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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2막, 길 위에 서다
2018년, 12년 동안 다니던 회사를 퇴직했다. 2003년부터 함께해온 도시빈민 청년들의 그룹홈 ‘바나바하우스’1)를 본격적으로 맡아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룹홈의 기둥처럼 버텨주던 남편이 공황장애와 수면장애를 겪기 시작하면서 힘들어하다가 쓰러진 때였다. 옆에서 돕는 배필로만 평생 살아갈 줄 알았던 내게 하나님은 길 위에 서도록 하셨다. 막막하고 두려웠지만, 방법이 없었다. 남편은 충분히 쉬어야 하는데도 무리하게 일어서려 했다. 그를 말리는 방법은 단 한 가지. 내가 그 일을 맡는 수밖에는 없었다.
옆에서 지켜본 남편의 일은 녹록지 않았다. 무엇부터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다. ‘세상 속 교회의 역할’에 대해 기도하고 공부하기 시작했고, 함께 일하던 활동가들의 열심과 도움으로 사람들과의 관계와 그룹홈의 그림을 조금씩 그려나갈 수 있었다. 하나님께 갈 길을 보여주십사 기도했고, 사이버대학 사회복지학과에 입학해 공부도 해나갔다. 어릴 때 집안 형편이 어려워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해 생긴 한을 하나님께서 이런 식으로 채워주시나 싶었다.
남편도 조금씩 회복되고 안정돼 가는 듯 보였다. 20년 가까이 쉬지 못했던 남편에게 한 달만 쉬라고 안식월을 제안했다. 그는 평소 자기가 꼭 가보고 싶었던 시애틀의 도시빈민 단체들인 ‘페어스타트’(FareStart)2), ‘리커버리카페’(Recovery Cafe)3), ‘쥬빌리하우스’(Jubilee House)4), ‘컴퍼스하우징연합’(Compass Housing Alliance)5)을 방문하고 싶다고 했다. 사실 나는 12년 동안 직장을 다닌 퇴직금으로 집안 가구도 바꾸고, 딸들에게 그동안 사주지 못한 물건들도 선물하고 싶었다. 하지만 자그맣고 소박한 나의 꿈을 내려놓고 결국,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했다. 12년간의 내 수고가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시애틀에서 경험한 뜻밖의 예배
그해 여름 시애틀로 출발했다. 한 달 동안의 짧지 않은 여정이었다. 출발하는 날부터 돌아오는 날까지, 나는 일정표를 시간대별로 짜고 비행기 좌석과 방문할 곳을 예약하고, 렌트까지 철저하게 준비했다. 출발할 때는 얇은 여행 매뉴얼 한 권을 가지고 갔다. 그렇게 준비하고 움직여야 마음이 불안하지 않다. 하지만 남편은 나와 정반대 성향의 사람이다. 내가 ‘공상쟁이’라고 부르곤 하는 남편은 시애틀에 도착해서도 여지없이 계획에 없던 곳을 가고, 계획에 없던 사람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쉴 새 없이 한국에 돌아가서 하고 싶은 꿈을 이야기했다. 그런 사람 옆에서 산다는 건 엄청난 에너지가 드는 일이었다. 쉴 새 없이 불안감이 찾아오기 때문이다.
역시나, 도착했을 때부터 남편은 페어스타트를 가자고 난리였다. 저녁에 짐도 제대로 풀지 못한 채 그곳으로 출발했다. 마침 도착한 시간에 페어스타트의 졸업식이 열리고 있었다. 마약중독, 알코올중독 등으로 험한 인생을 살아왔던 사람들이 페어스타트의 회복과정을 통해 마침내 셰프 자격을 갖추고, 각자 자신의 길을 찾게 되는 모습을 보여주는 졸업식이었다. 설교하는 사람도 없었고 특별한 찬양도 없었지만, 내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거룩한 예배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한 사람이 한 사람을 인격적으로 돌보고 그 한 사람이 ‘human being’ 되는 회복의 여정은 세상 속으로 들어간 교회의 모습처럼 깊이 각인되었다.
다음 날, 일정대로 다시 찾은 페어스타트에서 안내를 해준 주시에게 마치 이곳이 교회 같고, 어제의 졸업식이 예배처럼 느껴졌다고 말했다. 그녀가 살짝 윙크하며 ‘이곳의 비밀인데 그걸 어떻게 알았냐’고 했던 기억이 난다. 15년 동안 로컬처치 가정교회 목자로서의 부르심과 파라처치 사역자로서의 부르심 사이에서 적지 않은 혼란을 겪던 우리 부부는 기대감이 생겼다. 어쩌면 이곳에서 우리 정체성을 새롭게 정돈하는 계기를 맞을 수도 있겠다고 느낀 것이다.
한 달 동안 시애틀의 여러 도시빈민 단체들을 방문하면서, 동일한 느낌을 주는 곳을 많이 만났다. 그들은 모두 무엇인가를 하며 함께 움직이고 있었다. 아무도 관중으로 있지 않았다. 각자 자신에게 맡겨진 역할을 자발적으로 감당했다. 환하게 환대하는 자, 침묵을 돕는 자, 경청하는 자, 칭찬하는 자, 살핌을 받아오다 이제는 누군가를 살피게 된 자…. 저마다 역할을 찾아가며, 돕는 자가 되었다는 자부심을 느끼는 과정을 보았다. 우리 일행은 잠시 있었을 뿐인데도, 흔들리지 않는 중심 있는 사랑이 이곳에 존재한다는 것을 느꼈다. 무심한 듯했지만 친절했고, 조직처럼 보였지만 구성원들 스스로가 교회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의 문화와 내공이 부러웠다.
함께 사는 청년들과 꾸린 리커버리야구단
한 달간의 시애틀 탐방을 다녀오고 난 뒤, 무엇인가 시작하고 싶었다. 평소 사회인 야구를 활발히 하던 남편을 재촉해 함께 사는 청년들과 일주일에 한 번씩 야구를 해보자고 제안했다. 시애틀에서 야구를 하려고 마약과 술을 끊고 운동장에 모이던 사람들이 생각났기 때문이다. 또 남편이 다시 야구를 시작하며 에너지를 얻길 바랐다. 조현병이 있는 청년, 극심한 조울증에 시달리는 청년, 학교 폭력 피해 경험으로 대인기피증이 있는 청년들과 함께 야구라니…. 남편은 말도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 나도 운동이라면 평생 담을 쌓고 살아왔기에 청년들과 함께 야구를 할 수 있을지 도저히 자신이 없었지만, 용감하게 내가 쓸 글러브와 야구화를 샀다(사실 나는 움직여서 땀나는 걸 지금도 너무 싫어한다).
결국 남편은 사회인 야구를 하는 후배들에게서 야구방망이 몇 자루와 글러브 몇 개를 얻어왔다. 그리고 함께 사는 청년들과 한강 광나루 야구장에서 야구를 시작했다. 결혼식을 앞둔 한 후원자 자매는 웨딩 촬영비를 아껴 야구단의 유니폼을 맞춰주었다. 시작한 지 한 달 만에 ‘HBC유소년야구단’을 운영하시는 권혁돈·한상훈 감독님이 훈련을 도와주시겠다고 연락해오셨다.
처음엔 운동장에서 쭈뼛쭈뼛하던 청년들도 감독님들의 애틋한 친절과 가르침에 마음을 열었다. 내가 야구공을 던지고 받는 모습을 보고서 함께 신바람을 내기 시작했다. “희생, 배려, 협동, 인내, 예의”라는 리커버리야구단의 구호도 만들어졌다. 야구를 하면서 신학을 공부하신 권혁돈 감독님은 늘 훈련의 시작과 끝에 감사기도를 드렸고, 우리 청년들은 믿고 따르는 감독님의 기도에 감동을 받았다. 한 청년은 “예수 믿는 사람들은 우리보다 더 이상한 것 같아요”라는 말을 하기도 했다. 그렇게 몇 개월이 지났을까? 우리 청년들이 눈에 띄게 건강을 회복했다. 야구 유니폼을 입으면 다른 세상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이제는 ‘5149리그’라는 사회인 리그도 만들어졌다. 6개 팀이 1년 동안 리그 경기를 진행하는데, 야구계의 전설 이만수 감독님이 5149리그 총재를 맡아주셨다. 아직 1승도 못한 리커버리센터야구단이지만 열정은 메이저리그 이상이다. 기적 같은 일이고, 환상을 보는 기분이다.
리커버리야구단 창단 경기. (사진: 리커버리센터 제공)
신뢰를 쌓아가는 공동체 활동
같은 가정교회 공동체 안에 서영주라는 영화배우가 있다. 가정교회 예배 때 야구를 통해 조금씩 회복되는 청년들 이야기를 듣고, 자신의 동료들과 함께 일주일에 한 번씩 우리 청년들에게 춤과 노래 연기를 가르치기로 했다. 청년들은 춤과 노래, 연기를 통해 자신들 내면에 있는 욕구들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청년들에게 병과 우울감, 절망에서 회복하려는 힘이 생기는 게 느껴졌다. ‘하나님께서 이렇게 살아계시는구나.’ ‘그분의 교회는 건물과 조직을 뛰어넘어 온 세상 속에 이렇게 살아 엄청난 겨자씨 모략을 퍼뜨리고 계시는구나.’ 기쁨과 두려움이 함께 몰려왔다.
이곳저곳 장소를 옮겨다니며 눈칫밥도 먹고 여러 어려움도 겪었지만, 야구도 예술 활동도 멈추지 않았다. 아니, 멈출 수가 없었다. 하나님이 그리는 그림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이 생겼고, 그 그림을 보고 싶었다. 공동체 사랑방 주방 한구석에 모여 점심밥도 함께 지어 먹었다. 해보지도 않은 밥을 지으면서 티격태격하기도 했고, 각자 다른 메뉴 결정에 희한한 콜라보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활동적이지 못한 성격 탓에 나의 에너지가 거의 바닥을 보일 즈음, 가정교회의 이화란 자매가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퇴직급여를 받으면서 우리를 도와주기 시작했다. 마치 준비하고 있었던 것처럼 거침없이 이 일을 시작한 그녀는, 긍정 에너지의 화신이었다. 그녀는 언제 어디서든 에너지가 넘쳤다. 야구장이든, 예술단에서든, 밥을 준비하는 곳에서든. 그녀의 유쾌하고 쾌활한 성격은 나의 어둡고 지친 에너지를 말끔히 회복시켰다. 밥상공동체를 통해 우리는 서로에게 더 신뢰가 생겼고, 나는 하나님의 그림이 더 기다려졌다.
남편과 반대로 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람이고, 지금처럼 우리 가정이 밥이라도 굶지 않는 것은 나의 현실감각 덕분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늘 현실의 설거지는 내 몫이라 생각했다. 꿈은 내게 불안이었고, 믿을 수 없는 도박 같은 것이었다. 그랬던 내가 꿈을 꾸고 있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아니, 솔직히 정신을 차리고 싶었다. 하지만 하나님의 그림을 보고 싶은 열망 또한 너무도 절실했다. 지금까지 일어난 일들은 내가 생각하고 계획한 것이 아니었다. 우연의 연속이었고, 그 우연이 특별히 너무 자주 일어났다. 마치 준비한 것처럼.
‘리커버리센터’라는 교회가 세워지다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들만의 아지트, 공간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나의 꿈을 이야기했다. 남편은 내가 꿈을 꾼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그리고 그 꿈이 정말로 소중하다고 했다. 하나님이 꼭 이루어주실 것이라고 했다.
시애틀의 ‘리커버리카페’ ‘페어스타트’를 방문했을 때,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공간에 대해 갖고 있는 자부심과 사랑이 대단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밥을 먹을 때 누구도 감사기도를 잊지 않았다. 액자 하나, 화분 하나, 접시 하나에도 의미를 두었다. 스타벅스나 어떤 고급 레스토랑보다 멋지게 꾸미고 싶어 했다. 그 마음이 정말로 인상적이었다. 나도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나의 예수님이 오셔서 기뻐하실 그런 공간을 만들고 싶었다. 깨지고 부서진 세상에서 가난하고 고립된 청년들이 위로를 받고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그런 공간, 진짜 회복이 되는 교회를 만들고 싶었다. 교회라는 간판이 없어도 교회가 되고, 회복이 되고, 어떤 사람들이 와도 “Human Being” 되는 그런 공간을 갖고 싶었다.
그러던 차에, 2019년 어느 날 청년재단에서 강의 요청이 왔다. 우리는 그동안 해왔던 일들에 대해서 진솔하게 영상을 만들어 소개했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벌어졌다. 강의가 끝나자 청년재단에서 파트너십을 제안했다. 우리가 돌봐왔던 청년들과 프로그램을 보고, 고립된 청년들에게 좀 더 많은 기회를 주자며 함께하자고 했다. 함께 간 활동가들과 한동안 멍하니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이게 뭐지?’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직 우리 공간도 없고, 내세울 만한 게 아무것도 없는데…. 단체도 등록하지 않았고 단체명도 없는데, 어떻게 계약하나?’
그다음 날부터는 정말 믿기지 않는 일의 연속이었다. 여기저기 우리를 도와주실 분들을 찾아다니기 시작했다. 그렇게 100명이 넘는 분들을 만났고, 어떤 분은 기부를 통해, 어떤 분은 직접 설계와 시공으로, 어떤 분은 무이자 장기분할로 돈을 빌려주는 것으로 도움을 주셨다. 그렇게 기적처럼 리커버리센터가 아름답게 만들어졌다. 안타깝게도, 완공이 되자 코로나19가 확산되기 시작했지만 프로그램을 조정하며 나름 지혜롭게 센터를 운영했다. 그리고 지난해 12월, 첫 번째 졸업생이 나왔다. 시애틀에서 본 졸업식이 클로즈업되면서, 눈물 콧물이 얼굴을 뒤덮을 만큼 맘껏 울었다. 그리고 리커버리센터가 지금의 모양과 마음으로 전국에 퍼져나가길 소망하게 되었다. 고립된 이들에게 회복이 있는 곳, 건강한 아지트가 되어줄 수 있는 곳으로 말이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수많은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비난받고 조롱의 대상이 된 오늘, 슬프고 부끄럽다. 하지만 수많은 교회의 부끄러움이 교회의 본질과 존재 자체가 아님을 알기에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교회는 성령님이 머무시는 곳, 바로 나와 나의 형제자매들이기 때문이다. 지독한 현실주의자가 하나님의 꿈을 꾸는 곳, 교회를 나는 꿈꾼다.
내가 진정으로 너희에게 말한다. 무엇이든지, 너희가 땅에서 매는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땅에서 푸는 것은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내가 [진정으로] 거듭 너희에게 말한다. 땅에서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합심하여 무슨 일이든지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그들에게 이루어 주실 것이다.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여 있는 자리, 거기에 내가 그들 가운데 있다. (마 18:18-20, 새번역)
■ 각주
1) 김현일 대표가 2003년 세운 단체로 빈곤 위기 청년들을 돌보는 주거공동체이다. 노숙인을 대상으로 무료 배식 을 진행해온 그는 현장에서 노숙인뿐 아니라 빈곤 위기 청년들을 많이 마주하게 되면서 주거 공동체를 시작하게 되었다고 밝힌 바 있다. 복음과상황 359호 ‘사람과 상황’ 인터뷰 참조. (이하, 편집자 주)
2) 빈곤층에게 식당, 카페, 배식 프로그램, 피난처와 학교 등을 제공하면서 이들이 음식 산업에 고용될 수 있도록 도구와 훈련, 도움 서비스들을 제공하는 시애틀의 사회적 기업.
3) 회복적 도움이 필요한 이들(특히 멤버십)에게 마약과 알코올이 없는 안전한 공간과 헌신적인 공동체, 주거, 사 회적·건강 서비스, 건강한 관계, 교육과 고용 기회를 제공하는 사회단체.
4) ‘정의로운 주거’가 캐치프레이즈인 사회단체로 홈리스, 저소득층, 장애인, 고령층에게 값싼 주거가 아닌 합리적인 주거와 공동체를 제공한다.
5) 퓨젓사운드 지역의 홈리스와 저소득층 가구에게 필수적이고 합리적인 하우징을 개발·제공하는 사회단체.
김옥란
‘공상쟁이’ 남편과 든든한 두 딸을 함께 키우는 엄마. 10년 동안 두 딸과 남편을 키우는 전업주부였으며 12년 동안은 직장생활을 했다. 현재는 리커버리센터장으로 청년들의 회복을 돕는 일로 인생 2막을 시작했다. 사회복지를 공부하고 있는 50대 여대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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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는 절망하지 않는다..
리커버리센터.. 기억하며 응원하겠습니다.
그런 교회를 저도 꿈 꿉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