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명고] 고구려왕의 계보 (알고보시면 더 재밋을거 같아서 일부만...)
해모수 ??? 유화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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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서노 ??? 동명성왕 ??? 예씨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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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리명왕
비류 온조
1.동명성왕(재위BC37년~BC19년) : 고구려의 개국 시조이자 초대 군주이다.
휘는 주몽, 추모, 상해, 추몽, 중모, 도모 등이 있으며 동명왕, 동명제, 동명성제라고도 한다.
BC 37년, 나라를 세워 국호를 고구려라 하고, 성을 고라 하였다. (원래 성은 해이다.)
BC 36년, 비류국의 왕 송양의 항복을 받았고, BC 34년에는 성곽과 궁실을 건립하였으며, BC 33년 행인국을 정복하고, BC 28년 북옥저를 멸망시켰다.
2.유리왕(재위BC19~AD18) : 휘는 유리, 유류, 주류이고 유리명왕이라고도 하며 동명왕의 맏아들이다.
BC 19년, 부여로부터 아버지 동명왕을 찾아 고구려에 입국, 태자로 책립되고 동명왕에 이어 즉위하였다.
(동명성왕이 남긴 징표 부러진 칼 조각을 주춧돌에서 찾아냈다는 설화가 있다.)
BC 17년, 계비인 치희를 그리는 황조가를 지었다.
BC 9년, 고구려를 위협하던 선비족을 토벌하였다.
BC 6년, 부여의 대소왕이 고구려에 볼모를 요청하였고 유리왕은 부여의 강력한 국력 때문에 태자 도절을 인질로 보내려 하였으나, 도절이 두려워 가지 않았다. 이에 대소는 군사 5만여 명을 이끌고 고구려를 침공하였으나 폭설로 많은 군사를 잃고 퇴각하였다.
3년, 도읍을 홀본(졸본)에서 국내성으로 옮기고 위나암성을 쌓았다.
9년, 부여왕 대소가 고구려를 침략하겠다고 위협하자 왕자 무휼은 부여의 사신에게 부여의 내부 사정부터 잘 다스리라 충고하여 돌려보냈다.
13년, 부여가 침공해 오자 무휼은 매복작전을 펼쳐 부여군을 크게 격파하였고 그 후 군사 2만으로 서쪽의 양맥을 쳤으며 한나라 고구려현을 빼앗았다.
유리명왕은 6명의 아들이 있었으나, 첫째인 도절은 요절하였고, 둘째 해명은 황룡국왕이 선물한 활을 부러뜨린 일로 자살하였다. 그리하여 셋째인 무휼이 왕위를 이어받게 된다.
유리명왕 ??? 송양왕의 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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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절 해명 갈사국왕녀?대무신왕?원비 여진 민중왕 재사?부여태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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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동 모본왕 태조왕 차대왕 신대왕
3.대무신왕(재위18년~44년) : 유리왕의 셋째 아들로 휘는 무휼이고 대해주류왕이라고도 불린다.
14년, 태자로 책봉되어 군국정사를 맡아보다가 유리왕이 죽은 뒤 즉위한다.
20년, 부여의 대소왕은 대무신왕에게 몸은 둘인데 머리는 하나인 붉은 까마귀를 보내어 "까마귀는 검은 법인데 이제 빛이 변하여 붉게 되었고, 또한 머리는 하나인데 몸이 둘이니, 이는 두 나라가 병합될 징조이다."라고 선전포고를 하였다. 이에 대무신왕은 "검은색은 북방의 색인데, 이제 변하여 남방의 색이 되었다. 또한 붉은 까마귀는 상서로운 것으로 그대가 이것을 얻었으나 가지지 못하고 내게 보냈으니 양국의 존망은 알 길이 없도다."라며 까마귀에 대한 해석을 달리하여 대소왕에게 전하였다.
22년, 부여 정벌을 감행, 동부여를 공격하여 대소왕을 죽이고, 고구려에 병합하였다.
26년, 개마국을 쳐서 복속시켰고 그 후 구다국의 항복을 받아내어 국토를 살수 이북까지 확대하였다.
한편 을두지, 송옥구 등의 인재를 등용하여 국사를 맡겨 내치를 다졌다.
28년, 한나라 요동 태수가 군사를 이끌고 침략하였는데 고구려군은 을두지의 진언을 따라 위나암성에서 수십 일 동안 농성하였다. 한군이 포위를 풀지 않자 을두지가 계책을 내기를 저들이 물이 고갈되기를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니 연못에서 잉어를 잡아 적장에게 보내도록 하였다. 그러자 적장은 성 안에 물이 있으니 단시일에 점령하는 것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퇴각하였다
32년, 왕자 호동을 시켜 낙랑군을 정벌하게 하였으며, 37년 재차 공략하였다.
(삼국사기-호동왕자설화 : 어느 날 옥저로 사냥을 나갔다가 낙랑 태수 최리의 딸인 낙랑공주와 사랑하게 되었다. 이때 낙랑에는 적병의 침입을 저절로 알리는 자명고가 있어서 정벌하기가 어려웠는데 호동이 낙랑공주를 꾀어 자명고를 찢게 하고 군사를 이끌어 정벌하였다. 태수는 이 사실을 알고 딸을 죽인 후 항복하였으나, 낙랑을 정벌한 호동은 원비의 참소와 공주에 대한 사랑의 번민으로 자살한다.
일설에는 대무신왕이 낙랑을 멸하기 위해 호동을 최리의 딸과 정략혼인시키고, 그녀를 본국으로 돌려보내 북과 뿔피리를 파괴하게 하였다고도 한다.)
4.민중왕(재위44~48) : 이름은 해색주, 대무신왕의 동생으로 대무신왕이 죽자 태자 해우(모본왕)가 어리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44년, 대사면령을 내렸으며, 45년에는 신하들에게 큰 연회를 베풀었다.
47년, 사냥을 나갔다가 민중원에 이르러 석굴을 발견하고 그곳에 자신을 장사지낼 것을 명하였다.
48년, 왕이 죽자 유언에 따라 석굴에 장사지내고 지명을 따서 왕명을 민중왕이라 하였다.
5.모본왕(재위48~53) : 대무신왕의 차남으로 이름은 해우, 해애루이다.
49년, 한나라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등을 공격하였으나, 요동태수의 제의로 화친을 맺었다.
이 해에는 폭풍이 불고 서리와 우박이 내리는 등 악천후가 있어 사신을 보내 굶주린 백성들을 진휼하였다.
모본왕은 원래 성품이 포악하고 정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들의 원성을 들었다.
51년, 기록하기를 "왕이 날로 포악해져 앉을 때는 사람을 깔고 앉고 누울 때는 사람을 베개로 베어 사람이 혹시 움직이면 용서없이 죽였으며, 신하 중에서 간하는 자가 있으면 활을 쏘았다."고 하였다.
53년, 결국 신하에게 피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