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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전쟁
신명기 20:1~9
오늘 우리가 읽은 이 본문 말씀은 하나님의 선택받은 백성들인 이스라엘 백성들이 적국과 전쟁하러 나갈 때 반드시 지키도록 명한 절차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은 전쟁하러 나가는 선민 이스라엘 군사들을 향하여, 그들의 대적의 수가 더 많고 그 적군의 무기가 더 강력할지라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격려하면서, 애굽 땅에서 이스라엘을 인도해내신 그들의 전능하신 하나님이 이스라엘과 함께 하신다고 약속해주셨습니다. 그러면서 전쟁하러 집에서 출발하여 전쟁터에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나님의 성전에서 섬기는 제사장이 반드시 이렇게 말하도록 하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으라 너희가 오늘 너희의 대적과 싸우려고 나아왔으니 마음에 겁내지 말고 놀라지 말라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너희와 함께 행하시며 너희를 위하여 너희 적군과 싸우시고 구원하실 것이라”
이렇게 제사장이 하나님의 도와주심의 약속을 말한 다음에는 군역을 담당하는 소집 책임자들이 나서서 또 다시 이렇게 나온 백성들에게 말하라고 하나님께서 명하셨습니다.
“새 집을 건축하고 낙성식을 행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낙성식을 행할까 하노라 포도원을 만들고 그 과실을 먹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 과실을 먹을까 하노라 여자와 약혼하고 그와 결혼하지 못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전사하면 타인이 그를 데려갈까 하노라”
전쟁에 참여하라고 소집 명령서를 받아 출전했지만 집안의 중요한 일들이 있는 사람들은 돌아갈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입니다. 전쟁에 참여하여 혹 죽게 되면 그 일로 인하여 인생의 행복을 즐길 기회를 잃을 수 있기에, 자비하신 하나님께서 그러한 자들에게 돌아가 인생의 기쁨을 누릴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전쟁 소집의 권한을 가진 백성의 지도자들은 다시 한번 남아 있는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말하도록 하나님께로부터 명령을 받습니다.
“두려워서 마음이 허약한 자가 있느냐 그는 집으로 돌아갈지니 그의 형제들의 마음도 그의 마음과 같이 낙심될까 하노라”
하나님의 제사장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그 전쟁에서 함께해주실 것이요 하나님께서 그들을 위하여 싸워주실 것이라는 말씀을 듣고도 여전히 두려움이 떠나지 않고 또한 새 집을 짓고 낙성식 못하고 포도원을 만들고 첫 수확을 못하고 약혼만 하고 결혼하지 못한 이유로 전투에 임하지 않아도 될 면제 사유로 귀가하는 동료들을 보면서 부러워서 어쩔 줄 몰라하고, 여전히 마음이 허약하고 두려움에 벌벌 떠는 사람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런 사람들은 다시금 전쟁에 참가하지 않고 집으로 돌아갈 기회가 주어지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까닭은 무엇일까요? 선민 공동체를 위하여 나서는 여호와의 전쟁에 하나님의 백성이 전쟁에 참여하면서 두려운 마음과 허약한 정신을 가지고 나아가면 결국 다른 형제들 역시 겁을 집어먹은 사람들의 마음과 같이 낙심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두려움이 전쟁터에 나선 다른 동료들에게도 전염되어서 적군과 싸울 때에 사기가 떨어져 패배할까 염려해서 그렇게 두려움에 사로잡힌 병사는 처음부터 출전하지 못하도록 한 것입니다.
이러한 절차를 다 거친 후에야 남아 있는 용기 있는 군사들을 분류하고 그 부대마다 각기 지휘관들을 세워서 전쟁에 임하라고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구약 시대 이스라엘 백성들이 이방 민족들과 맞서 싸워 전쟁할 때마다 이러한 출전 절차를 지키도록 명하였는데, 이러한 절차의 목적은 전쟁에 임하는 군사들이 후방의 가족들의 안부나 집안 일에 연연하여 당면한 전쟁에 집중하지 못하는 일이 없게 하고자 함이요 또한 하나님 백성들이 이방인들과 맞서 싸우는 전쟁에서 두려움이 없이 하나님을 힘입어 담대하게 싸움으로써 승리할 수 있게 하기 위함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이 세상과 맞서 싸우는 여호와의 전쟁을 벌일 때 비록 그 수가 적은 수일지라도 오직 하나님 한분만을 의지하고 강하고 담대한 마음으로 전쟁에 임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수만 많으나 겁을 잔뜩 집어먹고 자꾸만 뒤를 바라보면서 도망칠 궁리만 하는 많은 자들과 함께 하지 않으십니다. 비록 수는 적을지라도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믿음을 가지고 용감하게 전쟁에 나선 자들과 함께 해주시고 그들을 통하여 승리를 거두게 하십니다.
구약 시대에 미디안 백성들이 메뚜기 떼처럼 이스라엘 땅에 몰려와서 모든 이스라엘의 논과 밭의 곡식들과 가축들을 다 먹어치울 때였습니다. 그런데 그들과 맞서 전쟁에 나선 자들이 이스라엘 중에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 중에 므낫세 지파에 속한 기드온에게 찾아오셔서 미디안 군사들과 맞서 이스라엘을 구원하라는 사명을 주셨습니다. 기드온이 소집 나팔을 불었을 때에 모인 이스라엘의 군사들의 수가 3만 2천 명이었습니다. 물론 미디안의 군사들은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았기에 이스라엘의 3만 2천 명도 지극히 적은 수였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기드온에게 말씀하시기를
“너를 따르는 백성이 너무 많은즉 내가 그들의 손에 미디안 사람을 넘겨주지 아니하리니 이는 이스라엘이 나를 거슬러 스스로 자랑하기를 내 손이 나를 구원하였다 할까 함이니라 이제 너는 백성의 귀에 외쳐 이르기를 누구든지 두려워 떠는 자는 길르앗 산을 떠나 돌아가라 하라”
고 하셨습니다. 이에 기드온이 모여든 이스라엘 무리에게 이 말씀을 전하니, 두려움 때문에 돌아간 백성이 2만 이천 명이요 남은 자는 만 명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께서는 다시 기드온에게 이르시기를
“백성이 아직도 많으니 그들을 인도하여 물 가로 내려가라 내가 너를 위하여 그들을 시험하리라”
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메롬 물가에서 물을 마시는 방식을 따라 만 명 중에서 삼백 명만을 다시 따로 선택하여 기드온으로 하여금 삼백 명만 데리고 수만 명의 미디안 군사들과 싸우라고 명하셨습니다. 삼백 명 대 수만 명, 도저히 싸워 이길 수 없는, 승산 없는 전쟁 아닙니까? 하지만 기드온과 삼백 용사들은 하나님의 약속과 격려를 힘입어서 밤중에 수만 명의 미디안 군사들을 기습하여 적군을 패배시키고 완전한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전쟁의 승리가 군사들의 숫자와 무기의 강약에 달려 있지 않음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 백성의 싸움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용감하게 싸우는 데 승리가 결정이 됩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 사울의 큰 아들 요나단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담대함으로 싸워 패색이 짙었던 블레셋 군대와의 싸움을 역전시킨 승리의 주역이었습니다. 엄청난 숫자의 블레셋 군사들이 강력한 철기 무기들을 가지고 사울 왕의 집권 초기에 이스라엘을 침공하였습니다. 블레셋 군사들은 병거만 삼만 개요 마병이 육천 명이요 보병의 수가 해변의 모래처럼 많았습니다. 이에 맞서는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울 왕이 소집하여 모였으나 다들 두려움에 사로잡혀 수시로 진영을 이탈하여 도망쳐 숨어버렸습니다. 그리하여 나중에는 사울 왕 곁에 남은 이스라엘 군사들은 육백 명밖에 안되는 소수에 불과했습니다. 더욱이 당시 이스라엘 역내에는 철공이 없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대장장이들을 다 잡아가서 농기구를 만들고 수리하는 것도 블레셋 사람들에게 가서 부탁해야 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니 이스라엘 백성들이 전쟁에 나섰지만 그들이 들고 싸우는 무기는 칼과 창이 아니라 괭이, 삽, 쇠스랑과 도끼였습니다. 오직 칼과 창은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만 갖고 있었을 따름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전투가 이미 형세가 기운 어느 날, 사울 왕의 아들 요나단이 자기의 직속 부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가 이 할례받지 않은 자들에게로 건너가자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일하실까 하노라 여호와의 구원은 사람의 많고 적음에 달리지 아니하였느니라”(사무엘상 14:6)
그러자 그 부하가 대답하기를
“당신의 마음에 있는 대로 다 행하여 앞서 가소서 내가 당신과 마음을 같이 하여 따르리이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렇게 단 두 사람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믿고 담대하게 적군이 모여 있는 들의 진영에 올라가서 싸우니, 여호와께서 그 두 사람과 함께하여 일하시니 블레셋 군사들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적군들에게 공포심을 불어넣어주니, 블레셋 온 군대가 벌벌 떨었습니다. 그러자 이를 지켜보던 이스라엘 군사들이 용기를 얻고 진격할 차비를 갖추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블레셋 진영 내에서도 블레셋 사람들에 의하여 억지로 끌려온 이스라엘 사람들도 적지 않았는데, 요나단과 그 부하가 이렇게 용감하게 싸워 블레셋 군사들을 치니 그들도 용기를 내어 블레셋 진영 내에서 반란을 일으켜 곁에 있던 블레셋 군사들을 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무수하게 많았던 블레셋 군대의 진영은 안팎에서 밀어닥치는 이스라엘 군사들의 공격 앞에서 속절없이 무너져서 도망치기 시작하니, 그날에 이스라엘 군사들이 피곤하기까지 밤중까지 도망치는 블레셋 군사들을 수없이 죽이고 그들을 물리치는 대 역전의 전쟁 드라마를 만들어냈습니다.
이 위대한 승리의 시발점이 오직 하나님의 역사하심, 하나님의 구원하심이 그를 신뢰하여 용감하게 행하는 자들과 함께 함을 굳게 믿었던 요나단과 그의 부관이었으니, 참으로 전쟁의 승리는 사람의 수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 분명한 것입니다.
이와 같은 전쟁의 승패의 열매가 비록 소수이지만 담대하고 용감한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은 역사 속에 자주 이루어진 일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면, 페르시아의 대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에 용감하게 맞서 싸웠던 그리스의 군사들은 페르시아 군대에 비하면 늘 소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동족의 생명과 자유를 지키기 위하여 온 시민들이 일치단결하여 용감하게 싸워 결국 페르시아의 엄청난 군사력의 압박을 물리치고 승리하였습니다. 훗날 그리스 북쪽 출신 마케도니아의 풍운아였던 알렉산더 대왕이 그리스를 통일하고 동방의 대제국인 페르시아를 정복하고자 출진할 때에 그가 거느린 군사들은 3~4만 명이고 기병대가 약 3~5천 명뿐이었습니다. 하지만 알렉산더가 이끄는 그리스도 군대가 페르시아 군대와 맨 처음 맞닥뜨린 그라니코스 강변의 전투에서 알렉산더 대왕이 흰 말을 타고 용감하게 적진에 뛰어들어가는 모습에 용기를 얻은 그리스군대는 소수에 불과한 군사력을 가지고 페르시아 군대를 격파하고 대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후에도 알렉산더 대왕의 용감한 선두 공격에 힘입어서 그리스 군대는 계속하여 페르시아 군대들을 격파하여 마침내 페르시아 제국과 인도까지 정복하고 웅대한 알렉산더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용기를 가진 소수의 군대가 다수와 엄청난 국력을 가진 나라를 너끈히 정복하는 경우가 역사 속에 많이 있음을 보게 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열두 척의 배를 가지고 300척의 일본 수군과 진도 앞바다 울둘목에서 맞서 싸워 대 승리를 거두었던 이순신 장군이 이끄는 조선 수군의 승리의 역사가 이 사실을 증명합니다.
이와 같이 용기 있는 소수의 군대가 승리하는 역전의 드라마를 써내려가는 것과 같은 일은 영적인 일에도 그대로 이루어지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깊이 신뢰하고 강력한 시련과 환난과 맞서 싸우고자 일어나는 소수의 믿음의 정예 성도들을 통하여 영적 전쟁에서 대 승리를 거두고 마침내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경우가 자주 일어나곤 했습니다.
예수님이 승천하신 후에 세워진 초대 교회가 당시 세계 최대의 강력한 무력 국가였던 로마 제국의 끈질기고 강력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죽기를 각오하고 복음을 전파하였던 소수의 갈릴리 사람들에 의하여 결국 로마 제국 전체에 복음이 퍼지고 3백년이 지나자 로마 제국 전체가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이는 대 변혁이 이루어지지 않았습니까? 영국에서도 영국 황제와 천주교 세력의 압박을 무릅쓰고 종교 개혁 정신을 따르던 얼마 안 되는 청교도 신자들이 순교와 투옥을 당하면서도 굴하지 않고 순수한 예배를 강행하였더니, 마침내 영국과 저 신대륙 미국과 캐나다까지 기독교가 강력하게 퍼지는 역전의 열매가 맺혀지게 되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도 일제 때에 수많은 성도들이 있었지만 진실하게 신앙의 근본 계명을 지키려고 일제의 강력한 신사 참배와 황국 요배를 거부하였던 주기철, 최권능, 손양원 등 목사님들과 안이숙 선생과 박관준 장로님들과 같은 소수의 평신도들과 숨은 저항자들이순교까지 감당하며 끝까지 싸운 결과 일제는 붕괴되고 기독교회는 해방 후에 놀랍게 부흥되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소수의 용감한 신앙의 헌신자들에 의하여 결국 하나님의 영적 전쟁의 승패가 결정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렇게 죽기를 각오하고 용기 있게 믿음으로 영적 전쟁의 최전선에 앞장서서 싸우는 소수의 영적 헌신자들이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통하여 상황을 반전시키고 압도적인 대적들을 잠잠케 하시고 무서운 시련의 풍랑을 가라앉게 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이 용감한 소수의 용사들이 담대하게 전진할 때 그 동안 믿음이 약하여 뒤로 물러가며 대적과 연합하여 자기의 정체성을 숨기던 자들도 다시 용기를 얻고 일어나 영적 상황을 반전시키는 아름다운 결과를 만들어내는 일에 동참하곤 합니다. 기드온의 삼백 용사가 이와 같이 전세를 뒤집었을 때 도망치고 숨어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도 숨어있는 굴에서 나와 도망치던 미디안 적군들의 뒤를 쫓아 가서 함께 섬멸하는 일에 동참하였지 않습니까? 주기철 목사님과 같은 분들이 끝까지 신사참배에 저항하면서 순교하니까 적지 않은 신자들도 부끄러움을 느끼고 일제 말기에 신사 참배를 거부하고 거룩한 영적 싸움에 동참하고 해방의 그 날에 부끄러움 없이 주님을 찬양한 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소수의 용기 있는 믿음의 용사들의 존재는 참으로 중요합니다. 이들의 존재가 영적 전쟁의 승패를 바꾸고 믿음 없는 자들로 하여금 다시 돌아올 수 있게 하며 영적 전쟁에 함께 동참할 수 있는 동기를 부여해주는 것입니다.
과거 엘리야 선지자 시대에 갈멜산에서 바알 신 우상을 섬기는 바알 선지자들과 엘리야 선지자가 영적 싸움을 싸울 때에 많은 사람들이 구경하러 몰려들었을 때입니다. 그 때 선지자 엘리야는 구경하러 모인 그 백성들을 향하여 이렇게 촉구한 바 있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왕상 18:21)
그 백성들은 여호와 하나님도 알고 있지만 당시 집권자인 아합 왕과 왕비 이세벨의 무서운 압력을 받아서 하나님을 섬기기보다는 눈치껏 바알 신을 섬기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러나 엘리야 선지자가 목숨을 걸고 바알 선지자들과 영적 대결에서 싸워 대 승리를 거두자 그 백성들은 엘리야의 명령에 순종하여 앞장서서 바알 선지자들을 체포하여 죽이는 일에 동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다수가 세상을 따르고 믿음을 저버리며 하나님을 등질지라도 끝까지 시험과 핍박과 유혹에 맞서 저항하는 거룩한 영적 저항자들이 있다면, 그 소수의 거룩한 저항자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진정한 신앙의 놀라운 승리를 거두게 하시고 믿음이 약한 자들도 돌이켜 하나님의 구원과 승리에 동참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시는 것입니다.
어느 시대, 어느 상황에서나 믿음이 연약한 자들과 압박과 시험 앞에 잠시 흔들리는 자들이 반드시 있습니다. 이들은 종종 용기를 내어 하나님께 더욱 충성하며 위험을 무릅쓰는 믿음의 헌신자들과 못 따라가고 뒤처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연약하여 도중에 쓰러지거나 주저앉는 자들도 결국 끝까지 믿음의 선한 싸움에 앞장선 믿음의 용사들 덕분에 이후에 하나님의 축복을 함께 나누는 일에 동참하게 됩니다.
그 실례로 다윗의 6백 명의 용사들이 대적 아말렉과 싸워 승리한 일화를 들 수 있습니다. 다윗과 6백 명의 용사가 시글락이라는 동네에 머물 때에 전쟁터에서 돌아왔을 때 그 동네는 이미 사막의 강도떼와 같은 아말렉 족속들의 습격을 받아 불이 다 타버린 상태였고 아녀자들과 가축들과 여러 재산들이 다 약탈당한 상태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온 다윗의 용사들은 큰 충격을 받았고 아내와 자녀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재산이 다 불타고 약탈당한 일을 겪은 그들은 큰 분노와 낙심에 사로잡혀 다윗을 원망하며 돌로 치려고까지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러한 화급한 상황에서도 하나님을 의지하여 마음을 평안하게 가지고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 결과 다윗에게 하나님께서 아말렉 군대를 추격하여 도로 약탈된 처자들과 재산들을 찾을 것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그리하여 추격하여 이스라엘 남부 사막 지대로 추격해들어가는 도중인데, 그들이 브솔 시내를 건널 때에 다윗의 6백 명 군사들 중에 이 백명이 지쳐서 도저히 못 따라가겠다고 뒤떨어졌습니다. 다윗은 그들을 머물게 하고 나머지 사백 명을 이끌고 추격하였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승리에 도취하여 방심한 아말렉 군사들이 밤을 새며 술과 음식을 먹고 마시며 춤추며 즐기던 중에 다윗의 군사들이 급습하여 치니, 아말렉 군사들 대부분이 몰살을 당하고 일부만 낙타를 타고 도망쳤습니다. 그리하여 다윗의 군사들은 빼앗겼던 처자들과 가축과 재산들을 아무런 손해 없이 모두 다 되찾아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쁨으로 돌아오던 중에 지쳐서 브솔 시내에서 머물렀던 이백 명 군사들을 다시 만났을 때, 끝까지 추격했던 군사들 중에 있던 일부 불량배들이 뒤처진 자들을 비난하면서 자기들과 끝까지 같이 가지 아니하였으니 도로 찾은 물건은 주지 말고 각자의 처자만 돌려주라고 악한 말을 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그들을 책망하면서,
“전장에 내려갔던 자의 분깃이나 소유물 곁에 머물렀던 자의 분깃이 동일할지니 같이 분배할 것이니라”
고 말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끝까지 용기를 가지고 전쟁의 최전선에서 앞장섰던 용사들이나 후방에서 머물면서 지킨 자들이나 도중에 지쳐서 머물렀던 자들이나 승리의 열매를 함께 나누도록 하시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의 싸움에서 소수의 충성되고 용감한 헌신자들을 통하여 영적 싸움에서 승리를 거두고 전세를 역전시켜 패배에서 승리로 바꾸는 계기를 만들게 되기에 소수의 헌신된 믿음의 영적 전사, 세상에 대하여 끝까지 굴복하지 않는 영적 저항자가 극히 중요합니다. 하지만 그들에 의하여 하나님께서 전세를 바꾸는 놀라운 일을 베푸시긴 하지만, 그 승리의 결과는 모두에게 골고루 다 나눠주시는 것이 하나님의 기쁘신 뜻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그러한 일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 우리 세대는 이전에 없었던 거대한 시험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코로나 바이러스의 대유행이 전 세계적으로 강타하고 있는 현실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세계화 시대에 강력한 코로나 폐렴 바이러스의 유행은 언제까지 가야 끝이 날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와 같은 시기에 우리 경제계나 정치계나 종교계나 교육현장이나 의료계나 문화계나 스포츠계나 모든 분야가 그 영향을 받지 않는 곳이 전혀 없습니다.
이번 일로 한국에서는 저 신천지 이단 집단 내의 대규모 발병이라는 특이한 현상으로 인하여 그 동안 일반인들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았던 신천지 집단의 실체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와 더불어 한국 종교계에도 다른 영역처럼 큰 도전이 닥쳤는데, 모두가 다 이 바이러스의 집단 발병을 막아내고자 집회까지 중단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습니다. 천주교나 조계종 불교계도 다 문을 닫은 상태입니다. 이처럼 대중 집회가 다 문을 닫는 상황인데, 한국의 개신교회들도 상당 수가 문을 닫고 예배를 폐하고 인터넷으로 예배를 드리는 등 많은 변화가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그리스도인의 한 사람으로서 어떻게 하는 것이 과연 합당한 태도인지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분명 코로나 바이러스가 강력한 전파력이 있는 것은 사실입니다. 주의해서 접촉을 피하고 나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에게까지 피해가 가지 않도록 힘써야 합니다. 특히나 연세가 많으신 분들은 때로 치명적인 결과도 나타날 수 있으니 더더욱 조심해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위중한 상황일지라도 기독교인들로서 가장 중요한 신앙의 의무인 예배를 쉽게 포기하는 것은 과연 신앙인으로서 합당한 것인지 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불러내신 하나님의 가장 큰 근본적인 목적이 무엇입니까? 그들을 통하여 하나님께 예배 드리기 위함입니다. 시내산에서 성민 언약을 맺고 난 후에 모세를 시내산 위로 불러 올린 후에 사십 일 동안 금식하는 모세에게 가르쳐준 주요 내용이 성막을 만드는 법이었습니다.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언약을 맺고 난 후에 명한 최초의 명령이 바로 성막을 만들라는 것입니다. 성막은 곧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장소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의 가장 근본적인 사명이 하나님께 예배 드리는 것임을 말해주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세상 사람과 하나님 백성과의 차이입니다. 구약의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는 십계명 중 네 번째 계명이 있는데, 그것은 바로 안식일에 하나님을 기억하며 거룩한 성일로 지키라는 계명이니, 곧 하나님께 예배 드리라는 말씀입니다. 이렇게 안식일을 거룩히 구별하여 하나님께 하루를 예배자로 살아가는 구별된 삶이 이스라엘 백성의 부르심을 받은 목적이요 이것이 세상 사람들과 근본적으로 구별되는 요소인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예배를 드릴 때 정신으로만 예배 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영으로만 예배 드리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로마서 12:1 말씀에 이르기를,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합당한 예배니라”
고 하였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도 이르기를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히 10:25)
고 하였습니다. 다시 말하면 예배는 우리의 마음과 영혼과 몸까지 전부 다 드리는 것이 진정한 예배의 자세인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그의 영혼만 오신 것이 아니라 그의 마음만 오신 것이 아니라 그의 몸도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그의 영과 마음과 함께 그의 육체까지도 십자가에 못박히고 살이 찟기시고 피를 흘려서 영원한 죄와 저주와 영벌의 결박에서 우리를 해방시켜주신 것입니다. 이처럼 우리 구주 예수님께서 그의 육체까지 우리에게 내어주셨으니, 우리도 하나님께 예배 드리며 우리 구주 예수님을 섬겨 예배 드릴 때에 우리 몸까지 온전히 드려야 진실된 예배가 되는 것입니다. 몸은 드리지 않고 눈으로 머리로 드리고 마는 인터넷 예배는 한계가 있는 것이요 온전한 예배, 하나님께서 만족하시는 예배가 결코 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코로나 바이러스가 들끓는 상황 속에서도 많은 위험을 무릅쓰고 교회에 나와 몸을 드려 예배 드리는 자의 헌신을 하나님은 심히 기뻐하심이 분명합니다. 물론 내가 걸리면 자신은 괜찮지만 다른 이들에게 피해를 줄까 염려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에 못 나온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 천안의 경우에는 교회 나와서 걸린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들 줌마 댄스와 관련된 사람들이 걸렸습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어쩌다가 만나서 접촉되어 걸린 사람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조심하여 더 이상 전파가 되지 않아서 지금 연 이틀 확진자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이대로 더 이상 천안에서 확진자가 나오지 않도록 우리 모두 기도합시다.
분명한 것은 지금도 잘 되는 식당에는 점심이나 저녁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 자리마다 식사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관공소인 시청, 동사무소도 직원들이 마스크 쓰고 열심히 사람들을 만나 일하고 있습니다. 시장에도, 마트에도 먹거리를 사려고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가고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직장에 따라 무급 휴가를 주는 곳도 있지만 여전히 대부분의 회사와 공장과 가게마다 다들 출근하여 바쁘게 일하고 있습니다. 병원마다 여전히 아픈 사람들은 모여들고 코로나에도 불구하고 다들 번호표 타서 기다리고 치료를 받고 있습니다. 은행마다 여전히 사람들이 모여들어 입금 출금을 하고, 커피 집도 문을 열고 사람들이 모여 삼삼오로 대화를 나누고 있고, 우체국이나 약국 앞에서 여전히 사람들이 마스크를 사려고 50센티 간격으로 줄을 서서 오래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렇게 마땅히 해야 할 일은 다 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에 와서 한 시간 하나님 앞에 예배 드리는 것은 금방 죽을 것 같다고 못한다고 하면, 교회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한 시간 드리는 것이 마트나 시장이나 은행이나 병원이나 식당이나 커피집이나 목욕탕에서 한 시간 두 시간을 쓰는 것보다 훨씬 가치가 없다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시장에서 먹거리 사는 것은 내 목숨을 걸 만한 가치가 있고 교회에서 한시간 예배 드리는 것은 목숨을 걸 가치가 없다는 것입니까?
오늘날 위험한 전염병이 이처럼 유행인데 왜 교회에서 주일에 예배 드린다고 끝까지 고집 피우고 있느냐고 비난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의 진정한 가치를 모르는 어리석은 사람의 말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은 하나님을 예배하다가 전염병에 걸릴지라도 그것을 결코 후회하거나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행함 있는 신앙을 여러분의 자녀들 앞에서 보여드리기를 바랍니다. 지금도 저 북녘에는 목숨을 걸고 비밀리에 예배를 드리다가 잡히면 온 가족이 다 정치수용소에 잡혀 들어갑니다. 그리고 기독교 신앙을 지속하는 한 죽음 외에는 한번 들어간 그 수용소에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그 좁은 신앙의 길을 지금도 마다않고 계속 걸어가는 순교를 각오하는 성도들이 저 북한에 지금도 20만 내지 40만 명이 있습니다. 지금 남한의 기독교인들이 이 유행병 앞에서 병에 걸리기도 전에 미리 겁을 집어 먹고 아예 교회 문을 몇주 전부터 닫아걸고 예배를 폐해버리는 허약한 신앙의 모습들이 북한 형제들이 본다면, 그들이 얼마나 어이없어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전쟁을 앞에 둔 자기의 백성 이스라엘 군사들에게 “내가 너희와 함께할 것이요 너희를 위하여 싸울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라”고 약속해주셨고, 제사장들도 겁내지 말고 두려워하지 말고 떨지 말고 놀라지 말라고 격려해주었는데, 여전히 우리들은 전쟁터에 나가지 아니할 핑계와 이유만을 찾는 겁쟁이들은 아닌지 자신을 돌아봅시다. 전쟁 소집관들이 그들을 향하여 집에 돌아갈 수 있는 좋은 핑계거리와 이유들을 낭독하였을 때 그러한 사유가 자기에게 있음을 발견하고 좋아라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사유가 자기에게 있더라도 자기는 나라와 민족을 위하여, 하나님의 이름의 영광을 위하여, 지금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이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돌아와서 그 후에 새 집에 들어가서 살고 새 포도원의 첫 열매를 맛보고 승리한 후에 돌아와 약혼자와 기쁨으로 재회하여 영광스럽고 기쁜 결혼식을 거행할 것을 바라보고 돌아가지 않고 전쟁에 용감하게 참여한 자들도 분명히 있었을 것입니다. 또한 그런 핑계거리가 없으나 또 다시 책임자들이 마음이 두렵고 허약한 자들은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또 다시 슬금 슬금 창을 내려놓고 보따리를 집어 들고 집으로 돌아간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요 그런 말을 듣고 돌아가는 겁쟁이들과 달리 더욱 마음을 굳게 가지고 그 자리에 남아 소수지만 하나님의 전쟁을 위하여 자기 생명을 바칠 것을 각오한 자들도 있었을 것입니다.
분명 전쟁은 이 소수의 용감한 자들에 의하여 결정될 것입니다. 비록 수는 적을지 몰라도 이들은 하나님 한분만을 믿고 이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하여 자기의 생명을 내걸을 것이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그러한 자들을 통하여 반드시 승리를 거두게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 승리의 결과는 다윗의 약탈물의 분배의 규례에서 정해진 대로 겁이 많아 전쟁에 나가지 못한 형제들이나 힘이 약하여 끝까지 전쟁에 참석하지 못하여 도중에 주저앉은 자들도 함께 공평하게 나눠지게 될 것입니다. 실제로 신사참배에 굴복하였던 자들도 해방 후에 그 신사들을 다 없애고 회개하며 온전히 하나님만을 섬김으로써 그들이 다 구원이 이르렀으리라 저는 생각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받은 해방과 구원의 은혜는 바로 소수지만 목숨을 걸고 신사참배 반대에 헌신했던 주기철 목사님을 비롯한 소수의 진정한 헌신자들의 피흘림의 싸움의 승리가 있었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승리는 이 소수의 헌신된 충성된 주의 병사들로 인하여 결정됩니다. 승리의 열매는 모두에게 공평하게 분배될 것이기에 연약한 자들을 비난하지는 말아야 할 것입니다. 몸이 약하거나 믿음이 약하여 이번 코로나 때에 예배에 참석하지 못하는 자들을 우리는 결코 탓하지 말아야 하겠습니다. 하지만 승리는 헌신된 충성된 소수의 사람들 의하여 결정되기에, 우리들은 여기서 다시 한번 분명히 우리의 행할 바를 결정해야 하겠습니다. 전쟁을 앞두고 집으로 돌아갈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용감하게 전쟁터로 달려가서 끝까지 하나님을 의지하여 싸울 것인가는 우리의 선택인 것입니다. 핑계거리가 있고 합당한 이유가 있어도 여전히 전쟁터로 달려갈 것은 우리의 자유로운 의지에 달려 있는 것입니다.
분명 이번의 전쟁 역시 하나님의 놀라우신 도우심으로 우리들은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이번 코로나 역시 담대한 믿음의 싸움꾼들을 보시고 하나님은 적군들을 다 패배시킬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연약한 형제들도 다 함께 이 승리의 열매를 함께 나눌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히 남는 것은 한 가지 있을 것입니다. 엘리야 시대에 다 바알에게 무릎꿇을 때에 바알에게 무릎 꿇지 아니한 칠천 명을 하나님께서 기억하고 계신 것처럼, 이번에도 하나님은 두려움없이 하나님을 신뢰하며 예배의 자리에 달려왔던 예배의 승리자들을 기억하실 것이라는 점입니다.
그리고 그런 자들은 자기 자신을 향하여 후회가 없을 것입니다. 그 언젠가 훗날에 무서운 유행병이 우리 사회를 뒤덮을 때에 나는 여호와를 신뢰하였고 그 신앙의 싸움에서 뒤로 물러서지 않았노라고 스스로에게 미소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은 이렇게 한 번뿐입니다. 그리고 이 인생의 순례 길에 때마다 예상치 않게 하나님의 시험이 다가올 것인데, 그 때마다 용기 있게 믿음의 길을 선택하고 영적 싸움에서 앞장섭시다. 그럼으로써 여러분을 통하여 하나님의 교회와 하나님의 나라가 든든히 서며 담대한 여러분의 신앙의 싸움의 승리를 인하여 수많은 연약한 자들까지도 여러분을 통하여 그 승리의 열매를 함께 누릴 수 있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