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일만위 순교 현양성지 → 갑곶순교성지 → 진무영성지 → 형님댁
12.8Km 3.9Km 34.1Km
4. 갑곶 순교성지
인천 끝단에 위치한 넓이 406평방킬로미터의 강화도는
섬 전체가 하나의 역사 및 문화 유적이다.
수도 방어의 요충지로서 고려 시대부터
외세와 격렬하게 충돌해 온 역사의 현장인 강화는
그래서 호국의 기상이 돋보이는 곳이기도 하지만
혹독한 박해를 겪어야 했던
신앙 선조들의 믿음과 순교에 이르는 열정도 함께 지니고 있다.
강화 지역이 교회와 특별한 관계를 갖기 시작한 것은
1866년 병인양요와 이에 이은 병인박해 때이다.
어느 박해보다도 극심하게 이루어졌던
병인년의 교난을 야기했던 병인양요의 현장이 강화도이다.
강화 군청의 적극적인 사업을 통해 말끔하게 관광지로 개발된 강화도는 특히,
지난 1970년 육지와 연결되는 강화대교가 개통됨으로써
보다 편리하게 다녀올 수 있게 되었다.
강화 지방에서 찾아볼 만한 교회 사적지는 관청리 형방(강화 고려궁지),
진무영, 갑곶돈대, 황사영 생가 터 등이다.
강화도 전체가 하나의 관광지이기 때문에
곳곳에서 자연의 아름다움을 맛볼 수 있다.
서울에서 버스 편으로 1시간 30분이 채 못 걸려 강화 터미널에 도착하면
우선 가까운 곳에 있는 강화 본당을 순례할 수 있다.
성당 구내에는 진무영에서 순교한 이들을 기념하는 성지가 조성되어 있고,
위쪽 강화 고려궁지 안에는 병인박해 당시
천주교인들에 대한 극심한 고문이 자행되었던
강화유수부 동헌(경기도 유형문화재 제25호)과 형방이 있다.
병인박해의 회오리는 강화대교 서쪽 끝에 서 있는
갑곶돈대(甲串墩坮, 사적 제306호)에서 일기 시작했다.
버스를 타고 강화대교를 건너면서 강화도 왼쪽으로 보이는 갑곶돈대는
1679년에 축조되어 8문의 대포를 설치한 포대를 두었다.
조선 숙종 5년(1676년) 강화에는 모두
5진(鎭) 7보(堡) 53돈대(墩坮)의 국방시설이 설치됐다.
1866년 병인양요 때 조선 정부가 프랑스인 성직자 9명을 처형한 책임을 물어
강화도를 점령하고자 했던 프랑스 함대가 바로 이곳으로 상륙,
강화성과 문수산성을 점령했다.
결국 프랑스 군은 후퇴했으나 이로 인해 강화 지방에서는
병인박해라고 불리는 새로운 박해를 받게 되었다.
갑곶 성지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백사장에서 많은 신자들이 이슬로 사라졌다.
프랑스 함대를 방문하여 리델 신부를 만나 교회 소식을 전했던
성연순(成連順)과 원윤철(元允哲)이 1866년 10월
순무영(巡撫營)에 넘겨져 양화진에서 효수형을 받았다.
그리고 1868년에는 최인서(崔仁瑞, 요한), 장치선(張致善), 박순집(朴順集)의 형 박 서방,
50세 된 조참봉의 부친 등이 병인양요와 연루되어 강화에서 순교하였으며,
1870년에는 통진 출신 권 바오로가 20세의 나이로 강화에서 교수형을 받기도 했다.
또한 1871년 신미양요(申未洋擾) 때는
미국 군함에 다녀왔다는 죄로 처형당한 강화에 살던 천주교 신자
우윤집(禹允集), 최순복(崔順福), 박상손(朴尙孫) 등이 갑곶진두에서 순교하였다.
문헌상의 갑곶진두의 정확한 위치를 찾은 인천교구 순교자 현양위원회는
그 자리를 매입하여 지금의 갑곶 순교성지를 조성하였다.
1999년 11월 성지를 새 단장하고 2001년 7월에
제대 및 십자가의 길과 성모상 축복식을 거행했다.
그 해 9월 20일에는 갑곶 해안에서 순교한 박상손, 우윤집, 최순복 순교자비 제막식과
순교자들의 행적 증언자이며 인천교구 역사의 증인인
박순집(베드로) 증거자의 유해 안장식을 가졌다.
2005년 4월에는 1997년 성지 부지를 인수할 당시
낡은 관공서 건물을 수리해서 사용하던 기존 경당을 재단장해서
성당 축복식을 갖고 김대건 성인과 남종삼 성인의 유해 일부를 모셨다.
성당 아래에는 넓은 야외행사장과 묵주기도 길, 쉼터 등을 조성하여
순례자들을 맞이하였다.
인천교구는 2011년 교구 설정 5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갑곶 성지와 연결하여
바로 옆에 '인천교구 50주년 기념 영성센터' 건립을 추진하였다.
교구 신자들의 신앙을 심화하고 영성의 내면화를 위해 시작한 영성센터는
신자들의 정성으로 2012년 11월 20일 준공되었다.
총 세 개의 건물로 건립된 영성센터는 신미양요 때 이곳에서 순교한
세 순교자를 기리고자 박상손관(A관), 우윤집관(B관), 최순복관(C관)으로 명명되었다.
박상손관과 우윤집관은 영성수련관으로 총 50개의 방을 구비해
한 번에 100명의 단체 피정이 가능해졌다.
최순복관에는 성당과 사제관, 수녀원 등이 들어섰다.
[출처 : 주평국, 하늘에서 땅 끝까지 - 향내나는 그분들의 발자국을 따라서,
가톨릭출판사, 1996, 내용 일부 수정 및 추가(최종수정 2013년 5월 10일)]
5. 진무영 순교 성지
천혜의 자연환경을 가진 섬이자,
‘지붕 없는 역사박물관’이라고 할 만큼
많은 유적이 남아 있는 섬 강화도.
강화읍내 중심가를 가다 보면
‘강화 고려궁지’(江華 高麗宮址)라는 안내 표지판을 찾을 수 있다.
고려궁지는 고려가 몽골군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강화도로 천도하고
1234년에 세운 궁궐과 관아 건물터이다.
고려궁지는 읍내 중심가에서 북쪽에 있다.
궁지로 가는 길에는 한옥으로 유명한 ‘성공회 강화 성당’이 있다.
궁지로 가는 오르막길 오른쪽에는 강화초등학교가 있고,
그 맞은편에 ‘천주교 강화 성당’이 있다.
성당의 정문에서 왼편으로 조금 들어가면 제대와 십자고상을 만날 수 있다.
이곳이 이번 호에서 소개할 진무영 성지이다.
진무영(鎭撫營)은 숙종 4년(1678년) 강화도와
주변 지역의 군사들을 함께 엮어 창설한 군영(軍營)이었다.
이러한 방어 체제를 구축한 이유는 강화도의 전략적 중요성 때문이었다.
강화도는 서울과 가까워
물길로 아침에 떠나면 해질 무렵에 도착할 수 있었다.
게다가 황해도와 삼남(三南) 지역을 연계하는 수로와
한강 하류가 연계되는 요충지에 있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강화도는 일찍부터 중요한 군사 방어기지로 간주되었다.
17세기 초, 청나라가 조선에 압박을 가하면서
강화도의 군사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다.
강화도는 청나라가 침입했을 때 국왕 일가와 조정의 신하들이
피난할 수 있는 지역인 보장처(保障處)로 지정되었고,
행정단위도 유수부(留守府)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비상시, 경기 ·황해·충청·전라도의 연안 읍들이 강화유수부를 중심으로
군병과 군량을 지원한다는 해안 방어 체제의 기조가 성립되었다.
이러한 방어 체제는 인조(仁祖) 대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정비되었고,
그의 일환으로 진무영이 창설되었다.
이로써 강화를 중심으로 주변 지역인 경기도와 황해도 연안 읍을 통솔하는
하나의 해안 방어 체제가 성립되었다.
그런데 영조(英祖) 대에 이르러 진무영을 중심으로 한
서해안 방어 체제는 변화를 맞게 되었다.
청나라와 조선의 긴장관계가 완화된 것이 한 원인이었다.
또한, 국방정책도 비상시 수도를 버리고 안전한 장소로 피난하는 것이 아니라
수도를 사수하는 ‘도성수비론’으로 전환되었다.
이에 따라 강화유수부의 전략적 기능은
서해안 지역의 중요한 요충지로 변화하게 되었다.
그리고 진무영의 군사 활동도 이전보다 축소되었다.
그런데 진무영의 기능이 다시 확대되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그것은 1866년에 발발한 병인양요였다.
병인박해 때 프랑스 선교사들을 처형한 데에 대한 보복과 통상을 목적으로
프랑스 극동함대가 9월과 10월 두 차례에 걸쳐 조선을 침공한 것이었다.
10월 16일 프랑스군은 강화부를 점령하고,
대량의 서적과 무기, 금은괴(金銀塊) 등을 약탈했다.
그러나 11월 9일,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梁憲洙)가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패퇴했고,
이를 계기로 11월 11일 강화도로부터 철수했다.
이처럼 서울의 관문인 강화도가 손쉽게 점령당했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조선 정부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 정부는 중앙 및 각 지방의 해안을 방어하는
군사 시설을 대대적으로 확충했다.
그러한 가운데 진무영도 다시금
해안을 지키는 최대의 해방(海防) 기지로 정비되었다.
한편 병인양요는 천주교에 대한 박해를 더욱 확대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흥선대원군은 “프랑스 함대가 양화진까지 침입한 것은 천주교 때문이고,
그로 인해 조선의 강역이 서양 오랑캐들에게 더럽혀졌으니,
양화진을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새남터와 서소문 밖에서 처형하던 신자들을
총융진(總戎陣)이 있던 양화진에서 처형하도록 했다.
양화진은 순교자들의 피로 적셔진 곳이라 하여
오늘날에는 절두산(切頭山)이라 불리게 된다.
그리고 진무영에서도 신자들이 처형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은 누구였고, 어떠한 죄목으로 처형되었을까?
진무영의 순교자들
1868년 5월(음) 장치선(張致善) · 최영준(崔英俊) 등이
진무영에서 효수(梟首)되었다.
그들의 죄목은 무엇이었을까?
의정부가 아뢰기를, “지금 우포도청이 보고한 바를 보니,
‘사학(邪學) 죄인 장치선(張致善)과 최영준(崔英俊)은
양인(洋人)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의 진상을 모두 자복했다’고 합니다.
치밀하게 일을 꾸며 화응한 죄는 흉악하고 패역하기 이를 데 없는 것으로
천지간에 이보다 심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니,
잠시라도 용서할 수 없습니다.
죄인 장치선과 최영준을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군민(軍民)들을 크게 모아놓고 효수하여
백성들을 경계하도록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니,
윤허한다고 전교하였다
(“승정원일기” 고종 5년 5월 22일).
장치선과 최영준의 죄목은 ‘서양인들과 내통하기도 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이기도 한 일’이었다.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였다?
이것만으로는 장치선과 최영준이 어떠한 일을 했는지 알 수가 없다.
보다 구체적인 설명이 필요하다.
장치선은 1830년생으로, 병인박해 순교자 장주기(張周基, 요셉) 성인의 조카다.
5세 때 경기도 양지 언리에 사는 오자현(吳子賢)에게 천주교를 배워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세례명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는 장성한 후에 많은 기도문을 보고 외우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각처에서 활동하고 있던 선교사들과도 만났다.
그는 충청도 제천에서 살고 있을 때인 1866년 봄에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가 붙잡혀 순교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3월경(음)에 정확한 상황을 알기 위해
서울로 올라 오던 길에 지자익(池子益)을 만났다.
이때 지자익은 박해의 사정을 중국 상해에 있는 프랑스인들에게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고
나아가서는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는 것을 꾀하였다.
이를 듣게 된 장치선은 그 계획이 성공할 수 있도록
연락의 책임을 맡아 적극 도왔다.
그들이 서울 신자들의 도움을 받아 배를 구입하여
출항할 채비를 하고 있을 때,
리델 신부(F. C. Ridel, 李福明)와 연락이 닿았다.
마침 리델 신부도 중국으로 가서 조선의 박해 소식을 전하고자 할 참이었다.
장치선 등은 리델 신부를 피신시키기로 하고, 출항 준비를 했다.
준비가 끝나자, 5월(음) 장치선은 리델 신부와 최영준 · 최선일(崔善一) 등과 함께
충청도 신창 용당리(현 아산시 선장면 가산리) 포구에서 출발하였다.
그 일행은 중국 산둥 반도의 연태(沿台, 즉 煙台)에 얼마 동안 머물다가
리델 신부와 조선인 3명은 남고 장치선 등은 조선으로 돌아왔다.
1866년 10월 프랑스 함대가 제2차 조선 침공을 단행했다.
그러나 프랑스군은 정족산성에서
양헌수가 이끄는 조선군의 공격으로 패퇴하였고,
이를 계길 철수를 결정하였다.
퇴각하기 전, 장치선은 김계쇠(金季釗) · 박복여(朴福汝) 등과 함께
프랑스 함대로 가서 리델 신부와 만났다.
리델 신부는 통역으로 프랑스 군함에 승선하고 있었다.
장치선 등은 리델 신부에게 박해의 상황, 조선에 남아 있던
페롱(S. Feron, 權)과 칼레(A.-N. Calais, 姜) 신부의 소식 등을 전하였다.
리델 신부와 조선인 신자들은 군함을 타고 중국 상해로 가서 1년 가까이 머물렀다.
그러다가 1867년 장치선은 김계쇠 · 최영준과 함께 조선으로 되돌아왔다.
그들이 귀국할 때 칼레 신부는 은자(銀子) 70량을 주며
신자들의 상황을 잘 살펴 속히 소식을 전하라고 당부했다.
덧붙여 신부 1명을 보낼 것이니 영접할 방법도 강구하라고 지시했다.
귀국 후, 장치선은 1867년 10월(음) 백동(현 혜화동)으로 이사하여
장사를 하면서 생활하고 있다가 1868년에 체포되었다.
최영준(요한)은 1811년 경기도 용인 굴암 태생으로,
최인서(崔仁瑞)란 이름으로 더 잘 알려졌다.
7-8세 때 부친에게 교리를 배워 입교하였고,
1839년경에 앵베르(L.-J.-M. Imbert, 范世亨) 주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
그는 서울 아현에 거주하면서 회장직을 수행했고,
선교사들과 지도급 신자들과도 교류하였다.
또한 서상기(徐尙基, 베드로) 등과 함께 수차례 변문을 왕래하며
중국 교회와의 연락 임무를 맡기도 했다.
그리고 1866년 5월(음)에는 장치선 등과 함께
리델 신부가 중국으로 피신하는 데에 큰 역할을 했다.
최영준은 병인양요 당시
강화도에 정박 중인 프랑스 함대에 승선하여 리델 신부를 만났다.
그리고 프랑스 함대가 철수할 때에 장치선 등과 함께 중국 상해로 갔다가
1867년 장치선 · 김계쇠와 함께 귀국하였다.
서울 산막리에서 쌀장사로 생활하던 최영준은
1868년 4월 10일(음)에 아내 주 데레사와 함께 체포되었다.
여기까지 장치선과 최영준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보았다.
그들은 리델 신부를 안전하게 중국으로 피신시켰다.
그리고 박해의 상황을 알려 프랑스 선박을 불러서
남은 신자들을 구제하려고 했다.
더 나아가서는 천주교를 온 나라에 전파하고자 했다.
장치선은 4월 18일(음) 포도청에서 있었던 문초에서
이러한 사실을 숨김없이 진술했다.
조선 정부는 이를 ‘서양인들과 내통하고,
바다를 건너가 도적들을 불러들인 흉악하고 패역한 일’로 규정했다.
그리고 장치선과 최영준을 진무영으로 압송하여 처형하도록 했다.
5월 22일(음) 장치선과 최영준은 진무영에서 효수되었다.
진무영으로 보내 처형한 이유는
강화도의 군민들이 모인 가운데서 처형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경계하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양화진과 같이 ‘서양 오랑캐에게 더럽혀진’ 강화도를
‘천주교 신자들의 피로 깨끗이 씻기 위한’ 목적도 있지 않았을까 싶다.
한편 진무영 순교자들은 그들만이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박 서방, 조 서방 등도 순교하였다.
박 서방은 박순집(朴順集, 베드로)의 형이었다.
잘 알려졌듯이, 박순집은 많은 순교자들의 행적을 증언하고,
그들의 유해 발굴에도 큰 공을 세운 이였다.
하지만 박 서방의 신앙생활이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다.
조 서방도 마찬가지다.
조 서방은 조 참봉(參奉)의 부친이고,
나이가 50여 세라는 점밖에 알려진 것이 없다.
만 그들이 최영준과 함께 잡혔다는 점을 볼 때,
최영준과 어떠한 관계가 있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성지 조성 현재 강화 성당 구내에 진무영 성지가 조성되어 있다.
그러나 진무영 터가 어디였는지를 정확히 알 수 없다.
1976년 강화문화원에서 간행한 “강화사”(江華史)에는
강화 농협이 있던 자리로 추정했다.
성지 연구가인 한종오(베드로)도
문헌과 구전을 근거로 같은 결론을 내렸다.
현재는 옛 강화 농협 자리에 있는 은혜 교회부터
북쪽으로 약 200m 떨어져 있는 강화 성당까지를
진무영 터로 추정하고 있다.
진무영 성지가 조성된 것은 최근의 일이었다.
2004년 강화 본당은 성당 구내에 성지를 조성하고
9월 15일에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성지의 모습은 소박하다.
옆의 일반 주택과의 경계에 담을 두르고 제대와 십자고상을 세웠다.
그리고 제대 뒤에는 반원형 장식물을 세웠다.
같은 해 9월 20일 인천교구 성지개발위원회는
성지를 소개하는 안내판을 세웠다.
현재 인천교구에서는 진무영 성지에 대한 문헌 연구와
고증 작업을 지속적으로 실시하고 있다.
[출처 : 교회와 역사, 2012년 5월호, 강화도의 순교지 진무영 성지,
양인성(대건 안드레아, 한국교회사연구소 연구원)
이번 3차 순례여행은 서울부근을 순례하기에
가능한 많은 친지와 지인들을 만나보고 싶었다.
첫날은 성지 5곳만 방문하고 형님, 형수님과 댁 근처에서 저녁식사를 했다.
4시 경에 만나 설렁탕집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2시간 가량 머물렀다.
제주 집에서 뜯어간 약간의 두릅, 방풍나물, 머위, 달래, 쑥갓을 전달하자
형님이 여행중에 먹으라고 간식을 직접사서 한 보따리를 주셨다.
자주 찾아뵙지 못하기에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형님댁에서 자라고 하셨지만, 형수님도 힘들고 불편할 것 같아
10여분 떨어진 모텔에서 묵었다.
숙소에 도착해서 핸드폰이 없는 것을 확인하고는
다시 내려와 주차된 차를 살펴보니 의자옆 빈 공간에 떨어져 있었다.
출발부터 여러가지 실수로 가슴졸임의 연속이었다.
숙소는 이제까지 잔 모텔 중에서 제일 좋았다.
가격도 6만원으로 저렴하고 시설도 깨끗하고 침대도 더불, 싱글 2개가 있었다.
샤워실, 사우나실 욕탕등이 있어 고단한 하루를 푹 쉴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