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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교양 스크랩 4월 학생 혁명-4월 26일 이승만 하야와 민권의 승리
우주후 추천 0 조회 103 16.03.31 16:5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4월 학생 혁명-4월 26일 이승만 하야와 민권의 승리 

 

4월 26일  이승만의 하야와 민권의 승리 

 

 

 

▲ '4·19'와 '5·16' 직후의 조선일보 지면.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보도한 1960년 4월 26일자(사진 위) 1면은‘萬歲(만세)! 民權(민권)은 이겼다!’라고 커다란 제목을 뽑았다. 1961년 5월 17일 자 조선일보 석간 1면은 계엄군 검열단이 제목과 기사를 마구 긁어내어 만신창이가 되었다

 

4.19 학생 혁명의 전개

  1 .개요
  2.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
  3. 3월 15일, 마산 시위
  4. 4월 11일, 제 2차 마산 시위
  5.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6. 4월 19일, 피의 화요일
  7.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도
  8. 자유당 정권의 몰락
  9. 미완의 혁명
10. 4.19세대

 

1. 개요

 
1960년 4월, 대한민국에서 이승만의 자유당 정권이 저지른  3.15 부정선거에 시민들이 항거하여 대대적인 시위를 일으켜, 최종적으로는 이승만 대통령을 사임하게 하고 제 1 공화국을 종식시킨 민주주의 시민 혁명이다.

2. 2월 28일, 대구 학생 시위
시위의 시작은 2월 28일 대구에서 학생들이 시위를 벌인 것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민주당 정.부통령 후보 장면 유세일이 일요일이었는데, 당국에서는 학생들이 유세장에 참여못하게 하도록 일요일에인데도 학생들을 강제로 등교하도록 지시했고, 이에 반발한 경북고 학생들이 "학원을 정치도구화 하지 말라!"고 가두시위를 벌였으며 이에 호응한 대구지역 여러 고등학교 학생들은 27일 시위를 벌였다.
 
다음날 28일 학생위원장이 부정에 항의하고 신성한 권리를 지키는 것을 요지로 하는 결의문을 낭독하였다. 결의문은 다음과 같다.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학도들의 붉은 피가 지금 이 순간에도 뛰놀고 있으며,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쳐부수기 위해 이 목숨 다할 때까지 투쟁하는 것이 우리의 기백이며, 정의감에 입각한 이성의 호소인 것이다.

당국에서는 이를 공산당 사주에 의해 벌어진 일이라 일축하면서 학생의 시위를 경찰을 동원해 강제 해산시켰다.
3. 3월 15일, 마산 시위
 
3월 15일의 대대적인 부정선거가 일어났다.(3.15부정선거) 마산지부 민주당 간부들은 경찰의 제지를 뚫고 투표소로 들어가 부정선거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하였으며, 민주당 마산 지부는 최초로 선거 포기를 선언했다. 그리고 당간부들은 마산시민을 모아 부정선거 규탄 시위를 진행했는데 전투적인 기질을 지닌 마산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시간이 지나자 시위 인원이 만 여명을 넘을 정도로 불어났고, 경찰과 대치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갑자기 정전이 발생,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총격을 가해 그 중 7명이 사망했고 수십명의 시민들이 부상당했다.

이 사건에 대해 후에 국회조사단이 이승만과 이기붕에게 경찰의 강경대응에 대해 따졌는데 이승만은 공산당 사주로 벌어진 시위라고 주장하였으며 부통령으로 당선된 이기붕은 "총은 쏘라고 있는 것 아닙니까?"라는 병크를 터트렸다.
 
이 사건의 책임을 지고 내무부장관과 치안국장이 사임했고, 당국에서는 내무부장관을 교체하여 사건을 수습하려했다. 하지만 학생들은 서울, 부산 등지에서 선거를 다시 하라는 시위를 지속적으로 벌였고, 4월 6일에는 민주당 간부들이 주동이 되어 시위를 벌이기까지 했다.
4. 4월 11일, 제 2차 마산 시위
 
한편 3.15 마산시위에서 아들이 행방불명된 이후로 아들을 찾기위해 어머니가 한 달 가까이 마산 거리를 분주히 돌아다니고 있었다. 그리고 4월 11일, 행방불명되었던 마산상고 재학생 김주열의 시신이 바다에 떠올랐다.
경찰은 김주열의 시신을 마산도립병원으로 급히 옮기고 사실을 은폐하려 했으나 김주열의 시신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마산 시내에 퍼지자 수많은 시민들이 경찰의 저지를 뚫고 병원 안으로 밀려들어가 김주열의 죽음을 확인했다.
 
최루탄이 관통된 상태로 발견된 김주열
 
김주열의 시신은 최루탄이 오른쪽 눈을 관통한 상태였다. [1] 시신을 본 마산 시민들은 분노했고, 학생들이 제일 먼저 대열을 이루어 시가행진을 시작했으며 시민들은 학생들을 향해 박수를 보냈다. 이윽고 성난 2만 여명의 시민들이 마산 경찰서와 시청에 난입하였으며 그 날 밤 경찰은 또 발포를 했고 두 명의 시민이 사망했다.
이에 더 자극받은 마산 시민들은 3일간 거리로 쏟아져나와 시위를 벌였으며 마산행정은 온통 마비되었다. 정부에서는 2차 마산 시위를 공산당이 사주한 것이라고 몰아붙였고, 이승만 대통령은 같은 날 난동 뒤에 공산당이 있다는 특별담화를 발표, 15일에도 공산당 선전 때문에 마산 "폭동"이 일어났다는 담화를 발표했다.

5. 4월 18일, 고려대학교 학생 시위
 
하지만 특별담화 이후로 도리어 이승만에 대한 반감은 전국적으로 확산되었고, 4월 18일에는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시위를 벌였다. 고려대학교 학생 3000여명이 "민주역적 몰아내자"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태평로 국회의사당 앞까지 행진하여 재선거 실시를 요구했다. [2]
그러나 그날 저녁, 학생들이 학교로 돌아가다가 유지광이 거느린 정치깡패에 의해 쇠망치 등으로 집단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도 언론의 자유는 (그럭저럭) 보장되어있었으므로 학생들이 정치깡패에 구타당하여 길바닥에 나뒹굴고 있는 사진이 다음날 조간신문에 대문짝만하게 실렸고, [3]이를 본 전국의 학생들과 시민들이 크게 분노하게 되었다. 참고로 이날을 기리는 의미에서 고려대학교 인문사회 캠퍼스에는 4.18기념관이라는 것도 존재하며, 고대에서 4.18 구국대장정이라는 행사도 한다.

6. 4월 19일, 피의 화요일
 
 

(4.19 당일의 모습을 담은 영상)

4월 19일 화요일, 피의 화요일이라고 불리는 그날에 시위는 서울, 대구, 부산, 마산, 전주, 제주 등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우선 서울의 경우 서울대학교 문리대생들이 교문을 나서자 여러 단과대생들이 합세하였고 서울 시내 대부분의 대학교, 이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생들까지 대대적으로 시위대에 합류하였다.
"시간이 없는 관계로 어머님을 뵙지 못하고 떠납니다. 어머님, 데모에 나간 저를 책하지 마시옵소서. 우리들이 아니면 누가 데모를 하겠습니까. 저는 아직 철 없는 줄 압니다. 그러나 국가와 민족을 위하는 길이 어떻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저는 생명을 바쳐 싸우려고 합니다. 데모하다 죽어도 원이 없습니다. 어머님, 저를 사랑하시는 마음으로 무척 비통하게 생각하시겠지마는 온 겨레의 앞날과 민족의 광복을 위해 기뻐해주세요. 부디 몸 건강히 계세요. 거듭 말씀드리지만 저의 목숨은 이미 바치려고 결심하였습니다."

데모를 나간 당시 한 여중생의 편지. 이 편지는 한성여중 2학년이었던 진영숙이 시위를 떠나기 전 부모에게 남긴 마지막 편지로, 진영숙은 시위에 참여했다가 목숨을 잃었다.

정부에서는 귀가조치를 단행했으나 10만명 이상이 세종로와 태평로 일대를 가득 메울 정도가 되었다. 서울대생들은 국회의사당 앞을 선점하고 동국대학교 학생들은 경무대 방향으로 행진하였다. 당시 경찰은 중앙청 앞에서 저지선을 형성하면서 공포탄과 최루탄을 남발하며 강경하게 대응하였다.
시위대의 선두 학생들이 3차 저지선으로 형성해둔 소방차를 빼앗았고, 시위대는 최종목표인 경무대를 향하기 시작했고 그리고 오후 1시 30분경,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21명이 사망하고 170여명이 부상을 입는 참사가 일어났다.
지방에서도 격렬한 시위가 이어졌고 경찰이 발포하여 시민들이 죽거나 다쳤다. 이날 하루에만 전국에서 115명이 사망, 727명이 부상 당하였다.
이날 하루 서울대학교 학생이 7명 사망하였다. 현재 서울대학교 교정에는 4.19탑이라는 것이 존재한다. 사회대와 법대를 내려가면 있는 두레문예관 앞에 있다.

이하는 서울대학교 문리대에서 발표한 4월혁명 선언문.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지성과 양심의 엄숙한 명령으로하여 사악과 잔악의 현상을 규탄 광정하려는 주체적 판단과 사명감의 발로임을 떳떳이 천명하는 바이다.

우리의 지성은 암담한 이 거리의 현상이 민주와 자유를 위장한 전체주의의 표독한 전횡에 기인한 것임을 단정한다. 무릇 모든 민주주의의 정치사는 자유의 투쟁사이다. 그것은 또한 여하한 형태의 전제도 민중 앞에 군림하는 '종이로 만든 호랑이'같이 어설픈 것임을 교시한다.

한국이 일천한 대학사(大學史)가 적색 전제에의 과감한 투쟁의 구획을 장하고 있는데 크나큰 자부를 느끼는 것과 꼭같은 논리의 연역에서 민주주의를 위장한 백색 전제에의 항의를 가장 높은 영광으로 우리는 자부한다. 근대적 민주주의의 줄기는 자유다.우리에게서 자유는 상실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아니 송두리째 박탈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이성의 혜안으로 직시한다.

이제 막 자유의 전쟁엔 불이 붙기 시작했다. 정당히 가져야 할 권리를 박탈하기 위한 자유의 싸움은 바야흐로 풍성해가고 있는 것이다.

민주주의와 민주의 공복이며 중립적 권력체인 관료와 경찰은 민주를 위장, 가부장적 전제 권력의 하수인으로 발벗고 나섰다. 민주주의 이념의 최저의 공리인 선거권마저 권력의 마수 앞에 농락되었다. 언론·출판·집회·결사 및 사상의 자유의 불빛은 무식한 전제 권력의 악랄한 발악으로하여 깜박이던 빛조차 사라졌다. 긴 칠흑같은 밤의 계속이다. 나이 어린 학생 김주열의 참사를 보라! 그것은 가식없는 전제주의 전횡의 발가벗은 나상밖에 아무 것도 모른다. 저들을 보라! 비굴하게도 협박과 폭력으로써 우리를 대하려 한다. 우리는 백보를 양보하더라도 인간적으로 부르짖어야 할 같은 학생의 양심을 느낀다.

보라! 우리는 기쁨에 넘쳐 자유의 횃불을 올린다. 보라! 우리는 캄캄한 밤의 침묵에 자유, 자유의 종을 난타하는 타수(打手)의 일원임을 자랑한다. 일제의 철추하에 미칠 듯 자유를 환호한 나의 아버지, 나의 형들과 같이!

양심은 부끄럽지 않다. 외롭지도 않다. 영원한 민주주의의 사수파는 영광스럽기만 하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결은 용기일 뿐이다. 우리의 대열은 이성과 양심과 평화 그리고 자유에의 열렬한 사랑의 대열이다. 우리 법은 우리를 보장한다.
 
중앙대학교 학생들도 이날 시위에 참가해서 하루만에 무려 6명이 사망했다. 7명이 사망한 서울대학교에 이어 가장 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이래서 중앙대의 별명이 '의혈'이다.
 
다음은 중앙대에서 발표한 선언문.

"우리 중대생이 자유당 정권의 폭정을 규탄하는 것은 기성세대의 파렴치한 유산을 물려받지 않으려는 젊은 세대의 정당한 저항이다. 총칼의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감행되어야 할 이 항쟁은 우리 후손에게 민주주의를 말살하려는 광적인 장기집권이 가져다 준 부정과 부패의 무서운 해독을 오염시키지 않으려함에 있다."

사망자 명단-故고병래(상학과3), 故김태연(약학과3), 故서현무(법학과3), 故송규석(정외과3), 故지영헌(신문과3),故전무영(신문학과1).

6인의 열사들의 영정과 이름은 중앙도서관 앞의 탑에 새겨져 있다. 다음은 탑의 비문의 내용

우리들은 남으로부터 싸워 올라가
마침내 사월학생혁명 그 대열에
기를 높이 올렸다
그러함에 있어 우리들은
우리들의 영원한 사랑
조국의 자유와 독립
민주와 번영
생존의 평등 평화를 위하여
모든 지성 모든 생면 모든 사랑을
다하여 아낌이 없었다
그리하여 여섯 명의 벗을 잃었으니
아! 슬프도가 4월이여! 광영이여!
벗의 이름으로 끝이 없어라

4293년9월 중앙대학교 학생일동.

7.

계엄령과 계엄군의 태

정부는 그날 오후 3시에 서울지역에 계엄령을 내렸는데 총격사망 문제를 덮기위해 1시로 소급하여 적용하였다. 계엄령은 서울, 부산, 광주, 대전, 대구, 전주, 청주, 인천 일대에 선포되었다. 그런데 경찰과는 대조적으로 당시 계엄군은 중립을 지켰고 정치문제에 개입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고수하며 발포를 하지 않았으며, 시위대와 협상을 하기도 하는 등 유연하게 대처하였다. 그들이 경찰들처럼 강경하게 시위대를 진압하지 않은 것은 이승만이 경찰세력을 비호하는 한편 독재연장에 공헌을 한 적 있는 군부에게 보상을 제대로 내려주지 않았고, 유력한 부통령 후보였던 군사부 지도자 이범석을 부통령 후보자리에서 끌어내리는 일을 저지른 적이 있어 군부 내에서 이승만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었기 때문이다.

8.자유당 정권의 몰락

그동안 미국은 1,2차 마산항쟁에 유감의 뜻을 표했을 뿐이었지만 4월 19일의 사태에 대해 주한미국대사는 정당한 불만의 해결을 희망한다고 밝혔고, 미국무부장관이 주미한국대사에게 항의각서를 보내기에 이르렀다.   [4]
미국이 등을 돌린지 얼마 안 된 4월 21일, 국무위원이 일괄 사표를 냈고 4월 23일에는 장면이 부통령 사임서를 냈으며, 그날 이기붕은 부통령 당선 사퇴를 고려하겠다고 발표했으며 다음날 이승만은 자유당 총재직을 사퇴하겠다고 밝혔다.
4월 25일, 대학교수들이 모여 시국선언문을 채택하고 오후 5시 50분경 "학생의 피에 보답하라"라는 플래카드를 앞세우고 데모를 하였고 시민들이 이에 호응하여 시위군중이 1만명까지 불었다.



이전에는 부정선거를 다시하라는 것이 주요 요구였고 이승만 하야는 주요사항이 아니었으나, 교수들은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으며 이는 시민들의 호응을 얻었다. 교수단 데모가 끝난 뒤에도 시민, 학생들이 통금사이렌을 무시하고 시위를 계속했으며 일부는 철야농성까지 벌였다.
다음날 새벽5시에 통금이 해제되자 학생과 시민들이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7시에는 3만여명이 모여 이승만 하야를 요구하였고, 1만여 군중은 탱크를 앞세우고 광화문 일대에서 시위를 하였다.
 
9시경 이기붕의 집이 파괴되는가 하면 [5] 같은 시각 45분경에 파고다 공원에 있는 이승만 동상이 군중들에 의해 철거되었다.[6]  10시경 시위 군중은 10만 명으로 불어났으며 국민학생들도 '부모 형제들에게 총부리를 대지 말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데모를 하였다. 피의 화요일 때 수송국민학교 학생 한 명이 총에 맞아 사망하였다.


(수송국민학교 학생들이 데모하는 모습)


아래는 당시 수송국민학교 학생 강명희가 남긴 글.
아! 슬퍼요
아침 하늘이 밝아오면는
달음박질 소리가 들려옵니다.
저녁 노을이 사라질 때면
탕탕탕탕 총소리가 들려옵니다.
아침 하늘과 저녁 노을을
오빠와 언니들은 피로 물들였어요.

오빠와 언니들은 책가방을 안고서
왜 총에 맞았나요
도둑질을 했나요
강도질을 했나요
무슨 나쁜 짓을 했기에
점심도 안 먹고
저녁도 안 먹고
말없이 쓰러졌나요
자꾸만 자꾸만 눈물이 납니다.
잊을 수 없는 4월 19일 그리고 25일고 26일
학교에서 파하는 길에
총알은 날아오고
피는 길을 덮는데
외로이 남은 책가방
무겁기도 하더군요
나는 알아요 우리는 알아요
엄마 아빠 아무 말 안해도
오빠와 언니들이 왜 피를 흘렸는지를
오빠와 언니들이
배우다 남은 학교에
배우다 남은 책상에서
우리는 오빠와 언니들의
뒤를 따르렵니다.
결국 시민 대표는 이승만과 면담을 하였고 10시 20분경, 드디어 이승만이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여 사임할 것을 발표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째, 국민이 원하면 대통령직을 사임할 것이요,
  둘째, 선거를 다시 하도록 지시하였고,
  셋째는, 이기붕 의장이 모든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가겠다고 결정한 것이다."
시민들은 방송을 듣고 경무대 앞에서 만세를 부르며 승리를 환호하였다.
 
이리하여 오후 2시, 국회는 이 대통령 즉시 하야, 정부통령 선거 재개, 내각책임제 개헌 등을 만장일치로 결의하였고 다음날 오후 3시에 국회에 제출된 이 대통령 사임서가 즉시 수리되었으며, 헌법 규정에 따라 수석국무위원인 허정이 대통령 권한을 대행하게 되어 후에 제2공화국이 출범하게 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이 물러나면서 자유당 정권과 이승만 추종자들은 저항할 여지도 없이 힘을 잃었으며, 집이 무너진 이기붕은 이화장으로 이사한 28일 일가족이 모두 자살하는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7]   이승만은 이기붕 가족을 조문한 다음날 비밀리에 하와이로 망명해버렸다. 그리고 살아서 한국 땅을 밟지 못하고 하와이에서 7월 19일에 사망하였다.
 
9.미완의 혁명
하지만 지도자가 중심이되어 이루어진 조직적인 혁명이 아니었고 민중에 의해 자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혁명결과 권력은 야당인 민주당에게로 돌아갔고, 반공보수가 아직까지 당내의 정책이었던 민주당은 시민들의 요구사항에 부응하지 못하였다. 무엇보다 장면내각 때 경찰 내 발포책임자에게 무죄 선고를 하자 시민들은 크게 실망하게 된다.
 
한편 경찰에 대한 민중의 반감은 극에 달한데다 자유당 정권 내내 억압되었던 시민들의 요구가 한꺼번에 폭발하자 시위로 시작하여 시위로 끝나는 하루가 이어지기도 했고 경찰서 등 관공서 건물에 대한 파손이 이어지기도 했다.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시국이 안정되고 국민들 사이에서 민주화가 될 것이라는 희망이 생겼다고 하는데, 정치권은 민주당 신파인 장면 총리와 구파인 윤보선 대통령 사이에 치킨게임으로 여전히 혼란스러웠고, 그틈을 타서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키게 된다(5.16 군사정변).  [8]
장면은 겁먹고 수녀원으로 도망가서 나오지 않았고, 윤보선은 이를 역이용해먹으려 하다가 기민하게 대처하지 못하여 쿠데타는 어이없게 성공하게 되었다.
그래서 4.19혁명은 '미완의 혁명'이라고도 한다. 이 때문에 정치학자들 사이에서는 4.19를 혁명으로 부를 수 있는 가에 대해서 몇번 이의가 제기된 적이 있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이의는 4.19 자체를 부정하는 의미에서의 이의제기가 아니라 어디까지나 '혁명'의 성격과 정의에 관한 학문적인 논쟁의 일종으로 봐야 할 것이다.
10. 4.19세대
4.19 혁명 기간에 대학생으로 운동에 참여 하고 이승만 정권을 무너뜨린 세대를 4.19세대라고 한다. 당시 대학생이 그렇게 많지 않았기 때문에 386세대 만큼 대중적이지는 않지만, 맨땅의 대한민국에서 독재정권을 타도하여 최소한의 민주적 원칙을 수호하였고 산업발달을 실질적으로 이끌어낸 위대한 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칭송하는 층에서는 4.19세대나 6.3세대가 이승만을 다시 평가해야한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심지어는 4.19 혁명 때 민중들이 박살내 버린 이승만 동상을 다시 세워야 한다느니, 도로 지폐에 넣어야 한다는 주장하고 있다.
   [1]  후에 국회 조사단이 조사해본 결과, 그 최루탄은 벽을 뚫고 들어가는 고성능 최루탄이었으며, 심지어 그 최루탄에는 "군중을 향해 쏘지 말것."이라는 설명까지 적혀있었다.

   [2]  특히 고려대와의 커넥션이 강한
동아일보 가 이를 앞장서서 보도했다.

   [3]  그런데 참고로 이 당시 고려대학교 학생들이 구타를 당한건 사실인데, 구타를 당한 이유가 깡패들이 먼저 학생들한테 시비걸었다가 개발살나서 쪽팔린 나머지 나중에 몰래 습격해 구타한 것이다. 자세한 것은 고려대학교 항목 참조.

   [4]  이는 미국이 이승만 정권의 독선배타적 외교행태를 탐탁지않게 보았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특히 미국은 자본진영 우방국인 일본과 남한이 관계를 돈독히 할것을 원했으나, 이승만은 항일운동가 전적이 있어서 그런지 이승만 라인을 선포하는 등 대일외교 부분은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였다.
 
이러한 행보 때문에 2ch혐한 들은 이승만을 매우 싫어한다. 정작 한국에서는 친일파를 자기 세력에 끌어들여서 친일파 득세의 원흉으로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데(…).

   [5]  현재 그 자리에는 4.19혁명기념도서관이 설립되었다.

   [6]  현재 그 자리에는 손병희 동상이 서있다.

   [7]  하지만 일가족 자살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타살일 가능성도 있다는 음모론이 있다지만 확실한 것은 불명. 야인시대에서는 이승만에 양자로 들어갔던 큰 아들이 가족을 죽이고 자신도 자살한다는 걸로 묘사되었다

   [8]  박정희는 4.19 1주년이 되면 1주년 기념 시위로 사회가 혼란스러울 것이라 생각하고 쿠데타를 준비하였지만 그날이 생각보다 조용해서 수틀려버려 무산되었다는 말이 있다(...)

   [9]  이게 평양에 있는 그 분 동상보다 더 크고 아름다운 거였다...

   [10]  애초에 이런 주장을 하시는 분들은 전쟁 중에 굶주린 중하류층 출신이라 미국이 보내주는 원조물자받고
미국킹왕짱, 이승만 박사 킹왕짱이라는 인식이 못박힌 분들이라 역사적 맥락이나 사회적 메커니즘을 얘기를 해봤자 통하지 않는다(...).

 

 

 

4.19혁명 직후에 이승만 동상이 철거되는 모습. 현재 이승만 흉상이 서 있던 자리에는 남산식물원 앞 분수대가 있다 [9] 

 

 

파고다 공원에 서있던 이승만 동상이 파괴 되었다. 지금 그자리에는 손병희 선생 동상이 서 있다

 

 

 

이정재

 

 

 

 4·19 혁명 직후 미국도 “이승만 물러나야” 압박

 

4.19 혁명 때 부상당한 학생을 위문하는 이승만 대통령. 그때 그는 “젊은이들이 분노하지 않으면 젊은이가 아니다”는 말로 청년학도들의 희생을 높이 평가했다.(출처: 『대한민국 정부 기록사진집 4』, 국정홍보처, 2000년)

1960년 4월 18일 고려대생들의 시위는 4·19 혁명의 도화선에 불을 지폈다. 이제 대구의 2·28 시위와 마산의 3·15 의거 이래 학생시위를 이끈 주역은 고등학생에서 대학생으로 바뀌었다.

서울시내 모든 대학과 주요 고등학교 학생들이 가두로 나온 이튿날. 경무대 앞에 진출한 시위대를 겨눈 경찰의 발포에 186명의 미처 못다 핀 꽃봉오리가 스러져 갔다.

“누적된 부패의 부정과 횡포로써 민심을 유린하고 민족적 참극과 국제적 수치를 초래케 한 현정부와 집권당은 그 책임을 지고 물러가라.” 교수들의 시국선언이 나온 다음 날인 26일 오전 10시30분 학생대표를 만난 이승만은 조건부 하야 성명을 발표했다.

“우선 그놈의 사진을 떼어서 밑씻개로 하자/ 그 지긋지긋한 놈의 사진을 떼어서/ 조용히 개굴창에 넣고/ 썩어진 어제와 결별하자/ 그놈의 동상이 선 곳에는/ 민주주의의 첫 기둥을 세우고/ 쓰러진 성스러운 학생들의 웅장한/ 기념탑을 세우자/ 아아 어서어서 썩어빠진 어제와 결별하자.” 바로 그날 시인 김수영은 독재자에게 정치적 사망선고를 내렸으며, 시위대는 탑골 공원에 서 있던 그의 동상을 끌어내렸다.

“국민이 원한다면 하야하겠다.” 그때 이승만은 자신이 물러나는 것을 국민이 원하지 않는다고 강변하며 권좌에서 버틸 수도 있었다. 그런데 왜 바로 다음 날인 27일 오후 대통령 사직서를 국회에 제출했을까?

하루 전 오전 9시10분. 매카너기 미국 대사는 김정렬 국방장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즉시 이 대통령을 만나 학생대표단 면담, 선거 재실시에 관련된 성명발표, 이 대통령의 향후 정치적 역할에 대한 고려 등을 건의하라.” 10시15분 국민이 원하면 사임하겠다는 조건부 하야 방침이 매카너기에게 통보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너무 많은 일을 해온 연로한 정치가는 책무로부터 벗어나 존경받는 자리로 은퇴하는 것이 좋다.” 10시40분 이승만을 만난 매카너기는 지금이 바로 물러날 때라고 압박을 가했다.

4·19 혁명이 터지자 미국은 군부에 정치적 중립을 지키도록 지속적으로 신호를 보냈고, 이승만에게도 세 차례에 걸쳐 직접적으로 퇴진을 종용했다. 임창순 교수의 증언에 의하면 대학교수단의 시위도 미국의 종용에 따라 일어난 것이었다.

 

아래로부터의 힘에 의한 정부 전복이 공산화를 촉발할 경우 반공의 보루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미국의 우려가 이승만에 대한 지지철회의 주된 이유였다. 미국의 원조 없이는 국가의 존립이 어렵던 그때 4·19 혁명은 미국의 개입과 지지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미국이 이승만과 선긋기에 나선 결정적 모멘텀은 민주주의의 제단에 몸과 마음을 바친 학생들의 희생에서 찾는 것이 합당하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출처 : 그때 오늘 /[중앙일보]

 민의 를 저버린 권력의 말로 … 이기붕 일가의 비극

 

왼쪽부터 이강석, 영부인 프란체스카, 이승만, 이기붕, 박마리아, 이강욱. 제1공화국 시기에 ‘민족의 해’ 이승만에 버금가는 권력자는 ‘민족의 달’로 불린 이기붕(李起鵬, 1896~1960)이었다

4·19혁명 직후 대학생 231명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이 누구인지를 묻는 설문에 이기붕, 자유당 지도층, 경찰, 부정축재자, 이승만, 정부관료 순으로 답했다. 이기붕이 1위, 이승만은 5위였다. 또한 시위 참여 이유에 대해서도 응답자의 84.5%가 자유당에, 그리고 11.5%가 이승만에 대한 반대를 꼽았다. 4·19혁명은 자유당 과두(寡頭)지배체제에 대한 저항이었으며, 그 중심에 이기붕이 있었다.

그는 1923년 미국 아이오와주 데이버대학 졸업 후 1934년까지 ‘3·1신보’의 편집을 맡으면서 이승만과 인연을 맺었다. 1945년 10월 이승만의 환국(還國) 이후 그는 서무담당 비서, 대통령비서실장, 서울시장, 국방부 장관 등을 역임하면서 권력의 사다리를 하나하나 올라갔다.

 

“파벌작편(派閥作偏)하여 반당(反黨)행위를 하는 족청(族靑)계를 축출하고 당을 정화 재건하라.” 1953년 9월 이승만의 지시에 따라 이범석이 이끄는 민족청년당 계열 숙청을 주도한 그는 당권을 손아귀에 넣었다. 이듬해 국회의장과 자유당 중앙위원회 의장자리에 오르며 명실상부한 제2인자가 됐다.

그때 미국은 “경제 개발에 더 적극적이고 대미 관계에서 덜 독자적이며(less independent) 대일 관계에서 덜 시끄럽고(less obstreperous), 대북 관계에서 광적인 과격함을 보이지 않는다”고 판단한 이기붕을 이승만의 후계자로 지목했었다.1956년 선거에서 낙선의 쓴잔을 들었지만, 이승만과 미국 둘 다 그의 손을 계속 잡아주었다.

 

1957년 3월 이승만은 이기붕의 장남 강석을 양자로 입적했다. 보수양당제의 확립을 바란 미국도 이기붕과 조병옥이 이끄는 자유당 온건파와 민주당 구파를 묶어 여당으로 만들고, 민주당 신파를 야당으로 만드는 것이 이승만 이후의 가장 바람직한 정치체제라고 판단했다.

 

내각제를 정강정책으로 택하고 있던 민주당의 구파와 공감대를 이룬 자유당 온건파의 내각제 개헌 노력은 자유당 강경파의 반발에 부딪쳐 무산됐다. 1960년 2월 15일 민주당 대통령 후보 조병옥이 급서(急逝)한 후 4대 정·부통령 선거도 4년 전과 마찬가지로 반쪽 선거가 됐다.

 

그때 자유당 강경파는 당 조직은 물론 경찰과 공무원을 동원한 부정선거를 자행함으로써 파멸을 자초했다. 4·19혁명이 터지자 미국은 이기붕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다.

 

1960년 4월 28일 아침. 이강석은 치사량의 수면제를 복용해 자살한 가족들의 시신을 향해 한 발씩 총탄을 쏜 뒤 자신의 가슴과 관자놀이에 두 발의 탄환을 쏘았다. 경무대 본관 36호 관사에서 자살로 생을 마감한 이기붕 일가의 비극은 민의를 저버린 권력의 말로(末路)를 보여주는 권력 무상의 증표로 우리 기억 속에 남아 있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출처] : 그때 오늘/ 중앙일보

 

 

  

 

 
 
민의,학도는 승리했다는 현수막을 들고 행진하는 시민들의 모습
 
 
4.19 혁명 당시 거리로 뛰쳐나온 성난 인파
 
 
 
결국 사형당한 경무대 최초 발포자 곽형주 경무대경찰서장

 

 

 

4.19 혁명으로 하야한 이승만 전 대통령(가운데) 이승만은 결국 5월 29일 하와이로 망명하고, 1965년 7월 19일, 그곳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민족자주통일을 내세운 서울대생들의 4.19 1주년 시위. 쿠데타 명분을 주지 않기 위해 침묵시위로 진행했다

자결한 이기붕 일가의 모습

 

이기붕은 결국 일가족이 모두 자살하는 비극을 맞는다

 

(이미 주인없는 이기붕의 집에서 가구들을 빼낸 뒤 불태우는 분노한 시위대

대표적인 정치깡패 이정재의 집도 방화를 면할 수는 없었다

 

 

4.19로 복간된 경향신문 4.19혁명을 계기로 복간되자 신분배달 소년들이 '호외'를 외치며 환호하는 모습

 

7월 1일 정기 간행물 발행이 자유화되자 41종이던 일간신문이 5개월 만에 389종으로 늘어났고 통신사도 14개에서 274개로 폭증했다. 4·19의 도화선이 됐던 언론이 이제 국민들을 괴롭히는 원흉이라는 비판까지 받게 되었다.

 

[그때 오늘] 건국대통령 이승만, 망명지 하와이에서 잠들다 [중앙일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하는 이승만.

 

그의 건국이상은 1949년 제창한 일민주의(一民主義) ‘4대 강령’에 잘 나타난다. “1. 경제상으로는 빈곤한 인민의 생활 정도를 높여 부요(富饒)하게 하여 누구나 동일한 복리를 누리게 할 것. 2. 정치상으로는 다대수 민중의 지위를 높여 누구나 상등계급의 대우를 받게 되도록할 것. 3. 남녀 동등의 주의를 실천해서 우리의 화복위안의 책임을 삼천만이 동일하게 분담하게 할 것. 4. 지역의 도별(道別)을 타파해서 동서남북을 물론하고 대한국민은 다 한 민족임을 표명할 것.” (사진 출처 : 건국대통령 이승만 박사 기념 사업회).

 

 1965년 7월 19일 대한민국 건국대통령 이승만은 망명지 하와이 호놀룰루 마우나라니 요양원에서 향년 90세로 하늘의 부름을 받았다. 실세한 왕족의 후예로 태어난 그는 1895년 배재학당에 들어가 신학문과 영어를 배우면서 자유·평등과 민주주의 사상에 눈떴다. 독립협회의 자유민권운동에 몸을 던진 그는 반정부 활동으로 인해 1899년 한성감옥에 갇힌 몸이 되어 사형선고를 기다리던 극한 상황에서 기독교로 개종했다. “오 하나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 주옵소서.”(‘청년이승만 자서전’, 『신동아』, 1965. 9)

그때 이후 그는 이 땅에 미국을 모델로 기독교라는 종교적 토대 위에 민주주의가 구현되는 새로운 국가를 세우길 염원했다. “우리의 대의명분은 하나님과 인간의 법 앞에서 당당한 것입니다. 우리의 목적은 우리 민족을 일본의 군국주의적 전제로부터 해방시키는 것이며, 우리의 목적은 아시아에 민주주의를 부식하는 것이며, 우리의 희망은 기독교를 보급시키는 것입니다.” 3·1운동이 터진 한 달 뒤인 1919년 4월 14일 미국 필라델피아에서 열린 ‘한인총대표회의’에서 결의한 ‘미국에의 호소문(An Appeal to America)’은 그의 건국이상을 잘 보여준다.

“우리는 할 수 있는 데까지 미국의 정체를 모방한 정부를 세우기로 제의함. 앞으로 오는 10년 동안에는 필요한 경우를 따라서 권세를 정부로 더욱 집중함.” 그러나 다음 날 이 회의에서 채택한 ‘한국인의 목표와 희망’에 실린 건국의 ‘종지(宗旨, Cardinal Principle)’ 제2조는 건국 후 10년간 강력한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하에서 점진적으로 민권을 확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생각을 담고 있었다.

1948년 5월 총선거를 맞아 그가 남긴 휘호 ‘방구명신(邦舊命新, 나라는 오래지만 명은 새롭다)’이 잘 말해주듯 그는 유교와 다른 전통종교의 장점을 아우르는 바탕 위에서 한국적인 기독교 국가 건설을 꿈꾸었다. 제헌국회 의장이었던 그는 1948년 7월 공포·발효된 헌법의 제정 과정에서 이 땅에 개인의 자유가 최대한 보장되는 민주주의 국가를 수립하되, 그 정부 형태를 ‘전제독주를 막을 수 없는’ 강력한 대통령 중심제를 택하도록 요구해 관철시켰다.

그가 귀천(歸天)한 지 45년이 흐른 오늘도 그의 군림(君臨)하는 제왕적 통치방식 때문에 치적에 대해서는 시시비비(是是非非)가 그치질 않는다. 그러나 민족의 광복에 큰 궤적을 남긴 불요불굴의 항일 독립투사였다는 역사적 사실에 토를 달 수 없듯이, 민주주의·평등주의·자본주의 등의 요소가 담긴 건국이상은 아직도 우리의 진로를 비추는 좌표로서 살아 숨쉬고 있다는 사실에도 이의를 제기할 수 없는 것이다.

허동현 경희대 학부대학장·한국근현대사

 

 

 

이승만 대통령 하야를 보도한 1960년 4월 26일자(사진 위) 1면은‘萬歲(만세)! 民權(민권)은 이겼다!’라고 커다란 제목을 뽑았다.

 

이승만의 하와이 망명을 보도한 경향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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