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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지 |
선 명 |
출발시간 |
기항지 도착시간 |
운항정보 |
여객선사정보 |
인천 - 난지 |
제3왕경호 |
09:30 |
육도 11:00 |
정상운항 |
왕경해운 032-883-6536 |
숙식과 식사
- 풍도에서의 숙박은 민박집을 이용해야 하며, 숙박비는 4만원/1객실
- 숙박시설 : 풍도랜드, 기둥민박 (032-833-1208), 고씨 할머니집(032-886-3715), 하나민박 등
- 식사는 민박집에서 해결하거나, 풍도항 둑길을 따라가다 보면 발전소 바로 윗쪽에 식당이 하나 있음.
- 식사비용은 5,000원 내외/인
"日本"은 아는데 우리는 모르는 섬' 풍도
진달래석과 양생화로 유명한 곳이 풍도이다.
안산 대부도서 직선 24㎞… 인천서 배편 하루 한 차례 "청일전쟁" 시발점된 해전 벌어져
日서 역사교재에 담아 국내서 사료 수집 등으로 '평화 공간' 재조명 움직임...
경기 안산시 단원구 대부동에 속해 있으며 대부도에서 직선거리로 24㎞,
충남 당진군 석문면에서 12㎞ 정도 떨어진 풍도에는 63가구 110여 명의 섬사람들이 산다.
모두들 어업으로 생계를 이어간다.
뭍에서 지척이지만 주민이 적어 인천 연안부두에서 정기여객선이 하루 한 차례밖에 다니지 않는다.
섬 형세는 가파르고 전체가 활엽수로 덮여 있어 농사는 못 짓는다.
조선시대에는 단풍이 아름답다고 풍도(楓島)라고도 불렸지만 1900년대 초 풍도(豊島)로 굳어졌다.
해산물이 풍족하지 않아 가난한 섬. 넉넉해지길 바라는 주민들의 바람이 풍도라는 섬 이름에 녹아 있다.
일본과는 전혀 상관없을 것 같은 이 섬이 일본인에게 널리 알려진 것은 청일전쟁의 시발점이 된 풍도해전 때문이다.
1894년 7월 25일 오전 7시 52분께 일본군의 쾌속 순양함 세 척이 풍도 서북 해상을 지나던 청나라 함정들을 격파했다.
청이 영국 회사에게 빌려 온 상선 고승호도
이때 약 1,100명의 청나라 군사와 보급품, 장비 등을 실은 채 수장됐다고 역사는 기록하고 있다.
고승호가 보물선으로 알려지며 1930년대부터 지금까지 잊을 만하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이유다.
한 풍도 주민은 "요새도 고승호 관련 지도를 들고 섬에 들어와서 물어보는 사람들이 종종 있다"고 말했다.
풍도해전은 청일전쟁의 시작이자 동북아의 패권이 일본으로 기울게 된 계기였다.
이후 일본은 러일전쟁 때도 풍도를 발판 삼아 중국 뤼순(旅順)항에 정박한 러시아 함대를 궤멸시켰다.
일본 역사 교과서는 현재도 청일전쟁의 기선을 잡은 풍도해전을 지도와 함께 비중 있게 다루고 있다.
일본인들이 풍도에 와 보지 않았지만 풍도를 아는 것은 우
리가 이순신장군 덕분에 가 보지 않았더라도 한산도를 아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한국인의 의사와 무관하게 풍도가 근대사의 중심에 선 것은 지리적 중요성 때문이다. 풍도는 예부터 서해의 요충지였다. 신
라와 연합한 당나라 군사가 백제를 치기 위해 들어왔던 뱃길에도 풍도가 포함됐다.
고려시대에는 경상도와 전라도에서 세곡을 실은 배가 예성강으로 들어가는 연안항로의 길목이었다.
조선 말 외세가 한양으로 진입하기 위해서도 풍도 인근을 지나야만 했다.
고종실록에는 신미양요와 병인양요 직전 풍도 해상에 이양선들이 나타났다는 기록들이 남아 있다.
또 러일전쟁 당시 일본의 해군 제독 도고 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는
"동해에서는 독도, 서해에서는 풍도를 차지해야 한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뱃사람들은 "풍도에서는 경기만을 지나는 모든 배들을 한 눈에 볼 수 있다"고 한다.
더구나 풍도 해안에는 서해의 다른 섬들과 달리 갯벌과 해수욕장이 없다.
항시 수심이 깊어 큰 배들이 정박하기에 좋은 조건을 갖춘 곳이다.
첫댓글 서해바다 폭풍으로 선박이 결항되어 쉬고있답니다.
저도 처음듣는 섬이네요^^
갯벌과 해수욕장이 없기 때문이군요..
처음 들어본 섬이름이어서 궁금했는데 설명해주시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