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3년 5월 19일, 사이언스타임즈가 독자분들께 처음으로 인사드린 날입니다. 사이언스타임즈는 창간 18주년을 기념하여 그간 독자분들께 많은 관심과 사랑을 받은 본지 기사를 다시한번 전해드리려 합니다. 앞으로도 사이언스타임즈를 향한 독자분들의 많은 성원과 관심 부탁드립니다.
신소재 그래핀 연구의 세계적인 권위자, 한국인 최초 올리버 버클리상 수상자, 2006 사이언티픽 아메리칸지 ‘Scientific American 50’에 선정, 2008년 호암상 과학상, 2011년 자랑스런 한국인상 수상…
이 모든 화려한 수식어보다 그저 물리학자로 불리기를 원하는 사람이 있다. 김필립 하버드대 물리학과 교수. 최근 부산에서 열린 제20회 세계진공학술대회 참석차 방한한 그는 대학생들을 대상으로 과학과 기술을 주제로 강연했으며 아프리카TV의 과학방송 채널인 곽방TV에 출연하는 등 대중과 소통하는 과학자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난 8월 29일 곽방TV 촬영 현장에서 김교수를 만나 기초 과학과 연구 문화, 과학자의 길에 관한 얘기를 들었다. 어릴 때부터 물리학이 좋아 과학자가 되는 꿈을 꾸었고 30년 동안 그 길을 걸었으며 앞으로도 같은 길을 걸어갈 그는 천상 물리학자이다. ‘과학자는 재미로 연구하며 결과를 인내하는 사람’이라는 그의 말에서 일가를 이룬 학자의 깊은 성찰이 느껴진다.
그래핀 연구의 권위자인 김필립 하버드대 교수가 최근 진공학회 참석차 방한했다. ⓒ 아프리카TV
한국에는 무슨 일로 오게 됐나.
= 일년에 한두 번은 오는 편이다. 학회 참석도 있고 대학 강연도 있다. 이번에는 진공학회 참석차 왔는데 아프리카TV에도 출연하게 됐다.
지상파나 케이블이 아닌 인터넷 개인방송에 출연하는 것이 좀 신기한데.
= 아프리카TV의 서수길 대표가 고등학교 동문으로 35년 절친이다. 언젠가 한국에 오면 과학방송 채널인 곽방TV에 꼭 출연해달라는 부탁을 받았는데 이번에 기회가 됐다. 대신 서대표도 같이 출연하는 조건을 걸었다. 곽방TV를 몰랐다가 출연을 앞두고 지난 방송을 찾아봤는데 아주 좋은 프로그램이다. 일반인들과 소통하면서도 수준높은 과학 지식을 전달하는 것이 인상적이었다. 과학자는 끊임없이 대중과 소통해야 한다. 과학자들이 지원받는 연구비는 공공재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에 유용한 결과를 세상에 다시 돌려주고 일반인들과 함께 즐길 수 있는 자세가 필요하다.
물리학자가 장래희망이었나. 혹시 다른 것을 해보고 싶었다거나…
= 아주 어렸을 때부터 과학자로 살고 싶었고 물리학자 되는 게 꿈이었다. 뚜렷한 이유는 잘 모르겠다. 어린 마음에 우주의 비밀 같은 걸 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웃음). 생업을 위해 다른 삶을 사셨지만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과학에 관심이 많으셨고 집에 과학 잡지나 책이 있었던 것도 작용했을 것 같다. 대학 졸업을 앞두고 잠시 과학사의 매력에 빠져 진로를 고민한 것과 물리학 내에서 실험과 이론 중 어느 쪽을 할까 정도의 작은 번민이 전부였다. 25년간 물리학을 하면서 크게 후회한 적은 없다.
다른 수식어보다 물리학자라는 호칭이 가장 자연스럽고 듣기 좋다는 김필립 교수. 대가의 소탈함과 겸손함이 느껴진다. ⓒ 아프리카TV
천직에다 학자로서 대단한 업적을 이뤘다.
= 운이 좋았다. 2000년대 초반에는 무명의 조교수에 불과했다. 그러다가 2005년 네이처지에 그래핀*의 물리적 특성을 입증한 논문이 실리면서 갑자기 유명해졌다(이 논문은 지금까지 후속 연구자에 의해 9500회 가량 인용됐다) 그냥 휘둘렀는데 홈런이 된 기분이랄까. 그러나 특별한 성공이라고 보지는 않는다. 과학자는 자기가 좋아서 연구하는 사람이고 과학을 한다는 것은 기나긴 여정이다. 열정을 조절하면서 (빨리 가는 것이 아닌) 오래 가는 것이 중요하다.
* 그래핀(Graphene): 흑연을 의미하는 ‘그래파이트(graphite)’와 화학에서 탄소 이중결합을 가진 분자를 나타내는 접미사인 ‘ene’를 결합해 만든 신소재 용어. 실리콘보다 100배 이상 빨리 전류를 전달하며 강철보다 200배 강하면서도 신축성이 좋아 휘거나 접을 수 있는 디스플레이와 차세대 반도체 소재로 각광받고 있다.
그래핀 연구는 어떤 단계에 와 있나.
= 어떤 신소재든 처음에는 꿈의 소재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다. 그래핀도 처음 발견됐을 때는 반응이 열광적이었다. 5년쯤 지나니 별거 없다는 시큰둥한 반응이 나오고 있다. 당연한 수순이다. 세간의 관심이 쭉 빠지는 이런 시간을 잘 보내는 것이 연구자의 몫이다. 희망적이고 낭만적이었던 연구가 시간이 지나면서 실망으로 바뀌는 것은 다반사다.
2014년 노벨 물리학상을 받은 청색LED의 경우도 도핑 기술이 어려워 포기가 당연시됐던 연구였다. 하지만 혼자서도 수십년동안 포기하지 않은 일본 과학자의 집념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15년동안 그래핀을 연구하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래핀의 장점과 단점이 계속 밝혀지고 있다. 그래핀 이외에도 다른 저차원 소자에 대한 연구도 다양하게 진행하고 있다. 어떤 소자가 차세대 더 유용할 지는 연구가 좀 더 이뤄져야 한다.
김교수는 과학자는 스스로 좋아서 연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 아프리카TV
한국의 과학기술 수준은 어떤가.
= 지난 20년동안 빠른 발전을 보이고 있다. 해외에 비해 뒤처지지 않는다. 물리학계만 봐도 예전에는 국제물리학 저널에 실리는 한국 과학자들의 논문이 손에 꼽을 정도였는데 지금은 쉽게 볼 수 있다. 과학자가 되려면 해외 유학을 가야하냐는 질문을 받는데 지금은 꼭 그렇지 않다고 조언한다. 과거에는 국내 인프라와 기자재가 부족해 유학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연구 환경도 좋아졌고 한국 과학에 대한 자부심을 가져도 될 정도다. 과학의 발전에는 시간이 필요하다. 과학의 선진국들도 최소 50년, 100년 정도의 역사를 갖고 있다.
최근 한국은 기초 연구라도 3~5년 기간이 대부분이다. 짧은 시간내 성과를 압박하는 한국 과학계의 분위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 한국이 상대적으로 짧은 편이긴 하다. 그러나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효율이 중요하기 때문에 어려운 문제다. 장인정신 문화가 강한 일본이 그동안 상대적으로 덜했는데 요즘은 일본도 분위기가 바뀌고 있다고 들었다. 미국 과학계도 점점 트렌드한 쪽으로 가고 있다. 한우물을 깊게 파야하는 분야도 있는데 약간 아쉬울 때도 있다.
미국에서도 지역간, 대학간 연구 문화 차이 같은 것이 있나.
= 대학교마다 학풍이 있겠지만 근본적인 차이는 없다. 다만 서부 쪽은 창업 생태계가 발달돼있어 기초과학을 하면서도 창업을 고민하는 사람들이 꽤 있다. 요즘은 동부도 조금 바뀌는 것 같다. 바이오나 메디컬 쪽으로는 창업이 활발하기도 하고. 예전에는 기초과학은 창업과 관계없는 분위기였는데 요즘은 경계가 약간씩 무너지고 있다는 느낌이다.
김필립교수는 아프리카TV 서수길대표와 고등학교 친구 인연으로 최근 곽방TV에 함께 출연했다. ⓒ 조인혜/ ScienceTimes
과학을 하려는 젊은이들에게 해줄 얘기가 있다면.
= 과학이 좋은 것은 누구의 권위가 중요한 게 아니라 과학적인 방법을 찾아내고 입증만 하면 된다는 점이다. 물리학은 천재가 하느냐고 물어보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물론 천재들도 많고 가르치다보면 반짝반짝하는 학생이 있지만 몇 년만 지나면 상황이 달라져있는 경우가 꽤 있다. 길게 가는 것이 훨씬 더 중요하다.
좋은 과학자가 되려면 좋은 질문을 많이 해야 한다. 처음부터 좋은 질문을 하는 것은 쉽지 않다. 나 역시 좋은 질문을 많이 하고 싶지만 가끔은 바보같은 질문을 하면서 후회도 한다. 하지만 수많은 바보같은 질문이 쌓여야 좋은 질문도 나온다. 한국 학생들은 미국에 비해 질문을 잘 하지 않는다. ‘수업 시간마다 좋은 질문을 하나씩은 해보겠다’는 자세를 가지는 게 필요하다.
김필립교수는 1986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해 대학원 석사과정까지 거친 이후 미국 하버드 대학교로 진학, 1999년 응용 물리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컬럼비아 대학교 물리학과 교수로 재직하다가 2013년 모교인 하버드 대학교의 물리학과 교수로 자리를 옮겼다. 그의 이름을 딴 김랩(Kim Lab)에서 그래핀을 비롯한 신소재 연구에 매진하고 있다.
연구를 하지 않는 시간에는 음악을 듣거나 영화를 본다. 스스로 ‘나는 심심하고 재미없는 사람’이라고 말하지만 인터뷰와 방송 출연 내내 즐거운 수다와 웃음이 끊이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