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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나사로를 살리신 예수님(요 11:38-44)
인간의 가장 근본적인 문제는 삶과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것보다 더 큰 문제는 사실상 없을 것입니다. 특별히 죽음의 문제는 우리가 현실생활속에서 외면하면서 살고 있지만 사실은 가장 심각한 우리의 문제일 것입니다. 인간의 과학과 역사는 이 죽음의 문제를 풀기위해서 끊임없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러나 해결할 수 없는 한계가 있음을 깨달을 뿐입니다.
사실상 인간의 고통은 본질적으로 죄와 죽음의 문제입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인간은 이 죄와 사망의 법에 매여 고통하고 있음을 분명하게 지적하고 있습니다. 나사로가 병이 났는데 예수님은 죽을 병이 아니라고 하십니다. 오히려 나사로의 병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니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나사로가 죽었습니다. 이제 인간으로서 희망이 끊어졌습니다. 무덤에 장사되었습니다.
하나밖에 없는 오라버니가 죽자 그 누이 동생인 마르다와 마리아가 앞이 캄캄합니다. 앞으로 어떻게 살아야 할지 막막했을 것입니다. 죽음이라는 것은 죽는 자를 두렵게 하고 절망하게 할 뿐 아니라 남은 가족들에게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과 상실감을 안겨줍니다. 마리아와 마르다 역시 그 마음속에 오빠 나사로에 대한 죽음에 커다란 아픔을 느끼고 있었을 것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왜 일찍 오시지 않았느냐고 원망하였습니다. 이것이 인간의 한계입니다.
죽음의 권세앞에 인간은 무력합니다. 죽음 앞에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성경 (히 9:27)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그렇습니다. 죽음은 누구도 피할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그 다음이 문제입니다. 하나님앞에 설 것을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은 아무렇게나 자기 욕망에 사로잡혀 삽니다. 그러나 하나님앞에 설 것을 생각하는 종말론적인 삶을 사는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의식하고 그날을 준비하며 살아갑니다.
이것이 종말을 사는 성도의 자세입니다. 우리나라는 교통 사고로 하루에 30명 내지 40명씩 죽어갑니다. 아니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도 1년에 15,000명이나 됩니다. 이러한 죽음앞에 온 가족이 통곡합니다. 죽음은 슬픔을 가져다 줍니다.
1.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오늘 본문에는 예수님도 찾아가 우셨습니다. 35절을 보십시오. "예수께서 눈물을 흘리시더라." '눈물을 흘리셨다'는 말은 헬라어의 의미는 막연히 눈물을 흘렸다는 뜻이 아닙니다. '눈물이 와락 쏟아졌다'는 강한 의미를 담고 있는 것입니다. 죽음이 인간에게 안겨 주는 슬픔과 절망이 얼마나 대단했으면 하나님이신 예수님 마저도 눈물없이는 그것을 지켜 볼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성경은 눈물을 흘리시던 주님의 감정을 두 마디 말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33절을 보십시오. "심령에 비통히 여기시고 불쌍히 여기사." '비통히 여긴다'는 말은 분이 나서 씩씩거린다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무엇에 대해 예수님이 분노하신 것일까요? 예수님은 죽음을 이세상에 끌어들인 죄를 향해 거룩한 분노를 발하고 계신다고 봅니다.
인간을 처참한 지경으로 몰아넣은 죽음의 실체를 보고 진노를 하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비통히 여긴다는 말의 의미입니다. 또 '불쌍히 여긴다'는 말은 예수님 자신이 죽음의 슬픔과 공포아래서 두려워 떨고 있는 인간의 입장에 내려오셔서 그 고통을 자기 것으로 맛보시는 심정을 나타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시지만 우리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기에 사랑하는 자를 죽음에 빼앗기고 슬퍼하며 고통하는 그 사람들의 마음을 고스란히 받으셨고 그들과 똑같은 심정을 느끼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인간이 겪는 이 죽음의 공포와 슬픔을 놓고 눈물을 흘리실 뿐 아니라 마음으로 비통히 여기시며 우리의 모든 아픈 감정을 함께 나누시는 하나님이신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이 흘리신 눈물은 패배와 절망의 눈물이 아니었습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자신을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입니다.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 할렐루야! 주님은 비록 눈물을 흘리시고 계셨지만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외치고 계십니다. 뿐만 아니라 이 말씀을 믿는 자는 죽어도 다시 살아날 것이며, 살아있는 자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고 계십니다.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믿는 자들에게 죽음이라는 것이 영원한 죽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요 5:24)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느니라”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진 자들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의 죽음이라는 것은 진정한 의미의 죽음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자는 죽음에서 이미 해방되었기 때문에 안죽는다는 말입니다. 생명이신 하나님과 하나됨으로 인해 죽음과 관계없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육신의 죽음이 주님 보시기에 진정한 죽음이 아니라고 한다면 우리는 죽음에서 해방된 자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이요 생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는 자의 죽음을 잠자는 것이라고 말하였습니다. 11절,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 나사로의 죽음을 잠으로 여기시는 것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이십니다. 그러므로 나사로를 죽음에서 살리실 수 있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이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실 분이시기 때문에 우리에게 생명이요 부활이 되시는 구세주가 된다는 사실을 강력하게 선언하고 계신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1장 10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의 나타나심으로 말미암아 나타났으니 그는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으로써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신지라." 예수님은 사망을 폐하셨습니다.
다시 말해 사망을 무력화시켰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복음으로서 생명과 썩지 아니할 것을 드러내셨습니다. 예수님이 마리아와 마르다 앞에서 서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가 육신의 몸을 입고 무덤앞에 서 계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눈물을 흘리고 계십니까? 히브리 저자가 그 이유를 웅변적으로 설명하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2:14-15절,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 [15] 또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한평생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을 놓아주려 하심이니” 사망의 권세를 잡은 마귀를 정복하고 그 죽음의 쇠사슬에 묶여서 일생동안 종노릇하는 우리들을 놓아주시려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세상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은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예수를 의지하고 믿는 자에게는 죽음은 더 이상 죽음이 아닙니다. 이것을 입증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 주셨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요한복음의 일곱 가지 표적가운데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인 나사로의 부활은 가장 장엄하면서도 감동적인 표적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죽은 나사로의 집에 찾아오셨습니다. 왜 찾아오셨습니다. 요10:10말씀처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은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오신 것입니다. 절망적인 가정에 희망을 주시고 죽음의 가정에 생명을 주시기 위해서 우리 주님이 찾아오신 것입니다.
2.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
예수님은 지금 울고 있는 마르다에게 찾아오셔서 하신 말씀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아나리라"(23절)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러자 마르다는 이렇게 받습니다. 24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24절). 그는 마지막 날 부활을 믿고 있었습니다. 대단한 믿음 아닙니까? 또 예수님께서 [25-2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26]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 이것을 네가 믿느냐”하고 말씀하시자 마르다는 다시 이렇게 대답합니다.
27절, "주여 그러하외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세상에 오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줄 내가 믿나이다." 이 얼마나 기가 막힌 신앙고백입니까?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마르다를 보면서 석연치 않는 부분을 발견합니다. 이렇게 완전한 신앙고백, 이렇게 완벽한 믿음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그 믿음이 오늘 오빠를 잃어버리고 슬퍼하는 자기에게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는 것입니다. 이런 신앙 때문에 뭐가 달라진 것이 있나 하고 아무리 살펴보아도 달라진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상을 당한지 일주일이 안된 마당에 마음이 상하고 슬픔을 가누지 못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믿음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사랑하는 자가 죽으면 그 슬픔을 한 순간에 다 몰아내지 못합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충분히 인정한다고 할지라도 마르다를 보면서 깊이 생각해야 되는 문제가 있습니다. 마르다는 멀리있는 진리를 믿는 데는 조금도 주저하지 않습니다. "주여 마지막 날에 살아날 줄을 믿습니다.“
그는 그 때가 언제일지 몰라도 마지막 날의 진리를 믿고 있습니다. 그 때에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하게 될 것이고, 자기 오빠도 살아날 것이라고 믿는 것입니다. 멀리 있는 진리는 주저하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이 있는 진리는 제대로 믿지를 못했습니다. 주님께서 "네 오라버니가 살리라"고 분명히 말씀하셨지만 그 말씀이 안 믿어지는 것입니다. 당장 적용이 되어서 그 결과가 눈앞에 드러나야 되는 문제이기 때문에 믿기가 쉽지 않은 것입니다.
마르다는 고백적인 진리에 대해서는 의심하지 아니합니다. 고백적인 진리가 무엇입니까? 주님이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것입니다. 그는 이 사실은 틀림없이 믿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재적인 진리는 금방 받아들이지를 못합니다. "지금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는 말씀은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성적인 한계를 넘어서기 때문입니다. 다시말하면마르다는 지금 자기 한계 안에서만 믿으려고 한다는 것입니다.
오라버니가 병들었을 때는 예수님께서 고치실 수 있었지만 죽은 자는 못살린다는 것입니다. 또, 과거에는 하실 수 있었지만 지금은 하실 수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3절)고 말씀하십니다. 그때 다시 마르다는 24절, "마르다가 이르되 마지막 날 부활 때에는 다시 살아날 줄을 내가 아나이다" 대단한 믿음 같지만 실상은 오늘의 하나님은 못하신다는 종교적 믿음이었다는 것입니다. 자신의 논리로 하나님의 능력을 제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뿐 만 아닙니다. 남에게 일어난 사건일 경우에는 그럴 수도 있고 그렇다고 믿으면서, 그것이 내 사건일 경우에는 믿지 못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와같이 관념적인 신앙은 생명없는 믿음인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전에도 죽은 자를 살리신 경험이 있었고 마르다는 그것을 듣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이 찾아오셨지만 마르다는 오늘 예수님이 역사하신다는 믿음이 없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직접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라"는 말씀과 "네 오라비가 살리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님의 말씀은 먼 훗날의 진리일 수가 없습니다. 그것은 당장 지금 효력을 나타낼 수 있는 진리입니다. 그러므로 "주여, 옳습니다. 제가 믿습니다."하고 주님께 전적으로 믿음을 의탁했더라면 얼마나 좋았겠습니까? 산신앙은 오늘 우리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는 현재의 신앙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마르다에게서 이러한 믿음을 찾아볼 수가 없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지금 나에게 일어난 일에 도움을 줄 수 있는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로, 생명으로 받아들이지를 못했던 것입니다.
같은 이야기를 99세가 된 아브라함에게서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가 아들 낳기를 얼마나 고대했습니까? 그러나, 막상 하나님께서 천사를 보내시어 내년에 네 아내가 아들을 낳을 것이다라고 메세지를 전하자 그는 픽하고 웃었습니다. 아들 낳기를 그토록 소원했으면서도 왜 믿지 못합니까? 소원은 간절했지만, 그 소원이 실제적으로 내 생활 속에 이루어진다면 오히려 부인하는 것이 인간입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루어진 것은 믿고, 또한 역사적으로도 믿으면서, 즉 관념적으로는 믿고 고백하면서 나의 현실 속에서는 믿으려 하지 않는 것이 우리들의 문제입니다.
일본의 신학자 우찌무라라는 분이 어느 해에 일본에 심한 가뭄이 들어서 비가 오기를 모두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우찌무라는 어느 날 아침, 두 아들을 앉혀 놓고 "주님, 마른 땅에 비를 주십시오. 비를 주실 줄을 저희들은 꼭 믿습니다"라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아들들이 학교를 가려는데, 둘째 아들이 "아버지 우산 주세요" 하더랍니다. 이때, 아버지는 "이놈아, 청천하늘에 무슨 우산을 찾느냐"고 소리를 쳤더니, 방금 아버지가 기도하신 것은 무엇이냐고 되물었다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우찌무라는 크게 회개했다고 고백했습니다. 어린 아들은 맑은 하늘이었지만 비가 올 것임을 믿는 순수한 신앙이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우리에게는 그와 비슷한 신앙의 모습이 없습니까? 마르다처럼 "천국 간다, 마지막 날 주님이 재림하신다, 그 때는 모든 성도가 부활한다"는 것 같은 멀리 있는 진리는 잘 믿는다고 하면서 정작 내 가까이 있는 진리는 믿지 못하고 자기 생각에 갇혀버린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살아있는 신앙이 아닌 것입니다. 정말 살아있는 신앙은 오늘 여기서 하나님을 믿고 그 말씀에 아멘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점검해보아야 합니다. 나는 지식적인 신앙, 과거의 역사는 믿습니다. 미래에도 믿습니다. 그런데 오늘은 믿지못합니다. 엄격하게 말하면 불신앙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오늘 주님은 여전히 살아계십니다. 오늘 주의 말씀을 믿고 순종하십시오. 제가 늘 이야기 하지만 순종하려면 항상 부딪치는 것이 내 생각입니다. 내 생각을 내려놓으십시오. 예수님께서 말씀하셨음을 늘 묵상하시고 붙잡으십시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이 말씀앞에 자기자신을 내려놓으십시오. 그래야 주님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실제가 되기 위해서 반드시 거쳐야 할 과정입니다. 정말 여러분의 믿음이 살아있는 믿음, 오늘 주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고 그 믿음대로 순종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3.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이제 예수님은 나사로의 무덤으로 가셨습니다. 그의 무덤은 굴로 되어 있었는데, 큰 돌이 그 입구를 막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돌을 옮겨 놓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마르다가 예수님의 말을 가로막고 나섰습니다. "주여, 죽은 지가 나흘이나 되었으매 벌써 냄새가 나나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 볼 때 틀린 말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각도에서 보면 그는 지금 "이미 죽어 부패하고 있는 마당에 무덤 입구를 열어 어떻게 하자는 것입니까?"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네 오라비가 다시 살리라"(24절)는 예수님의 말씀을 믿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자신의 생각이 언제나 믿음을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방해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가립니다. 인간적인 계산으로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가로막습니다. 마르다가 바로 그와 같은 역할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런 마르다를 보시고 예수님은 아주 중대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 우리는 이 말에서 '왜 내 말을 네가 믿지 못하느냐? 왜 나를 의심하느냐?'하고 책망하시는 것 같은 인상을 받습니다. 드디어 무덤입구를 막고 있던 돌이 옮겨졌습니다. 무덤이 열린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은 하늘을 향해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기도를 드리셨습니다.
[41절] “돌을 옮겨 놓으니 예수께서 눈을 들어 우러러 보시고 이르시되 아버지여 내 말을 들으신 것을 감사하나이다” 주님은 먼저 하나님 앞에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에 왜 나사로를 살리시는지 그 이유를 밝히셨습니다. 42절,“항상 내 말을 들으시는 줄을 내가 알았나이다 그러나 이 말씀 하옵는 것은 둘러선 무리를 위함이니 곧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 둘러선 무리들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세상에 보내신 것과 이 예수님이 세상에 부활이요 생명이 되는 것을 믿도록 하기 위해서 나사로를 살리신다는 것입니다.
주님은 기도를 마치시자 마자 무덤을 향해 큰 소리로 말씀하셨습니다. "나사로야, 나오라!" 정말 기가 막힌 말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가 한 번 그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무덤 안에는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이 메아리쳤습니다. 조금 후에 수의를 걸친 나사로가 뚜벅뚜벅 걸어나왔습니다. 주님은 그 수의를 풀어 주어 자유롭게 다니게 하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주님은 나사로에게 생명을 주셨을 뿐 아니라 자유도 주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에게 생명과 자유를 주실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밖에 없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심으로써 자신이 부활이요 생명임을 실제적으로 증명하셨으며, 며칠 후에 그 자신이 십자가에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실 것이라는 사실을 미리 예고하셨습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세상 끝날 예수님이 재림하실 때 하늘의 별과 같이 무수한 성도들이 천사의 나팔 소리를 듣고 무덤에서 일어날 것을 가르쳐주셨습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우리가 믿는 신앙은 바로 부활의 신앙입니다. 인간이 죽음이 끝이 아니라 죽음이후에 부활이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 말씀을 통해 보여주고 있습니다. 나사로는 병들어 죽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그를 살려주신 것입니다. 이것이 부활의 증거입니다. 이제 이전 것은 다 지난 간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새것이 된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갖고있는 살아있는 신앙입니다.
우리는 마르다의 믿음과 같은 종교적인 믿음을 가지고는 영적 전쟁에서 승리할 수가 없습니다. 옛날이야기만 하고 과거에 매여서도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뿐 만 아니라 먼 훗날 부활하는 믿음만을 가지고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오늘 살아있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우리가운데 임하셔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이 한 가지 있습니다. 마음의 돌을 옮겨 놓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나사로를 살리기에 앞서 돌을 옮겨 놓도록 명령하셨습니다. 예수님 자신이 직접 그 돌을 옮겨 주시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나사로를 살리는 것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우리가 해야 합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까지 하나님께 맡기는 유아적인 신앙을 가져서도 안됩니다. 우리를 살려주시고 우리를 깨워주시는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돌을 옮기는 것은 우리가 해야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가슴을 가로막고 있는 돌이 무엇입니까? 불신앙입니까? 시기와 질투입니까? 무엇이 여러분의 돌입니까? 이 돌이 가로막고 있는 이상 "나사로야 나오라" 하시는 주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죽은 자가 부활하는 생명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의 심령을 무덤처럼 만드는 돌이 무엇입니까? 예수님에 대해서 무식한 것입니까? 그 돌을 빨리 옮기십시오. 아직도 예수님의 말씀을 자기에게 유리한 것만 믿는 골라잡는 신앙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까? 그 돌도 옮기시기 바랍니다. 교회에 나와서 예배는 드리지만 마음이 전혀 열리지 않아 딴 생각만 하다가 돌아갑니까?
그 세속적인 생각의 돌을 옮기십시오. 그 돌을 옮길 때 주님이 드디어 여러분의 심령을 향해서 "나사로야 나오라" 하고 외치십니다. 그때 내 안에 다시 부활하는 생명의 기적이 일어납니다. 할렐루야! 말씀을 다시 봅시다. [40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말이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하시니" 믿음이 위대한 기적을 일으킵니다. 하나님의 역사의 통로는 오늘 살아있는 우리의 믿음인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맺겠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믿고 있습니까?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십니다. 죄와 사망의 법에 사로잡혀 사는 자를 자유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언제나 우리의 믿음을 통해서 역사하십니다. 생명의 주님을 우리 안에 모셔들여서 지금 역사하시는 하나님, 오늘 나와 함께 하시면서 당신의 뜻을 이루시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렇게 할 때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고 생명과 부활의 기쁨을 오늘도 살아있는 믿음으로 세워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