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1. 14. 08;30
늦잠 자는 게 평소의 내 소원이라,
밤새도록 겨울비가 내린다는 핑계로 늘어지게 잠을 자고
평소보다 세 시간이나 늦게 앞산에 오른다.
나뭇잎 다 떨어진 활엽수 사이로 서슬 퍼런 '사철나무'가 보인다.
누런 갈색과 잿빛 짙은 숲 속에서 단 하나의 초록색을 만나니
조금 생뚱맞다.
문득 몇 년 전 태풍으로 지붕이 망가진 서산 간월암 앞마당에서
만났던 250살짜리 사철나무가 온몸을 부르르 떨던 생각이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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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다니지 않던 샛길로 들어서자 나무들은 속살을 숨김없이
보여주며 나를 반긴다.
어쩌면 요즘이 숲 속의 나무를 관찰하기에 매우 좋은 때인지도
모르겠다.
5리마다 심어 배고픈 나그네의 이정표가 되어주던 '오리나무',
신작로 20리마다 심었다는 '시무나무',
돌아가실 임금님 없어 재궁(梓宮)이 되지 못할 '가래나무'가
추위에 떨고,
옆에는 왕의 관(棺)인 재궁으로 선택되지 못해 시샘 부리던
큰 키의 '개오동나무'도 서있다.
지금 내가 오르는 앞산은 높이가 해발 100m도 되지 않는
야산임에도 숲은 전형적인 혼효림(混淆林)으로 많은 종류의
나무가 자생한다.
이곳의 나무는 몇 종류나 될까,
지금부터 만나는 나무를 메모해야겠다.
가죽처럼 질긴 '가죽나무'
물을 시퍼렇게 만드는 '물푸레나무'
꽃이 부채보다 더 예쁘다는 '미선(美扇)나무'
돈이 안 되는 수놈 쥐똥나무 '남정목'
한약재로 돈이 되는 암놈 쥐똥나무 '여정목'
작살 만들라고 보채는 '작살나무'
시럽 만드는 '단풍나무'
사람의 뼈 건강을 위해 온몸의 물(骨利水)을 내주는 '고로쇠나무'
불에 탈 때 자작자작 소리를 내는 '자작나무'
봄에 풍부한 비타민을 주는 '드릅나무'
천연 모기 기피제인 '누리장나무'
'밥나무'로 불리다가 발음에 의한 이름으로 바뀐 '밤나무'
무슨 기준인지 '나리'보다 등급이 낮다는 '개나리나무'
꽃을 헷갈리게 만들어 웃음 주는 '회화나무'
하도 오래 살아 느끼하게 만드는 '느티나무'
불이 붙으면 꽝꽝 소리를 내는 '꽝꽝나무'
한약재료로 쓰이는 '노간주나무'
사람 굶는 꼴 못 본다며 도토리가 잔뜩 달렸던 '졸참나무'
짚신 해지면 덧대라고 두툼한 잎사귀가 달렸던 '신갈나무'
떡을 싸면 쉽게 부패하지 않아 자연산 방부제 역할을 하는
'떡갈나무'
지붕 재료로 쓰고, 코르크 마개도 만드는 '굴참나무'
무능해 백성 버리고 도망치기 바빴던 선조임금을 살려준
'상수리나무'
제일 늦게까지 가을을 즐기던 '갈참나무' 등 참나무 6형제가
여기저기에 자리를 잡았다.
천연염료로 노랑물감을 대주던 '노린재나무'
향도 꽃도 예쁜 '아까시나무'
스님 머리통 닮은 열매 달렸다는 '때죽나무(때중나무)'
"아프면 나를 써라" 이순신 장군의 다리를 묶었던 진통제
'버드나무'
염증은 자기에게 맡겨라고 큰소리치는 '인동나무'
연지(Rouge) 바른 여인의 잎술처럼 빨갛게 물들었던 옻나무과의
'붉나무'
일지일화(一枝一花) '진달래'
김수로왕 부인이 좋아했다는 일지다화(一枝多花) '철쭉'
칡은 왼쪽으로 등나무는 오른쪽으로 감아올라 갈등(葛藤)이라는
말을 만든 '등나무와 칡'
줄생가산이라 줄기에 꽃이 피는 '생강나무', 가지 끝에 꽃이 피면
'산수유나무'
똥냄새 풍기는 '은행나무'가 저쪽에 있다.
수수꽃 닮아 '수수다리꽃'이라는 한국 토종 '미스김 라일락'
꽃이 병 모양 닮아 '병꽃나무'
꽃이 수수 닮아 북한식 이름인 '개쉬땅나무'
껍질 벗기면 국수 면발로 보이는 '국수나무'
꽃이 하늘로 피는 '산초나무'
검은 기름 연기 내뿜어 산유국을 만들어 줄 '물박달나무'
용궁으로 간 토끼 간(肝) 사건의 목격자 '조팝나무'
말채찍 만들던 '말채나무'
열매는 팥모양이고 맛은 배맛이라 '팥배나무'
꽃이 100일이나 시들지 않아 백일홍인 '배롱나무'
까치밥 대롱거리는 '감나무'
뱀무늬 섬뜩한 '노각나무'
율곡선생의 불화로를 그리워하는 '매화나무'
며칠간 내린 비에 봄이 왔다고 착각을 했는지 동아(冬芽)를 잔뜩
키운 '산목련'
꿀이 좋아 직박구리 대가리 박아대던 '산벚나무'
잠 귀신 '자귀나무', 만병통치 '마가목'
간에 좋다는 '헛개나무', '느릅나무', '벌나무', 염주 만드는 '모감주나무'
아직도 떨어질 낙엽이 남아있는 '낙엽송'과 '메타쉐콰이어'가 눈에
띈다.
한 시간 정도 앞산을 오르내리며 보이는 나무의 이름을 메모했더니
나무의 종류가 수십 개나 된다.
머릿속의 기억창고를 두드린다.
생각은 생각을 낳는 모양이라 예전 전국 각지에서 만났던 나무들이
머릿속 메모리 창고에서 튀어나오기 시작한다.
울릉도에선 "너도 밤나무"냐 물었더니 그래 '나도밤나무'다,
"나도 밤나무?"야 말했더니 아니 '너도밤나무'라던
'나도밤나무'와 '나도밤나무', 2600살이 넘는 '향나무'를 만났고,
신시도에선 검은 꽃 핀 '족제비 싸리나무',
해남에선 보기만 해도 돈이 된다는 '돈나무',
내변산 정상 밑 안부에선 옻나무 종류 중 하나인 '검양옻나무',
공해에 탁월하다는 '붉가시나무'와 '호랑가시나무'를 만났다.
사당역 4거리에 우뚝 자란 '마로니에'
남산 정상 갈림길에서 독성 강한 열매를 맺은 '칠엽수'를 만났으며,
이밖에도
한라산에서는 솔방울을 전봇대 애자처럼 위로 매단 '구상나무'
속리산 천왕봉에서는 밤에 빛나는 '야광나무',
대패칼날을 담는 '대패나무'
각화산에서는 '털진달래나무', 주왕산에서는 '수달래'를 만났다.
살아 천년 죽어 천년 태백산 '주목나무'
홍천 가리산을 지키는 거대한 '황벽나무'
정선 두위봉에서 만난 우리나라 최고령 1400살 '주목나무'
여수 영취산 진달래 군락지에서 만난 '개비자'
제주 비자림에서 만난 '비자나무'
판서급 정이품송으로 유명한 속리산 '소나무'
워낭소리를 묻은 청량사 '삼각우송(三角牛松)'
막걸리를 세말씩이나 마시는 운문사의 '처진 소나무'
돈이 많아 재산세를 내는 예천 '석송령 반송(盤松)'
구례 산동마을에서 만난 1,000살짜리 '산수유 시조목(始祖木)'
봉화 옥돌봉에서 만난 550살짜리 '철쭉나무'가 생각난다.
제행무상(諸行無常)이라 무위자연(無爲自然)은 변해가고,
세월은 흐르고 흘러 사람도 바뀐다.
사람은 사라지고 없어져도 저 나무들은 그 자리에 서서 인간의
영욕(榮辱)과 부침(浮沈)을 측은지심(惻隱之心)으로 바라보겠지.
09;30
예전에 만났던 꽃과 나무들이 새록새록 기억나면 치매라고 했던가.
나이가 들면서 체력과 기억력이 떨어지는 건 사실이다.
심리학자들은 과거를 곱씹는 '반추'를 경계하라고 했는데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할까.
옛일이나 예전에 만났던 나무들을 기억해 가며 반추(返芻)하는 건
좋은 일인가, 아님 나쁜 일일까.
물론 인생에 정답이 없듯이 반추에도 정답은 없겠지.
땀으로 온몸을 적셔가며 높은 산을 오르고, 사연과 전설을 간직한
나무와 야생화를 촬영하며 느꼈던 희열(喜悅)이 기억나자 마음에
떨림이 오니 이제부턴 노인의 시간인 모양이다.
2023. 1. 14.
석천 흥만 졸필
첫댓글 나무 이름에도 다 나름대로 뜻이 있구나!!
흥엉는 평생 치매걱정은 없겠다^^
ㅋㅋ 똥칠할때까지 살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