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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 : 여호수아 6 : 1-5
제목 : 싸움의 기술
일시 : 2019. 6. 23
장소 : 라이프찌히 교회
I. 종종 알다가도 모를 일이 “왜 그렇게 싸우냐”하는 것이다. 개인도 그렇고 가정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국가도 그러하다. 논쟁과 갈등 그리고 심하면 무력이 있다. “싸울거리”들이 무궁무진한 것 같다.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키고, 주도권을 갖기 위해서 투쟁을 한다. 생각이 달라서 싸우는 사상과 체제의 싸움도 있다. 먹고살려는 경제전쟁이 치열하다. 미세먼지와 온난화 등 환경전쟁이 있다. 그래서 이번 주에 온도가 37도도 넘을 것인가보다. 사회가 병들어 상상 못할 범죄가 일어나서 정부는 범죄와의 전쟁도 벌인다. 퀴어축제와 같이 창조의 질서에 역행하는 것을 바로 잡으려는 믿음의 사람들이 시련을 당하기도 한다. 배움을 위한 입시전쟁, 직장을 잡기 위한 취업전쟁, 건강을 위한 투병등 수많은 싸울 거리들이 우리 주변에 널려 있다. 이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의 기술이 무엇이냐?
II. 우리 앞에 놓여있는 “싸움거리”가 무엇이든지 간에 우리는 그 적이 얼마나 “강하냐 약하냐”를 놓고 승부를 미리 결정해서는 안된다. 우리가 싸움에서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는 적이 얼마나 강하냐 약하냐의 문제가 아니다. 그 싸움거리를 다루는 나의 문제이다. 물론 그들의 강약을 가볍게 보거나 무시하자는 것이 아니다. 적에 대해 “강하다,” “약하다”고 할 때는 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알고 보면 내가 얼마나 강하여 그것을 감당해 낼 수 있느냐의 문제이다. 약하다 강하다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강하다고 할 때는 “나”보다 강한 것이다. 약하다고 할 때는 “나”보다 약한 것이다.
예)옛날 신학교 시절 종종 탁구를 쳤다. 탁구를 치면서 운동만 하는 것이 아니라, 입에서 터져 나오는 멘트가 재미있다. 어느 전도사님이 공을 무척 잘 넘겼는데 내가 받을 수가 없었다. 그때 “나이스플레이”라고 외쳤다. 잘 했다고 말이다. 그때 그가 한 멘트는 아직도 기억한다. “자기가 잘 못 받으니 나이스플레이래!^^” 신학교 탁구장에서 운동하면 주고받은 멘트이지만 33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생각이 난다. “맞아! 상대방이 얼마나 잘 치느냐의 문제라기보다 나의 문제이지!” 내가 버겁게 느끼고 감당하기 어려우면 상대방이 하는 것이 나이스플레이처럼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진짜 선수가 보면 그냥 우습게 보일 수 있을텐데. 그래서 사람들이 나이스플레이라고 하면 “나를 감당 못한다는 얘기군”으로 이해가 되고 “나를 얼마나 무시했으면 이정도 하는 것을 가지고 놀라면서 나이스라고 말하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여리고성은 강하다고 하는 성이었다. 그리고 그 다음에 나오는 성은 약하다고 알려진 아이성이다. 그러나 막상 뚜껑을 열었을 때 강한 여리고성은 함락되고 약한 아이성은 강력했다. 이스라엘이 그 성들을 점령할 때에 문제는 그 성들이 약하고 강하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제는 “이스라엘 자신”이었다. 여리고성이 강한 것이 아니라 여리고성을 치고자 했던 이스라엘이 강하게 준비했던 것이다. 아이성이 약한 것이 아니라 이미 이스라엘이 그 성에 대해 약해 있었다.
강하니 약하니 하는 것은 우리의 판단일 뿐 실체에 있어서는 그렇지 않을 수 있다. 우리가 판단할 일이 아니다. 막상 뚜껑을 열어보면 전혀 예기치 않은 일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약하다고 생각했는데 호락호락하지 않고 내 발목을 잡기도 한다. 그리고 강하다고 생각하여 긴장했는데 의외로 금방 이루고 쉽게 함락하기도 한다. 싸움은 우리의 판단과 객관적인 전력과 원인결과의 논리에 따라서 움직이는 것이 아니다. 공은 둥글다고 한다. 경기를 해 봐야 안다는 것이다. 마지막 휘슬을 불기 전까지 모른다는 것이다. “이변”이라는 것이 속출한다. 예기치 못한 일이 여리고 성과 아이성에 일어났다. 함락하지 못할 철옹성 여리고를 함락시켰고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을 것이라 예상했던 아이성에서는 고전하게 된다. 강함과 약함이라고 하는 정보가 언제나 옳은 것이 아니다. 옳다고 하더라도 그 성이 강하다고 할 때 내가 기가 죽고 좌절하는 것 외에 내게 무슨 큰 유익이 있을까? 옳다고 하더라도 그 성이 약하다고 할 때 내가 교만하여지고 우습게 여기다가 큰 코 다치는 것 외에 무슨 유익이 있을까? 여리고성을 보고 떨지 말라. 아이성을 보고 쉽게 생각하지 말라.
III. 싸움의 승패의 결정적인 요인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누구의 편에 있느냐 하는 것이다. 다윗은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 여호와께서 내 편이 되사 나를 돕는 자들 중에 계시니”(시편118:6,7)라고 한다. 다윗은 적이 유난히도 많았다. 블레셋, 아말렉, 에돔과 모압, 암몬, 그리고 시돈과 아람... 등등 주변 나라들이 모두 적이었다. 다윗은 여러 적들을 쳐서 영토도 확장하였으며 정치적으로 뛰어나 이스라엘의 왕권을 확립한 사람이다. 그는 왕궁을 지었다. 이스라엘의 열왕 가운데 대표적인 왕을 말할 때 다윗왕이 거론된다. 그 자리까지 이르고 그렇게까지 이스라엘을 강성한 나라로 키우기까지 그는 전쟁을 많이 하였다. 그러했기에 그가 하나님의 전을 지으려고 해도 하나님께서는 그의 손이 피를 많이 흘렸기에 성전짓기를 거절하셨다. 그에게 전쟁은 일상생활이었다.
이러한 전쟁에 능한 다윗에게 싸움의 기술은 딱 한가지였다. 바로 하나님과 “한 편”에 있는 것이었다. 그는 블레셋 장군 골리앗을 무너뜨리면서 이스라엘의 정계와 사회에 혜성같이 등장했다. 골리앗을 어떻게 무너뜨렸나? 물맷돌 하나 잘 던져서가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 으로 무너뜨린 것이다. 골리앗의 신장, 전사로서 받은 그의 훈련, 그의 무기 등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다윗승리의 결정적인 요인은 하나님이 그와 함께 있었다는 것이다. 골리앗보다 더 강한 평생의 적이 다윗에게 있었다. 사울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사울에게서 떠나고 다윗의 편에 서자 사울이 아무리 왕이라 하더라도 그는 기울어졌고 다윗은 일개 신하에 불과해도 떠오른다. 하나님이 함께 계실 때는 약해보여도 강한 것이고, 하나님이 떠나시면 강해보여도 약한 것이다. 사도바울도 그와 똑같은 선언을 고린도교회에 하고 있다. “무명한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살아 있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라”(고후6:9-10).
여리고 성을 함락시키는 이스라엘에게 있어 하나님이 그들의 편에 계셨다. 하나님의 결재가 있으면 싸움에서 승리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지 않으면 우리가 아무리 철저히 준비하고 최선을 다해도 실패이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시편127:1). 그러나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아무것도 안하는 것 같아도 일은 된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시편127:1-2). 하나님이 내 편에 서 계시면 모든 문제는 해결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그 모든 상황과 대적을 콘트롤하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통제하지 못하는 것이 없다. 하나님의 한계 밖으로 나가는 것이 없다. 하나님이 위로 못할 슬픔이 없다, 하나님이 옮기시지 못할 거대한 산은 없다. 하나님이 잠잠하게 못하실 폭풍우는 없다. 하나님이 미처 예상 못할 갑작스러운 일은 없다. 하나님도 주체 못할 엄청난 복잡한 일은 없다. 내 생각을 가지고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 우리 앞에 있는 수많은 대적들과 싸움거리들은 큰 문제가 아니다. 내가 하나님과 함께 하느냐가 가장 중요한 우리의 싸움기술이다. 하나님과 함께해야 한다. mit 되어야 한다. gegen 되어서는 안된다.
IV.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약속의 땅을 눈앞에 두고 있다. 그 첫성이 여리고이다. 이스라엘이 어떻게 바로의 압제에서 벗어나 홍해를 건넜으며, 40년광야생활을 통해 얼마나 대단한 전사로 거듭났는지 여리고는 알고 있었기에 “여리고는 굳게 닫혔고 출입하는 자가 없더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국경수비대와 같이 전선에 가까운 지역 군대가 언제나 가장 강한 것처럼 여리고는 강한 성이었다. 그러나 그들의 강함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약속이었다. “보라 내가 여리고와 그 왕과 용사들을 네 손에 넘겨주었으니” 이스라엘에게 있어 오직 약속하신 하나님과 함께 하는 것이 “싸움의 기술”이었다. 여리고성 함락 작전이 어떠한가 보라. 모든 군사는 그 성 주위를 매일 한 번씩 도는데 6일 동안 그렇게 해야했다. 제사장 일곱은 일곱양각나팔을 잡고 언약궤 앞에서 도는 것이다. 일곱째 날에는 그 성을 일곱 번 돌며 그 제사장들이 나팔을 불 것인데 길게 불어 소리가 백성들에게 들리면 다들 소리를 외치라고 했다.
무슨 싸움의 방법이 그런가? 한국에서 목회를 할 때 주변에 목사님들과 교회가 종종 이 기술을 가지고 교회건축을 하거나 원하는 것을 얻으려 하는 것을 보았다. 물론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지만 하나님은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신다. 우리가 관심을 가질 것은 하나님이 나의 대적을 어떻게 이기느냐에 관심을 가질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느냐다. 하나님이 함께 있는 것이 싸움의 기술이다. 하나님이 함께 하실 때 그분이 알아서 하시는 것이다. 그리고 그분이 “어떻게” 알아서 하실지 은근히 그 드라마가 기대되기도 한다. 우리가 병원에 가서 치료를 받을 때 방법에 관심을 갖는 것이 아니라 의사선생님이 알아서 잘 치료를 할 수 있는지 그것이 더욱 중요한 것처럼, 명의 하나님이 우리를 치료하신다는 것이 더욱 중요한 것이다. 하나님이 쓰시는 방법은 칼러풀하다. 우리 앞에 놓인 적들을 제압하는 방법은 이전에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으신 싱싱하고 새로운 방법을 사용하시는 것 같다. 따라서 우리가 신뢰할 것은 방법의 매뉴얼이 아니요 그 방법을 쓰시는 하나님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싸우는 방법을 가르쳐 주시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싸움의 기술이 되신다. 이스라엘이 불레셋의 골리앗을 이길 때 다윗이 물매돌로 이긴 것이 아니다. 다윗은 두 번 다시 그것을 사용하지 않았다. 주님이 38년된 병자를 고치실 때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셨다. 치료의 매뉴얼이 아니다. 자리를 들고 간다고 낫는 것이 아니다. 주님은 날 때부터 소경된자에게 “땅에 침을 뱉어 진흙을 이겨 그의 눈에 바르시고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요9:6-7)고 하였는데 이에 눈이 밝게 되었다. 우리는 굳이 예수님의 침이나 진흙의 치유성분 그리고 실로암 물의 수질 검사를 조사 연구를 할 필요는 없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전쟁들이다. 이 싸움에서 어떻게 해야 이길 것인가? 우리의 싸움의 기술은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것이다. 이제 하나님께서 드라마를 연출하실 것이다. 우리와 더불어 함께 싸우시는 하나님이 스토리를 만들어 내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우리 각자가 가지고 있는 간증이다.
예)오늘 찬송 288(204장)을 하였다. 패니 제인 크로스비의 찬송시이며 제가 가장 좋아하는 찬송이다.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 1820년 3월 24일 뉴욕의 작은 마을 푸트남에서 출생한 패니 제인 크로스비는 태어난 지 6주 만에 돌팔이 의사의 잘못된 약물치료로 시각장애인이 되었다. 패니가 갓 돌을 지났을 때 그녀를 극진히 사랑하던 아버지 존 크로스비가 세상을 떠났다. 당시 21세의 엄마 머시 크로스비는 패니를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큰 도시로 가 부잣집 하녀로 일해야 했다. 패니가 11살 때에 그녀를 눈물과 기도와 말씀으로 키우던 외할머니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패니는 38세에 시각장애인 교사 밴 앨스틴과 결혼한 후 귀여운 아기를 낳았지만 곧 아기를 잃는 슬픔을 당했다. 이후 노년에 남편을 먼저 하늘나라로 보내게 된다. 사랑하는 사람들을 늘 잃던 패니 자신은 1915년 2월 12일 95세의 나이로 하나님 곁으로 가게 된다. 세상의 눈으로 볼 때 가장 불행한 삶을 살았던 여인같아 보였지만 패니 크로스비는 평생 하나님과 동행한 행복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그는 상실의 여인같아 보였지만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이었다. 우리가 즐겨 부르며 깊은 은혜를 받는 찬송의 많은 곡들이 패니 크로스비 여사가 작시한 것들로 그의 삶의 이야기들이다. 오늘 부른 찬송 ‘예수를 나의 구주 삼고’(288)와 더불어 ‘예수 나를 위하여 십자가를 질 때’(144), “너희 죄 흉악하나 눈과 같이 희겠네’(255), ‘인애하신 구세주여 내가 비오니’(279), ‘나의 생명 되신 주 주님 앞에 나아 갑니다’(380), ‘나의 갈길 다 가도록 예수 인도 하시니’(384), ‘오 놀라운 구세주 예수 내 주 참 능력의 주시로다’(391), ‘나의 영원하신 기업 생명보다 귀하다’(435), ‘십자가로 가까이 나를 이끄시고’(439), ‘주의 음성을 내가 들으니 사랑한단 말일세’(540) 등등의 찬송가가 있다. 이 모든 찬송들은 패니 제인 크로스비가 수많은 인생의 싸움에서 하나님과 더불어 어떻게 승리하였는가하는 전쟁의 스토리들이다.
V. 내일 모레 화요일은 6.25전쟁 한국전이 있었다. 국제정세와 조국을 생각할 때 이 모든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지라는 생각으로 나라 걱정한다. 주변 열강들을 생각할 때 우리의 통일에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렵게 만들고 있다. 내 자신의 진로와 우리 가정을 생각할 때 버겁게 느껴지고 어떻게 해야하지 어느쪽을 결정하지?라는 생각이 든다. 주변에 떠오르는 수많은 싸움거리들과 테마들이 널려 있다. 신경을 다 쓰기에도 힘들다. 경제적인 것, 건강, 취직, 자녀문제, 무역분쟁, 동성애문제...
어떻게라는 생각을 하기 전에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시는 것이 싸움의 기술임을 기억하라.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 “하나님이 내 편이시다”라는 신앙의 고백이 나의 싸움의 기술이 된다면 어떻게 하실런지는 하나님이 신경 쓰실 문제이다. 우리 앞에 여리고 성이 있다. 하나님이 지금 나와 함께 하시는가에 승부수를 던지라. 하나님께서 이제 계속 펼쳐질 우리의 삶에 나만을 위해 쓰시는 드라마 나와 함께 쓰시는 스토리를 만들어 “이것이 나의 간증이요 이것이 나의 찬송일세”라는 찬송이 나의 신앙간증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