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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동명천제단입니다.
대한제국 애국가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사
성수무강하사
해옥주를 산같이 쌓으시고
위권이 환영에 떨치사
오천만세에 복록이 일신케 하소서
상제는 우리 황제를 도우소서
먼저, 저희 대한제국 재건회(大韓帝國 再建會)를 방문해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지금까지 대한제국의 재건과 관련하여 제국(帝國)이라는 이름으로 이백육십육편(二百六十六篇)에 달하는 글을 쓰며, 저희 스스로도 우리 민족과 국가에 대한 많은 것을 배우고 또 많은 것을 느끼며, 새롭게 재건회가 발전하는 느낌을 받고 있습니다. 금일도 전국 팔전(全國八殿)의 내용으로 글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금일은 경주에 있는 총 세 개의 신전 중 세 번째 신전인 숭신전(崇信殿)입니다.
숭신전은 신라(新羅) 석씨 최초의 임금이셨던 석탈해(昔脫解) 임금을 모신 신전입니다. 왕의 공식 명칭은 탈해 이사금(脫解 尼師今)으로 이사금(尼師今)은 임금이라는 오늘날 일반적 왕(王)에 대한 호칭의 원래 원형이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다. 그런데, 이사금 명칭과 관련하여 삼국사기(三國史記)와 삼국유사(三國遺事) 두 권의 역사서에서는 유례에 대해 다른 해석을 하고 있어서 매우 흥미로운 부분이 되고 있습니다.
먼저, 삼국사기에서는 남해 차차웅(南解 次次雄)께서 붕어하실 즈음, 아들 유리(儒理)와 사위 탈해(脫解)에게 말씀하실 때 '내가 죽은 후에 너희 박(朴), 석(昔) 두 성(姓) 가운데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라'고 유언을 남기셨고, 후에 김씨 성이 또한 일어나 삼성(三姓)에서 나이가 많은 사람이 서로 왕위를 이었던 까닭에 이사금이라고 불렀다라는 내용이 나오고 있습니다.
즉, 남해 차차웅 이후에는 박씨성(朴氏姓)과 석씨성(昔氏姓), 그리고 김씨성(金氏姓)의 삼성이 있는데, 모두 나이가 많은 사람이 왕위를 이어가라는 뜻을 남기셨다는 의미입니다. 그래서 이사금의 명칭도 연장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을 하고 있습니다.
반면, 삼국유사에서는 치아(齒牙) 갯수가 많은 사람이 덕망(德望)이 높다는 옛 기록과 이야기에 따라서 유리와 탈해가 서로 떡을 문 후 잇자국이 가장 많았던 유리를 왕으로 추대했다는 이야기를 전하며, 이사금에 대한 설명 또한 삼국유사에서는 이질금(尼叱今) 또는 이사금이라는 칭호 또한 '잇금'에서 유래되었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는 어떤 내용이 진실이라고 생각되십니까?
위의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내용만 본다면, 충분히 양측 기록이 가능성이 있고 또 근거가 전혀 없다고 볼 수 없습니다. 역대 왕조의 정사(正史) 기록을 중요하고 또 특별한 근거없이 경시(輕視)하거나 무시(無視)할 수는 없기 때문이며, 그렇기 때문에 내용 자체가 아주 틀렸거나 또는 전혀 이치(理致)에 맞지 않는 내용이라고 보기 어려운 측면이 있다는 생각은 백분(百分) 납득됩니다. 하지만, 역사적(歷史的) 측면이 아닌 순수하게 이사금이라는 명칭 자체에 대한 국내 국어학자들의 언어학적(言語學的) 의견은 다른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에 우리는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바로, 이사금은 원래 왕(王)을 뜻하는 고대어인 왕검(王儉)의 신라 방언(方言)으로 해석을 하고 있다는 점인데, 이것은 매우 중요한 내용으로서 왕검이 바로 임금(님금)으로 변하는 과정의 연결 고리로 보는 하나의 시각입니다. 즉 해석의 근거로는, 이사금은 '니(메, 가장, 으뜸) + ㅅ + 금(큼, 크다, 위대)'의 차자(借字)로, 바로 훗날 '임금(님금)'으로 변한 것으로 해석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신라가 바로 지난 3월 9일에 저희 재건회에서 기록했던 '帝國 二百六十五: 팔전 중 세 번째 신전 숭덕전'에서 언급하였던 박혁거세(朴赫居世)의 서라벌(徐羅伐) 건국 이전에 이미 부친(父親) 시기에 국가가 건국(建國), 성립(成立)되어 있었다는 점과 육촌(六村) 촌장들이 바로 기자조선(箕子朝鮮)에서 적어도 왕족(王族)이거나 귀족(貴族) 출신의 유민들일 가능성에 대해서도 앞에서 언급했던 내용들을 통해 충분히 개연성(蓋然性)이 있다는 말씀을 드릴 수 있었습니다.
특히, 왕검이라는 이름은 단군조선(檀君朝鮮) 최초 시조단군(始祖檀君), 즉 대황조(大皇祖) 의 휘(諱)였기 때문에, 삼조선(三朝鮮)으로 이어지는 고조선(古朝鮮) 중에서도 특히 왕족이 아니라면 당시의 설사 귀족이라고 하더라도, 전 왕조였던 단군조선 수천 년 전의 최초 기록이며, 왕실의 비밀 족보로 남아 있는 단군의 고유 휘까지 쉽게 알기는 당시의 상황으로 어려웠을 것으로 보이기 때문에, 따라서 일반 백성의 경우는 접하는 것조차 거의 불가능 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신라의 최초 국가 서라벌에서 임금의 최초 호칭이었다고 하는 이사금의 유래가 바로 왕검이었다는 설은, 바로 신라의 첫 국가였던 서라벌 국가의 주체가 고조선의 두 번째 왕조인 기자조선(箕子朝鮮)의 왕족이라고 하는 우연일 수가 없는 매우 중요한 근거이며, 바로 신라가 단군조선(檀君朝鮮)부터 내려온 고조선(古朝鮮)의 진정한 계승자(繼承者)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또 하나의 매우 유력한 근거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예는, 당시 서라벌이 세워졌을 시기의 삼한(三韓)내 많은 같은 시기 소국(小國)들이 자신들의 군장(君長)이나 왕을 호칭하던 명칭은 소위 건길지(鞬吉支)라고 하는, 지금의 현대 시각으로 본다면 조금 생소한 이름으로 부르던 그런 시대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부여(夫餘)와 고구려(高句麗)에서는 오랫동안 전통적인 왕의 호칭이 가(加)와 개차(皆次)였고, 백제에서는 부여와 고구려의 약간의 영향을 받았지만 더욱 발전시킨 형태로써 자신들의 왕을 호칭하던 명칭으로써 어라하(於羅睱)로 하였다는 점은 요즘 국민들에게도 매우 잘 알려진 사실입니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고구려가 망하고 후에 고구려를 계승하는 국가로 나중에 건국된 발해(渤海)의 경우 조차, 왕에 대한 자신들의 고유한 호칭으로 귀족들은 왕에 대한 호칭으로 기하(基下)로 불렀고, 또는 백성은 왕을 가독부(可毒夫)로 불렀다는 것을 통해서 본다면, 신라에서 오직 유일하게 왕에 대한 호칭으로 단군왕검의 왕검이라는 휘가 변형되어 이사금으로 불렀다는 것이 얼마나 독특하고 또 특수(特殊)했는가를 명확하게 확인하게 되는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더욱이, KBS(Korean Broadcasting System)가 지난 2009년 9월 5일에 방송한 역사스페셜(history special)을 보면 '[특별기획] 만주대탐사 2부작- 제2부 금나라를 세운 아골타, 신라의 후예였다!'는 제목으로 과거 금나라(大金國)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방송한 바 있었습니다.
여기서 보면, 영화 '마지막 황제(The Last Emperor)'를 인용하며, 1959년 중국 푸순(撫順) 전범 재판소에서
"아이신줘러 푸이, 전범자 아이신줘러 푸이(愛新覺羅 溥儀), 나이 53세, 만주족 북경 출신..."
이라고 호명하는 장면을 방송으로 보여준 바가 있었는데, 방송의 내용 중에 나오는 아이신줘러는 바로 청나라의 황제 성씨로서 한자로 적으면 애신각라(愛新覺羅)가 됩니다. 바로 성씨 안에 바로, 신라가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예는 백제(百濟) 왕의 성씨가 부여국(夫餘國)의 국호인 부여(夫餘)로 성(姓)을 삼았다는 점도 역시 같은 사례(事例)였다는 점을 우리는 실체적 역사적 진실앞에 확인할 수 있는 내용입니다. 그렇다면, 무엇 때문에 국호를 아예 성으로 삼았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자신의 뿌리이며 자신의 기원을 잊지 않기 위함일 것입니다.
과거, 근대 이전의 시기만 해도 물자의 부족 등으로 역사적 사실이나 족보같은 개인 또는 가족들의 고유 기록을 유물로써 남긴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고, 이러한 사례는 왕족이라고 하여 크게 다르지 않았습니다. 예를 들어, 지금 중국(中國)의 역대 왕조들이 남긴 기록들이, 우리나라의 조선왕조실록(朝鮮王朝實錄) 등에 비해 매우 수준이 낮고, 내용적으로 매우 형편이 없을 정도로 부실(不實)한 것은, 물론 전쟁 등의 영향으로 많은 유물과 유산들이 파괴되고 사라지게 된 근본적 원인이라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만, 기록 자체를 많이 남길 수 없었다는 점도 십분(十分) 작용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즉, 이러한 사정을 한국의 왕족(王族)들 뿐만 아니라, 중국의 황족(皇族)들 역시 태어나면서 부터 죽을 때까지, 모든 내용을 상세하게 모두 기록으로 남길 수 없다는 점을 황족 스스로 상식적으로 알고 있었고, 심지어 자신이 죽고 묻힐 황릉(皇陵)까지도 도굴(盜掘)될 것을 이미 미리 알고 있었기 때문에 훗날 제국이 멸망(滅亡)하였을 때, 이름만 남게 될 자신들의 먼 미래에 대해 그래도 자신이 누구의 왕족이며 황족인가를 후대 사람들이 이름만 봐도 알 수 있도록 하기 위한 고육지책(苦肉之策)으로 바로, 성에 국호(國號)를 새겨넣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다시, KBS의 역사스페셜에서 방송되었던 '만주대탐사 2부작'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중국 북경(北京)의 중국 최대의 도서관인 수도 도서관(首都 圖書館)에 보면, 금나라 황실의 가계를 기록한 '송막기문(松漠紀聞)'이라는 책을 볼 수 있는데, 송막기문은 바로 송나라(大宋國)가 금나라와의 전쟁에서 대패하고 항저우(杭州)로 피신하고, 또 포로로 잡혀간 송나라 황제의 귀환을 위해 1129년 송나라의 홍호(洪皓)가 금나라에서 약 10년 동안 머물며 기록한 생생한 증언인데, 여기에서 매우 놀라운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즉, '송막기문'에 "여진 추장은 신라인이다. 호는 완안씨이며, 금태조 구대조의 이름은 감복, 시호를 추존하여 경원황제라고 하며, 금시조이시다. 부인은 명의황후이다(女眞酋長乃新羅人, 號完顔氏, 金主九代祖名龕福, 追諡景元皇帝, 號始祖, 配曰明懿皇后)."는 기록이 남겨져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나라의 정사(正史)인 금사(金史)에서는 금 시조(金始祖)의 형인 아고내(阿古乃)는 고려(高麗)에 남고, 둘째인 금의 시조와 동생 보활리(保活裡)는 여진으로 왔으며, 금시조의 8대손이 태조 아골타(金太祖 阿骨打)이다. 고려에서 온 금나라 시조의 이름은 함보(函普)였다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다만, 금사에서 언급하고 있는 고려는 시기적으로 신라를 고려로 인식하면서 생긴 기록상 차이이며, 감복과 함보는 비록 한자는 다르지만, 발음으로 본다면 감복과 함보는 만주어(滿洲語)를 한자로 음차(音借)하여 적은 사례이기 때문에 약간의 발음상 차이에 의한 한자 기록의 차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금사 본기(金史 本紀)
금지시조휘함보(金之始祖諱函普), [금나라 시조는 함보라 불리웠는데,]
초종고려래(初從高麗來), [처음에 고려에서 왔을 때,]
년이육십여의(年已六十餘矣). [이미 60여세 정도였다.]
형아고내호불(兄阿古乃好佛), [형은 아고내인데 불교를 좋아하여,]
유고려불긍종(留高麗不肯從), [따라 오지 않고 고려에 머무르면서,]
왈(曰), [말하기를,]
후세자손필유능상취자(後世子孫必有能相聚者), [후세 자손은 반드시 서로 모여 살 자가 있을 것이니,]
오불능거야(吾不能去也). [나는 따라가지 않을 것이다.]
독여제보활리구(獨與弟保活裡俱). [홀로 아우 보활리와 함께 왔다.]
금사의 기록을 토대로 살펴본다면, 금의 태조인 무원황제 완안 아골타(太祖 武元皇帝 完顔 阿骨打)가 역사적 인물로서 1068년생인 것을 감안(勘案)했을 때, 8대조인 함보로 거슬러 올라가면 금의 시조는 대략 900년대 초반의 인물이 됨을 알 수 있습니다. 즉, 신라와 고려의 교체기와 시기적으로 겹침을 알 수 있는 것인데, 금사의 기록이 결코 터무니없이 틀렸거나 잘못된 내용이 아님을 우리는 여기서 알 수 있고, 더욱 우리가 여기서 사실로써 확인할 수 있는 내용은 바로 신라의 유족(新羅遺族)들이 고려왕조(高麗王朝)로의 교체 시기에 만주(滿洲)로 넘어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는 내용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사실은 함보를 시조로 둔 금나라의 황실은 발해인(渤海人)을 왕비로 맞는데, 금나라의 최고 성군이신 세종(世宗)의 어머니, 정의황후 이씨(貞懿皇后 李氏)의 아버지 추와지(雛訛只)는 발해 유민들이 집단거주하고 있던 동경요양부(東京遼陽府) 출신의 발해인이었고, 정실(正室)인 명덕황후 오림답씨(明德皇后 烏林答氏) 외에도 원비(元妃)인 광헌황후 이씨(光獻皇后 李氏), 그리고 원비 장씨(元妃 張氏), 유비 대씨(柔妃 大氏) 등이 모두 발해인이었습니다. 금나라 4대 황제인 해릉양왕(海陵煬王)의 어머니는 발해의 왕손이신 자헌황후 대씨(慈憲皇后 大氏 )셨으며, 후궁으로는 원비 대씨(元妃 大氏)를 두고 있을 정도로 금나라는 자신의 조상인 신라뿐만 아니라, 왕비 역시 모두 발해 여인을 둘 정도로 동이족으로서의 스스로 뿌리를 잃지 않으려고 노력하였습니다.
금사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는 발해인 출신으로 정식 황제의 황후나 비빈이 되신 분은 각각 모두 1분과 12분이었고, 추존 황제의 황후나 비빈의 사례까지 보면 각각 3분과 2분이 더 계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금사에는 기록에 아골타 역시 발해유민이었던 장호(張浩)를 새 수도인 북경 건설 책임자로 등용할 정도로, 금나라는 대제국을 경영했던 발해의 경험을 토대로 국가체제를 확립하였다고 나오는데, 바로 장호에 대해 금사는 요양 발해인이다. 본래 성은 고씨로 동명왕의 후손이다(張浩遼陽渤海人 本性高氏東明王之後)는 기록을 남기고 있습니다.
그런데, 관련된 내용으로 금준(今俊)이라는 인물이 등장하고 있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약 두 가지의 설이 존재하는데, 하나는 고려 평주(平州)의 승려(僧侶)로 여진으로 도망쳐 들어가 아지고촌(阿之古村)에 살았는데, 그가 금나라 황실의 시조라는 설과 평주의 승려 김행(金幸)의 아들 김극수(金克守)가 여진의 아지고촌에 들어가 여진 여성에게 장가들어 아들 고을태사(古乙太師)를 낳고 그 현손인 아골타가 1115년 1월 금나라 태조의 자리에 올랐다고 하는 설입니다.
바로, 고려사 세가의 예종 10년(1115) 정월조의 기록으로 정사에 기록된 내용으로 매우 신뢰할 수 있는 내용인 점을 생각한다면 금태조 아골타의 출생이 결코 신라와 무관하다고 할 수는 없을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종합한다면,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에서 언급하고 있는 김행의 아들인 김극수가 여진의 아지고촌에서 아들 고을태사를 낳았고, 바로 고을태사가 함보 또는 감복이라는 내용이 바로 금나라 태조인 아골타의 선조라는 내용으로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 신뢰할 수 있는 고려와 금나라의 정사 기록을 통해 매우 자세하고 상세하게 결론내릴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여기에서 더 덧붙여서 확인할 수 있는 함보에 대한 내용이 있는데 바로 그가 김함보이며, 여진족 땅에 함보가 갔을 당시에 각 부족 사이에는 분쟁이 끊이질 않았지만, 우마변상법(牛馬辨償法)이라는 일종의 성문법(成文法)을 제정하고 각 부족으로부터 합의를 이끌어 냄으로써 그의 후손들이 완안 여진뿐만 아니라, 전체 여진족의 중심으로 자리잡게 됨을 금사에서는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물론, 평주의 승려라는 김행이라는 인물에 대해 안동 권씨(安東 權氏)의 시조로 추측하는 글도 상당히 많이 존재하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만, 안동 권씨의 시조인 권행(權幸), 즉 김행(金幸)은 비록 성함은 같지만 살았던 지역이 안동과 평주로 다르고 시기도 년대(年代)의 차이 때문에 동일 인물이라고 단정하기에는 많은 무리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오히려, 김행이라는 인물이 김씨 성을 가진 사실로 볼 때, 김행이 사실은 신라 왕실의 왕족이었을 가능성이 더 크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라 시대 왕족도 많은 분들이 승려로 출가를 한 사례가 당시에도 많았기 때문입니다.
또한, 비슷한 내용입니다만, 참고로 지난 2009년의 KBS '천추태후' 드라마(drama)에서 바로 천추태후(千秋太后)와 김치양(金致陽)의 아들인 김진이 훗날 금나라의 태조가 된다는 내용도 등장하게 되는데, 드라마 천추태후에서는 김진을 우여곡절(迂餘曲折) 끝에 훗날 천추태후가 데려가려고 했지만, 당시 김진을 죽음으로부터 어렵게 보호하고 있던 드라마상의 인물 독연이 고려 왕실로 가면 반드시 정적들에게 살해당한다고 하면서 독연이 김진을 자신의 아들인 금준이라고 하면서 돌려보내는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통해서, 고려의 왕족이 금나라 태조의 시조가 되는 것처럼 소개한 내용도 참고적으로 살펴볼 필요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은 천추태후 드라마에서만 등장하는 내용이기 때문에 역사적 사실로 믿기에는 한계가 있을 것으로 사료됩니다.
또한, 만주실록(滿洲實錄)의 기록에 따르면, 청나라 황실의 성인 아이신줘러에서 아이신(愛新)은 금(金), 줘러(覺羅)는 겨례(族)을 의미하며, 결국 아이신줘러라는 애신각라는 결국 금부족(金部族), 김씨(金氏)라는 뜻이 됩니다.
역사스페셜에서 방송된 내용을 확인해보면, 결국 금나라와 청나라의 황실 후예들은 모두 김씨를 성으로 삼고 있음을 우리는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연이라고 하기에는 역사가 너무 길고, 또 신뢰할 수 있는 신빙성(信憑性) 또한 매우 크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는 위대하고 유서깊은 우리의 실체적 역사라고 하겠습니다.
금일까지 숭덕전(崇德殿), 숭혜전(崇惠殿), 그리고 숭신전(崇信殿)까지 이야기를 마무리하면 신라에 대한 역사와 평가를 모두 마치게 됩니다. 앞의 글들을 통해 우리는 신라가 단순히 삼국시대에 한 나라로써 존재했던 작은 나라가 아닌, 단군조선부터 시작된 우리 고조선의 역사의 혈통적 계승 국가이며, 또한 신라가 고려(高麗)에 양국(讓國)하면서 비록 멸망을 하였다고 하지만, 고려왕조(高麗王朝)에서 현종(顯宗) 이후 신라와 고려의 혈연적 관계로 신라와 고려의 왕실이 함께 고려왕조를 통치하였으며, 만주(滿洲)까지 가서 금나라와 청나라의 뿌리가 되고 있다는 점에서 신라가 어떤 나라였고 역사를 지닌 우리 민족의 국가였는가를 확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대한제국의 재건은 단순히 한국내에서 상징적 존재로서 왕을 임명하고 복원하는 것에서 그치질 않습니다. 미국(the United States of America)과 소련(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이라고 하는 외세와 무지몽매(無知蒙昧)했던 일본제국 시대 당시 극렬 공화주의들에 의해 빼앗기고 왜곡된 우리 위대한 민족적 역사를 복원하여 한국을 중심으로 하는 다시 미래의 일본과 만주, 그리고 중국에 대한 역사와 미래까지 새롭게 통합하고 발전시킬 수 있는 유일한 길입니다.
아무리 우리의 선조가 세운 나라가 일본(日本)이고, 만주의 금나라와 청나라가 우리 신라인들이 세운 나라라고 떠든다해도 지금 우리나라가 대한민국 공화국으로 존재하는 한 이러한 견해의 글과 언어들은 어떤 국민이나 국가도 인정하지 않는 쓸데없는 공염불(空念佛)에 불과할 것입니다.
부디, 의식이 있고 미래에 대한 선도적 기상(先導的 氣像)을 가진 국내 지식인이라면 저희 재건회(再建會)에서 주장하는 내용에 대해 십분 공감해주시길 바라며, 함께 복벽 운동(復辟運動)에 동참해주시길 바랍니다. 대한제국의 복원과 재건은 다시 우리 동이족(東夷族)이 안중근 의사(安重根 義士)가 바라던 미래의 시대상(時代相)처럼 만주대륙(滿洲大陸)과 한반도(韓半島), 그리고 일본 열도(日本列島)가 한 국가가 될 수 있는 유일하고 마지막 길임을 깊이 인지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또한 제발, 지금 대종교(大倧敎)처럼 독립군(獨立軍)들의 제사(祭祀)조차 지내지도 않으면서 마치 대종교가 과거에 독립운동하면서 대종교인 10만명이 희생되었다는 식의 엉뚱하게 날조(捏造)된 주장만 일삼는 대종교측 내용은 부디 우리 국민이 신뢰하지 않으시길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심지어 지금도 대종교측에서 어떤 독립운동가가 마치 대종교에 오래 다닌 것처럼 이야기를 만들어서 국민에게 호도(糊塗)하고 거짓된 이야기로 꾸미는 행태를 반복하고 있는데, 분명하게 역사에 죄를 짓는 길임을 명심하기 바라고, 즉각 가짜 대표 내세워서 대종교를 계속적으로 깡패 집단으로 만드는 행태에 대해서는 즉각 중단하시고 물러나 주시길 바랍니다.
대한제국 만세! 존왕양이 만세!
감사합니다.
대한제국 재건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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