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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6년 4월 19일 주일
[(백) 부활 제3주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오늘 전례
오늘은 부활 제3주일입니다. 부활의 기쁜 소식이 우리의 삶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리고 있는지 차분히 살펴볼 때입니다. 무엇보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우리의 삶에서 어떤 어려움과 슬픔이 있더라도 하느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게 하신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의 은총이 우리 삶의 순간순간에 살아 숨 쉬기를 청하며, 주님께서 현존하시는 성체성사에 기쁜 마음으로 참여합시다.
말씀의 초대
오순절에 베드로 사도는 유다인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에게, 여러분이 나자렛 사람 예수님을 못 박아 죽였지만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이라고 소리 높여 말한다(제1독서). 베드로 사도는, 그리스도께서는 마지막 때에 나타나셨고,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다고 한다(제2독서). 예수님의 제자 두 사람이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함께 걸으시며,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영광에 들어가야 한다고 하신다. 식탁에서 빵을 떼어 주실 때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본다(복음).
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습니다.>
▥ 사도행전의 말씀입니다. 2,14.22ㄴ-33
오순절에, 14 베드로가 열한 사도와 함께 일어나 목소리를 높여 말하였다.
“유다인들과 모든 예루살렘 주민 여러분, 여러분은 이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내 말을 귀담아들으십시오.
22 여러분도 알다시피, 나자렛 사람 예수님은
하느님께서 여러 기적과 이적과 표징으로 여러분에게 확인해 주신 분이십니다.
하느님께서 그분을 통하여 여러분 가운데에서 그것들을 일으키셨습니다.
23 하느님께서 미리 정하신 계획과 예지에 따라 여러분에게 넘겨지신 그분을,
여러분은 무법자들의 손을 빌려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24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음의 고통에서 풀어 다시 살리셨습니다.
그분께서는 죽음에 사로잡혀 계실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25 그래서 다윗이 그분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나 언제나 주님을 내 앞에 모시어
그분께서 내 오른쪽에 계시니 나는 흔들리지 않는다.
26 그러기에 내 마음은 기뻐하고 내 혀는 즐거워하였다.
내 육신마저 희망 속에 살리라.
27 당신께서 제 영혼을 저승에 버려두지 않으시고
당신의 거룩한 이에게 죽음의 나라를 아니 보게 하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28 당신은 저에게 생명의 길을 가르쳐 주신 분
당신 면전에서 저를 기쁨으로 가득 채우실 것입니다.’
29 형제 여러분, 나는 다윗 조상에 관하여
여러분에게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습니다.
그는 죽어 묻혔고 그의 무덤은 오늘날까지 우리 가운데에 남아 있습니다.
30 그는 예언자였고, 또 자기 몸의 소생 가운데에서 한 사람을
자기 왕좌에 앉혀 주시겠다고 하느님께서 맹세하신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31 그래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예견하며 ‘그분은 저승에 버려지지 않으시고
그분의 육신은 죽음의 나라를 보지 않았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32 이 예수님을 하느님께서 다시 살리셨고 우리는 모두 그 증인입니다.
33 하느님의 오른쪽으로 들어 올려지신 그분께서는
약속된 성령을 아버지에게서 받으신 다음,
여러분이 지금 보고 듣는 것처럼 그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제2독서
<여러분은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해방되었습니다.>
▥ 베드로 1서의 말씀입니다. 1,17-21
사랑하는 여러분, 17 여러분은 사람을 차별하지 않고
각자의 행실대로 심판하시는 분을 아버지라 부르고 있으니,
나그네살이를 하는 동안 두려워하는 마음으로 지내십시오.
18 여러분도 알다시피,
여러분은 조상들에게서 물려받은 헛된 생활 방식에서 해방되었는데,
은이나 금처럼 없어질 물건으로 그리된 것이 아니라,
19 흠 없고 티 없는 어린양 같으신 그리스도의 고귀한 피로 그리된 것입니다.
20 그리스도께서는 세상 창조 이전에 이미 뽑히셨지만,
마지막 때에 여러분을 위하여 나타나셨습니다.
21 여러분은 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시고 영광을 주시어,
여러분의 믿음과 희망이 하느님을 향하게 해 주셨습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빵을 떼실 때에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24,13-35
주간 첫날 바로 그날 예수님의 13 제자들 가운데 두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예순 스타디온 떨어진 엠마오라는 마을로 가고 있었다.
14 그들은 그동안 일어난 모든 일에 관하여 서로 이야기하였다.
15 그렇게 이야기하고 토론하는데,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가시어 그들과 함께 걸으셨다.
16 그들은 눈이 가리어 그분을 알아보지 못하였다.
17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걸어가면서 무슨 말을 서로 주고받느냐?” 하고 물으시자,
그들은 침통한 표정을 한 채 멈추어 섰다.
18 그들 가운데 한 사람, 클레오파스라는 이가 예수님께,
“예루살렘에 머물렀으면서 이 며칠 동안 그곳에서 일어난 일을
혼자만 모른다는 말입니까?” 하고 말하였다.
19 예수님께서 “무슨 일이냐?” 하시자 그들이 그분께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에 관한 일입니다.
그분은 하느님과 온 백성 앞에서, 행동과 말씀에 힘이 있는 예언자셨습니다.
20 그런데 우리의 수석 사제들과 지도자들이 그분을 넘겨,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시게 하였습니다.
21 우리는 그분이야말로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그 일이 일어난 지도 벌써 사흘째가 됩니다.
22 그런데 우리 가운데 몇몇 여자가 우리를 깜짝 놀라게 하였습니다.
그들이 새벽에 무덤으로 갔다가,
23 그분의 시신을 찾지 못하고 돌아와서 하는 말이,
천사들의 발현까지 보았는데
그분께서 살아 계시다고 천사들이 일러 주더랍니다.
24 그래서 우리 동료 몇 사람이 무덤에 가서 보니
그 여자들이 말한 그대로였고, 그분은 보지 못하였습니다.”
25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아, 어리석은 자들아!
예언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믿는 데에 마음이 어찌 이리 굼뜨냐?
26 그리스도는 그러한 고난을 겪고서
자기의 영광 속에 들어가야 하는 것이 아니냐?”
27 그리고 이어서 모세와 모든 예언자로부터 시작하여
성경 전체에 걸쳐 당신에 관한 기록들을 그들에게 설명해 주셨다.
28 그들이 찾아가던 마을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예수님께서는 더 멀리 가려고 하시는 듯하였다.
29 그러자 그들은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
저녁때가 되어 가고 날도 이미 저물었습니다.” 하며 그분을 붙들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묵으시려고 그 집에 들어가셨다.
30 그들과 함께 식탁에 앉으셨을 때, 예수님께서는 빵을 들고 찬미를 드리신 다음
그것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 주셨다.
31 그러자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32 그들은 서로 말하였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33 그들이 곧바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보니 열한 제자와 동료들이 모여,
34 “정녕 주님께서 되살아나시어 시몬에게 나타나셨다.” 하고 말하고 있었다.
35 그들도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을 직접 보고 들은 목격자요 증인이었습니다. 그래서 자신들은 그 사건을 잘 알고 있다고 말하면서, 또한 예수님께 얼마나 큰 기대를 걸고 있었는지를 고백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스라엘을 해방하실 분”(루카 24,21)으로 바라보며, 그분께 모든 기대를 걸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그 기대는 ‘죽음’이라는 사건 앞에서 한순간에 무너졌고, 실망과 좌절에 사로잡힌 그들의 발걸음은 엠마오로 가는 길 위에 놓입니다.
바로 그 길에서 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과 함께 걸으면서도, 그분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죽음’이라는 과거의 사건이 그들의 눈을 가리고 있어 ‘부활’이라는 현재의 신비를 체험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미 죽음에서 부활로 건너가신 ‘파스카’에 계시는데, 그들의 마음은 여전히 그 길을 건너지 못하였습니다.
그런 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성경의 기록들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함께 걸으시며 이야기를 나누십니다. 그들의 마음이 서서히 열리자, 그들은 마침내 예수님을 ‘초대’합니다.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 그 초대에 응답하신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시는 순간, 두 제자는 눈이 열려 부활하신 예수님을 알아봅니다. 말씀과 성체성사를 통하여 지금도 우리 곁에 현존하시며, 파스카의 눈을 열어 주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현재 나를 짓누르는 바쁜 일과 걱정, 과거에 대한 후회, 미래에 대한 불안 때문에 우리 또한 ‘눈이 가리어’ 지금 내 곁에 계시는 예수님, 부활하시어 새롭게 다가오시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니 예수님을 향한 이 초대가, 이 시간 우리의 기도가 되었으면 합니다. “주님, 저희와 함께 묵으십시오”(24,29).(김도형 스테파노 신부)
부활하신 주님꼐서는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님
엠마오 소풍 길에 만난 형형색색의 꽃들, 어찌 그리 눈부시고 화사하던지요. 나이 탓인지, 여리여리하고 청초한 것들을 보면 새삼 세월의 무상함을 느낍니다. 끔찍하게 먹어버린 제 나이를 생각하며 우울해지기도 합니다.
꽃길을 걸으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렇게 하느님께서는 길고 혹독한 겨울을 잘 견뎌낸 우리에게 또 다시 찬란한 눈요기를 선물로 주시는구나. 이런저런 매일의 고통을 잘 이겨낸 우리에게 위로의 선물로 화사한 봄날을 보너스로 주시는구나.
엠마오 길에 예수님을 만난 두 제자는 꽤 긴 여정을 그분과 함께 걸었지만, 시종일관 그분을 알아뵙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빵을 떼어 그들에게 나누어주실 때야 마침내 ‘눈이 열려’ 그분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네 인생 여정 안에서 참으로 중요한 순간이 있으니, 바로 우리들의 눈이 열리는 순간입니다. 눈이 열린다는 것은 새로운 시선, 새로운 시각을 지닌다는 것입니다. 그간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던 새로운 깨달음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깨달음을 얻게 될 때 우리 인생은 얼마나 풍요로워지는지 모릅니다. 그때 우리는 고통이 기쁨으로, 슬픔이 은총으로 변화되는 체험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 순간 초라하고 누추한 우리네 인생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도 알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뵌 제자들은 이렇게 외쳤습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속에서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루카 24,32)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존재 방식은 이제 종전과는 확연히 다른 방식입니다. 엠마오 제자들과 함께 길을 걸으시고, 식사를 같이 하셨지만, 어느 순간 홀연히 사라지십니다. 그러다가 언제 그랬냐는 듯이 짠하고 눈앞에 나타나십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여기도 계시지만 지구 반대편에도 계십니다. 성전 안에도 계시지만, 시끄러운 시장 한 가운데도 현존하십니다. 저 멀리 위에도 계시지만 내 마음 깊숙한 곳에도 자리하십니다.
우리에게 나타나시고, 함께 길을 걸으시고, 대화를 통해 이것 저것 자상히 가르쳐 주시고, 빵을 떼어주시고, 그러나 또 다시 사라지시고...참으로 묘하신 하느님, 신비의 절정이신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나 다행스러운 것 한 가지 오늘도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빵을 떼어 나누어주실 때, 우리 앞에 확연히 나타나십니다. 다시 말해서 매일 우리가 거행하고 참여하는 성체 성사 안에서 꾸준히 당신 모습을 드러내십니다.
우리가 매일 봉헌하는 성체성사가 좀 더 잘 준비되어야겠습니다. 좀 더 경건하고 깨어있는 태도로 임해야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성체성사를 통해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진정으로 다가오시고, 영성체를 통해 우리 눈이 열려 주님을 뵈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 크신 하느님께서 매일 내게 다가오신다는 것, 얼마나 은혜로운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창조주 하느님께서 내 인생에 구체적으로 개입하신다는 사실, 생각만 해도 행복합니다. 하느님께서 다정한 친구의 모습으로 매 순간 내 옆에서 함께 걸어가신다고 생각하니 이보다 더 큰 기쁨은 없을 듯합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어느 다른 하늘에 존재하시는 것이 절대 아닙니다. 때로 부족하고 비참한 오늘 우리의 일상 안에 현존하십니다. 티격태격하는 우리들의 인간관계 안에 현존하십니다.
이번 주말도 많은 피정객들이 저희 집을 찾아주셨습니다. 한팀이 나가고 나니, 바로 또 한팀이 들어왔습니다. 그런데 저는 개인적으로 깜짝 놀랐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찾기 힘들었던 부활 예수님께서 저희를 찾아오신 형제자매들 안에 떡하니 현존해 계셨습니다. 오늘 우리 안에, 우리 공동체 안에 굳건히 현존하시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목격하고 발견하고, 선포하는 우리가 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성체성사의 효과를 못 느끼는 이유: 가슴이 타올라야 눈이 열린다
전상용 요셉 신부님
"그제야 그들의 눈이 열려 예수님을 알아보았다. 그러나 그분께서는 그들에게서 사라지셨다." (루카 24,31) 찬미 예수님! 부활하신 주님의 평화가 여러분과 함께하기를 빕니다.
오늘 우리는 부활 제3주일,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의 복음을 듣습니다. 이 이야기는 신앙생활의 가장 핵심적인 메커니즘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길을 걸으면서도 알아보지 못하다가, 주님께서 "빵을 떼어 나누어 주실 때" 비로소 눈이 열립니다. 하지만 그전에 반드시 거쳐야 했던 과정이 있습니다. 바로 길 위에서 예수님이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제자들의 가슴이 먼저 뜨겁게 타올랐다는 사실입니다.
왜 우리는 매주 성체를 모시면서도 부활하신 주님의 현존을 느끼지 못할까요? 왜 성당 문만 나서면 다시 두려움과 걱정의 노예가 될까요? 오늘은 그 이유가 '말씀에 대한 무관심'과 '스승의 부재'에 있음을 명확히 파헤쳐 보겠습니다.
성체성사의 효과를 느끼지 못하는 첫 번째 부류는 말씀을 무시한 채 형식적인 영성체에만 매달리는 이들입니다. 말씀이 가슴을 데워놓지 않으면, 성체는 단지 밀떡일 뿐입니다.
2018년 6월, 이탈리아 남부 비보 발렌티아(Vibo Valentia) 근처의 산 탄토니오 성당에서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습니다. 주일 미사 중 거룩하게 성체를 영하고 성당 문을 나선 한 50대 남성이, 주차 문제로 시비가 붙자 트렁크에서 흉기를 꺼내 이웃을 찔렀습니다. 그는 본당의 여러 소임을 맡아 하며 평생 미사에 빠지지 않던 사람이었습니다. (출처: 이탈리아 일간지 「코리에레 델라 세라」, 2018.06.18 보도)
이 사건은 전 유럽 가톨릭계에 '신앙의 해리(Dissociation)'라는 화두를 던졌습니다. 그는 수만 번 성체를 모셨지만, 성체는 그에게 어떤 변화도 일으키지 못했습니다. 왜일까요? 오늘 복음이 그 해답입니다. 바로 말씀으로 가슴이 뜨거워지지 않은 채 성체를 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그 성체의 뜻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사람이 어떤 행동을 할 때, 그 행동만 보면 그 사람이 이해될까요? 만약 여기 그림자만 보이는 두 아이로 보이는 물체가 있습니다. 둘 다 움직입니다. 한 아이는 걸음마를 하며 두 발로 일어서려 하고 한 아이는 원숭이 흉내를 합니다. 둘 다 진짜 아이일까요? 가림막을 걷어내면 정반대입니다. 사실 아기 때는 인간보다 원숭이가 더 인간 같을 수 있습니다. 행동만 봐서는. 이는 1931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교의 심리학자 윈스럽 켈로그가 자기 아들 도널드와 침팬지 구아를 함께 키움으로써 증명되었습니다.
참 정체성을 알려면 행동보다 말을 들어보아야 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을 먼저 이해시켜 주신 이유가, 그래야 당신의 사랑의 행위인 빵을 떼어 나누어주는 행위를 이해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위해 돌아가시고 부활해야 함을 이해해야 성체성사 안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저 역시 성체성사의 효과를 전혀 보지 못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성당엔 사람들이 좋아서 다녔습니다. 어쩌면 지옥에 가기 싫어서 다녔는지 모릅니다. 미사의 의미를 크게 느끼지 못했습니다. 성체의 의미를 느끼지 못하면 미사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지적 호기심은 있었습니다. 주일학교 교사를 했기 때문에 아이들에게 예수님을 조금 더 자세히 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마리아 발토르타가 쓴 『하느님이시요 사람이신 그리스도의 시』 10권 전집을 만났습니다. 그 책은 성경 한 절 한 절을 마치 제가 예수님 옆에서 직접 보고 듣는 것처럼 가슴 뜨겁게 설명해 주었습니다.
주님의 숨소리와 제자들의 갈등, 십자가의 고통이 말씀 안에서 생생하게 살아나 제 심장을 직격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왜 돌아가셔야 했는지가 조금 이해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로 결심하고 신학교에 갔습니다.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듯이, 그러고 났더니 성체에서 “그래, 너 나에게 많이 주었니? 난 네게 다 주었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예수님께서 성체 안에 부활하시어 살아계심이 전혀 이상하지 않았습니다. 만약 제가 성경을 설명해 줄 가장 뜨거운 선생인 그 책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땠을까요? 지금까지도 성체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올 수 없음을 확신합니다. 일단 알아들어야 알아볼 수 있습니다.
이 예화가 도움이 될 것입니다. 두 아들에게 평생 나타나지 않던 아버지로부터 마지막 편지가 왔습니다. “이 편지를 읽을 때 즈음엔 나는 아마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것이다. 나는 너희 둘의 미래를 위해 먼 곳에서 일을 하다 보니 너희들이 크는 모습을 볼 수 없게 되었구나. 미안하게 되었다. 내가 너희 둘을 위해 땅을 사 두었다. 그 땅에는 내가 평생 일해서 벌은 보물이 숨겨져 있다. 아버지는 병이 들어 이제 죽는구나. 너희의 행복을 빈다.”
어떤 사람이 두 아들에게 이 편지를 가져왔습니다. 두 아들은 어리둥절했습니다. 그 땅으로 가서 둘은 땅을 파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몇 날 며칠을 파도 보물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한 아들은 화가 나서, “평생 찾아오지도 않더니, 아버지가 우리를 끝까지 놀리시는군!” 하며 삽을 집어던졌습니다. 그러자 편지를 가져온 사람이 아버지의 사정을 말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 아들은 들으려 하지 않고 가버렸습니다.
“나는 당신 아버지를 사랑합니다. 그분이 나에게 얼마나 잘해주셨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언제나 아들 둘을 자랑스러워 하셨습니다. 다만 누명을 쓰고 도망자 신세였기에 살아 생전에는 발각되어 아들들에게 피해가 갈까 봐 편지도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아버지의 편지가 가짜일 수는 없습니다.”
이 설명을 들은 다른 아들은 무언가 의미가 있을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돌을 골라낸 한 곳에 씨를 뿌려보았습니다. 그랬더니 다른 곳보다 몇 배는 더 빠르게, 몇 배는 더 많은 열매가 맺히는 것이었습니다. 그 땅은 말 그대로 영양분 덩어리였습니다. 거기에 농사를 지으니 몇 년 안 지나서 그 아들은 큰 부자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떠났던 다른 아들은 사기를 치다가 감옥에서 평생 썩게 되었습니다.
성경도 이와 같습니다. 누가 설명해 주지 않으면 깨달아지지 않고 그러면 왜 살과 피를 주시는지 이해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면 그 효과를 못 누리고 성체를 영해도 구원받지 못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성체가 마치 어머니의 젖처럼 우리 정체성을 바꿔주는 것이라는 내용이 많이도 나와있습니다.
야곱이 에사우의 옷을 입고 에사우라고 정체성을 바꾸고, 요한 복음에서도 눈이 생긴 태생소경은 ‘나는 있는 나다.’라고 자신이 하느님이라고 고백합니다. 엄마 젖을 먹으면 아기가 인간이라 믿을 수 있듯이, 하느님의 살과 피는 그렇게 우리를 하느님 자녀가 되게 하는 것입니다.
프랑스 카르멜 수도회의 삼위일체의 성녀 엘리사벳(St. Elizabeth of the Trinity)은 26세라는 젊은 나이에 에디슨병이라는 희귀병으로 임종을 맞았습니다. 장기가 타들어 가는 극심한 통증 속에서도 그녀는 놀라운 평온을 유지했습니다. 그 비결은 무엇이었을까요? 그녀는 병상에서 사도 바오로의 서간들을 닳도록 읽으며 묵상했습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라는 말씀이 그녀의 영혼을 불태웠습니다. 말씀이 가슴을 뜨겁게 하자, 그녀는 매일 모시는 성체 안에서 자신과 주님이 완전히 결합됨을 실재로 느꼈습니다. 그녀는 고백했습니다. "말씀이 내 눈을 열어주었기에, 나는 내 병실 침대가 곧 예수님과 하나가 되는 제단임을 봅니다. 나는 이제 고통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사랑을 영하고 있습니다." (출처: 콘래드 드 메스테르, 『엘리사벳 신부의 생애와 영성』)
우리가 성경을 읽지 않는 이유는 시간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하느님을 좋아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의 말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귀를 기울입니다. 하지만 싫어지면 그의 모든 말이 소음이 되고 행동은 위선으로 보입니다.
세계적인 심리 학자 존 가트맨(John Gottman) 박사는 3,000쌍 이상의 부부를 연구한 결과, 이혼의 결정적 징후는 '말씀의 거부(Stonewalling)'임을 밝혀냈습니다. 한쪽이 상대방을 싫어하기 시작하면, 상대의 말을 듣지 않기 위해 마음의 벽을 쌓습니다.
상대가 사랑한다고 말해도 "위선 떨지 마"라며 냉소적으로 반응합니다. 상대를 좋아하지 않으니 그의 '행동(도시락이나 선물)'조차 자신을 통제하려는 수단으로 오해합니다.
오늘날 가톨릭 신자들이 성경을 모르는 것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그분의 뜻보다 자신의 죄와 욕망 속에 머물고 싶어 하기 때문입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피하는 자에게 성체는 더 이상 생명이 아니라 거추장스러운 숙제가 될 뿐입니다. (출처: 존 가트맨, 『사랑의 심리학』)
엠마오 제자들도 성경을 아는 사람들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스스로 읽어서 가슴이 뜨거워지지 못했습니다. 우리에게는 가슴 뜨겁게 말씀을 설명해 줄 스승이 필요합니다. 그 스승이 바로 교회입니다.
사도행전 8장에 나오는 에티오피아 내시는 당대의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수레 위에서 이사야서를 정독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읽으시는 것을 알아듣습니까?"라는 질문에 "누가 나를 이끌어 주지 않으면 내가 어떻게 알아들을 수 있겠습니까?" (사도 8,31)라고 답했습니다.
그는 성경 박사였지만, 말씀의 '혼'을 깨워줄 스승이 없었기에 가슴이 차가웠습니다. 성경은 본인이 읽고 해석하는 게 아닙니다. 해석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과 같은 성령 충만한 분이 설명해 주면 비로소 눈이 열려 성체성사의 의미를 알아보게 만드는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 켐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 (Imitation of Christ, 제4권 11장)에서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나에게는 두 가지가 꼭 필요하니, 곧 영혼의 양식인 '성체'와 내 발의 등불인 '말씀'입니다. 주님께서는 제 영혼의 위로를 위해 당신의 거룩한 몸을 주셨고, 제 발의 인도를 위해 당신의 말씀을 주셨나이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공감(empathy)과 연민(sympathy)’이라는 말에 관해 강의를 들었습니다. 둘 다 긍정적인 의미가 많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공감은 폭력과 전쟁의 수단이 되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했던 군중도 공감했습니다. 예수님을 하느님의 이름으로 심판했던 대사제와 율법 학자도 공감했습니다. 부정한 여인에게 돌을 던지려고 했던 사람들도 공감했습니다. 독일의 나치즘과 이탈리아의 파시즘은 공감을 통해서 정권을 잡았고, 2차 세계 대전이라는 비극과 홀로코스트라는 비극을 만들었습니다. 이스라엘과 미국은 공감했기에 선전포고도 없이 이란을 공격했습니다.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 했고, 유가의 급등으로 세계 경제에 큰 어려움을 주었습니다. 공감의 특징은 나와 가까운 거리에 있습니다. 율법 학자는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누가 나의 이웃입니까?” 지금 내 옆에 있는 사람의 고통과 아픔에는 공감하지만, 멀리 있는 나라에서 고통받고 아파하는 사람에 관해서는 공감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저도 뉴스로 듣지만, 베네수엘라의 대통령이 납치되어 미국의 법정에 서는 것을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이란에서 폭격으로 무고한 여학생이 170명이나 죽었지만 역시 크게 공감하지 않습니다. 저와 너무 멀리 있기 때문입니다.
공감이 사랑과 자비라는 옷을 입으면 연민(sympathy)이 됩니다. 하느님이 이 세상을 극진히 사랑하셔서 외아들을 보내 주신 것은 연민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을 먹이신 것은 굶주린 사람을 바라보았던 예수님의 연민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소경의 눈을 뜨게 해주시고, 나병환자는 깨끗하게 해주시고, 중풍 병자는 일어나게 해 주셨습니다. 연민의 마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알려주십니다. 잃어버린 동전, 잃어버린 양의 비유는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돌아온 아들의 비유도 아버지의 ‘연민’을 이야기하십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도 ‘연민’의 마음을 이야기하십니다. 하느님의 율법을 잘 안다고 하는 레위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하느님께 제사를 드린다고 하는 사제는 ‘연민’의 마음이 없어서 강도당한 사람을 외면하고 자기의 길을 갔습니다. 착한 사마리아 사람은 율법도 잘 모르고, 제사를 드리는 방법도 몰랐지만 ‘연민’의 마음이 있었습니다. 강도당한 사람을 여관으로 데려가서 치료해 주었습니다. 돈이 필요하면 다녀와서 주겠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 학자에게 묻습니다. “누가 강도당한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율법 학자가 말합니다. “강도당한 사람에게 자비를 베푼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너도 가서 그렇게 하여라.”
예전에 미국의 ‘타임'지는“ 20세기의 끝에서 가장 위대한 연설 4개”를 발표한 적이 있습니다. 하나는 케네디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역사상 위험이 최고조에 이른 시간에 자유 수호의 역할을 부여받은 세대는 몇 되지 않는다. 나는 그 책임을 피하지 않고 환영한다. 나의 동료인 미국인들이여, 조국이 자신에게 무엇을 해줄 것인가를 묻지 말고, 자신이 조국을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는가를 물어라.” 두 번째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취임 연설입니다. “우리가 오로지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움 자체이다.” 세 번째는 처칠 영국 총리의 연설입니다. “나치를 몰아내기 위해서는 프랑스 땅에서건 대양에서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네 번째는 마틴 킹 주니어 목사의 연설입니다. “내게는 예전 노예의 아들과 노예 소유자의 아들이 형제처럼 함께 식탁에 앉을 수 있는 꿈이 있다.” 공감을 넘어서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마음이 느껴지는 연설입니다. 저 자신을 돌아보면 시류에 편승해서 공감한 적은 많습니다. 하지만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어 ’연민‘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부족했습니다.
우리는 지금 부활 시기를 지내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길에서 여러 번 넘어지셨지만, 다시 일어나셨습니다. 십자가 위에서도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십시오.” 이것이 바로 연민입니다. 그리고 그 예수님께서는 죽음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는 절망 속에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들의 마음은 슬픔과 좌절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길에서 낯선 한 사람이 함께 걸어옵니다. 그분은 성경을 풀어 주시고 하느님의 계획을 설명해 주십니다. 그리고 빵을 떼어 나누는 순간 그들은 그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알아봅니다. 그때 그들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나 성경을 풀이해 주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절망 속에 있던 제자들의 마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희망이 다시 피어났습니다. 그것이 바로 부활의 힘입니다.
지금 들과 산에는 꽃이 피고 있습니다. 나무에는 새순이 돋고 있습니다. 자연은 봄이 왔음을 우리에게 알려줍니다. 그러나 신앙의 봄은 자연이 아니라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삶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삶을 살아갈 때 우리 안에서 부활이 시작됩니다. 부활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신 사건이 아닙니다. 부활은 우리의 마음이 다시 살아나는 사건입니다. 누군가의 고통을 보고 외면하지 않을 때, 누군가의 눈물을 보고 손을 내밀 때, 누군가의 상처를 보고 함께 걸어 줄 때, 그때 우리는 이미 부활의 삶을 살고 있는 것입니다. 시류에 따라 공감하는 사람으로 머무르지 말고 사랑과 자비의 옷을 입은 연민의 사람이 되면 좋겠습니다. 그때 우리의 삶의 길에서도 엠마오의 제자들처럼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어가실 때 우리 마음이 타오르지 않았던가!” 하고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삶 속에서 부활은 다시 시작될 것입니다.
오늘의 성인
성 레오 9세 (Leo IX)
활동년도 : 1002-1054년
신분 : 교황
지역
같은 이름 :
오늘날의 프랑스 북동부 알자스(Alsace) 지방 에기샤임(Eguisheim) 태생인 성 레오 9세는 황제의 측근인 부친 밑에서 훌륭한 교육을 받아 독일어권에서 살았지만 프랑스어에도 능통하였다. 5세 때까지 브루노(Bruno)라고 불린 그는 학교에서도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런데 소년 시절에 뱀에 물려 생사의 기로에 있을 때 성 베네딕투스(Benedictus)의 환시를 보고 기적적으로 치유된 경험이 그의 일생을 사로잡았다.
1027년 주님 승천 대축일에 그는 툴(Toul)의 주교로 착좌하면서부터 성직자들의 기강을 바로잡는 일부터 착수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다. 1048년에 교황 다마수스 2세(Damasus II)가 서거했을 때, 그가 후계자로 선출되어 레오 9세로 명명되었다. 그는 교회의 고질병이던 성직매매를 금지하기 위하여 로마(Roma) 시노드를 개최하였고, 특히 사제 독신제를 강화시켰다. 또 그는 남부 이탈리아 지역에 대한 세속권을 받음으로써 교황령을 크게 확장시켰으나 잡음은 그치지 않았다
성 엑스페디토 (Expeditus)
신분 : 순교자
활동지역 :
활동연도: +303년경
같은이름 : 엑스페디또, 엑스페디뚜스, 엑스페디투스
엑스뻬디또란 이름이 몇몇 순교록과 달력에 나와 있으나, 이같은 순교자가 실재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많다고 한다. 그러나 독일과 시실리 지방에서는 18세기 이전부터 이 성인을 공경해 오는데, 특히 긴박한 상황에 처할때 이 성인에게 기도한다고 전해온다.
(성바오로수도회홈에서)
원래는 로마의 군인장교였다. 그러나 신앙을 고백한 후 4세기경 디오크레시아노의 황제의 박해시대때 순교당했다. 성인은 자동차 운전자들의 주보성인이시다.
(성바오로딸수도회홈에서)
순교자.殉敎者
라틴어 martyr. 영어 martyr
신앙의 진리를 증거하기 위하여 생명을 바친 사람. `증인’을 뜻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말이다.
`증인’은 사도행전에서 사도들만이 부활의 증인으로서 복음의 내용을 보증한다는 특수한 의미로 사용되며(사도 10:41) 스테파노(사도 22:20)와 바울로(사도 22:15)에게 적용되었고 묵시록에서는 예수께서 증인이라 불린다(묵시 1:5,3:14).
그밖에 묵시록(6:9,12:17,19:10)에는 예언자의 신분을 가진 많은 사람들이 증언을 내는데 위험한 시대에 증언을 한 증인들이(묵시 2:13,11:3,17:6) 순교자가 된 것이다.
2세기 중엽부터 교회는 재판소에 끌려가서 말씀의 증언을 하고도 죽지 못한 자들을 증거자(confessor-es)라 부르고 피로써 증언을 낸 자들을 증인(mar-tyres)이라 불러 양자를 구별하였는데 이는 죽음 자체가 지니는 특수한 의미 때문이었다고 생각된다.
순교자를 처음으로 증인이라 부른 것은 폴리카르포 주교의 순교전(165년경)에서였다.
여기서 순교자란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이 곧 하느님의 아들의 그것임을 피흘려 증거한 자 라는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
한편 110년경 안티오키아의 이냐시오는 스미르나 교회에 보낸 편지에서 순교자란 피흘려 죽음을 당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하신의 실재성을 입증한다고 하여 예수의 죽음을 부정하는 가현주의 자(假顯主義者)들의 주장을 논박하였다.
2세기 말엽 이레네오도 순교자를 "죽음을 당하신 그리스도의 증인"를 배격하는 입장을 분명히 하는 과정에서 교회내 순교자들의 특수한 지위를 확인하게 되었다. 순교자가 죽음을 당하면서까지 신앙을 증거할 수 있는 초인적 용기는 순교자 안에 현존하는 하느님 때문에 가능하다
(디오그네토에게 보낸 편지),
순교는 모든 죄를 없애주는 행위이므로 제2의 세례이며(테르툴리아노),
순교자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므로 순교자는 죽은 후 바로 천국의 영광을 누린다(알렉산드리아의 글레멘스).
신앙 때문에 죽을 수 있음을 몸소 보여주는 순교자는 악의 세력을 쳐 이긴 승리를 증거하고 다시는 고통이 없는 부활을 선포한다(오리제네스).
그러므로 순교자는 완덕(完德)에 이른 자이며 이들로 인하여 역사상 그리스도 교인의 숫자가 놀랍게 증가하였다.
그래서 "순교자는 그리스도 교인의 씨앗이다"라고 테르쿨리아노가 일찍이 설파하였다.
복자 콘라도 (Conrad)
활동년도 : +1289년
신분 : 선교사
지역 : 아스콜리피체노(Ascoli Piceno)
같은 이름 : 콘라두스, 콘라드, 콘래드
이탈리아의 아스콜리피체노에서 태어난 콘라두스(Conradus, 또는 콘라도)는 귀족 출신으로 농부 출신인 히에로니무스 마쉬(Hieronymus Masci) 앞에 무릎을 꿇으리라는 예언을 들었다. 이들은 이때부터 아주 가까운 친구가 되어 작은 형제회 회원이 되었고, 수련과 서원도 함께 하였으며, 페루자(Perugia)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도 같은 날에 받았다. 콘라두스는 그 후 로마(Roma)에서 설교자로 출발하여 선교지로 뛰어들었고,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리비아 선교단원이 되었다. 북아프리카에서 행한 그의 선교는 대성공이었다. 수천 명이 그의 설교와 기적으로 개종하였다.
이러한 외적 활동 외에도 그는 극도로 엄격한 생활과 더불어 수난을 받으신 주님께 대한 특별한 신심으로 불타고 있었다. 그는 때때로 가시관을 쓰신 주님을 뵈었을 뿐만 아니라 그분의 고난에 동참하기까지 하였다. 그 후 건강상의 이유로 이탈리아로 돌아온 그는 히에로니무스와 함께 프랑스의 교황대리로 일했고 히에로니무스는 신학을 가르쳤다. 그 후 히에로니무스는 니콜라우스 4세(Nicolaus IV)의 이름으로 성 베드로(Petrus)의 좌를 계승하여 교황이 되었다. 그래서 콘라두스는 그가 어릴 때 받은 예언이 성취되었음을 목격한 후 운명하였다. 그에 대한 공경은 1783년 교황 비오 6세(Pius VI)에 의해 승인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