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민속씨름에서 활약하던 선수들이 샅바를 풀고 대거 격투기 무대에 뛰어들 채비를 하고 있다.
1월 해체된 신창건설 씨름단 소속의 김동욱, 신현표, 김경석 등이 K-1 진출을 준비하고 있으며 씨름 백두급 장사 출신 정민혁도 일본의 신설 격투기대회 ‘마즈(MARS)’와 계약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처럼 민속씨름 선수들이 속속 격투기 무대를 노크하는 것은 국내 민속씨름계의 침체로 더 이상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는 생계형 이유 때문이다.
이만기, 이봉걸 등 스타급 선수들을 앞세워 80년대 대단한 인기를 누렸던 민속씨름은 2000년대 들어 볼썽사나운 씨름계의 내분과 대회 운영 및 홍보 미숙으로 점차 하락세를 보였고 결정적으로 공중파 방송의 중계 포기라는 직격탄을 맞았다.
여기에 모그룹 홍보에 더 이상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프로씨름단들은 하나 둘 씩 해체되기 시작했고 현재는 현대삼호중공업 한 팀 만이 남아있다. 이런 암울한 씨름계의 현실에서 선수들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여기에 지난해 씨름을 포기하고 일본의 격투기대회 K-1에 진출한 최홍만의 성공신화는 비슷한 고민에 빠져있던 씨름 선수들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데뷔 무대인 서울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결국 월드그랑프리 파이널까지 진출해 K-1 정상급 파이터로 우뚝 선 최홍만은 ‘테크노 골리앗’이라는 별명으로 모래판을 평정했던 시절보다 더 큰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다.
많은 격투기 전문가들의 우려를 비웃기라도 하듯 최홍만은 K-1 진출을 앞두고 복싱 및 발차기 등 타격기술을 단기간 습득해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었고 이에 고무된 많은 씨름선수들도 앞 다퉈 도전 의사를 피력하기에 이른 것이다. 씨름으로 단련된 힘이라면 격투기 무대에서도 얼마든지 통할 수 있다는 것을 최홍만이 증명한 것이라는 믿음이 선수들 사이에 퍼져 나갔다.
최홍만의 성공은 예외적?
그러나 여전히 많은 전문가들은 그러한 생각이 매우 위험천만하다고 지적한다.
이동기 MBC ESPN K-1 해설위원은 “씨름에서 격투기로 전향하기 위해서는 처음부터 새로 시작해야 한다”며 “몸과 기술 모든 것을 다 바꿔야 하는데 일부에서 너무 쉽게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지적한다.
이어 이동기 해설위원은 “최홍만의 성공은 그의 큰 키와 리치에 기인한 바 크다. 하지만 그런 신체적 이점이 없다면 잡아서 넘어뜨리면 끝나는 씨름은 격투기에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강조했다.
또한 맷집에 대한 검증을 거치지 않은 씨름 선수들이 격투기 선수들의 정교한 펀치와 킥을 견뎌낼 수 있을지 여부, 그리고 반대로 빠른 스피드와 효과적인 타격기를 익히는 것도 큰 과제다.
다행히 최홍만은 맷집이 강했고 스피드가 좋았기에 빠른 적응을 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조건이 갖추어지지 못한 선수들의 경우 성공을 장담하기 힘들다. 실제로 체격과 힘 외엔 갖춘 것이 없는 스모 선수 출신 아케보는는 K-1 전적 1승 9패로 격투기 무대 적응에 완전히 실패하고 있다.
그라운드 기술까지 요구되는 MMA도 마찬가지다. 씨름 기술이 테이크다운에는 유리할 수도 있겠지만 그레플링 기술은 하루아침에 이루어질 수 없기 때문이다.
어느덧 인기 스포츠의 하나로 자리 잡은 격투기 무대에서 민속씨름 선수들이 좋은 활약을 펼쳐 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하지만 냉철한 판단과 철저한 준비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스모의 아케보노처럼 씨름의 전통에 먹칠을 하고 웃음거리로 전락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