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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 오리지널 멤버였지만 1집의 엄청난 성공에도 불구하고 앨범 발매 6개월 만(86년 초)에 탈퇴하여 미국으로 갔던 싱어송라이터가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조덕환!
그는 '들국화' 1집에 수록되어 있는 '아침이 밝아올 때까지', '세계로 가는 기차', '축복합니다'를 만든 사람입니다.
1집 앨범 '세계로 가는 기차'에서 들리는 목소리의 주인공이 바로 조덕환입니다.
'들국화'를 좋아했던 저는 저 조덕환이란 분에 대해서 너무 궁금했답니다.
'들국화' 1집 수록곡 중 적다고 볼 수 없는 3곡을 만들었던 사람이 무슨 이유로 6개월만에 탈퇴를 한 것인지 너무나 궁금했습니다.
그랬던 그가 2009년 가을, 무려 4반세기인 24년 만에 영구 귀국하였습니다.
이유는 오직 하나!!!
'들국화'를 재결성하여 음악활동을 다시 본격적으로 하기 위해서...
그의 나이 올해 58세(54년생)입니다.
25년 전에 그가 그렇게 떠나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요?
무언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픈 사연이 있었겠지요...
2009년에 영구 귀국한 조덕환은 '들국화'를 재결성하고 음반을 내려 했으나 전인권의 심신 상태가 좋지 않아 재결성이 여의치 않자 본인의 1집 음반을 먼저 발표하기로 마음먹습니다.
그리하여 1년의 작업을 거쳐 지난 1월 1집 음반을 발표하게 됩니다.
그리고 지난 3월 EBS '스페이스 공감'에 출연하여 라이브 공연을 하였습니다.
그 역사적(?)인 공연 실황이 이번 주 수요일(4월 13일) 밤 12시 30분에 EBS의 전파를 탈 예정입니다.
저 혼자 보기가 너무 아까운 생각이 들어 이렇게 소개를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그의 1집 앨범 수록곡 중 '수만 리 먼 길'이 가장 절절하게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25년 만에(결코 젊다고 할 수 없는 58세의 나이에) 다시 음악의 길로 돌아오게 된 사연을 목소리로, 기타 연주로 들려주는 것 같아서요.
http://www.ebsspace.com/broadcast/bc_review.php?num=3066 (방송 다시 보기)
http://cafe.daum.net/ilsanband/5fSL/1736?docid=c2Bo|5fSL|1736|20110201092107&q=%BC%F6%B8%B8%B8%AE%B8%D5%B1%E6 ('수만리 먼 길' 음악 감상)
http://music.bugs.co.kr/album/261475 (벅스 뮤직)
전인권(54년생), 최성원(54년생), 조덕환(55년생), 허성욱(62년생)
이 네 사람이 '들국화'의 오리지널 멤버입니다.안타깝게도 허성욱은 지난 97년에 캐나다에서 사망하였습니다.
알고 보니 들국화의 주 멤버인 전인권은 '세시봉'의 후신이라고 할 수 있는 음악다방 '쉘부르' 출신이더군요.
재미있는 것은 조덕환이 1978년 제2회 대학가요제 출신이라는 것입니다.
고려대(8명)와 경희대(1명) 학생들 9명으로 구성된 '고인돌'이라는 그룹사운드로 나와 '날개'라는 노래로 동상을 받았더군요.
전인권(보컬, 어쿠스틱 기타), 최성원(보컬, 베이스 기타), 조덕환(보컬, 전기 기타), 허성욱(보컬, 피아노)...
드럼이 빠졌죠?
(드럼이 없다는 것은, 이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음악이 비트가 있는 강력한 록이 아니라 부드러운 포크 록이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갖게 해줍니다.)
1집 녹음할 때, 당시에는 다른 밴드에서 활동하던 주찬권(55년생)이 세션 자격으로 드럼을 맡았습니다.
기타리스트인 최구희(59년생)도 주찬권과 함께 1집 녹음에 세션으로 참여하였습니다.
주찬권은 손진태(62년생)와 함께 1집 발매 후 시작한 '라이브 콘서트' 때부터 들국화의 정식 멤버가 되었고 최구희는 2집 음반 녹음할 때부터 들국화의 정식 멤버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조덕환은 1집(1985년 9월) 발표 직후인 86년 초 갑자기 미국으로 떠나버렸습니다.
그 이유에 대해서 전인권과 최성원은 확실하게 이야기를 해주고 있지 않습니다.
1집에 비해 너무 많은 실망을 주었던 2집(1986)을 끝으로 들국화는 사실상 해체되고 말았지만 들국화는 현재까지 한국대중음악사에서 최고의 아티스트로 손꼽힙니다.
각 멤버들의 싱어송라이팅 능력은 물론, 국내 최초로 멤버 간의 유기적 작용에 의한 결정물로서 음악작업을 완성시킨 록밴드라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1998년과 2007년에 각각 대중음악 평론가와 기자 등 대중음악 관계자들이 한국 최고의 명반으로 선정한 100장의 앨범 중 '들국화' 1집이 모두 1위를 차지한 것 다 알고 계시죠?
(아래 내용은 제가 가지고 있는 들국화와 관련된 자료를 편집한 것입니다.)
통기타 진영에서 오랫동안 무명시절을 거쳤던 들국화 멤버들
85년 앨범을 내기 전 입소문으로 먼저 알려진 탓이었을까.들국화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그룹인 것처럼 표현되곤 하는데 1집의 멤버였던 전인권, 최성원, 조덕환, 허성욱은 모두 통기타 진영에서 오랫동안 무명시절을 거쳤다.
이들은 81년(혹은 82년)경부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인간적, 음악적 조우를 해왔고 결국 85년 들국화 1집을 대중에게 선보이게 된 것이다.
들국화 이전의 들국화 [전인권, 허성욱, 최성원] : 일명 전인권 트리오
83년 초부터 10월경까지 활동했던 3인조의 일명 전인권 트리오는 '매일 그대와' 이외에 최성원의 여러 자작곡들을 허성욱의 피아노와 최성원의 베이스 반주로 작곡자가 직접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84년 봄무렵 음악적 견해차를 보이던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세사람은 전인권 모친상을 계기로 해산 상태로 들어간다.
들국화의 출발 [전인권, 허성욱, 조덕환]
84년 여름 혼자 있는 전인권을 찾아간 것은 조덕환이었다.
조덕환은 전인권과 80년대 초 함춘호의 소개로 만나 강릉의 디스코테크에서 한 달 남짓 함께 활동했던 적이 있는 오랜 친구이다.
그는 함께 음악을 하진 않았지만 '이조시대' 에서 이영재, 한영애등과 활동하면서 일명 전인권트리오 멤버들과 지속적인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조덕환이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음악을 하기로 결정하고 전인권에게 음악을 같이 하자며 제의해 왔고 전인권, 조덕환, 허성욱 세사람은 합숙하다시피 연습에 돌입했다.
이 당시에 전인권과 허성욱은 음악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조덕환은 이전부터 전인권 트리오의 음악을 알고 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최성원의 곡을 포함한 전인권 트리오에서 부르던 노래들 그리고 자신의 자작곡과 새로운 록적인 팝음악을 섞어 새로운 그룹음악을 할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인권과 허성욱을 끌어들여 자신의 머릿 속에 있는 음악을 현실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강원도에서 맹합숙을 한 후 84년 12월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륨에서 그 곳에 온 모든 관중을 사로잡으며 역사적인 데뷰를 하였다.
롯데호텔에서 있었던 '젊은이의 록 콘서트'에서 성공적으로 데뷔한 들국화는 이후 85년 1월 최초의 단독 라이브 공연을 동숭동의 파랑새 소극장(지하1층)에서 갖는다.
이때 세션으로 최성원(베이스), 이영재(키보드,클라리넷) 등이 참여한다.
당시 드럼은 없었고 전인권이 대신 곡 중간중간 하이햇과 심벌을 적절히 구사했다.
그는 드럼을 담당 할 멤버를 차후에 추가 할 것이라고 했다.
최성원의 가입과 1집 음반 발매 그리고 장기 순회 공연
85년 5월에는 파랑새 소극장과 파고다 연극관에서 공연을 하게 되며 이때를 계기로 최성원이 정식으로 들국화에 가입하게 된다.
또 이 때 '사랑일뿐이야'가 들국화의 라이브의 레퍼토리로 추가된다.
이 공연 이후 들국화는 앨범 녹음에 집중하게 되고 역사적인 데뷰 앨범이 85년 9월에 발매된다.
이 1집 녹음에는 '믿음소망사랑'의 최구희와 주찬권이 세션으로 참가한다.
그동안 들국화의 곡들은 드럼 파트가 없어 리듬이 강조되지 않아 포크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앨범 녹음을 하면서 드럼이 추가되었고 들국화의 곡들은 훨씬 강화된 록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들국화 앨범은 발매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성공하였다.
1집 앨범의 성공 후 그들은 장기 순회공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들국화 신화는 창조되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순회 공연을 했지만 현실은 공연만으로는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진 않았다.
문화체육관 공연에서는 전기 문제로 인해 공연에 사용할 임대 장비의 대부분이 고장나기도 했다.
신촌 크리스탈 소극장에서 37일간 공연, 파고다극장에서 10일간 공연을 시작으로 대구 동아쇼핑센터, 부산 가톨릭문화센터등 공연이 계속됐고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문화체육관, 부산 이사벨여고 강당, 대구대학교 강당, 춘천 시민회관 등을 돌았다.
소극장 공연은 아니었지만 당초 계획한 6개월은 채운 셈이었다.
파고다 예술극장 공연 때부터는 허성욱의 친구로 들국화를 계속 따라다니던 손진태가 세컨 기타로 가세했다.
들국화의 가장 불행한 사건, 베일에 쌓여 있는 조덕환의 탈퇴
이때쯤 들국화의 가장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86년 초 조덕환의 급작스런 미국행이었다.
그의 미국행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들국화의 성공이 확실시 되었을 때 승리의 결과를 만끽해야할 들국화의 가장 핵심 멤버는 미국으로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최구희와 손진태가 대신했고 돌아올 가망이 없는 그는 탈퇴 처리되었다.
전인권이나 최성원은 팀에서의 조덕환의 위치와 탈퇴 원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회피했다.
사실 당시 조덕환은 전인권의 말처럼 기타리스트로서 코드웍이 불안했다.
앨범 나오기 전에 있었던 소극 장라이브에서부터 그의 기타 연주는 불안정했으며 가끔 삑사리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기타 때문에 1집 녹음에는 최구희라는 세션 기타리스트의 도움이 필요했다.
또한 최성원과 구별이 힘든 그의 보컬도 기타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데뷰 앨범의 성공 후 들국화 내에서의 조덕환의 입지는 줄고 있었다.
들국화 1집에서 전인권의 '행진'과 최성원의 '그것만이 내세상'이 들국화를 대표하는 노래가 된 반면 조덕환의 노래들은 그 앨범을 대표하지 못했다.
그럼 점이 데뷰 이전의 들국화의 공연에서 보여주던 작곡가로서의 조덕환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또한 과거 화음 위주의 팝록트리오였던 들국화는 데뷰 앨범 성공 후 완전한 록그룹이 되었으며 조덕환이 팝록트리오에서 맡던 화음의 중요도는 줄어들었고 라이브 공연에서 기타 역시 최구희에게 더 비중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당시 조덕환의 위치가 불안한 면이 있었지만 그것이 탈퇴의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조덕환이 탈퇴한 시점이 들국화 데뷰 앨범의 상업적 성공으로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있을 때이기에 때문이다.
더군다나 들국화 사운드의 창조 중심에 조덕환이 있었다.
그런 조덕환이 성공의 정점에 있을때 들국화를 갑자기 떠났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일지 모른다.
전인권은 조덕환이 떠난 이유를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로 대신했다.
모두 정확한 답변을 회피함으로써 추측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떤이는 결혼 때문에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였다면 맴버들이 대답을 회피할 까닭이 없다.
또 그것이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미국으로 도피한 조덕환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는 없다.
어쨌던 조덕환은 미국으로 사라졌고 이것은 들국화의 비극이 되었다.
조덕환의 탈퇴 이유 중의 하나일 것으로 추측되는 그의 기타
[아래는 최성원의 인터뷰 내용]
"(조)덕환이는 독특한 보컬이었는데, 간단히 얘기해서 '가장 외국 애들에 가깝게 노래('Carry on till Tomorrow' 같은 것)를 부르는' 사람이었어요.
다만 기타리스트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밴드에서 리드 기타를 맡기에는 조금 미흡했죠.
1집을 녹음하면서 (조)덕환이의 기타에 대해서 말이 많았어요.
그리고 내 생각이지만 그때 (조)덕환이는 굉장히 술을 많이 했어요.
그때만 해도 (전)인권이랑 나랑 (허)성욱이는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거든요.
그래서 (전)인권이랑 (조)덕환이랑 트러블이 많았죠.
음반을 낼 때 밴드 형태로 해야 되겠다는 것은 어느 정도 감을 잡고 있었어요.
드럼의 경우 우리 팀에는 원래 드럼이 없었으니까 (주)찬권이가 세션으로 참여한 것이고, 기타의 경우 (조)덕환과 (최)구희가 같이 시작했는데 (조)덕환이 중간에 빠지게 된 케이스죠.
일단은 (조)덕환이의 기타가 (1집 앨범) 녹음에는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래서 '축복합니다'의 간주 정도를 (조)덕환이가 어쿠스틱 기타로 연주했고, 나머지는 전기 기타는 (최)구희, 어쿠스틱 기타는 내가 연주하게 되었죠.
1집 앨범 녹음은 어쨌든 끝났는데 그러고 나서 언젠가 한번 마찰이 있었고 그 시점에서 (조)덕환이가 탈퇴를 하게 된 것이죠."
라이브 앨범 발매와 들국화 2집의 실패 그리고 해체
들국화의 라이브
이 앨범은 1985년 12월부터 시작된 국내 최장기 6개월 라이브공연을 기념하는 음반이다.
본래 이 앨범은 실제 라이브 현장에서 녹음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라이브녹음의 경험이 없는 엔지니어들의 기술적 한계와 비싼 녹음 장비를 현장으로 가져오는 것에 대한 부담으로 인해 계획이 취소되었다.
결국 관객들을 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 모아 놓고 공개방송을 진행하듯이 녹음이 되었다.
따라서 라이브 콘서트 앨범은 공연장의 열광적인 현장감이 결여되었고 실제의 라이브 공연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86년 9월 25일에 들국화 2집이 발매된다.
들국화의 팬들은 2집을 매우 기다려 왔다.
그러나 앨범을 받아든 순간 어리둥절할 수밖에 없었다.
음악이 팬들이 기대하는 것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국화 1집에 환호를 보냈던 이유는 들국화 고유의 색깔이 담긴 팝록 사운드의 신선함과 새로움 때문이었다.
그러나 2집에서는 1집의 신선함을 찾아 볼수 없었으며 들국화 고유의 록사운드를 느낄 수 없었다.
(반면에 최성원은 예전에 어떤 인터뷰를 통해서 개인적으로는 1집보다 2집을 좋아한다고 말한 바 있다.)
결국 이 앨범은 실패하였고 1집의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들국화는 87년에 해체된다.
해체는 팀 내분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멤버들은 들국화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들국화 결성 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연이였던 잠실 체육관 공연을 마지막으로 들국화를 종료시킨다.
모두의 기대를 모았던 2집이 1집의 음악적인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그룹내에서 음악적 성격을 그려내던 조덕환이 떠나자 들국화는 곧 고유의 신선한 사운드를 상실한다.
2집에서 최성원과 전인권은 새로운 곡들(사실은 이미 불리워지던 노래들)을 실었지만 그것은 들국화가 아니였다.
그 노래들이 들국화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그 노래를 신선한 들국화만의 이미지와 색깔이 있는 록사운드로 변화시켜줄 조덕환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덕환은 들국화에 없었다.
1집에서 전인권, 허성욱, 최성원, 조덕환은 들국화의 음악을 생성하는데 동일한 기여를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수평적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각각 멤버의 음악적 역량을 묶어 들국화의 색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것은 조덕환이었다.
조덕환이 떠난 들국화에 재능있는 새로운 멤버들이 들어왔고 2집에서는 그중 누군가는 조덕환의 역할을 대신해 멤버들의 역량을 묶어 들국화만의 신선한 팝록사운드를 만들어내야 했다.
2집에서 그 역할을 최성원이 대신했지만 그는 록커가 아니었고 나름대로 앨범을 팝록사운드로 구성했지만 1집의 사운드와는 차이가 있었다.
(최성원은 지금도 '들국화'는 록밴드가 아니라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조덕환과 최성원의 음악적 성향의 차이는 1, 2집의 대비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으며 최성원이 1집의 흐름을 이어나갈 수 없음은 분명해졌다.
2집의 참패 이후 조덕환의 공백을 아쉬워하며 그룹을 꾸려나갈 대안을 찾지 못하던 들국화의 최선의 선택은 화려하게 들국화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결국 들국화는 1집의 성공을 추억하면서 87년에 막을 내리게 된다.
http://www.maniadb.com/artist.asp?p=103419&o=d ('들국화'의 모든 앨범을 볼 수 있는 사이트)
http://blog.naver.com/arpuer/100132980778 (대한민국 최고의 명반을 보유한 밴드)
http://weiv.cafe24.com/view_detail.html?code=interview&num=1962 ('들국화'의 고수, 주찬권 인터뷰) : 2002년 3월 5일
http://ager94.tistory.com/101 (인물 디벼보기 '가객열전' - 전인권) : 2002년 말 ~ 2003년 초
http://weiv.cafe24.com/view_detail.html?code=interview&num=1963 ('들국화'의 브레인, 최성원 인터뷰 1회) : 2003년 2월 26일
http://weiv.cafe24.com/view_detail.html?code=interview&num=1997 ('들국화'의 브레인, 최성원 인터뷰 2회) : 2003년 2월 26일
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318&bigcateidx=11&subcateidx=13&mrbs=1&history=1 (전인권 인터뷰) : 2003년 8월
http://www.izm.co.kr/contentRead.asp?idx=22671&bigcateidx=11&subcateidx=13&mrbs=1&history=1 (조덕환 인터뷰) : 2011년 3월
들국화의 탄생과 해체
■ 들국화의 탄생과 한국 사회
80년대 중반 한국경제는 유래 없는 급성장을 한다. 이것은 70년대부터 이뤄온 사회기반 산업에 대한 대기업 중심의 투자가 정치와 경제의 극심한 위기를 극복하면서 이뤄낸 것이었다.
1차 오일쇼크 이후 호황국면으로 접어든 73년 정부의 '중화학공업화' 선언이후 부터 정부주도의 중화학공업 육성정책이 본격적으로 진행된다.
또한 75년에는 월남이 패망하면서 미국에서 주한미군철수논의가 본격화 된다. 이에 박정희는 자주국방과 핵개발을 통해 북한의 남침에 대비하고 대미관계를 유지시키려 한다. 또한 자주국방정책의 바탕이 되는 중화학공업을 본격적으로 육성하고 집중투자를 하기 시작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70년대말부터 본격적인 재벌체제가 성립되었다.
79년의 제2차 오일쇼크는 정부가 무리하게 추진하던 중화학공업화의 발목을 잡는다. 무리한 투자는 고금리의 외채부담을 가중시켰고 국내에서는 살인적인 인플레로 이어졌다. 게다가 79년의 오일쇼크로 인한 원유가의 상승은 경제의 붕괴위기로 다가왔다.
79년 10월의 박정희 시해사건은 국내 정치상황을 혼란으로 몰고갔으며 그것은 경제에까지 파급되었다. 광주학살이라는 혼란을 딛고 정권을 잡은 전두환 군부는 80년대 초 산업합리화 조치로 위기에 처한 중화학공업산업을 국가적으로 지원하여 구원해주고 이를 계기로 중화학공업은 안정화로 접어들게 된다. 중화학공업의 지원은 이 산업을 바탕으로한 재벌체제를 결정적으로 강화시켜 주었다.
85년 이후 추진된 경기부양책과 통화량확대 방침은 3저(유가하락,금리하락,달러화 하락)라는 호기를 만나 86 아시안게임, 88 올림픽을 치루어냈고, 우리 경제는 급속히 팽창하며 부의 축적과 확대를 이루었다.
85년 중반 이후 시작된 3저현상은 89년 초까지 지속되었다. 달러화의 하락은 엔화의 강세로 이어지고 수출의 경쟁력 강화로 이어졌다. 3저효과로도 불리는 이 기간동안 460억불에 달하는 경상수지 흑자를 달성했고 연간 12%의 놀랄만한 경제성장률을 보였다.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의 개최는 사람들을 변화시켰다. 각종 행정편의와 규제조치의 완화로 사람들은 사고와 행동이 자유로워지고 있었고, 경제의 팽창으로 자동차 100만대 시대를 열었고 관광, 유락, 외식 등 각종 신생산업을 탄생시켰으며 소비 패턴은 날로 고급화를 지향해갔다.
87년 노동자 대투쟁이후 임금이 급속도로 상승되면서 대기업의 자본의 일부를 돌려받은 노동자들은 중산층으로 진입하고 있었으며 정치적인 면은 점차 희석화 되고 있었다. 또한 87년의 대통령선거를 통해 통화량이 급증하였으며 그를 통해 80년대 형성된 부는 다양한 계층으로 이전되었다.
80년대의 경제적 성장으로 사람들은 보다 다양한 욕구를 가지게 되었으며 정치적인 자유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다양한 욕구의 증대는 문화와 소비의 다양화로 이어졌으며 80년대 중반의 가요는 사람들의 새로운 욕구를 반영하여 한층 발전하였다.
이 시기에는 시나위로 대표되는 언더 헤비록씬, 들국화로 대표되는 동아기획사단, 주현미를 필두로 한 트로트, 김완선, 소방차등의 댄스계열, 이문세, 변진섭등의 팝발라드계열등 새로운 가요의 흐름이 물밀듯 밀려오게 된다. 또한 이 시기를 통해 이 글의 최종 목적지이며 주제가 되는 서태지가 가요계로 진입하게 된다.
■ 동아기획
1) 동아기획의 출발
80년대 동아기획은 언더그라운드의 메카였다. 김현식, 들국화, 조동진을 비롯하여 봄여름가을겨울, 신촌블루스, 시인과 촌장 에서 푸른하늘, 김현철까지 기성가요의 상식과 틀을 거부하고 새로운 음악을 추구하던 실력있는 음악인들의 산실이었다.
사단이라고 불리울 만한 동아기획의 주요 구성원 대부분은 70년대 중후반에 통기타 진영에서 활동하던 사람들이었다. 통기타 진영에서 그들은 스타를 준비하고 있었으나 70년대말 통기타진영의 축소는 이들이 메인스트림으로 진출하는데 걸림돌이 되었다.
70년대 세대와는 달리 교복자율화와 두발자유화의 혜택(?)과 입시교육의 억압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워진 팝음악의 세례를 받은 80년대의 젊은 세대는, 80년대의 경제적인 발전과 맞물려 전두환정권의 자유화조치가 진행된 사회적 상황속에서, 음악적으로 별 감흥을 못느끼던 기성 가요와는 다른 새로운 가요를 요구하고 있었다. 이런 흐름속에서 동아기획사단의 음악인들은 기성가요와는 다른 음악성이 뛰어난 가요를 보여주고자 했다. 80년대에 동아기획사단 가수들은 기성가수처럼 연예인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그들은 예술가로 인정받고 싶었다. 당연히 TV출연 중심의 활동을 거부했으며 앨범판매와 라이브공연으로 자신의 실력을 인정받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흐름을 이해해주고 재정적 뒷바침을 해줄수 있는 무교동옆의 광화문에 레코드가게를 크게 운영하던 김영사장이 있었다.
78년 부업삼아 차린 레코드 가게를 운영하며, 터득한 노하우를 바탕으로 음반기획에 뛰어든 그(김영사장-인용자)는 82년에 동아기획을 설립하고 조동진의 '제비꽃' , 이어 우순실의 '잊혀지지 않아요', 김현식의 '사랑했어요' 등을 첫 작품으로 제작하였다.
기획사라고 하지만 동아기획은 방송이나 매체등의 특별한 홍보전략을 갖고 있지는 않았다. 이들의 앨범은 꾸준히 팔리면서 1년쯤 후에야 음악으로서 이름이 알려지는 식이었다.
동아기획이 전면적으로 나오는 것은 85년초부터 들국화를 후원하면서 부터인데 85년 9월의 들국화 데뷰앨범에는 동아기획이라는 이름이 앨범에 정확하게 등장한다. 그리고 86년에 등장한 '김현식과 봄여름가을겨울'의 김현식 3집에도 동아기획이라는 명칭이 분명하게 등장한다.
들국화가 85년 초에 라이브활동으로 인지도를 향상시키고 그해 9월에 1집을 발표하여 성공할 수 있었던 것은 동아기획의 재정적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이다. 들국화 1집(85년9월)그리고 김현식 3집(86년)의 연이은 성공은 동아기획을 메이저 기획사로 올려놓는다.
앞으로 동아기획 사단의 전개 과정을 들국화와 김현식을 중심으로 살펴보려고 한다.
2) 들국화
들국화의 시초
그들은 지하에서부터 갑자기 나타나 처음부터 거의 완벽에 가까운 창작력과 연주력을 보여주면서 직수입된 팝송이나 록 음악에 심취해서 '국산 가요' 라면 거들떠보지도 않던 청소년들을 단번에 휘어잡아 들국화의 추종자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컬트라고 하기엔 너무나 광범위하고, 폭발적인 현상이었죠. (한국락의 선구자그룹 들국화)
85년 앨범을 내기전 입소문으로 먼저 알려진 탓이었을까. 들국화가 어느날 갑자기 나타난 그룹인 것처럼 표현되곤 하는데 1집의 멤버였던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조덕환은 모두 통기타진영에서 오랫동안 무명시절을 거쳤다. 이들은 81년(혹은 82년)경부터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며 인간적, 음악적 조우를 해왔고 결국 85년 들국화 1집을 대중에게 선보이게 된것이다. 그것은 그동안 그들의 음악활동 기간을 뛰어넘는 결과물이었다.
들국화의 1집 멤버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조덕환은 모두 통기타 진영의 친구들이었다.
전인권은 음악감상실 '쉘부르'출신으로 전국을 유랑하며 통기타업소에서 노래하곤 했다. 쉘부르는 DJ로 유명한 이종환이 운영하던 통기타 업소로 70년대 초 통기타진영의 중심이었던 쎄시봉의 쇠퇴 이후 새로운 통기타가수들의 중심이 되었다.
전인권은 이후 78년 강인원, 이주원, 나동민과 <따로또같이>로 활동하며 '맴도는 얼굴'을 발표하면서 서서히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 노래는 대중들에게도 제법 알려져 있었고 전인권이 들국화로 활동하기 전까지 그의 얼굴과도 같은 곡이었다. 전인권은 앨범발표 이후 얼마 안 되어 곧 따로또같이를 탈퇴한 후 솔로로 활동하기 시작하면서 80년에는 히트레코드사에서 통기타 성향의 전인권 1집을 발표하지만 별 성과를 얻지 못한다.
정확한 시기를 알수없지만 80년대 초 전인권은 세션기타리스트로 활동하던 함춘호의 소개로 허성욱과 조덕환, 한춘근(후에 백두산의 드러머로 활동)을 만나 강릉의 한 디스코테크에서 그룹음악을 처음 시작한다. 그러나 한달쯤 되었을때 허성욱의 부모가 찾아와 팀은 해체된다.
80년대초는 통기타가수들의 기반이었던 업소들이 사라지던 시기이고 그들이 가수 생활을 위해서는 디스코테크 같은 업소에서 자신의 생활을 영위해야했다. 업소에서는 당시에 유행하던 댄스음악을 주로 연주했고 그외에 간간히 그들이 좋아하는 팝이나 록음악을 연주할수있었다. 통기타출신 가수들도 뜻이맞는 친구들끼리 그룹을 결성하며 업소에서 활동하면서 음악적 방향도 모색하고 금전적인 문제도 해결하곤 했다.
들국화 이전의 들국화 [전인권, 허성욱, 최성원] : 일명 전인권 트리오
다시 전인권이 통기타업소를 전전하고 있을때 집안의 허락을 받은 허성욱이 '동방의 빛'을 소개했다. 전인권은 이승재, 허성욱, 이원재, 권혁소와 함께 나이트클럽과 디스코테크에서 활동하며 댄스음악과 팝음악을 했다. 얼마후인 82년 8월,9월에 전인권과 허성욱은 다시 통기타업소인 '까스등' '모노'로 돌아와 자신의 고향과 같은 통기타 음악을 한다.
이때 역시 '모노'에서 활동하던 최성원을 처음만난다. 그는 80년 자작곡을 담은 <이승희, 이영재, 최성원>이라는 옴니버 스 앨범을 냈던 실력자 였다. 세사람은 곧 의기투합하게 되고, 피아노 반주에 소박하게 노래부르던 전인권 허성욱 듀엣은 최성원의 베이스와 보컬 그리고 하모니를 얻었고 정식적인 사운드를 구사할수있게 되었다. 그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레파토리 안에 처음으로 자신들의 자작곡을 넣어 부를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때의 레파토리는 '마이 라이프', '어네스티', '테이크 잇 투 더 리미트'와 자작곡 '매일 그대와' 였다.
우리는 성원이가 베이스기타, 성욱이는 건반, 그리고 내가 노래를 불렀다. <전인권 트리오>라는 이름을 쓰기도 했으나 말 그대로 무명이었다. 주로 노래한 곡은 <마이 라이프> <어네스티> <테이크 잇 투 더 리미트>등 빌리 조엘, 그룹 이글스 등의 조용한 멜로디 위주의 노래를 불렀다. 이때 부른 곡 가운데는 성원이가 만든 <매일 그대와>라는 노래도 있었다. 관객들은 <매일 그대와>라는 노래를 부르면 처음에는 그저 그런 노래가 있으려니 하는 눈치더니 한달쯤 그 노래가 다운타운에서 흘러나가자 따라 노래하는 사람도 꽤 있었다. "아 이것이 인기라는 거로구나"를 처음 피부로 느낀 순간이었다고 할까.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 전인권 1990)
'매일 그대와'의 메인보컬은 최성원이다. 최성원은 통기타 음악인 중에서 이미 실력을 인정받고 전인권과 합류하기 전에 '매일그대와'같은 자작곡으로 인정받고 있는 음악인이었다. 그는 전인권과 허성욱을 자신의 자작곡을 돋보여줄 수 있는 친구로 생각했고 전인권과 허성욱 듀엣에 자신이 가입하는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즉 세 명은 각자 동격의 인격이었고 음악적 역량이나 통기타그룹의 인지나 유명세에 있어서도 최성원은 최고였고 따라서 최성원은 자신이 그룹의 중심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외국곡이나 기성곡이 레파토리인 듀엣 전인권과 허성욱과 인기있는 자작곡을 부르는 일명 전인권 트리오와는 중량감에서 큰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를 만든 것은 최성원이었다. 자작곡을 원작자가 부르는 형식은 이때부터 시작되었을 것이다.(물론 '그것만이 내세상'같이 전인권이 부른 곡도 있다.) 즉, 전인권 트리오의 최고스타는 바로 최성원이었던 것이다.
83년 초부터 10월경까지 활동했던 삼인조의 일명 전인권 트리오는 '매일 그대와' 이외에 최성원의 여러 자작곡들을 허성욱의 피아노와 최성원의 베이스 반주로 작곡자가 직접 부르고 있었을 것이다. 최성원이 이미 작곡하여 준비하고 있던 노래들은 후에 <우리노래전시회>에 다양한 통기타계열가수들에 의해서 불리워져 수록되었으며 또 몇몇 곡은 들국화 2집에 다시 선보인다.
최성원의 노래들은 멜로디 위주의 노래이며 통기타 음악적 성향을 지니고 있다. 들국화 2집에 있는 최성원의 노래를 들어보면 당시 전인권트리오의 음악 경향을 추측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외에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같은 그들의 주요 라이브 레파토리 역시 피아노, 베이스, 보컬의 트리오 편성과 어울리는 노래로 당시에 부르던 노래로 추측된다.
들국화의 출발 [전인권, 허성욱, 조덕환]
84년 봄무렵 음악적 견해차를 보이던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 세사람은 전인권 모친상을 계기로 해산 상태로 들어간다. (주1)
본인이 생각하기에는 이 때쯤부터 최성원이 <우리노래전시회>를 준비하면서 독자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한 것이라 생각한다. 결국 84년에는 최성원이 기획한 언더 가수들의 옴니버스 앨범이며 최성원이 작곡한 여러 노래가 수록된 <우리노래전시회>가 발표되었는데 이 앨범에서 전인권은 '그것만이 내세상'의 노래를 맡았으며 허성욱은 피아노연주로 참여하게 된다.
그해 여름 혼자있는 전인권을 찾아간 것은 조덕환이었다.
조덕환은 전인권과 80년대 초 함춘호의 소개로 만나 강릉의 디스코테크에서 한달 남짓 함께 활동했던적이 있는 오랜 친구이다. 그는 함께 음악을 하진 않았지만 '이조시대' 에서 이영재, 한영애등과 활동하면서 일명 전인권트리오 멤버들과 지속적인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 조덕환이 집안의 반대를 뿌리치고 음악을 하기로 결정하고 전인권에게 음악을 같이하자며 제의해왔고 전인권, 조덕환, 허성욱 세사람은 합숙하다시피 연습에 돌입했다.
이 당시에 전인권과 허성욱은 음악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조덕환은 일명 전인권트리오의 음악을 알고있었다. 그의 머리 속에는 최성원의 곡을 포함한 전인권트리오에서 부르던 노래들 그리고 자신의 자작곡과 새로운 록적인 팝음악을 섞어 새로운 그룹음악을 할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전인권과 허성욱을 끌어들여 자신의 머릿 속에 있는 음악을 현실로 구현하기 시작했다.
이들은 강원도에서 맹합숙을 한 후 84년 12월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륨에서 그 곳에 온 모든 관중을 사로잡으며 역사적인 데뷰를 하였다.
지난해(84년-인용자) 9월 30일 밤이던가.
기자는 강원도 산골짜기용평골에 메아리치는 세갈래의 목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각각의 그 목소리들은 쥐어짜는듯 하면서도 끝없이 퍼져갔고, 듣는 이 모르게 귓가를 포근히 감싸주었으며, 안들리는듯 하면서도 완벽한 하모니를 이루는 하나의 색깔을 나타냈었다.
그때의 목소리들이 만들어준 분위기는 Bad Finger의「Carry On Till Tomorrow」, Styx의「The Best Of Times」, Supertramp의「Breakfast In America」그대로였다. ... (중략)
두달 후 12월 2일, 롯데호텔에서 있었던 록사운드 콘서트에서 이들의 진가는 나타났다. Hollies의「He Ain't Heavy He Is My Brother」외에 몇곡의 외국곡을 부른 다음, 최성원 작사작곡인 「그것만이 내세상」과 멤버인 조덕환의 곡 「아침이 밝아올때까지」를 불렀을 때 청중은 열광했다. 그것은 누가 연출한 광경도 아니었고 청중들의 맥빠진 답례박수도 아니었다.
피아노와 통기타의 앙상블에 조덕환과 허성욱의 하모니, 그리고 전면에 나서는 리드보컬리스트 전인권의 부채꼴처럼 뻗어 나가는 보컬이 만들어낸 짜릿한 감동에 어쩔 수 없는 청중들의 몸부림이었던 것이다. (월간팝송, 진한 감동의 꽃내음 흩뿌리는 팝/록 트리오, 1985)
당시에 들국화는 이 기사의 제목처럼 조덕환, 전인권, 허성욱의 팝/록 트리오였다. 이 공연으로 모든 관계자는 경악했고 동아기획의 김영사장의 지속적인 지원을 받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그들이 불렀던 'He Ain't Heavy He Is My Brother', '그것만이 내세상'과 '아침이 밝아올때까지' 와 함께 'Carry On Till Tomorrow'는 앨범이 발표될때까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 같은 단발 출연 무대 에서 고정 레파토리가 되었다. (주2)
롯데호텔에서 있었던 '젊은이의 록 콘서트'에서 성공적으로 데뷔 한 들국화는 이후 85년 1월 최초의 단독 라이브 공연을 동숭동의 파랑새 소극장(지하1층)에서 갖는다. 이때도 역시 트리오 구성이며 세션으로 최성원(베이스), 이영재(키보드,클라리넷) 등이 참여한다. 당시 드럼은 없었고 전인권이 대신 곡 중간중간 하이햇과 심벌을 적절히 구사했다. 그는 드럼을 담당 할 멤버를 차후에 추가 할 것이라고 했다.
무대에는 네모난 나무 상자가 자연스럽게 놓여있었고 전인권을 비롯한 모든 연주자들이 거기에 앉아 노래하고 연주하는 마치 통기타 공연같은 차분한 분위기의 공연이었다.
통기타의 진정한 대부 이백천씨는 이 공연에 참석하여 공연진행을 도와주었다. 이때 모든 관중은 코 앞에서 마구 질러대던 전인권의 보컬에 완전히 압도되었다. 당시의 들국화가 공연에 사용한 레파토리는 다음과 같다.
Carry on till tomorrow (Bad Finger) , The Best of times (Styx), Come Sail away (Styx), Breakfast in America (SuperTramp), The Logical Song (SuperTramp), You and me (Alice Cooper) , Everybody needs a friend (Wishbone Ash) , Take it to the limit (Eagles), Against the wind (Bob Seger), He ain't heavy, He's my brother (Hollies), 그것만이 내세상, 아침이 밝아올때까지, 매일 그대와, 더 이상내게, 축복합니다, 앞으로 앞으로(동요), 우리의 소원(동요)
당시의 들국화는 통기타적인 기타사운드와 화음이 살아있으면서도 록적이고 팝적인 분위기가 가득한 팝/록 사운드를 추구하고 있었다. (주3)
아래의 곡들을 들으면 들국화가 추구하려고 한 음악적 방향과 공연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을 것이다.
You and Me(Alice Cooper)
Everybody needs a friend(Wishbone Ash)
Carry on till tomorrow(Bad Finger)
일주일간 진행된 이 공연은 성황은 아니였지만 성공적인 공연이였으며 롯데의 공연과 맞물려 들국화에 관한 입소문이 퍼져나가게 된다. 그리고 이들은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의 출연으로 더욱더 유명세를 타게 된다.
최성원의 가입, 들국화 1집 발표 [전인권, 허성욱, 조덕환, 최성원]
85년 5월에는 파랑새 소극장과 파고다 연극관에서 공연을 하게 되며 이때를 계기로 최성원이 정식으로 들국화에 가입되게 된다. 또 이때 '사랑일뿐이야'가 들국화의 라이브의 레퍼토리로 추가된다.
이 공연 이후 들국화는 앨범 녹음에 집중하게 되고 역사적인 데뷰앨범이 85년 9월에 발매된다.
이 1집 녹음에는 '믿음소망사랑'의 최구희와 주찬권이 세션으로 참가한다. 그동안 들국화의 곡들은 드럼 파트가 없어 리듬이 강조되지 않아 포크적인 성향을 띄고 있었지만 앨범 녹음을 하면서 드럼이 추가되었고 들국화의 곡들은 훨씬 강화된 록적인 이미지를 갖게 되었다.
블루스 스타일의 느린 템포의 곡이였던 '아침이 밝아올때까지'는 앨범에서 편곡이 완전히 변경되어 보다 빠른 템포의 록적인 노래로 변모되었으며, 전인권 작사작곡의 '행진'이 추가되어 전인권의 작곡 솜씨가 최초로 선보였다. 그외에 조덕환의 '세계로 가는 기차'와 어떤날의 '오후만 있던 일요일'도 추가된다.
최고의 녹음스튜디오인 서울스튜디오에서 녹음된 이 앨범은 엔지니어들의 열의가 적극 반영되어 최고의 수준으로 녹음이 되었으며 그들의 녹음실력이 이 앨범을 명반으로 승화시키는데에 큰 힘이 되었다.
들국화의 성공과 장기 순회 공연, 급작스런 조덕환의 탈퇴
들국화 앨범은 발매후 얼마 지나지 않아 크게 성공하였다. 성공 후 그들은 장기 순회공연을 시작한다. 그리고 들국화 신화는 창조되었다. 그들은 열정적으로 순회공연을 했지만 현실은 공연만으로는 안정된 수입이 보장되진 않았다. 문화체육관 공연에서는 전기문제로 인해 공연에 사용할 임대장비의 대부분이 고장나기도 했다.
전인권은 아래와 같이 말한다.
85년 9월 우리에겐 너무나 역사적인 앨범이 출반됐다. 앨범 재킷은 비틀스의 마지막앨범 재킷과 비슷하게 만들었다. 비틀스를 너무나 좋아했던 내가 바로 들국화가 비틀스를 승계하는 그룹인 것처럼 꾸미기 위한 의도로 주장했던 재킷디자인이었다.
앨범의 반응이 찌릿찌릿하며 오기 시작했고 나는 과감하게 6개월간 소극장을 빌려 마라톤 공연에 들어가자고 제의했다. 물론 힘이 들겠지만 함께 먹고 자고 공연을 하다보면 팀워크가 맞아 들어갈 것이고 또 무엇보다 우리에게는 쇼킹한 자극제가 필요하다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공연기획과 제작을 맡겼던 프로덕션의 일 진행이 시원시원하게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6개월간의 소극장 공연계획은 일단 취소됐고 전국순회공연으로 계획을 바꿨다. 김이 빠졌다고나 할까. 성질이 급한 편인 나로서는 참지 못하고 궤도를 수정했던 것이다.
우리는 순회공연의 타이틀을 <추억 들국화>라고 붙였다. '들국화를 오래도록 기억해달라'는 이유였고 또 추억이란 말을 싫어할 사람이 있겠냐는 생각이었다.
신촌 크리스탈 소극장에서 37일간 공연, 파고다극장에서 10일간 공연을 시작으로 대구 동아쇼핑센터, 부산 가톨릭 문화센터등 공연이 계속됐고 점차 규모가 커지면서 문화체육관, 부산 이사벨여고, 대구대학교 강당, 춘천 시민회관등을 돌았다. 소극장 공연은 아니었지만 당초 계획한 6개월은 채운 셈이었다. 파고다예술극장 무대공연 때부터는 허성욱의 친구로 우리 그룹을 계속 따라다니던 손진태가 세컨기타로 가세했다.
아직 설익은 듯한 맛이 있는 친구였지만 자기 몫을 다해주었고 실력이 하루가 다르게 향상했다. 무대가 오르기만 하면 관객들이 열광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는 과연 들국화가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말로 인기가 있는 건지 의혹을 갖게 됐다. 우리는 서로 눈이 마주칠 때마다 "우리가 스타는 스타냐'하고 물어보고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6개월간 장기공연을 가졌고 공연 때마다 수많은 관객들이 몰려들어 성황을 이뤘지만 우리는 결코 부자가 되지 못했다. 우리나라의 라이브가 활성화되기에 어려운 여건에 놓여 있음을 여실히 나타내는 일이었다. 공연환경의 미비로 조명, 음향을 항상 실어 날라야 하는 경비가 만만치않고 기재를 대여해주는 일도, 예컨대 우리 개런티가 10만원이라면 대여비는 1백50만원을 넘어 배보다 배꼽이 더 큰격이었다. 음악하는 사람이 있어야 악기 파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공연하는 사람이 있어야 음향, 조명을 대여해주는 장사가 있을 수 있는 것인데 이는 우리 공연환경의 숙제중 숙제이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 전인권 1990)
이때쯤 들국화의 가장 불행한 사건이 일어난다.
그것은 86년 초 조덕환의 급작스런 미국행이었다. 그의 미국행은 예정된 것이 아니었다. 들국화의 성공이 확실시 되었을때 승리의 결과를 만끽해야할 들국화의 가장 핵심 멤버는 미국으로 갑자기 사라졌다. 그리고 그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의 자리는 최구희와 손진태가 대신했고 돌아올 가망이 없는 그는 탈퇴처리 되었다. 전인권이나 최성원은 팀에서의 조덕환의 위치와 탈퇴원인에 대해서 언급하는 것을 회피한다.
전인권은 SUB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박준흠 : 조덕환이 탈퇴한 것은 어떤 문제가 있어서였나?
전인권 : 개인적으로 그를 매우 좋아했지만 당시 여건이 허용하지 않았다. 그리고 조금은 불안했다. 왼손잡이인데 기타치는 것을 오른손으로 바꾸면서부터 튜닝감각도 사라졌다. 또한 생각하는게 이국적이었다. (SUB 1998.5)
전인권은 조덕환의 정확한 탈퇴이유를 설명하지 않았다. 다만 탈퇴시의 그의 상황만을 말하고 있다. 여건이 그를 허용치 않았고 기타연주가 불안했다고 할뿐이다.
사실 당시 조덕환은 전인권의 말처럼 기타리스트로서 코드웍이 불안했다. 앨범 나오기전에 있었던 소극장라이브에서부터 그의 기타연주는 불안정했으며 가끔 삑사리를 연출(?)하기도 했다. 이런 그의 기타 때문에 1집에는 최구희라는 세션 기타리스트의 도움이 필요했다. 또한 최성원과 구별이 힘든 그의 보컬도 기타와 마찬가지로 안정적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데뷰 앨범의 성공 후 들국화 내에서의 조덕환의 입지는 줄고 있었다. 들국화 1집에서 전인권의 '행진'과 최성원의 '그것만이 내세상'이 들국화를 대표하는 노래가 된 반면 조덕환의 노래들은 그 앨범을 대표하지 못했다. 그럼 점이 데뷰 이전의 들국화의 공연에서 보여주던 작곡가로서의 조덕환의 위상을 약화시켰다.
또한 과거 화음 위주의 팝록트리오였던 들국화는 데뷰앨범 성공 후 완전한 록그룹이 되었으며 조덕환이 팝록트리오에서 맡던 화음의 중요도는 줄어들었고 라이브에서 기타 역시 최구희에게 더 비중이 주어지기 시작했다.
이렇듯 당시 조덕환의 위치가 불안한 면이 있었지만 그것이 탈퇴의 이유가 될 순 없었다. 조덕환이 탈퇴한 시점은 들국화 데뷰 앨범의 상업적 성공으로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있을 때이기에 때문이다. 더군다나 들국화 사운드의 창조 중심에 조덕환이 있었다.
그런 조덕환이 성공의 정점에 있을때 들국화를 갑자기 떠났다. 무엇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그것은 대답하기 곤란한 문제일지 모른다. 전인권은 조덕환이 떠난 이유를 '여건이 허락하지 않았다'는 말로 대신했다. 모두 정확한 답변을 회피함으로써 추측만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어떤이는 결혼 때문에 미국으로 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런 이유였다면 맴버들이 대답을 회피 할 까닭이 없다. 또 그것이 성공의 정점에서 갑자기 미국으로 도피한 조덕환을 충분히 설명해줄 수는 없다.
어쨌던 조덕환은 미국으로 사라졌고 이것은 들국화의 비극이 되었다.
라이브 앨범 발매와 들국화 2집의 실패 그리고 해체
들국화
결국 관객들을 이촌동 서울스튜디오에 모아 놓고 공개방송을 진행하듯이 녹음이 되었다. 따라서 라이브 콘서트 앨범은 공연장의 열광적인 현장감이 결여되었고 실제의 라이브 공연과는 좀 거리가 있었다.
86년 9월 25일에 들국화 2집이 발매된다. 들국화의 팬들은 2집을 매우 기다려 왔다. 그러나 앨범을 받아든 순간 어리둥절 할 수 밖에 없었다. 음악이 팬들이 기대하는 것과 너무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들국화 1집에 환호를 보냈던 이유는 들국화 고유의 색깔이 담긴 팝록 사운드의 신선함과 새로움 때문이였다. 그러나 2집에서는 1집의 신선함을 찾아 볼수 없었으며 들국화 고유의 록사운드를 느낄 수 없었다. 결국 이 앨범은 실패하였고 1집의 수준을 유지할 수 없게 된 들국화는 87년에 해체된다.
해체는 팀 내분으로 인한 것이 아니다. 멤버들은 들국화를 더 이상 진행할 수 없다는 것을 스스로가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들국화 결성이후 가장 큰 규모의 공연이였던 잠실 체육관 공연을 마지막으로 들국화를 종료시킨다.
모두의 기대를 모았던 2집이 1집의 음악적인 내용과 수준을 유지하지 못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84년 9월 들국화의 강원도 용평의 합숙 훈련장까지 취재를 갔던 월간팝송의 기자는 조덕환을 다음과 같이 소개한다.
조덕환... 그는 전인권의 음악 친구이면서 들국화의 음악적 성격의 핵심을 그려내는 화가이다. 그룹이 부르는 대부분을 그가 작곡하고 일렉트릭기타를 담당하며 특히 그의 분위기는 부드럽고 곡선적이면서도 보이지 않는 꼼꼼함을 지니고 있다. (월간팝송, 진한 감동의 꽃내음 흩뿌리는 팝/록 트리오, 1985)
그룹내에서 음악적 성격을 그려내던 조덕환이 떠나자 들국화는 곧 고유의 신선한 사운드를 상실한다. 2집에서 최성원과 전인권은 새로운 곡들(사실은 이미 불리워지던 노래들)을 실었지만 그것은 들국화가 아니였다. 그 노래들이 들국화의 노래가 되기 위해서는 그 노래를 신선한 들국화만의 이미지와 색깔이 있는 록사운드로 변화시켜줄 조덕환이 필요했다. 그러나 조덕환은 들국화에 없었다.
1집에서 전인권, 허성욱, 최성원, 조덕환은 들국화의 음악을 생성하는데 동일한 기여를 하고있었다는 점에서 수평적 관계라고 할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각각 멤버의 음악적 역량을 묶어 들국화의 색체를 만들어내는 역할을 한 것은 조덕환이었다.
조덕환이 떠난 들국화에 재능있는 새로운 멤버들이 들어왔고 2집에서는 그중 누군가는 조덕환의 역할을 대신해 멤버들의 역량을 묶어 들국화만의 신선한 팝록사운드를 만들어내야 했다. 2집에서 그 역할을 최성원이 대신했지만 그는 록커가 아니었고 나름대로 앨범을 팝록사운드로 구성했지만 1집의 사운드와는 차이가 있었다.
조덕환과 최성원의 음악적 성향의 차이는 1, 2집의 대비를 통해 극명하게 드러났으며 최성원이 1집의 흐름을 이어나갈 수 없음은 분명해졌다. 2집의 참패 이후 조덕환의 공백을 아쉬워하며 그룹을 꾸려나갈 대안을 찾지 못하던 들국화의 최선의 선택은 화려하게 들국화를 마감하는 것이었다.
결국 들국화는 1집의 성공을 추억하면서 87년에 막을 내리게 된다. (주4)
팝과 록의 시대를 연 조용필과 들국화
85년은 가요계가 또 하나의 새로운 시대를 여는 해이다.
들국화의 등장은 한국 가요의 조용한 붐을 가져왔다. 그들은 이전의 가요들과는 달랐다. 외국팝을 즐겨듣는 젊음이들을 귀기울이게 하고 열광케 할 정도로 신선하며 세련된 음악을 하고 있었다.
또 그들은 라이브 위주로 활동하면서 방송에 출연하지 않고도 앨범판매와 라이브 공연만으로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것은 방송에만 목메는 가요계의 관행에 반하는 것이었다.
들국화의 새로운 음악과 라이브 활동방식은 당시 모든 진지한 음악가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후 가요계가 팝스타일과 록스타일의 음악이 새롭게 구축되는 시발점이 되었다.
한편 주류에서는 조용필이 85년 초 발표한 조용필 7집 <어제 오늘 그리고>로 가요계를 지배하고 있었다. 이 앨범에서 조용필은 80년대 감성이 담긴 세련된 조용필식 록사운드를 선보였다. 여기에는 유재하의 '사랑하기 때문에' 같은 역사적인 팝발라드 곡도 있었다. 이 앨범의 대다수의 노래는 일년내내 히트행진을 이어가며 주류 가요계에 새로운 변화를 제시하고 있었다.
이렇듯 85년은 언더그라운드와 주류 양측면에서 새로운 시대가모색되고있었던 것이다.
이 둘은 얼핏 전혀 다른듯 하지만 그들의 음악적 지향점은 다르다고 말하기 어렵다.
조용필의 록이 주류방송매체를 활용한 제도권 색체가 짙은 것이었고 들국화는 라이브공연중심의 활동으로 보다 팝적이고 서구지향적인 록으로 서로 음악적 활동방식과 내용은 달랐지만 이들이 가요계에 제시한 음악적 방향은 일치하고 있었다.
이들의 음악은 보다 팝적인 멜로디와 강렬하면서도 흥겨운 비트를 사용하였다. 이것은 경제적인 여유가 생기기 시작하면서 새로운 것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감성에 부응하는 감각적이고 세련된 사운드를 만들어 내었다. 그리고 이들의 성공은 앞으로 가요계가 나아갈 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이미 조용필을 통해 가요계가 변모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는것이 입증되었고 들국화의 성공으로 팝과 록의 가능성을 다시한번 보여주었다.
이들의 영향으로 이후 가요계는 팝 멜로디에 강렬한 느낌의 비트를 쓰지 않으면 안되는 시대가 오게된다.
들국화에 뒤이어 동아기획의 김현식, 신촌 블루스와 봄여름가을겨울이 팝 멜로디와 록비트를 사용하였고 거기에서 더 나아가 보다 정통한 블루스, 퓨전재즈등으로 발전시켜갔고 이문세, 유재하 등은 팝발라드의 전성시대를 열었다. 한편으로는 들국화의 성공에 자극받은 음반사들은 새로운 록밴드를 찾았으며 시나위, 부활, 백두산이 등장하며 더욱 강한 록을 선보이게 된다.
주류에서도 김지애, 태진아가 트로트에 록비트를 적극 받아들이면서 주현미와 함께 트로트의 전성시대를 열기도 했다.
이렇듯 이후 가요계는 팝적인 멜로디와 강한 비트를 쓰지 않고서는 젊은팬을 사로잡을 수 없었고 가수들은 앨범의 완성도를 중요시 하게 되었으며 이는 앨범판매량으로 이어졌다.
서태지는 자신이 영향 받은 선배 뮤지션으로 들국화와 조용필을 꼽는다. (주5) 이는 공치사가 아니다. 그가 음악을 진지하게 받아들이던 85년 가요를 지배한 음악인이 이들이기 때문이다. 서태지에게 팝스타일의 멜로디와 록음악은 그의 음악의 기본이다. 즉, 서태지는 80년대 중반 급성장한 가요계의 산물을 이어받고 있는 것이다.
(주1)
전인권은 일명 전인권트리오의 해체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한다.
"최성원, 허성욱과의 활동은 84년 5월 어머니의 죽음과 각자의 의견차이로 당분간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우리 3총사는 방배동의 <이트>라는 연주실을 연습장소로 택해 쓰고 있었는데 포크록을 하고 싶어하는 최성원, 클래식하길 원하는 허성욱 간에 가끔 마찰이 일곤 했다.
그러던 차에 암으로 오랫동안 앓아 누워 계시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자 그 충격으로 나는 한동안 말을 잃었고 성원이와 성욱이도 잠시 헤어져 있게 됐다." (일간스포츠 스타스토리 - 전인권, 1990)
(주2)
들국화 홈페이지 (http://my.dreamwiz.com/aproman/)에 의하면 이종환의 밤의 디스크쇼 공개방송에는 3회 출연(1집앨범 발매 이전)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985년 2월 16일 :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라이브 디스크쇼 공연 (들국화)
1985년 5월 11일 :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라이브 디스크쇼 공연 (들국화)
1985년 6월 8일 : 롯데호텔 크리스탈볼룸 라이브 디스크쇼 공연 (들국화)
(주3)
백두산, 아시아나의 기타리스트였던 김도균은 들국화가 포크음악으로부터 출발했다고 말한다.
"처음 볼 때는 들국화도 3인조였죠, 그런데 조금 독특한 멤버 구성이었습니다.
드럼이 없이 어쿠스틱 기타(전인권), 일렉트릭 기타(조덕환-그후 들국화를 탈퇴하고 미국으로 도미) 그리고 베이스(최성원). 사실 처음 보는 형태였죠. [옮긴이 - 트리오 시절의 들국화는 (트리오 1기라 할 수 있는) 전인권, 최성원, 허성욱과 (트리오 2기라 할 수 있는) 전인권, 허성욱, 조덕환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처음에는 3인조였다가 최성원이 나중에 재가입하게 되는데 김도균 씨는 허성욱을 후에 들어온 멤버로 잘못 알고 있는 것 같다.]
매일 밤마다 연주를 하니까 항상 만나게 되고 또, 농담도 서로 자주 주고 받으며 아주 사이좋게 지냈었습니다. 그 이후 앨범을 내고 국내에서 상당히 유명해졌죠.
사실 음악적인 스타일은 저희와는 달랐습니다.
제가 볼 때는 포크 음악으로부터 출발한 것 같습니다.
그쪽의 선배들은 한대수, 김민기, 조동진... 등 이런 분들로부터 내려온 라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rock 과 folk music은 서로 긴밀한 관계를 유지함으로 서로 돕게 되는 것입니다.
미국에서도, 밥 딜런 노래를 지미 헤드릭스가 부르는 등 같은 히피 시대의 동지들이죠....."
(김도균 홈페이지, http://www.rock777.net/index-k.htm)
(주4)
이후 전인권은 허성욱과 듀엣으로 <추억 들국화>를 발표한다. 이 앨범은 허성욱, 전인권 듀엣의 과거를 회상하는 것이며 잘 알려진 통기타 계열의 음악으로 채워져있다.
88년 전인권은 솔로 1집을 발표하고 <돌고 돌고 돌고>를 히트시킨다.
(주5)
다음은 서태지가 2000년 9월 딴지일보와의 인터뷰 내용중 일부이다.
파토 : 영향받은 국내뮤지션은 어떤 사람들인지, 글고 가요중에 명곡이라고 생각하는 곡은?.
서태지 : 조용필, 전인권, 들국화는 제가 처음에 정말 많이 따보고 그랬죠. 그러고 보면 많은 영향을 받은 것 같아요. 조용필 선배님은 음악적인 것도 좋지만 이미지적인것도 좋았구요.
'그것만이 내 세상' 이나 '매일 그대와' 같은 곡들 정말 좋지 않아요? 암튼 들국화 너무 좋아합니다!
(이때 엄지손가락을 쳐들며 어린애처럼 좋아했다.)
첫댓글 깊드리님! 꼭 들어 보겠습니다.
좋은 소식 알려주셔서 고맙습니다...
들국화의 최성원 님도 사오모 가족이시죠? 닉 네임은 '푸른밤'...
맞습니더맞고요 ..
들국화는 저의 우상이었습니다.
그래서 더욱 반갑고 고마운 자료입니다.
귀한 자료 퍼갑니다. 허락해주세염^^*
허락은요 뭘... 얼마든지 퍼가세요...
으음세시봉이 뜨니..잠자고 있던 포크세대 뿐아니라 락커나 그룹사운드들까지 용트림 하고 있습니당
근데 제주도푸른밤성원이 엉아랑 찬권오빠는 왜 일케 카페에서 잠잠한겨
들국화 주찬권 님도 사오모 가족이에요?
장문의 글 잘 읽었습니다. 들국화 시절 이전에 전인권님이 토속적인 어감이 물씬 풍기는 '꽃분이'라는 곡을 타이틀로 솔로 앨범을 내신 적이 있지요. 저도 소리바다 시절에 떠돌아다니는 그 노래를 들어본 적이 있는데 목소리는 들국화 시절과 비슷하지만 내지르는 창법은 아니었고 트로트곡 비슷하게 불렀습니다. 그리고 조덕환님이 대학가요제 출신이군요. 저도 고인돌의 '날개'라는 곡을 무척 좋아하며 그 당시에 매우 세련된 곡이구나 하고 생각했습니다.
내공이 깊으신 포크락님께서 보잘 것 없는 제 글을 읽어주시니 정말 감사합니다. 1979년 '따로 또 같이' 음반에 들어 있는 '맴도는 얼굴'이란 노래를 전인권 님이 불렀다는 것을 저는 나중에 알았습니다. 그 때도 전인권 님의목소리는 아주 독특한 음색이었는데 들국화 시절의 목소리와는 많이 다르다고 느꼈어요. 훨씬 투박한 목소리였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