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한정흠(韓正欽, 1756~1801, 스타니슬라오)은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柳恒儉, 1756~1801, 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유항검으로부터 교리를 배워 입교하게 된 한정흠은 교회의 가르침에 따라 제사도 지내지 않았다. 그리고 훗날 주문모(周文謨, 1752~1801, 야고보) 신부가 전주를 방문하였을 때 그에게서 성사를 받기도 하였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金千愛, 1760~1801, 안드레아)와 최여겸(崔汝謙, 1763~1801, 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한정흠과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형조에서는 1801년 8월 21일 그들에게 사형을 선고함과 동시에 각각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도록 명하였다. 이에 따라 한정흠은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었다. 그리고 며칠 후 그곳에서 참수형으로 순교하였으니, 이때가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로, 당시 그의 나이는 45세였다.

김제는 삼국 시대 때부터 벼농사가 발달한 지역으로, 농업이 산업의 근간을 이루던 전근대 사회 동안 풍요를 누리던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조선 시대 동안 중요한 정치세력이 배출되지 않았음에도 군으로써 읍의 격이 비교적 높은 지역이었으며, 현존하는 관아 건물과 향교 건물들이 그에 따른 위계를 보여 주고 있어 역사적·학술적가치가 있다.

김제 관아는 조선 시대 당시의 건물들인 동헌, 내아, 피금각, 관리사로 부르는 건물 1채등 다수가 남아 있고. 향교는 대성전이 조선 시대 건물이고, 명륜당과 문루인 만화루 등은 일제 강점기와 해방 후에 다시 지은 것들이나 관아 및 향교 건축의 품격을 충분히 느낄 수 있을 만큼 잘 보존되어 있어서, 관아와 향교를 중심으로 지방 통치와 교화 기능을 담당하던 우리나라 읍치(邑治)의 면모를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다.
관아 및 향교가 인접한 거리에 함께 보존되고 있어 조선 시대 행정 기관과 교육 기관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자료이고, 관아의 동헌과 내아가 함께 남아 있는 매우 드문 예라는 점에서 그 보존 가치가 매우 크다. 형장터는 동헌 북쪽 쇼핑 사거리에서 김제초등학교 정문 앞 직전 100m 내외 지점으로 추정된다.
■ 순교자
◆ 한정흠 스타니슬라오(1756∼1801년) <하느님의 종 124위>
한정흠(韓正欽) 스타니슬라오는 전라도 김제의 가난한 양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훗날 전주에 살던 먼 친척인 유항검(아우구스티노)의 집으로 가서 그 자녀들의 스승이 되었다. 그가 천주교 신앙을 알게 된 것도 바로 유항검 때문이었다.
1801년 신유박해가 일어난 지 얼마 안 되어 그는 유항검과 함께 그 해 3월에 체포되었다. 전주 감영으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혹독한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조금도 여기에 굴복하지 않았다. 이곳에서 그는 열심한 신자 김천애(안드레아)와 최여겸(마티아)을 동료로 맞이하게 되었다. 그와 동료들은 그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문초를 받았지만, 그들의 신앙에는 조금도 변함이 없었다. 고향으로 보내 처형하라는 명에 따라 그는 고향인 김제로 이송되어 그곳에서 1801년 8월 26일(음력 7월 18일) 참수형으로 순교하였다. 당시 그의 나이는 46세였다.

■ 찾아가는 길

■ 순례지 정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