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약 성경에는 여러 명의 야고보가 나온다. 그 중 대표적인 인물은 다음과 같다.
1.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 - 예수님의 제자, 큰 야고보로 불림
2. 알패오의 아들 야고보 - 예수님의 제자, 작은 야고보로 불림
3. 야고보 감독 - 예수님의 동생, 초대교회 지도자, 야고보서의 저자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요한은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받은 제자들이었다. 야고보는 예수님의 부활 이후에 유대와 사마리아 지역에서 복음을 전하고, 당시 땅끝으로 여겨졌던 이베리아 반도까지 가서 전도하였다고 한다. 예루살렘에 돌아온 후 AD 44년 헤롯 아그립바에 의해 순교를 당함으로 제자 중에 제일 먼저 순교의 자리에 오르게 되었다 (행 12:1~3). 그의 시신이 스페인의 갈리시아 지방으로 옮겨진 것에는 여러 가지 이야기들이 있다.
그 중 하나가 가리비 조개와 관련있는 전설이다. AD 44년 갈라시아의 작은 어촌 이리아 플라비아에 사는 어부 루고가 풍랑에 밀려온 배를 발견했는데, 거기에 초대형 가리비에 둘러쌓인 시신이 있었다고 한다. 루고는 그가 4년전 사라고사의 에브로 강가에서 예수를 증거하다 예루살렘으로 돌아간 야고보임을 기억하였다. 야고보의 시체가 배에 실려왔다는 소문은 여러 가지 이야기로 만들어져서 퍼져나갔고, 그의 시신은 이리나 플라비아에 묻혔다가 나중에 다른 도시로 옮겨졌다고 한다.
수백년이 지나고 야고보의 무덤은 잊혀졌는데 818년 양치기 ‘펠라기우스’가 별빛의 인도를 따라 한 동굴 속에서 무덤을 발견하였다. 펠라기우스는 너무 놀라고 신기하여 다음날 주교 테오데비르에게 말했는데, 이곳을 찾은 주교가 그 무덤에 “사도 야고보”라는 이름이 씌여져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고 한다. 그는 바로 갈리시아를 통치하는 알폰소 2세 국왕에게 이 이야기를 설명하였다. 놀라운 소식에 흥분한 알폰소 2세는 당장 무덤 위에 성당을 지으라고 지시했다. 그는 예배당이 완공된 후 직접 말을 타고 달려가 야고보의 유해에 가장 먼저 고개를 숙여 '산티아고 순례길의 첫 번째 순례자’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산타아고 (Santiago)는 성인을 뜻하는 ‘San‘과 야고보의 존칭 ’Diego‘의 합성어이다. 즉 성야고보를 말하는 것이다. '산티아고 데 콤포데텔라'는“별빛이 쏟아지는 들판에 있는 성 야고보의 무덤” 이란 뜻이다.
844년 이베리아 반도에 세력을 뻗친 이슬람교 세력에 가톨릭 세력이 맞선 싸운 클라비호 전투가 있었는데, 이 때 야고보가 스페인군 앞에 나타나는 기적을 일으켜 이슬람군을 무찔렀다는 말이 널리 전해지게 되었다.
아교보의 유해가 발견되었다는 이야기는 유럽 전역에 퍼지게 되었고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는 순례객의 발길이 이어지기 시작했다. 11세기를 전후해서는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스에서 이곳으로 오는 순례객들이 생기게 되었고, 특히 십자군 전쟁으로 인해 예루살렘 성지순례가 막히게 되어 이 순례길이 번성하게 되었다.
피레네 산맥 근처의 2곳에서 시작되어 부르고스·카리온 데로스콘데스·레온·아스토르가·폰페라다를 지나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있는 성야고보의 무덤를 참배하는 이 길은 이베리아반도와 다른 유럽 여러 나라를 이어주어 문화와 종교 정보를 교환하는 데 크게 이바지하였다. 이 순례길은 11∼15세기에 가장 번성하였으며, 16세기 말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쇠퇴하였다.
이 순례길은 1993년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이라는 명칭으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었다. 그러나 2015년에 프랑스 남부와 마주한 국경지방에서 출발해 피레네 산맥을 넘어 에스파냐로 유입되는 초기 순례길 등이 추가되면서, 총 길이 1,500kmdml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 순례길(카미노 프란세스와 에스파냐 북부 순례길)’이라는 새 이름을 갖게 되었다. 카미노 프란세스(Camino Francés)는 '프랑스 사람들의 길'이란 뜻이다. 한편, 현지에서는 에스파냐 북부를 잇는 순례길을 카미노 델 노르테(Camino del Norte)라고 부른다.
요즘은 종교적 순례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방문객 뿐 아니라 지친 도시의 삶 속에서 자신을 비우고 또 다른 자아를 발견하고자 하는 목적으로 이곳을 찾는 사람들이 많다..
가리비 껍데기는 까미노 순례의 상징인데, 야고보의 시신을 보호한 의미와 함께 몸에 지니고 다니면 행운이 찾아온다는 바람으로 이 것이 유행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