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식 경상국립대학 명예교수] 《 '키산드라'의 눈물 》
※ 카산드라 (Cassandra) ㅡ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여자 예언자. 트로이 왕 프리아모스 (Priamos)의 딸임, 아폴론 (Apollon)의 노여움을 사 사람들이 그녀의 예언을 믿지 못하게끔 운명 지어졌음.
그리스신화 속 태양의 신이자 학예의 신인 아폴론은 반듯한 외모와 다양한 재주에도 불구하고 연인들에게는 매력적인 남성이 아니었던 모양이다. 다프네 (Daphne), 코로니스 (Coronis) 등 그가 사랑했던 요정이나 인간은 모두 신의 사랑을 거부하거나 배신해 치명적인 불행을 맞았다. 다프네는 일방적인 신의 사랑을 피해 월계수로 변신했고, 코로니스는 신의 아들을 잉태하는 은혜를 입고도 그사랑을 배신해 죽임을 당했다.
트로이의 공주 카산드라 (Cassandra)도 아폴론의 사랑으로 불행을 겪는 비운의 주인공이다. 아폴론은 온갖 정성을 기울이며 공주의 사랑을 얻으려 노력했지만 끝내 인간의 운명에 안주하려는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 상심한 신이 그동안 그녀에게 줬던 모든 선물을 돌려받으면서 미래를 알 수 있는 예지력 (豫知力) 하나만 남겨두는 징벌적 꼼수로 그녀에게 복수한다. 신이 준 특별한 선물인 그녀의 예지력은 그 탁월함에도 인간 세계 누구도 인정해 주지 않는 무용지물이어서 하염없이 그녀의 속을 태운다.
조국 트로이가 그리스연합군에 의해 무너지는 과정에서 그녀는 닥쳐오는 불행을 예언하며 특단의 대책을 당부했지만, 아무도 그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심지어 트로이 패망 이후 적장 아가멤논 (Agamemnon)의 노예가 돼 끌려가면서 적장의 아내 클뤼타임네스크라 (Klutimneskra)가 남편을 배신할 것을 예언하지만 적장은 그 말을 믿지 않았고, 그런 적장과 함께 그녀도 죽임을 당한다.
'카산드라' 신화가 전하는 교훈은 애초 예지력은 인간이 갖고 활용한 재주가 아니라는 것이다. 미래는 신적이고 성스러운 것이어서 인간이 제대로 알 수 없고 제어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혹시 알 수 있다고 하더라도 인간의 잣대론 설명할 수 없어 아무도 동조하지 않아 결국 파국으로 이어지고 만다.
운명적으로 인간은 무력하고 닥치는 현실은 가차 없다. 뻔히 그렇게 되도록 예정된 불행을 알면서 대책 없이 기다려야 하는 무력함에 더해 그 불행을 속절없이 당하는 운명의 가혹함을 카산드라는 보여 주는 것이다. 카산드라의 불행은 곧 인간 존재의 운명적 불행이다.
그리하여 불행한 예언자, 지혜를 무시당하는 현자, 무력한 혁명가를 대변하는 상징적 인물로 카산드라는 자리하고, 카산드라적 인물들은 역사의 현장에서 늘 바운의 주인공이 된다. "그래도 지구는 돈다"며 푸념했다는 갈릴레이나 '10만 양병설'로 일본의 침략에 대비하자고 제안한 율곡도 당대에는 그저 무력한 그 시대의 카산드라였다. 우리 시대 환경 파괴와 기후 변화에 따른 재앙을 경고하며 애를 태우는 환경운동가들의 처지도 다르지 않다.
최근 정치 상황과 관련해 자천타천족집게 예지를 쏟아 내는 이들의 활약이 신화 속 카산드라를 떠올리게 한다. 팩트와 해설을 엮어 남들이 선뜻 믿어주지 않는 미래상을 그리면서 관심을 끌고, 때로는 예지의 실현을 알리며 기고만장하거나 그 좌절을 변호한다. 시간이 지나면 백일하에 드러날 불행한 사건의 끝자락에 수 많은 불나비 카산드라가 경연을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정치의 격랑을 타고 일희일비의 주장과 기대를 쏟아 내는 불나비들의 노력을 진짜 카산드라는 어떻게 바라볼까?. 인생은 새옹지마, 카산드라식 예지의 실현이라는 당첨의 불행은 낙점의 행운이 되기도 하고, 다시 새로운 불행이 되기도 한다. 미래를 안다는 것은 현재 시점에선 무기력하고, 예지의 실현도 그것이 행운과 불행 어는 쪽이 되든 새로운 오늘이 냉엄하게 감당해야 할 또 다른 슬픔의 소재가 될 뿐이다. 카산드라들의 눈물에도 세월은 가차 없이 흘러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