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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세 단군 연나(檀君 延那), 25세 단군 솔나(檀君 率那 )의 치적
- 소도(蘇塗)를 증설하고, 예(禮)를 강의하여 군(君)과 신(臣)의 도(道)를 깨우쳤다. -
환단고기(桓檀古記) 정본(正本)
단군세기(檀君世紀)
二十四世 檀君 延那 在位 十一年 庚子元年 命皇叔 固弗加 爲攝政 辛丑二年 諸汗奉詔 增設蘇塗 祭天 國家
이십사세 단군 연나 재위 십일년 경자원년 명황숙 고불가 위섭정 신축이년 제한봉조 증설소도 제천 국가
有大事 異災 則輒禱之 定民志于一 庚戌 十一年 帝 崩 太子 率那立 二十五世 檀君 率那 在位 八十八年 辛
유대사 이재 즉첩도지 정민지우일 경술 십일년 제 붕 태자 솔나립 이십오세 단군 솔나 재위 팔십팔년 신
亥元年 丁亥 三十七年 箕子 徙居西華 謝絶人事 丁酉 四十七年 帝在上蘇塗 講古禮因 問 侫臣 直臣之分 三
해원년 정해 삼십칠년 기자 사거서화 사절인사 정유 사십칠년 제재상소도 강구예인 문 영신 직신지분 삼
郞 洪雲性 進對曰 執理不屈者 直臣也 畏威曲從者 侫臣也 君源臣流 源旣濁矣 流豈求淸 是爲不可 故 君聖
랑 홍운성 진대왈 집리불굴자 직신야 외세곡종자 영신야 군원신류 원기탁의 류기구청 이위불가 고 군성
然後臣直 帝曰 善哉 己酉 五十九年 田穀豊登 有一莖五穗之粟 戊寅 八十八年 帝 崩 太子 鄒魯立
연후신직 제왈 선재 을유 오십구년 전곡풍등 유일경오수지속 무인 팔십팔년 제 붕 태자 추로립
<해석>
24세 단군 연나(二十四世 檀君 延那)의 재위 기간은 11년이다(在位 十一年).
경자원년(庚子元年, BC 1161)에 단제께서는 황숙(단제의 숙부) 고불가에게 명하여(命皇叔 固弗加) 섭정하도록 하였다(爲攝政).
※ 황(皇)은 단군을 일컫는 말임. - 지도자 칭호, 아래 <참고 1> 글 참조
신축 2년(辛丑二年) 모든 한(汗)들은 단제의 뜻을 받들어(諸汗奉詔) 소도를 증설하고, 제천행사를 실시하였다(增設蘇塗 祭天). 또 국가에 큰 일이나 이변이 일어나면(國家有大事 異災) 그 때마다 기도회(禱)를 열어(則輒禱之) 백성들의 뜻을 하나로 모았다(定民志于一).
경술 11년(庚戌 十一年) 단제께서 붕어하시고(帝 崩) 태자 솔나가 즉위하였다(太子率那立).
25세 단군 솔나(二十五世 檀君 率那)의 재위 기간은 88년이다(八十八年).
신해년(BC 1150)이 원년이다(辛亥元年).
정해 37년(丁亥 三十七年) 기자(箕子)가 서화로 옮겨 가 살았는데(徙居西華), 인사(사람으로써 하여야 할 마땅한 도리) 조차도 사절하였다(謝絶人事). -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 일명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과 상반된 주장, 기자(箕子) 및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관련 내용 아래 <참고 2> 글 참조
정유 47년(丁酉 四十七年) 단제께서는 소도의 상석에 앉아(帝在上蘇塗) 옛 예(禮, 군신관계)의 근본에 관하여 강의를 하시고(講古禮因), 영신(侫臣, 간신)과 직신(直臣)을 어떻게 구별하는지 질문하였다(問 侫臣 直臣之分). 이에 삼랑 홍운성이 (三郞 洪雲性) 나아가 대답하기를(進對曰)
"원칙을 지켜 굴복하지 않는 자(執理不屈者) 그가 직신이요(直臣也), 권위를 두려워하여 굽신거리며 따르는 자(畏威曲從者) 그가 영신입니다(侫臣也). 또 임금(君)은 강(江)의 근원(발원지)이라고 한다면 신하는 흐르는 물줄기와 같습니다(君源臣流). 물의 근원이 혼탁하면서(源旣濁矣) 어찌 물줄기가 맑기를 바랄 수 있겠습니까(流豈求淸)? 이것은 불가한 일입니다(是爲不可). 고로(故) 임금이 먼저 성스러움을 보여야 신하도 직신이 되는 것입니다(君聖然後臣直)." 라고 말하였다.
단제께서 말씀하시기(帝 曰)를 "옳은 말씀입니다(善哉)."라고 말하였다.
기유 59년(己酉 五十九年) 밭농사가 대풍이었다(田穀豊登). 한 줄기(莖, 포기)에서 다섯 개의 조 이삭(穗)이 맺혔다(有一莖五穗之粟).
무인 88년(戊寅 八十八年) 단제께서 붕어하시고(帝 崩), 태자 추로가 즉위하였다(太子 鄒魯立).
<중요 한자 풀이>
輒(문득 첩) : 문득, 갑자기, 번번히, 때마다, 오로지
禱(기도 도) : 기도를 올리다, 제사 지내다, 합동제를 지내다.
禮因(예인) : 예의 근본, 여기서 말하는 예(禮)는 군신관계를 말함
因(인할 인) : 인하다, 말미암다, 원인이나 계기가 되다, 원인을 이루는 근본, 유래, 연유, 까닭
侫臣(녕(영)신) : 아첨꾼(아첨하는 신하), 간신
侫=佞(아첨할 녕(영))
執理不屈者(집리불굴자) : 원칙(이치, 도리)를 지켜(정직하여) 굽히지 않는 자/ 원칙을 따르는 자
畏威曲從者(외위곡종자) : 위세를 두려워하여 굽신거리는 자/ 줏대가 없어 흔들리는 자
君源臣流(군원신류) : 임금은 물의 발원지요, 신하는 흐르는 물줄기다.
豈(어찌 기)
<참고 1> : 고조선의 지도자 칭호, 단제(檀帝), 황(皇), 한(汗), 군(君)
위글에서 황(皇)은 단군(檀君, 壇君)을 일컫는 말이다.
황(皇)이라는 칭호는 중국으로 넘어가 황제(皇帝)라는 칭호로 바뀌었다. 중국의 시조 삼황(三皇) 중 헌원(軒轅)이라는 자(者)가 있는데, 그를 황제(皇帝)라고 칭하였다. 그래서 헌원황제(軒轅皇帝), 또는 황제헌원(皇帝軒轅)이라고 한다. 이 것은 후대에 붙여진 것이다.
중국이 최초 고대국가 체제를 갖춘 시기는 주(周)나라 시대다.
※고대국가 성립요건은 법(法)과 공신력을 갖춘 공권력(公權力) 유무(有無)이다. 공신력이 없는 법은 사법(私法)이다. 탐관오리가 휘두르는 법(法)은 공신력을 잃은 사법(私法)이다.
하(夏), 상(商)=은(殷) 시대는 고대국가 체제 전 단계인 부락연맹체사회 단계(Level of intervillage aggregate society)로 그 지도자를 상(上), 상인(上人) 또는 주(主)라 하였다. 이후 주(周)나라가 세워지면서 지도자를 왕(王)이라 하였다(예, 周武王, 周虎王).
이후 진(秦)나라 때, 황(皇)이라 칭하였고(예, 秦始皇), 한(漢)나라때에는 제(帝)라 하였다(예, 漢武帝). 이 후 황제(皇帝)라는 칭호가 생긴 것이다. 진시황제(秦始皇帝)라는 칭호는 이후에 붙여진 것이다.
반면 고조선의 지도자 칭호는 단제(檀帝), 황(皇), 한(汗), 군(君), 주(主) 등이 있었다.
단제(檀帝)나 황(皇)은 단군을 칭하는 호칭이고, 한(汗)과 군(君)은 제후국의 지도자를 칭하는 호칭이다. 한(汗)과 군(君)의 서열은 정확하게는 알 수 없으나 군(君)보다는 한(汗)이 더 높은 서열이었을 것이다. 대국의 지도자는 한(汗, 三韓 = 三汗)이라 하였고, 소국의 지도자는 군(君, 고죽군(孤竹君), 람국군(藍國君), 청구군(靑丘君) 구려군(句麗君))이라 하였고 주(主)는 마을 및 부족의 촌장격이었다.
(고죽군(孤竹君), 람국군(藍國君), 청구군(靑丘君) 구려군(句麗君)- 제 23강 참조
후에 고조선의 세(勢)가 확장되고 강역(疆域)이 넓어지면서 오가(五加)에게도 한(汗)이라는 호칭을 칭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오가(五加)는 최고 권력가들을 칭하는 관직명이었다.
오가(五加)의 가(加)에 한(汗)을 붙여 가한(加汗)이라 하였는데(예, 거란의 지도자 가한(加汗)), 가한(加汗)은 지도자를 뜻하는 말이다.
가한(加汗)은 후에 축약되어 칸(Khan)이 되었고(예, 몽고리의 지도자 칸(Khan), 징키스칸), 칸(Khan)은 후에 '간(干)'으로 전음되었다(예, 신라(진한)의 마립간).
고조선 멸망 후 열국시대를 거치면서 지도자 호칭은 독자적으로 사용되었다.
북부여는 단군이라는 칭호를 그대로 사용하였고, 고구려는 태황(太皇), 태왕(太王)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으며, 신라 간(干), 백제 건길지(鞬吉支), 어라하(於羅瑕), 거란 가한(加汗), 몽고리 칸(Khan) 을 사용하였다.
거란과 몽고리가 지도자 칭호를 가한(加汗), 칸(Khan)을 사용했다는 것은 과거 이 종족들이 고조선 시대에 오가(五加)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이처럼 중국의 지도자 칭호 체계와 고대 조선의 지도자 칭호는 완전히 달랐다.
이후 중국과 왕래가 활발해 지면서 또 신라가 6세기 경 당(唐) 세력을 등에 업으면서 왕(王)이라는 칭호가 일반화 되었다.
덧붙여 말하자면
왕(王)은 간(干)이 발전한 글자다.
사실 하(夏), 상(商), 은(殷), 주(周)대 까지는 중국과 조선은 한 나라였다. 중국 역시 구환족(九桓族)의 일종이었다.
동이족(東夷族)이라는 말은 한(漢, 西漢 = 前漢)이 구환족(九桓族)에서 떨어져 나가기 위해서 중국인들이 만든 용어다.
중국인들은 황하강을 중심으로 뭉쳐 발전(夏-商-周-秦-漢)하면서 구환족(九桓族)을 사방으로 몰아내고, 자신들을 중화(中華)라 칭하고, 사방(四方)으로 몰아낸 구환족(九桓族)을 사이(四夷, 동서남북 오랑캐)라 하였다. 그 중의 하나가 동이(東夷)다.
제 22대, 23대 색불루 단군과 소태 단군이 은(殷)나라 정벌에 나선 것은 구환족(九桓族)에서 독자적 노선을 걷고자하는 은(殷))나라를 응징하고자 하였기 때문이다.
색불루 단군과 소태 단군이 공격한 곳은 현 황하강 중류 은허지역(현(現)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인 빈기(邠岐)이다. 빈기(邠岐)는 하(夏), 상(商(殷)), 주(周)의 본거지로 산서성의 빈(邠)과 섬서성의 기산(岐山)하남성이 경계를 이루는 지역을 말한다. - 제 22강, 23강 지도 참조
<참고 2> 기자(箕子), 그는 누구이며, 기자조선설(箕子朝鮮說)은 맞는 역사인가?
※ <다음 내용은 네이버 백과사전에 실린 글을 부분 인용하였음을 밝힌다.>
기자(箕子)는 중국 은(殷)의 군주인 문정(文丁, 太丁)의 아들로 주왕(紂王)의 숙부(叔父)이다. 주왕(紂王)의 폭정(暴政)에 대해 간언(諫言)을 하다 받아들여지지 않자 미친 척을 하여 유폐(幽閉)되었다.
은(殷)이 멸망한 뒤 석방되었으나 유민(遺民)들을 이끌고 주(周)를 벗어나 북(北)으로 이주하였다. 비간(比干), 미자(微子)와 함께 은(殷) 말기의 세 명의 어진 사람[三仁]으로 꼽힌다.
이중 일부 사서(史書)는 주무왕(周武王)이 기자(箕子)를 조선의 왕으로 봉했다(기묘년, BC 1122, 삼국유사 기묘년이라 기술)고 한다.
하지만 이 내용에 관한한 위 사서(史書)들은 모두가 위서(僞書)다.
우리 역사서에는 기자(箕子)가 우리나라로 와서 기자조선(箕子朝鮮, BC 1122 - BC 195)을 세워 약 928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그 기자조선(箕子朝鮮)은 BC 195년에 위만(衛滿)에게 멸망되었고, 그 자리에 위만은 위만조선(衛滿朝鮮, BC 194 - BC 108)을 세워 87년간 나라를 다스렸고, 이 후 위만조선(衛滿朝鮮)은 BC 108년에 한(漢)나라에게 멸망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는 한(漢)나라의 한사군(漢四軍)이 설치되었다고 한다. 한사군은 AD 313년 낙랑군을 마지막으로 소멸되었다고 한다.
한사군(BC 108 - AD 313)이 설치되었던 기간은 421년이다.
그 자리는 지금 북한의 평양이란다.
이렇게 하여 한사군은 한반도에 설치되었고, 우리 민족은 기원전 부터 중국의 지배을 받던 민족이란다.
그 기간이 무려 1436년이다.
이건 말이 되지 않는다.
우리나라 역사를 중국의 사서(史書)에 의존하여 기술하다보니 이런 결과가 나온 것이고, 과거 고려시대, 조선시대 모화사상(慕華思想)에 빠진 사가(史家)들이 중국의 사서를 금과옥조로 여기고 추종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일제의 우리 민족 죽이기 역사관(민족문화 말살정책)이 "고조선 → 기자조선 → 위만조선 → 한사군" 이라는 현 우리나라 역사체계를 더욱더 고착시켰고, 세뇌시켜 버렸다.
우리는 빨리 이 역사 체계를 깨야한다. 이것이 역사 바로 세우기다.
지금 평양에는 반경 40Km 안에 수천기의 고인돌이 있고, 평양에서 발굴된 단군릉은 기원전 5000년까지 올라간다. 너무 역사가 올라가 그 연대를 믿을 수 없다는 사람들도 있다.
기원전 부터 약 1500년 가까이 중국이 평양(한반도)을 지배했다면 그 문화가 남아 있어야 하는데, 중국이 자랑하는 중화문화인 앙소문화의 흔적은 찾아 볼 수 없다.
간혹 어떤 이들은 '미송리 항아리'를 가지고 왈가왈부하는데, '미송리 항아리'는 중국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던 시기 보다 한참 앞선 시기의 유물이다.
평양에서는 얼마전 낙랑전을 펼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낙랑 유물은 서울에서도 전시된 일이 있었다. 하지만 이 낙랑은 한사군의 낙랑군이 아니다.
고대 한반도에는 낙랑국이 있었고, 고조선 말기에는 최씨낙랑이라는 고조선 거수국(제후국)이 평양지역에 있었다. 이 시대의 유물들이다.
이것을 한사군의 낙랑유물로 착각하는 우(愚)를 범하지 말아야 한다.
그리고 한사군이 한반도에 설치되어 있었다면 만주 역시 한나라의 지배하에 있었을 텐데, 지금 만주에서 발굴되는 유물 유적, 특히 요녕성과 내몽골 지역의 홍산문화(요하문명) 발굴지에서 발굴되고 있는 유물, 유적은 중국의 앙소문화와는 차원이 다르다. 앙소문화와 홍산문화는 완전 이질문화이다.
여기서 출토되고 있는 비파형동검, 빗살(Z자 무늬)무늬 토기, 적석총 돌곽분 무덤은 한반도에서도 출토되는 우리 문화이다.
중국의 검은 양날의 곧은 1자 형식이며 칼과 칼자루가 분리 되어 있지 않다.
하지만 비파형동검은 그 모습이 표주박 모습이며, 칼과 칼자루, 귀틀(칼과 칼자루 연결 부분)이 모두 분리된 조립식이다.
중국의 검과 우리의 검이 부딛치면 어느 쪽 검객이 충격을 많이 받았을까?
당연히 중국의 검객이다. 그 이유는 중국의 칼을 소위 말하는 '통째로 칼'이기 때문에 그 충격이 그대로 검객에게 전달되었다. 반면 우리의 칼은 조립식이기 때문에 그 충격이 완화되어 검객에게 전달되었다. 당시 검을 만드는 기술도 중국보다는 우리의 기술이 훨씬 앞장 섰던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미개한 한(漢)족이 한나라 주변의 일부 지역을 지배하였다는 것은 이해가 되지만 수천리나 떨어진 한반도 평양까지 와서 약 1500년간을 지배했다는 것은 말이 되지 않는다.
그 증거도 없다.
만주와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유물, 유적은 중국의 유적이 아니기 때문이다.
조금은 섣부르고 확인되지 않은 루머(소문)지만, 지난 2000년을 전후로 하여 중국 중원의 한복판 서안(장안)에서 대형 피라미드(적석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중국은 곧바로 발굴 작업을 착수하였으나 발굴 도중 갑자기 중단하고 다시 덮어 버렸다고 한다.
이 발굴 작업에 참여했던 인부의 말에 의하면 이곳에서 이상한 글자(한글) 관련 자료(고대 가륵 단군 시절에 만들었다는 가림토로 추측)가 출토되어 덮어 버렸다고 한다.
이 내용은 확인되지 않은 내용임으로 강력히 주장할 수 없어 서운할 따름이다.
위 7개 사서(史書)에 기록된 내용을 조금이나마 인정해 주자면 『환단고기』「단군세기」제46대 단군 보을(普乙) 조(條)에 이와 유사한 기록이 있다.
BC1122년(삼국유사 기묘년이라고 기록) 경에 살았던 기자(箕子)는 절대로 평양에 오지 않았다. 평양에는 기자조선도 없었고, 위만조선도 없었고, 한사군도 없었다.
기자(箕子)는 위 <단군세가>의 기록처럼 22대 단군 색불루와 23대 단군 소태의 은(殷)나라 정벌로 기자는 서쪽으로 갔다. 북쪽으로 갔다는 설도 있다.
그럼 한사군(漢四軍)은 어찌 된 것인가?
먼 훗날 기자(箕子)의 후손인 기후(箕詡)가 BC 323년 연(燕)나라의 고조선 침입 당시 기(箕, 현 산서성 태곡현)의 군사를 이끌고 고조선을 지원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제46세 단군 보을(普乙)이 기후(箕詡)를 번조선 왕(王)으로 봉(封)하고, 연(燕)나라와 대치하도록 하였다. - 『환단고기』「단군세기」제46대 단군 보을(普乙) 조(條) 참조
단군 보을이 기후(箕詡)를 번조선 왕으로 봉한 지역이 바로 현(現) 난하의 동쪽 창려현이다.
이 창려현에는 왕검(험)성이 있는데, 이 왕검(험)성이 기후(箕詡)의 성이었다.
이 후에 왕검(험)성에는 기후(箕詡)의 후예들이 살았다. 이 조선이 기후조선(箕詡朝鮮)이다. 이 기후조선(箕詡朝鮮)이 BC 194년 연나라 사람인 위만(衛滿)에 의하여 정복이 되면서 기후의 왕검(험)성은 위만의 왕검(험)성이 되었다. 이 조선이 위만조선(衛滿朝鮮)이다. 위만조선은 그 손자 우거왕(右渠王) 때 한나라의 수군과 육군에 의하여 점령되었다. BC 108년이다. 이곳에 한사군이 설치된 것이다.
당시 이곳을 요동이라 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을 위에 제시된 7개의 사서(史書)들은 한반도의 기자조선설, 위만조선설, 한사군로 바꿔 놓은 것이다.
즉 기자조선이니, 위만조선이니, 한사군이니 하는 제후국들을 중국은 자신들의 외신국(外臣國)이라고 주장 하지만 한사군은 그렇다 손치고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고조선의 서쪽 변방을 수비하던 고조선의 거수국(제후국)이었다.
한사군에 대해서도 일부학자들은 한사군이 아니라 조선 5군이라고 주장하며 우거왕과 한나라의 전쟁은 우거왕이 패하지 않았으며, 위만조선이 망한 것은 내분에 의하여 망했다고 한다. - 명지대 송준희
이 역사적 사실을 왜곡하여 한반도 평양으로 끌고 왔으니 위에 제시된 7개 사서(史書)들은 이 내용에서 만큼은 위서(僞書)라는 굴레를 벗어날 수 없다.
위 사서들은 서로가 서로를 인용하며 돌려쓰기(옮겨쓰기)를 한 것이다. 그 과정에서 내용을 더 심화되고 확대되었다.
요동지역에 설치되었던 한사군은 AD 313년 낙랑군을 끝으로 소멸된 것이 아니다. 고구려 초 제6대 태조대왕(재위기간 AD 53 - AD 146) 때 이미 초토화되었다.
그 이전에도 한사군의 힘은 미비하였다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태조대왕에 앞서 고구려 제5대 모본왕은 하북성과 산서성, 섬서성 일대를 공격한 적이 있다(DA 49).
<삼국사기>에 의하면 모본왕은 현토군이 고구려현을 습격한 것을 빌미로 (우)북평을 출발하여 어양, 상곡을 거쳐 태원 까지 진격하자 요동태수 채융이 지난 일을 사과하며 연회를 베풀고 진상품을 주어 그것을 받고 돌아 왔다는 기록이 있다.
모본왕이 하북성, 산서성, 섬서성을 공격할 때 요동에 강력한 한사군이 버티고 있었다면 가능했을까? 모본왕이 (우)북평→어양→상곡→태원을 공격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사군이 유명무실했기 때문이다.
이후 태조대왕은 이 지역에 10성을 구축하여 서북방의 외적을 방비하였다. - <삼국사기> '태조대왕 조' 참조
이 역사적 사실들은 현재 많은 역사학자들(송준희, 우실하, 윤내현, 이덕일, 등 가나다순임)에 의하여 밝혀지고 있다.
한반도에 있지도 않았던 한사군을 한반도 허리에 만들어 놓고 그것을 가르치는 현 우리 역사 교육은 정말로 잘못된 것이다. 시급히 해결되어야 할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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