요약)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조명연합군은 철병하는 침략군을(왜군을) 추격하는 것으로 전략을 전환하였다. 명군은 조선군과 함께 울산왜성을 공격목표로한 동로군과 사천왜성을 목표로한 중로군, 순천왜교성을 목표로한 서로군을 편성하여 동시에 남진하였다.”
“ 이와 아울러 진린의 명나라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을 하나로 묶어서 수로군을 편성한 다음 순천왜교성을 함께 공격하도록 하던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이른바 사로병진작전을 세워 9월부터는 남해안 일대의 적군에(일본군) 대한 공격을 일제히 개시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의 저항이 의외로 완강하여 결국 사로병진작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 사로병진작전의 수로군은 7월16일 고금도에서 명나라 진린의 수군과 이순신의 조선수군이 합세하여 7월24일 조명연합함대를 편성하여 홍양의 절이도를 거쳐 9월20일 묘도에(광양만에 있는 섬) 도착하여 묘도를 중심으로 조명연합육상군과 연합전선을 구축함으로써 정유재란의 최후총력전을 펼쳤다. 그러나 10월3일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이순신과 진린의 수군만이 단독으로 왜교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첨사 황제득과 군관 이청일 등이 전사하였다. ”
“ 이때 퇴로가 막힌 고니시가 후퇴를 위해 진린을 뇌물로 매수했으나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해 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마침내 11월19일 왜군은 자신들의 퇴로를 만들기 위해 노량으로 진출하는 왜선 500여척이 움직이자, 이순신장군은 조명연합수군 200여척으로 노량으로 이동해 오는 왜군을 공격하여 크게 이겼다. ”
“ 이때 충무공 이순신은 노량에서 관음포로 도주하는 마지막 왜군을 추격하던 중 흉탄에 쓰러지면서 싸움이 급하니 내가 죽었다는 말을 하지 말라는 세계사에서 길이 빛나는 유언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
“ 한편 왜교성에서 봉쇄당하고 있던 고니시군은 노량해전의 혼란을 틈타 묘도(광양만의 섬)의 서쪽을(광양만) 통해 퇴각하였으며 노량해전을 끝으로 정유재란이 막을 내리고 7년간의 긴 전쟁도 끝이 났다. ”
이 전사 기록에서 주목할 점은 “ 10월3일 뇌물에 매수된 유정이 군사를 움직이지 않자 ” 라는 문구와 “ 퇴로가 막힌 고니시가 후퇴를 위해 진린을 뇌물로 매수했으나 이순신은 진린을 설득해 왜군의 공격에 대비했다.” 라는 문구가 있다. 이렇게 국운과 목숨이 걸린 전쟁터의 혼란속에서도 적군과 내통하는 뇌물수수행위가 거래되고 있다는 것은 인간이란 믿을 수 없는 존재임을 방증하는 기록인 것 같다.
(3.14일 여수시 묘도와 묘도대교)
묘도는 광양시 앞바다에 떠있는 섬이며 묘도대교와 이순신대교를 연결하는 거점역할을 하고 있다. 행정구역은 여수시다. 묘도대교를 남쪽으로 건너면 여수시 적량동이고 이순대교를 북쪽으로 건너면 광양시다. 이순신대교의 중간쯤을 경계로 광양시와 여수시가 갈라지는 것 같았다. 여수시 이순신대교홍보관을 둘러본 뒤 우리는 다시 이순신대교길로 진입해서 묘도 섬을 남북으로 횡단해서 묘도대교를 건너서 여수시 적량동으로 향했다.
묘도대교를 건너서 우회전하니 여수시 LG화학공장 입구이고 이 입구 맞은편은 전라선 적량역이라는 간이역이었다.(적량 간이역 주소는 여수시 적량동 1153-9번지다.) LG화학공장은 무척 큰 공장인데 대형 구형돔 같은 대형탱크들이 무척 많이 밀집해 있다. 이 LG화학공장 입구에서 유턴해서 우리는 다시 묘도대교쪽으로 방향을 틀어서 이순신대교를 건넌뒤 광양시내로 진입했다. 그리고 섬진강 입구에 있는 광양시 관광지 두 곳을 더 둘러보려고 광양시 동쪽인 진월면쪽으로 향했다.
(여수시 적량동에 위치한 LG화학공장 모습)(묘도대교에서 남서쪽으로 바라본 모습임)
(묘도대교 북단끝에서 남쪽으로 바라본 묘도대교 모습)(다리 주탑 뒤로 보이는 산이 여수시 적량동 일대임.)
(3.14일 광양시 동쪽의 태인동 소재 수변공원, 진월면 망덕포구와 배알도 섬, 망덕포구의 정병욱 교수가옥 등)
광양시 동쪽의 태인동에는 포항제철공장이 있다. 그 옆에는 도로 하나 건너서 배알도 수변공원이다. 이 배알도 수변공원 바로 옆이 섬진강물과 남해바다가 합류하는 곳이다. 이 바다가 해변은 모래밭이라서 여름에는 해수욕장이 된다. 이 해변가로는 자전거길이 쭉 뻗어 있다. 그리고 주변은 울창한 해송이 가득 드러찬 솔밭이다.
이 광양시 태인동 수변공원 바다 북쪽으로 약1km 떨어진 곳의 섬진강 어귀에는 조그만 섬이 하나 있는데 이것이 바로 배알도 섬이다. 이 수변공원에서 배알도 섬까지는 산책로 다리가 바다위로 연결되어 있어서 도보로 배알도섬까지 걸어갔다고 돌아 올 수 있다.
또 이 배알도섬에서 서쪽으로 약 500미터쯤 떨어진 곳이 망덕포구인데 이 망덕포구의 행정구역은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다. 그리고 배알도 섬에서 망덕포구까지도 도보로 건너갈 수 있는 산책로 다리까지 설치되어 있다. 따라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와 광양시 태안동 수변공원까지는 산책로 다리를 타고 도보로 왕래할 수 있다.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에서 배알도섬을 경유해서 바다 건너 광양시 태안동 수변공원까지도 도보로 이동할 수 있으니 이것은 얼마나 좋은 섬진강 포구의 바다산책로 관광지인가. 아무리 봐도 백만불짜리 관광자원인 것 같다. 이 바다 산책로 다리위에서 광양만 바다와 노량해협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면서 섬진강 어귀 풍경을 감상하는 맛이 상당히 즐겁다.
(광양시 태인동 수변공원에서 바라본 배알도섬은 사진중앙 상단의 거북이 같은 숲이 배알도 섬이고 그 우측 산책로 다리는 여수시 태인동에서 배알도섬으로 건너는 산책로 다리이고 배알도 섬 좌측으로 보이는 다리는 배알도 섬과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로 연결되는 산책로 다리 모습임.)
(광양시 태인동수변공원에서 배알도섬까지 연결된 산책로 다리 모습임.)(사진 중앙 좌측에 보이는 산은 하동군 모습임.)
(광양시 태인동 수변공원에서 배알도섬으로 건너가는 산책로 다리 모습)
(배알도섬에서 바라본 태인대교모습임. 이 다리는 광양시 진월면에서 광양시 태인동으로 연결되는 대교임.이 태인대교 밑으로 흐르는 바닷물은 광양만으로 연결됨.)
(배알도에서 북쪽으로 바라본 섬진강 포구모습.왼쪽은 망덕포구.오른쪽은 하동군일대의 해변가모습)
(3.14일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의 배알도섬과 망덕포구를 연결한 산책로 모습)
이렇게 광양시 태인동 수변공원과 그 산책로 및 배알도 섬일대을 구경한 뒤 우리는 다시 광양시 태인동과 진월면을 연결해주는 태인대교를 건너서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845-1번지(망덕포구)쪽으로 이동했다.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는 섬진강과 남해바다가 서로 만나는 포구다. 이 망덕포구에서 동쪽으로 약 500m쯤 떨어진 바다위에 배알도섬이 위치해 있다. 또한 망덕포구의 이 배알도섬 우측으로는 섬진강물이 광양만 바다와 연결되어 흐르고 배알도섬 좌측으로는 섬진대교와 노량대교 및 남해대교 사천대교까지 바다로 연결된다.
따라서 이 섬진대교.노량.남해대교는 하동군과 남해도섬을 연결하는 교통망의 대동맥 역할을 하고 있다. 사천대교는 사천시와 남해도를 연결하는 교통망의 대통맥 역할을 하니 남해도는 이젠 섬이라 할 수 없는 곳이다.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에서 배알도섬으로 연결된 산책로와 배알도 섬 모습)(배알도 섬에서는 다시 광양시 태인동 수변공원으로 산책로가 연결되어 있음.)
(배알도 섬 산책로 위에서 바라본 배알도섬과 오른쪽의 태인동수변공원까지의 산책로 모습) (중앙상단의 멀리 희미하게 보이는 다리는 남해도와 하동간의 섬진대교 모습)
(3.14일 윤동주시인과 연희전문교 때의 친구 정병욱 교수 의 인연 이야기)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망덕포구에는 정병욱교수 부모님이 살면서 양조장 공장을 운영했던 옛집이 잘 보존되어 있다. 이 집에는 정병욱교수와 윤동주시인의 학창시절 인연에 대한 기록물들이 잘 전시되어 있다.
전 서울대교수 정병욱 교수가 연희전문학교 시절부터 윤동주시인과 깊은 인연을 맺었다. 윤동주 시인이 일제에 투옥되자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을 정병욱 교수가 자신의 모친에게 부탁해 이곳 부모님 가옥 지하실 장독 항아리속에 보관해 왔다.
윤동주시인이 고인이 되고 (1945년2월 일본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생을 마감) 조국이 해방되자 정병욱 교수는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인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윤동주 시인의 이름으로 발표하여 비로소 세상에 알려졌다.
고 정병욱 전 서울대교수는 남해군 설천면 출생이며 하동군에서 보통학교와 동래고등학교 졸업후 연희전문학교 시절에 북간도출신의 윤동주 시인을 만나 교분을 쌓았다.
정병욱교수가 1940년4월 연희전문하교 문과에 입학후 산문 “뻐꾸기의 전설”이란 글을 조선일보에 발표하자 윤동주시인이 이 글을 읽고 정병욱교수의 기숙사 방으로 찾아와 둘은 처음 만났다. 1941년부터는 정병욱교수는 윤동주와 함께 북아현동 등지에서 함께 하숙생활을 했다. 그때 정병욱교수는 윤동주시인으로부터 자필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를 인계받아서 1944년3월 그 유고시집을 자신의 모친에게 맡기고 정병욱교수는 일본군 징병으로 끌려갔다.
광양시에서는 윤동주 시인과 정병욱교수와의 인연으로 윤동주시인의 시집이 세상에 빛을 보게된 경위와 기록물 및 윤동주 시인의 유고시집이 보관됐던 정병욱교수 부모님 가옥을 관리하면서 광양시의 관광자원으로 관리하고 있다.
(정병욱교수 양력과 윤동주 시인과의 인연을 기록한 안내판 모습)
(정병욱교수와 그 모친등의 가족사진 모습.)
(윤동주 유고시집을 보관했던 정병욱교수 부모님 가옥에 대한 안내문 사진)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 만덕포구에 있는 정병욱교수 부모님이 살았던 주택겸 양조장 모습)
(정병욱교수 가옥내의 윤동주 유고시집을 보관했던 지하실의 장독대 모솝)
(3.14일 섬진강 산책로변에 세워진 윤동주 시인 시비)
진월면 망덕리 일대의 섬진강변에는 강변산책로가 잘 만들어져 있다. 이 강변 산책로변에는 윤동주시인의 유고시집인 “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이란 시집속의 시가 기록된 시비가 아래와 같이 세워져 있다.
(윤동주와 망덕포구 시비를 세우면서 라는 안내표지판 모습)
이곳 시비의 상단에는 “윤동주와 망덕포구 시비를 세우면서”라는 제목을 달고 그 아래쪽에 다음과 같은 글을 기록하고 있다.
“ 광양시 진월면 망덕리에 소재하고 있는 정병욱 가옥은
윤동주 시인이 생전에 써서 남긴 원고가 온전히 보관되
었던 곳이다. ”
“윤동주 시인은 (1917-1945) 1941년에 하늘과 바람과 별
과 시를 발간하려 했으나 일제의 방해로 실패하자 자필
시집3부를 만들어 그중 1부를 그의 절친한 친구 정병욱
(전서울대학교 국문학과 교수,1922-1985)에게 맡기고
1945년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
다. ”
“정병욱은 이 원고를 자신의 가옥에서 소중히 보관해오다
광복후 1948년 고인의 뜻을 받들어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라는 제목으로 세상에 출간하였다.”
“광양시에서는 이러한 인연을 기념하기 위해 윤동주 시인
의 육필원고를 새겨 시비를 세우게 되었다.
2020.2.19. ”
(시집속의 “별을 헤는 밤”의 시를 기록하고 있는 표지판 사진 모습) (시비에 새겨진 “별 헤는 밤”이라는 시의 내용을 기록하고 있음.)
이 시비의 하단에는 “별 헤는 밤”이라는 제목의 시가 아래와 같은 내용으로 검은 오석판에 새겨져 있다.
“ 별 헤는 밤
윤동주
계절이 지나가는 하늘에는
가을로 가득 차 있습니다.
나는 아무 걱정도 없이
가을속의 별들을 다 헤일 듯 합니다.
가슴속에 하나 둘 색여지는(새기어지는)
이제 다 못 헤는 것은
쉬이 아츰이(아침이) 오는 까닭이오.
내일 밤이 남은 까닭이오.
아직 나의 청춘이 다 하지 않은 까닭입니다
별 하나에 추억과
별 하나에 사랑과
별 하나에 쓸쓸함과
별 하나에 동경과
별 하나에 시와
별 하나에 어머니 어머니
어머님.
나는 별 하나에 아름다운 말
한마디식 불러 봅니다. 소학교 때 책상을
같이 햇든(했던) 아이들의 일홈과(이름과)
벌써 애기 어마니 된 (어머니 된)
게집애들의(계집애들) 일홈과 가난한 이웃
사람들의 일홈과 비둘기,강아지,토끼,노새,
노루,프랑시쓰 썀 ,라이넬 마리아 릴케 (라이나
마리아 릴케) 이런 시인의 일홈을 불러봅니다.
이네들은 너무 멀리 있습니다.
별이 아슬이 멀 듯이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게십니다.(계십니다)
나는 무엇인지 그리워
이 많은 별빛이 나린 언덕우에 (위에)
내 일홈자를(내 이름자를) 써 보고
흙으로 덥허버리엇습니다.(었습니다)
띠는(찌는) 밤을 새워(세워) 우는 벌레는
부끄러운 일홈을(이름을) 슬퍼하는 까닭입니다.
(1945.11.5.일)
그러나 겨울이 지나고 나의 별에도
봄이 오면 무덤 우에(위에)
파란 잔디가 피어나듯이
내 일홈자 묻힌 언덕 우에도 (위에도)
자랑처럼 풀이 무성할 게 외다. ” .끝.
이곳 시의 첫소절에는 밤하늘에 수많은 별들을 세어보지만 오늘 다 세지 못하는 것은 이 밤이 짧기 때문이오 그러나 내일 밤이 또 있고 아직은 내가 청춘이니 앞으로 많은 날들이 남아 있기에 걱정하지 않습니다 라는 표현으로 보입니다.
중간소절에서는 이 많은 별들과 나의 정겨운 추억, 사랑, 쓸쓸함, 시 ,어머니, 소학교 계집동창들 이름과, 가난한 이웃들, 비둘기, 강아지, 토끼, 노새, 노루, 라이나 마리아 릴케의 이름들을, 저 밤하늘의 별들과 연결시켜 봅니다. 그러나 이들은 너무 멀리 있어서 그립고 보고싶지만 소용없는 일이라서 윤동주라는 이름을 흙위에 썼다가 그냥 지워버립니다. 또 긴 밤을 세워가면서 벌레가 우는 것은 정겨운 이름들이 보고 싶은데 보지 못해 슬프기 때문입니다 라고 표현하는 것으로 해석됩니다.
이 시의 마지막 소절에는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면서(윤동주 시인은 1945년2월 일본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생을 마감했음) 내 무덤앞에 있는 묘비속의 윤동주라는 이름은 무덤위의 자랑스런 풀처럼 부끄럼 없이 살았다고 표현하는 시인의 속마음이라고 해석됩니다.
이렇게 만덕포구에서 정병욱교수 부모님 가옥과 섬진강 입구에 있는 배알도섬 및 그 산책로 등을 둘러보고 나니 시간은 14시30분경이었다. 우리는 다시 남해고속도로 진월ic를 빠져나와 하동ic쪽으로 이동했다.
(3.14일 하동읍내 식당에서 재첩국으로 점심식사)
우리는 하동ic를 빠져나와 하동읍내 재첩국 식당을 찾았다. 하동읍내에는 재첩국 식당이 여기 저기 많이 눈에 띠었다. 그렇다고 아무곳이나 들어갈 수는 없어서 고르고 골라서 찾아갔다. 식당은 조용하고 한적했다. 여기서 재첩국으로 점심을 잘 먹었다. 재첩국은 뿌연 국물속에 파란색 부추잎을 송송 썰어서 국물에 띠워놓은 부추입이 둥둥 떠있다. 이 국물속에는 재첩알이 가라앉아 있다. 이 재첩국은 담백한 맛이 먹을 만했다. 재첩국 2인분에(2만원) 참게장 1인분을(7천원) 시켰다. 참게장은 집사람이 좋아해서 시켰다.
(3.14일 하동군 금남면과 남해군 설천면에서 여관이나 모텔을 핸드폰 속 지도앱으로 검색)
우선 3.14일 밤을 1박해야 하기 때문에 우선 여관을 찾았다. 하동 금남면 한 곳을 찾아가니 영업을 하지 않는 곳이었다. 하동군 금남면 노량리 노량항에 도착해서 여관을 찾으니 방이 없다고 했다. 하는 수 없이 노량대교를 건너서 남해군 설천면 노량리로 이동해서 모텔을 찾았다. 모텔이 4곳이나 있다. 모텔 2곳을 찾아가서 숙박비를 물으니 2인1박에 6만원을 불렀다.
또 다른 곳을 찾았다. 마침 언덕위에 “민박”이란 광고판을 보고 찾아갔다. 이곳은 현금을 즉석에서 통장입금시는 1박에 4만원으로 숙박이 가능했다. 그래서 이 민박집에서 1박을 하기로 했다. 우선 민박집 주인 개인통장번호를 넘겨 받은 뒤 바로 핸드폰 은행앱을 열어 숙박비 4만원을 입금시켰다.
이 민박집에서 여장을 풀고 석식과 조식은 손수해서 식사를 했다. 잠도 별 탈 없이 잘 잤다. 밥은 햅반을(4개) 데우고 찌게는 돈육찌게를 끓여서 석식과 조식을 잘 먹었다. 냄비와 가스버너 그리고 찌개거리는 휴대해 간 것을 사용했다. 이 민박집에 도착했을 때의 시간은 3.14일 17시20분이었다. 서울에서 이곳까지의 금일 누적 주행거리는 441km였다. 1부 .끝.
(2부에서 동일제목의 이야기가 계속됨)
(동일제목의 이야기를 1부와 2부로 나누어 올린 이유는 파일 1개당 수록 가능한 사진 매수가 23개이하로 제약되기 때문임)
************************************************
(여행간 비용 지출액 : 155,429원)
1.1박2일 왕복주행거리 : 900km
2.평균연비:24.4km/리터당.(계기판에 표시된 내용이지만
정확성은 검증하지 못함/하이브리드 차임)
3.휘발유값=900km/24.4km*1580원=58,279원
4.고속도로통행료=36,300원(9건)-할인50%환급=18,150원
5.조식용 김밥 1인분 = 2,000원
6.하동읍내재첩국(점심값2인분)=27,000원
7.남해군설천면노량리민박집1박숙박료=40,000원
8.집사람 구매내역 : 10,000원
가.휴게소 옥수수차 1병=5,000원
나.휴게소 빵 1개=5,000원
9.여행비용지출액 총계 : 155,429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