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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그분의 길을 갈 것입니다 | ||||||||||||||||||||||||||
[인터뷰] 유영훈 위원장, 팔당공동대책위 위원장, 팔당 생명살림 회장 - 20여 년 농민과 더불어 온 생명운동의 길 - 4대강 반대는 가치관 싸움, 나의 모두를 걸 것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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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있는 사람은 나오시오”
유영훈 씨는 충북 청주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의 고향은 경상도, 어머니는 평안도였다. 초등학교, 중고등학교를 김포와 인천에서 다녀서 인천은 제2의 고향과도 같다. 유영훈 씨가 운동가의 삶을 살게 된 첫 계기는 대학 때였다. 대학 1학년, 도서관에서 시험공부를 하고 있는데 한 학생이 뛰어들어오더니 총학생회장이 연행되었다고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공부도 되지 않아서 나갔을 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것은 아니었다. 학생들이 경찰 봉쇄를 뚫지 못하는 것을 보고 답답해하며 그저 구경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마침 누군가가 “용기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 우리가 뚫읍시다.”라고 말해 맨 앞, 가운데 줄에 섰다가 연행이 됐다. 생각해보면 그것이 유영훈 씨의 첫 번째 “행동”이었다. 그 뒤로 학생운동을 시작했고 구속되기도 하면서 결국 군대에 가게 되었다. 제대를 하고 보니 학생운동 출신들이 대거 노동현장에 투신하는 분위기였다. 유영훈 씨는 인천에서 고등학교 동기들과 야학 활동을 하던 중 1980년 5월, 민주화의 봄과 함께 복교했다. 그러나 다시 현장으로 가야겠다고 생각했고 때마침 한 선배가 가톨릭농민회를 소개해 1983년 3월, 수원교구 농민회 총무로 활동을 시작했다. 그 즈음 '사도 요한'이라는 이름으로 세례도 받았다. 당시 김수환 추기경과 가톨릭 교회의 모습을 봐왔고 누나를 비롯한 가족들이 신앙활동을 하고 있어 호감이 있었던 터라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사도 요한, 요한은 예수님이 가장 사랑하던 제자였으며, 예수님의 어머니를 모셨던 제자다. 가톨릭농민회는 농민운동을 통해 민주화를 쟁취하려고 했지만 아무리 싸워도 나아지지 않으니 내부에서는 반성의 목소리가 나오기 시작했다. "운동을 할수록 체제의 변화에 앞서 사람이 변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죠. 당장 내 안에도 소유욕, 독점욕이 있는데. 사람이 변하지 않는 한 세상이 변할 수는 없다, 운동 방향을 바꿔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 결과가 생활 속 운동을 위한 우리밀, 우리콩 살리기 운동본부였습니다." "다시는 조직운동은 쳐다보고 싶지 않았어요. 농담처럼 지인들에게 ‘이제 경춘가도에서 옥수수빵 장사를 하며 살겠다’고 말했습니다."
온 국민과 더불어,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본부’ 또 한 번의 계기는 ‘천주교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본부’, 지금의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본부’였다. 첫 번째 시도가 생활운동, 대안 운동으로 농민운동의 내용을 바꾸자는 것이었다면, 두 번째는 운동 주체의 확장이기도 했다. 민주화로 농민운동이 대중화되면서 종교적 농민운동이 해야 할 역할은 따로 있다는 생각을 했다. ‘보다 근본적 변혁, 사회 변화를 모색하는 운동으로 나가야 한다’는 고민에서 생명존중, 도농연대, 유기농 공동체 운동에 집중했다. 그러던 중 1995년 우루과이라운드 타결로 농업이 더욱 어려움에 부닥쳤을 때 당시 김수환 추기경을 주례로 명동에서 기도회를 열었다. 그때 추기경이 “마음이 무너지면 모든 것이 무너진다. 아무리 어려워도 마음을 굳건히 먹고, 생명을 버리는 일은 없기를 바란다. 어렵지만 농민뿐 아니라 온 국민이 함께 농업 살리기에 나서면 이것을 기회로 만들 수 있다”고 말한 데 용기를 얻었다. 그 말을 듣고 교회 안에서 농촌살리기 운동을 해보자는 생각에 출범시킨 것이 ‘천주교 우리농촌 살리기 운동본부’고 운동의 주체가 농민에서 전 국민으로 확장되는 운동이었다. 1990년대 말, 몸담았던 모든 조직을 떠나 휴식을 얻으려고 예전에 함께 운동을 했던 지인을 방문했다. 유영훈 씨의 오랜 동지였던 그 친구는 이미 팔당에서 유기농 운동을 하면서 생산자 조직을 만들었고, 유영훈 씨에게 생활협동조합을 함께 꾸려보자는 제안을 했다. 하지만 당시는 의욕도 없었고 경험상 생협은 한번 시작하면 빠져나오기 어렵다는 생각이어서 주저했다. 결국 가볍게 시작하자는 말에 초대 이사장이 되었고 3년 전부터 팔당에 어려움이 생기자 생협과 영농법인이 결합한 생활문화운동 단체, ‘팔당생명살림’의 대표를 맡던 중 4대강사업이 시작되면서 오늘에 이르렀다. 나는 이 싸움을 가치관 싸움으로 규정합니다. 생명 중심과 물질·편의 중심의 가치관이 대립하고 있죠. 그래서 이 싸움에 그동안 쌓아왔던 내 모든 경험과 가치관을 쏟아 부으려 합니다. 내 삶의 최정점이라고 할 수 있을 거에요."
"신앙은 생활 자체이고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지금껏 그래 왔지만, 이 싸움이 어떻게 끝나든지 주님은 나를 또 어떤 길로 이끄실 것이고 나는 받아들일 거에요." 유영훈 씨는 <러시아에서 그분과 함께>라는 책으로 유명한 취제크 신부가 쓴 <나를 이끄시는 분>이라는 책을 통해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을 읽고 응하는 자세를 배웠다. 이 책은 러시아에서 겪은 영적 체험을 중심으로 "어떠한 어려움도 자유를 향한 갈망과 하느님께 대한 믿음을 꺾을 수 없으며, 오히려 더 깊은 어둠일수록 하느님께 향한 우리의 믿음은 강한 뿌리를 내릴 수 있다는 확신을 심어준" 책이다. 유영훈 씨는 늘 스스로 영웅시하거나 투사화 하는 것을 경계한다. 때론 팔당에 쏟아지는 과도한 사랑이 부담스럽고, 생명이라는 가치를 외치면서도 부족한 것이 많은데 이 과분한 사랑에 대해 보답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면 겸허해진다고 말한다. "결국은 성령께서 이끄는 것이고 내가 가진 경험들은 도구일 뿐입니다. 함께 하는 이들과도 늘 이런 생각을 나누고 있어요." 유영훈 씨는 팔당 일에 뛰어들면서, 아니 그전부터도 활동가로 살면서 늘 가족들에게 가장 미안했다. 가장으로서 역할을 제대로 못 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노모가 계시지만 유영훈 씨가 길거리에 단식에 나섰다는 이야기는 모른다. 다만 아내만 마음 아파한다. 그래서 '미안해할지라도 부끄럽게 하지는 않을 것'을 다짐한다. "지인들은 나에게 돈 안 되고 빛나지 않는 일만 한다지만 이 모든 것이 내 삶이니 모두 받아들이려 합니다. 어려움도 있지만 보람도 있으니까요. 지금도 적지만 함께 버티는 팔당의 농민들이 있고 사람들의 호응이 이루어지고 일이 되어갈 때 행복합니다. 지난번 단식 때도 굉장히 행복했어요. 몸은 힘들지만 많은 이들이 방문하고 생산자들 마음이 흐트러지려 할 때 한 곳으로 모을 수 있었고, 내가 투신해서 사람들이 용기와 희망을 얻는다면 그 이상의 보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4대강 사업, 국민이 막아 낼 것 유영훈 씨는 "시대가 변하고 있다. 일방통행은 국민이 용서하지 않을 것이고, 역사가 평가할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4대강 사업 역시 소수 운동가나 어떤 정당이 막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지적한다. 국민의 인식이 높아졌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의사표시의 기회만 준다면 결국 국민이 4대강 사업을 막아줄 것이라 확신한다. 다만 운동가들이 겸허하게 국민이 나설 수 있도록 계기를 만들어 주어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가 한다는 오만함이 아닌 진정성을 통해 국민이 응답하도록 노력하자"고 덧붙였다. 유영훈 씨는 “용기 있는 사람은 앞으로 나오시오”하는 그 목소리에 지금도 끊임없이 응하는 사람이었다. 처음 시작처럼 이 지루하고 힘든 싸움의 앞줄, 가운데에 서 있는 그에 대해 알리고 싶어서 계획한 인터뷰였다. 복중 더위에 굶는 사람에게 이래도 되는 건가 싶었지만 알량한 언론의 직무를 앞세워 한 시간 남짓 이야기를 들었다. 듣는 내내, 마음에 와 닿았던 것은 그 삶의 일치성이었다. 그야말로 생각과 말과 행위가 평화와 생명의 길로 점철된 일치성. 무엇을, 왜 하고 있는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삶이 던지는 질문에 충실히 응답해 온 이의 내공이 바로 이런 것인가 싶었다. 유영훈 씨는 현재 정동 서울지방국토관리청 앞에 자리를 펴고 무기한 단식 중이다. 사람들의 호응이 가장 큰 보람이라는 그를 응원 하고 싶다면, 생수 한 병 사들고 방문해보시길. 이 순간 화살기도 한 번도 큰 힘이 될 것이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