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요즘은 산에 가서 ‘얏호’라고 외치는 지 모르겠습니다. 예전에는 의례히 정상에 오르면 누구나 가슴 뿌듯하게 손 모아 외쳤습니다. ‘얏호’ 그러면 반대편에서 ‘얏호’라고 들려옵니다. 우리는 그 소리를 메아리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 2절을 두고서 메아리와 같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이 말씀은 갈라디아서 5:12-13의 말씀에 대한 메아리로 설명을 합니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 서로 종 노릇 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13-14)
이 말씀에 대하여 조금 다른 표현하여 요약한 말씀이 바로 오늘 본문 2절 말씀이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2)
5:13에 사랑으로 ‘서로 종노릇 하라’는 말씀은 2절에서는 ‘짐을 서로 지는 것’으로 말씀합니다. 5:13에 ‘온 율법을 이루는 것’이 바로 2절에서는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는 것’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을 시험하려고 질문을 했습니다.
“선생님이여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끕니까?”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 22:39)
예수님의 법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입니다. 이것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입니다. 한 문장으로 하면 바로 오늘 본문의 ‘그리스도의 법’입니다. 그리스도의 법은 ‘서로 짐을 지는 것’으로 이루어 집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서로 짐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까요?
(1) 자기를 낮추는 사람
그 당시로 돌아가 보십시다. 그 당시에 무거운 짐을 지는 자는 종이 하는 일입니다. 짐을 지는 이는 종의 자리에 나아가지 않으면 안됩니다. 종은 낮은 자의 자리입니다. 종이 되지 않으면 짐을 질 수가 없습니다.
바울 시대에 ‘서로 짐을 지라’는 말씀은 앞서 말한 ‘서로 종 노릇하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표현이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기에 ‘서로 짐을 진다’는 것은 서로 간에 종의 자리, 낮은 자리로 내려가야 할 수 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만일 누가 아무 것도 되지 못하고 된 줄로 생각하면 스스로 속임이라”(3)
“아무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사람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한다면 그것은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3 현대인의 성경)
스스로 속이는 자가 누구라고 합니까? ‘아무 것도 아니면서 대단한 사람이나 된 것처럼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자기를 속이는 것입니다. 착각하는 사람은 스스로를 속이는 사람입니다. 진실되게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들어다 보아야 합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보면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이런 저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답변하시면서 율법사에게 ‘가서 너 이와 같이 하라’고 했습니다. 어떤 이야기 끝에 그렇게 하셨습니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어떤 유대인이 강도를 만나 거반 죽어갈 때에 길을 가던 사마리아인이 그를 불쌍히 여겨 기름을 바라고, 나귀에 태워 주막에 가서 자기의 돈을 지불하여 주막 주인에게 돌보아 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율법사에게 바로 사마리아 사람처럼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비유에서 사마리아 사람처럼 행하지 않은 사람이 나옵니다. 바로 제사장과 레위인입니다. 이 사람들처럼 하지 말라는 경고의 메시지도 있는 것입니다.
이 두사람은 어떠했습니까? 강도 만나 죽어가는 사람에게 전혀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짐을 져주지 않습니다.
왜 그렇게 했을까요? 자기 자신에 대한 과대 평가입니다.
“나는 하나님께 제사하는 제사장이기 때문에, 레위인이기 때문에 피를 손에 묻혀서는 안돼. 나는 거룩한 자이니 피를 가까이 하면 안돼”
자기 자신에 대해 스스로를 정의 내립니다. 하나님께서 무엇을 원하시는지를 묻고 따지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관습 혹은 종교적인 형식에 의해서 자기 스스로를 정의합니다. 스스로 높여서 남보다 나은 사람으로 여깁니다. 자기는 이제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사람을 가까이 갈 수 없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스스로를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스스로에게 편하고 유리한 방향으로 결정해 버리고 그 현장을 벗어난 것입니다.
갈라디아서 5:26 말씀에의하면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격동하고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
바로 그렇습니다. 헛된 영광을 구하면 다른 사람에게 싸움을 겁니다. 나를 왜 이렇게 대우하느냐? 당신이 나에게 이럴 수가 있는가? 격동합니다. 아니면 질투를 하게 됩니다. 자신의 가지지 못함에 대해서 주변 사람에게 질투하므로 격동합니다. 그러니 이제는 다른 사람에게 손을 내밀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주신 말씀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대해서는 “너도 이와 같이 하라”는 메세지입니다. 하지만 제사장과 레위인에게는 “너는 이와 같이 해서는 안된다”는 메시지입니다.
서로 짐을 지라. 낮은 자만이 할 수 있습니다.
2. 자기의 행위를 살피는 자
어떤 사람이 서로 짐을 지는 자가 될 수 있을까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4)
“각자 자기 행위를 살피십시오. 그러면 남과 비교하지 않고도 자기 자신이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길 수 있을 것입니다.”(현대인의 성경 4)
자기의 일을 살피고, 자기의 행위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지난 번에 6:1 말씀을 살펴보았습니다.
“형제들아 사람이 만일 무슨 범죄한 일이 드러나거든 신령한 너희는 온유한 심령으로 그러한 자를 바로잡고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1)
교회 안에서 범죄한 사람이 있으면 거룩한 성도는 온유한 심령으로 바로잡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범죄’라는 단어는 ‘정상에서 벗어나 엉뚱한 길로 가는 것’입니다. 그래서 바로 잡아야 하는데, ‘바로 잡다’는 말을 뼈가 서로 어긋난 상태에서 교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여러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어깨뼈가 어긋났다고 해보십시오. 단순하게 어깨만 아프겠습니까? 어깨가 아프면 온 몸이 정상적으로 기능하기란 불가능합니다. 서로 연결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로잡는 일은 서로 짐을 지는 엄청한 고통의 수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나는 괜찮아. 나와는 상관없어. 내만 잘 하면 돼. 무슨 상관이야’
지체의식, 그리스도 안에서 한 몸, 그리스도 예수의 공동체라는 의식이 없이는 서로를 돌아볼 수 없습니다.
서로 짐을 지는 일은 끊임없는 자기 성찰, 돌아봄이 필요합니다.
“너 자신을 살펴보아 너도 시험을 받을까 두려워하라”
자신을 살펴보는 일이 필요합니다.
때로 우리는 스스로를 대단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습니다. 뿌듯한 마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이 뿌듯한 마음은 다른 사람에게 자랑질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것은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우월감에 자랑질을 해서는 안됩니다. 하나님 앞에 우리는 고백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여기까지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고, 붙들어 주시고, 은혜를 베풀어 주셨습니다.”
“임마누엘, 여호와이레, 할렐루야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저는 하루에도 몇번씩 우리집 주변의 산들을 쳐다보곤 합니다. 우리 집에서 쳐다보는 산의 형체에서, 특별히 나무의 숲이 만들어주는 형상에서 저만의 메세지를 받기 때문입니다.
첫번째는 뒷산 꼭대기는 무릎을 꿇고 기도하는 형상이 있습니다. 그 형상을 보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주님이 십자가를 앞두고 기도하셨던 것을 떠올립니다. 그리고 너는 기도하느냐?는 메시지를 받습니다.
두번째는 동남쪽의 산 등선에는 아주 조그맣게 보이는 나무가 건너편 큰 나무를 보고 90도로 허리를 굽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습니다. 인사하는 작은 나무를 보면서 저는 겸손의 메시지를 받습니다.
“너는 하나님 앞에 죄인이다. 너 자신을 알아라. 그리고 겸손하라”
저는 푸른 산을 바라보면서 두 가지 메시지를 마음에 새기며 나 자신을 돌아보려고 합니다.
“하나님 앞에 죄인이니 겸손하라. 기도하라”
잠시 잠깐 저를 살피게 됩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 또 허물어지기도 하지만 그 과정을 되풀이할 수 있어서 감사합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나의 행위를, 나의 삶을 살펴보십시다. 내가 이룬 일이 내가 잘나서, 내가 열심히 해서만 얻은 결과입니까?
‘내가 말이야. 내가 그때 말이야 ….’
자랑하기 전에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인도하시고 도와 주심을 기억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 고아 출신의 장학사 이정남씨에 대한 스토리가 {인간극장} 다큐멘타리에서 나왔습니다. 이정남씨는 5살 때에 김천에 보육원 앞에 있는 슈퍼에 동생과 함께 버려졌습니다.
그는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그런데 그는 학교 체육 선생님이 되고 교육청 장학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성공한 고아가 되었습니다.그런데 장학사님은 자기가 잘 나서, 자기가 열심히 해서가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도움과 하나님의 은혜로 오늘이 있게 되었음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고아원의 어린 후배들을 여러 가지 여러 모양으로 섬기며 영향력을 흘러 보내며 살아가는 것을 보았습니다. 참 감동적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의 고백을 들어보십시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다”
이 은혜가 바로 서로 짐을 지게 합니다.
3. 자기 짐을 지는 자
어떤 사람이 서로 짐을 질 수 있을까요?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라 그리하면 자랑할 것이 자기에게는 있어도 남에게는 있지 아니하리니 각각 자기의 짐을 질 것이라”(4-5)
짐을 서로 지라는 말과 각각 자기의 짐을 지라는 말이 서로 상충되는 것으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앞뒤가 맞지 않는 말로 들릴 수 있습니다.
‘전에는 다른 사람의 짐을 지라고 하더니 지금은 자기 짐은 자기가 지라고 하는 건가?’
이상하게 들릴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말하는 두 짐은 서로 다른 짐입니다. 같은 짐이 아닙니다. 우리 성경은 2절과 5절의 단어가 똑같이 짐으로 번역되었는데 원어에서는 서로 다른 단어입니다.
두 단어를 구분하면 2절의 단어는 무거운 짐을 의미하고 5절의 단어는 일반적인 짐을 가리킵니다. 그리고 2절의 짐은 사람이 나눠질 수 있는 짐이지만, 5절의 짐은 나눌 수 없고 스스로 책임을 져야 하는 짐으로 구분합니다.
물론, 항상 이 두 단어를 이렇게 구분할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두 단어가 구분 없이 비슷한 의미로 사용될 때도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지금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이 두 단어를 분명히 구분해서 사용했다는 것입니다.
그럼 우리 각자가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짐은 무엇일까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일을 고유의 일을 가리킵니다. 우리 각자에게 주신 고유의 일, 역할, 달란트, 직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가 져야 할, 고유의 짐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면서 내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일은 스스로 감당할 수 있는 짐이 있다면 스스로 감당해야 합니다. 각자의 짐이기에 그러지 않으면 민폐요, 불충이요, 직무 유기가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에게 비슷한 명령을 했습니다.
“각각 자기 일을 돌볼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보아 나의 기쁨을 충만하게 하라“(빌2:4)
오늘 본문에 입각해서 설명한다면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일도 돌아보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균형 잡힌 신앙의 모습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서로 도와서 해야 할 일이 있는가 하면 개인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내가 책임지고 감당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이 해줄 수 없는 내가 해야 할 고유의 역할이 있습니다.
가령, 집에서 가족들이 서로 도와서 할 수 있는 일이 있지만 엄마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아빠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고유의 영역이 있습니다.
교회에서도 그렇습니다. 우리 성도님들이 할 수 있고, 집사님, 권사님이 할 수 있는 일이 있습니다. 그러나 목사인 제가 전심전력하여 제가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말씀을 가르치고 전하는 일은 목사인 제가 해야 일이며 짐입니다.
여러분도 성도로서, 집사로서, 권사로서 하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우리 각자는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행한 일을 책임지게 될 것입니다.
존 스토트 목사님은 본문을 설명하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우리가 나눌 수 없는 짐이 있다. 그것은 심판 날에 하나님 앞에서 져야 하는 우리의 책임이다. 그날 당신은 내 짐을 질 수 없고 나는 당신의 짐을 질 수 없다”
우리는 주님 앞에 서서 주님의 평가가 있음을 기억하고 각각 자기의 일을 살피고 자기의 짐을 져야 할 것입니다.
달란트 비유에서 2 달란트 5달란트 받은 종처럼 칭찬과 유업을 받을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너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을 맡기리라”
뉴질랜드나 대영 제국의 식민지 였던 나라에서 가장 유명한 구기 종목은 크리켓이라는 스포츠입니다. 야구처럼 배트를 가지고 나무 공을 쳐서 득점을 하는 운동입니다. 한 팀이 11명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한 크리켓 선수가 자신의 자서전을 섰습니다. 처음 10년 동안 그가 속한 팀은 우승을 한 번도 못했다고 합니다. 그 팀에는 인기 선수들이 많았고 대부분은 선수들이 다른 팀의 선수보다 실력이 월등했다고 합니다. 하지만 팀은 한 번도 우승을 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뛰어난 선수들이 오직 자신과 자신의 성공에만 몰두했기 때문입니다.
10년 후에 선배 선수 몇몇이 은퇴했고 그들만큼은 유명하지 않은 젊은 선수들이 팀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새로 임명된 주장은 유명하지 않은 선수였습니다. 그런데 팀의 분위기는 바뀌었습니다. 선수들은 팀을 위해 경기에 임했고 주장을 중심으로 팀은 한 마음으로 움직이기 시작했습니다.
한 예로, 같은 편 선수가 실수를 하면 비웃기보다 도와주려고 했고, 누군가 침체에 빠지면 자신이 대신 부각될 수 있다고 기뻐하기보다 그 선수를 격려하고 도와주었습니다. 그러자 놀랍게도 그 팀은 마침내 처음으로 우승을 차지했습니다. 객관적인 전력은 오히려 더 낮아졌는데 팀원이 각자 자신을 위한 플레이가 아니라 팀을 위한 플레이를 했을 때 우승을 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바로 이와 같은 모습이어야 하지 않을까요?
(1) 자기를낮추고
(2) 자신을살피고
(3) 자기 짐을 지므로 서로의 짐을 질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아름다운 법을 성취해 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찬송 / 너의 마음에 슬픔이 가득 차도 458, 5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