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15:1]
우리 강한 자가 마땅히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우리 강한 자가 - '강한 자'의 헬라어 '호이 뒤나토이'는 보통 '능력있는 자', '~을 할 수 있는 자', '힘 있는 자'를 뜻하나 여기서는 '영적으로 강한 사람'을 의미한다. 바울은 이 논쟁에서 자신을 강한 자의 편에 넣어 말하고 있다. 마땅히 -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 '오페일로멘'은 '하여야 할 것이다'라는 권고의 의미보다는 '해야만 한다', '의무가 있다'라는 뜻으로 보아야 한다.
즉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는 것은 권고나 권면으로써 수행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의무적으로 수행되어야 함을 나타낸다.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하고 - '약점'은 '연약함'의 의미로 쓰이며 '담당' 갈 6:2에 나오는 '너희가 짐을 서로 지다'와 같이 '짐 따위를 지다'라는 상징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이와 같이 강한 자는 약한 자의 여러가지 약점들을 짊어져야 한다.
그러나 강한 자가 연약한 자의 약점을 담당할 때 사랑 안에서 행해야만 한다. 사랑은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열쇠이다.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할 것이라 - 믿음이 강한 자가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들 자신의 입장만을 고수하려고 한다면 연약한 자는 시험에 빠져 낙심하게 될 것이다. 또한 강한 자가 자기 이익을 위해 힘쓰며 약한 자 앞에서 그들의 강함을 뽑낸다면 약한 자는 믿음에서 돌아서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바울은 자기가 모든 성도들의 기쁨을 위하여 자신의 유익을 구치 않은 것처럼 강한 자도 연약한 자에 대해서 그렇게 하라고 권면하고 있다.
[롬 15:2]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찌니라..."
우리 각 사람이 이웃을 기쁘게 하되 - 이 말씀은 단순히 남의 기분을 맞추라는 의미가 아니다. 또한 남이 원하는 바를 맹목적으로 좇는 일을 요구하고 있는 것도 아니다. 이는 타인의 영적 각성에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자기를 희생해서라도 그 필요를 채워주라는 의미이다. 성도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가능한 많은 사람을 주께로 인도하기 위하여 자기 자신의 모든 유익을 구하지 않고 그들에게 기쁨을 주었던 바울의 삶이기도 하였다.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도록 할지니라 - 타인의 영적 유익을 위하여 이루어야 할 목표는 '선을 이루고 '덕'을 세우는 일이다. '선을 이루고'의 헬라어 '에이스 토 아가돈'은 내적 가치, 특히 도덕적 목적을 나타내는 말로서 '자신을 위함이 생각하는 행위'를 말한다.즉 성도들이 약한 형제들의 약점을 자신의 것으로 짊어지면서 살아야 할 원칙을 말씀한 것이다.
또한 '덕을 세우도록'으로 번역된 헬라어 '프로스 오이코도멘'은 '집을 세우다'라는 의미를 가지며 여기서는 성도들로 하여금 지혜와 사랑, 은혜와 거룩에 이르도록 믿음의 성장을 촉진케 하는 행동을 가리킨다. 전자가 내적 목적이나 가치를 지향하는 반면 후자는 외적 목적을 지향한다. 결국 이것은 사람들의 인기나 기분을 맞추기 위하여 사람들을 기쁘게 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영적 유익을 위하라는 의미이다.
[롬 15:3]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셨나니 - 헬라어 원문에는 접속사 '왜냐하면'을 사용하여 앞절의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이웃을 기쁘게 하여야 할' 이유를 설명하고 있다. 성도가 자기를 기쁘게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께서 성도들에게 친히 모범을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를 따르는 사람들이 직면한 모든 문제를 경험하셨다. 자기의 유익을 위하여,
혹은 자신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뜻을 좇아 행하며 모든 사람의 기쁨을 위하여 살 것이냐의 갈림길에서 그는 항상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셨다. 그는 비록 많은 사람의 반대를 불러 일으켜 자신에게 죽음이 초래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계셨음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계획을 결코 중단하지 않고 그분의 뜻을 순종하셨다. 기록된 바 주를 비방하는 자들의 비방이 내게 미쳤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
시 69편은 고난의 시로서 그리스도의 수난과 그리스도를 박해한 자들을 보응할 것에 대한 예언이다. 이 인용 구절이 의미하는 바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향한 충성과 순종의 결과로 비난과 모욕을 받아 죽음을 당하시리라는 것이다. 이렇듯 바울은 시 69:9을 인용하여 독자들로 하여금 그들이 하나님을 위하여 일하겠다는 뜨거운 마음을 품고 그것을 실행하다 보면 사람들의 비난과 반대에 부딪혀 오해와 중상을 받게 되지만 이 때에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 끝까지 하나님을 기쁘게 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고자 하였다.
[롬 15:4]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한 바'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가리키나 구체적으로 바울이 앞절에서 인용한 시 69:9의 메시야에 관한 예언을 염두에 두고 말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이 구약성경을 인용하고 있는 현상 자체는 당시 교회가 구약성경을 구속사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음을 뚜렷이 반영해 준다.
바울이 앞절에서 시편에 나타난 기록을 그리스도에게 적용시키고 여기서 다시 성도들에게 적용시킨 것은 시편뿐만 아니라 구약성경에 기록된 것임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성경은 과거와 현재 그리고 장래의 모든 성도들을 교훈하기 위해 기록되었다.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 -
성경을 상징하는 진정한 목적은 영생에 대한 위대한 소망을 갖는데 있다(요 5:39). 본문은 영생에 대한 소망을 위해서 '인내'와 '성경의 안위'가 필요함을 역설한다. 이 두 가지 요소가 소망과 밀접한 연관을 맺는 것은 인내가 영과으런 영생으로 가는 과정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요소라면, 성경의 안위는 그러한 소망을 얻을 수 있도록 확신을 주기 때문이다 소망을 견지하는 방법으로서 전자가 주관적이면 후자는 객관적이다
'인내'의 헬라어 '휘포모네'는 고난당하는 자가 수동적인 자세로 체념에 빠지는 것이 아니라 혹독한 시련과 고난 속에서도 용맹스런 군인처럼 흔들리지 않고 자신의 목적과 신앙에 대한 충성을 지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자세는 약한 자들의 약점을 돌보아 주는 자들에게 필요하다.약한 자들은 한 두 번 도움을 받는 것으로 바로 서지 못하므로 인내를 가지고 그들을 돌보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한편 '안위'의 헬라어 '파라클레시스'는 보통 '권고', '위로'를 뜻한다. 바울 서신에서 이 단어는 하나님께서 현재와 미래에 당신을 믿는 성도들에게 구원을 보장해 주시고 확신케 해주심을 의미한다. 특히 본절에서는 안위가 성경을 통하여 온다는 사실과 이 안위는 우리가 믿음으로 소유한 영생을 소망하는데 힘을 주고 확신을 갖게 해줌을 강조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