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희안(1419-1464)
강희안은 세종조의 사대부로서, 선비화가이다. 안견과는 비슷한 시기의 사람이지만 신분도, 화풍도 다르다. 전문화가와 문인화가라는 관점에서 대비하여 설명하는 수가 많다,
강희안의 예술가적 재능은 계유정난(수양대군이 쿠데타를 일으킨 정변) 이후 그린, 그 유명한 그림인 〈고사관수도〉에서 방점을 찍는다. 〈고사관수도〉는 한 선비가 바위에 비스듬히 기대어 물을 바라보는 그림이다. 강희안은 친교를 나누었던 교우들을 계유정난으로 많이 잃었는데, 저자는 “내면에 가득한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자(본문 중)” 물을 바라보는 자신을 화폭에 재현한다고 말하고 있다.
종이 바탕에 수묵. 세로 23.4㎝, 가로 15.7㎝. 국립중앙박물관 소장. 그림의 왼편 가장자리 상단부에 ‘仁齋(인재)’라는 그의 호를 새긴 백문방인(白文方印)이 찍혀 있다.
이 그림은 덩굴과 깎아지른 듯한 절벽을 배경에 두고 바위에 기대어 엎드린 자세로 물을 바라보고 있는 선비의 유유자적한 모습을 담고 있다. 이 그림은 중국 북송대(北宋代) 회화의 영향을 토대로 발전된 안견파(安堅派) 화풍이 크게 풍미하고 있던 당시로서는 색다른 경향의 화풍을 보이고 있다 하겠다.
산수의 조그마한 한 부분을 배경으로 한 인물 중심의 구성이라든가 근경 위주의 대담한 변각 구도(邊角構圖)와 공간감의 결여 등은 조선 중기에 유행하였던 절파계(浙派系) 소경산수인물(小景山水人物) 화풍의 선구적인 요소로 간주된다. 안견이 북송대의 이곽화파로 그렸다면, 강희안의 그림은 명대의 절파 화풍이다. 명대의 절파화풍은 전문화가의 그림이다. 그런데 전형적인 사대부가 절파화풍으로 그렸다는 것에 의문을 표하는 미술사가도 있다,
(이곽파(안견 그림)가 대형 산수를 그렸고, 절피는 산수의 극히 일부분만 나타내는 소경산수를 그렸다.)
이 <고사관수도>의 화풍은 조선시대 중기에 이르러 함윤덕(咸允德)의 <기려도 騎驢圖>를 비롯하여 이경윤(李慶胤)·김명국(金明國) 등의 절파계 화가들의 소경산수인물 화풍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강희안은 친교를 나누었던 교우들을 계유정난으로 많이 잃었다. 강희안은 힘든 시대를 살면서 “내면에 가득한 삶의 고통을 치유하고자 물을 바라보는 자신을 화폭에 재현했으리고 말한다.
강희안은 선비로서, 예술가, 학자, 정치가로서의 면모를 갖춘 인물이다.
그의 동생이 조선 초의 문인인 강희맹이다.
선새님께서도 강희안처럼 인간사 고통을 가슴에 안고
물이나 바라보면서 마음을 달래지는 않으신지요;
첫댓글 강희안선비님은
원예관련책 "양화소록"을
편찬하신 분으로
꽃을키우면서 그분의 가르침을
익혔습니다
강희안 선비님 그림을 반가운 눈으로
바라봅니다
중국풍의 아주높이 두리둥실 한 산이
아니어서 편안하게 와닿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