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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사도행전 제5강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말씀/행4:32-5:16
요절/행5:11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오늘 말씀에는 ‘큰 은혜’와 ‘큰 두려움’이 나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사도들의 말씀을 통해 ‘큰 은혜’를 받아 한마음 한뜻으로 서로 물건을 통용할 정도로 사랑이 충만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한 사건을 통해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큰 두려움’을 갖도록 하셨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에는 큰 은혜와 함께 큰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교회에 은혜만 차고 넘치게 해주시면 될 텐데 왜 하나님은 ‘큰 두려움’도 주실까요? 그 두려움은 어떤 두려움일까요?
4장 32절을 보십시오. “믿는 무리가 한마음과 한뜻이 되어 모든 물건을 서로 통용하고 자기 재물을 조금이라도 자기 것이라 하는 이가 하나도 없더라.” 예루살렘 교회의 성도들은 한마음 한뜻이 되었습니다. 모든 것을 공동으로 사용합니다. ‘내 것, 네 것’을 구분하지 않습니다. 보통 사람들은 자기 것에 대한 애착이 큽니다. 내 것을 남이 가져다 쓰면 망가뜨릴까 봐 신경이 쓰이고 기분이 좋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루살렘 교회는 마치 한 가족처럼 생각하고 행동하며 그렇게 살았습니다. 동역자 중에 외투가 없으면 내 것을 입으라고 주고 반찬이나 쌀도 나누어 씁니다. 수박도 한 통을 사서 옆집 동역자와 나누어 먹습니다. 이뿐만이 아니었습니다. 부동산이 있는 사람들은 그것을 팔아 그 값을 교회에 헌금하였습니다. 사도들은 그것을 각 사람의 필요에 따라 나누어 줍니다. 생계가 어려운 사람에게는 식량 구입비를 제공해주고, 돈이 없어 학업을 감당하기 어려운 청년에게는 학비를 공급해 줍니다. 이들은 ‘서로 사랑하고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그대로 실천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 성도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이었을까요? 33절을 보십시오. “사도들이 큰 권능으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니 무리가 큰 은혜를 받아” 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사도들이 말씀과 여러 기적의 역사로 주 예수의 부활을 증언하자, 성도들이 큰 은혜를 받았습니다. 성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또 인생은 죽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후 영원한 삶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예수님의 사랑과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산 소망으로 충만해졌습니다. 그러자 그토록 집착하고 얽매이던 재물에 대한 욕심과 이기심을 내려놓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피를 함께 나눈 성도들을 친가족 이상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가난한 성도들을 보면 기꺼이 자신의 소유를 나누어 주었습니다. 이처럼 초대 교회 성도들은 자신이 가진 소유로 이웃을 적극적으로 섬기는 삶을 살았습니다. 그랬을 때 그들의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 중에 대표적인 인물이 언급되고 있는데 누구입니까?
36,37절을 보십시오.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 (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자기 재산을 바친 성도들이 많이 있었지만 그중에서도 돋보이는 사람이 바나바였습니다. 그는 구브로(키프로스)에서 태어난 레위인 요셉입니다. 사도들은 그를 바나바라고 불렀는데 ‘바나바’는 ‘위로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아름다운 입술을 주셨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아름다운 입술을 가지고 다른 사람의 마음에 상처 주고 힘 빼는 말을 합니다. 그러나 바나바는 하나님이 주신 아름다운 입술로 사람들을 위로하고 용기를 주는 말을 합니다. 주변 사람의 장점들을 찾아 적극적으로 칭찬해주고,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에게는 믿음과 용기를 북돋워 주고 기도해주는 사람이었습니다. 한마디로 모임에 윤활유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이런 바나바로 인해 사람들은 큰 위로를 받고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성도들을 박해하던 바울은 다메섹으로 가던 길 위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합니다. 회심하자마자, 그는 회당을 돌아다니며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했습니다. 그러자 당혹스러운 유대인들이 그를 죽이고자 공모하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켰습니다. 이에 바울은 밤에 광주리를 타고 성 밖으로 도망가 아라비아 광야에서 3년 동안 성경을 연구합니다. 그런 후, 예루살렘에 가서 성도들과 교제하고자 했지만 모두 피했습니다. 스데반을 돌로 쳐 죽이고 많은 성도들을 옥에 가두는데 주동이 되었던 바울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이때 바울을 적극적으로 변호하며 사도들에게 데리고 간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또 유대인들의 박해를 피해 고향 다소에서 13년 동안 칩거하고 있던 바울을 안디옥교회로 불러들인 사람도 바나바였습니다. 바울이 뛰어난 성경 선생이었기 때문에 그의 훌륭한 점을 잘 발휘해 양들을 잘 돕도록 환경을 만들어준 것입니다.
교회에는 바나바와 같은 사람들이 필요합니다. 사실 사람은 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살다보면 여기저기서 받은 상처들로 인해 부상병처럼 되기 쉽습니다. 내게도 위로가 필요하듯이 다른 사람에게도 위로가 필요합니다. 위로는 삶 속의 작은 관심에서부터 시작됩니다. 특별히 말부터 잘하는 데서 시작합니다. 남의 수고, 내면의 아픔을 공감하면서 하는 말 한마디는 상대에게 큰 위로를 줍니다. 그래서 오은영 박사와 같이 사람을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는 사람이 인기가 있습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얼마나 고생 많으셨습니까?” 직장인 부부라면 서로에게 직장에서 수고했다고 말해줄 수 있습니다. 가정주부로 섬기는 사모님들에게도 집안일 섬기느라 정말 수고 많았어요. 이렇게 말하며 서로의 수고를 알아주고 공감해줄 수 있습니다. 시험을 앞둔 학생들에게 “기말시험 보느라 수고가 많아요” 하면서 심방해서 격려해줄 수 있습니다. 우리가 여러 모양의 위로와 격려를 통해 예수님 안에서 한 가족으로서 서로에게 힘과 위로가 되어주는 그런 공동체를 이루어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바나바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자기 소유의 밭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습니다. 말로 다른 사람을 위로하고 섬기는 것도 어렵지만, 자신의 소유를 팔아 헌금하여 구제하도록 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입니까? 이것은 누가 시켜 한 일이 아닙니다.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자발적인 소원이 이처럼 아름다운 헌신을 하게 했습니다. 바나바는 아마도 사도들이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의 복음을 전해 주었을 때 큰 은혜를 받았을 것입니다. 죄인인 자신을 위해 생명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주님의 사랑과 헌신을 생각할 때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소중한 것을 드려 주님을 섬기고자 하는 열정으로 불타올랐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12장에 나오는 마리아와 같이 자신의 소중한 향유 옥합을 깨뜨려 주님께 부어드린 것입니다. 사람들은 이런 바나바를 칭찬하고 존경했습니다. 또 그의 삶은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 좋은 모범이 되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바나바의 아름다운 행동을 보고 따라 했습니다. 초대교회는 바나바의 선한 영향력으로 말미암아 더욱 주님을 사랑하고 헌신적으로 이웃을 사랑하며 섬기는 영적 분위기가 무르익어 갔습니다.
그런데 5장 1,2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라 하는 사람이 그의 아내 삽비라와 더불어 소유를 팔아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추매 그 아내도 알더라. 얼마만 가져다가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 바나나처럼 자신들의 소유를 팔아 성도들을 구제한 사람들 중에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있었습니다. ‘아나니아’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은혜로우시다’입니다. ‘삽비라’는 ‘청옥같이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삽비라’(Sapphira)는 보석 ‘사파이어’(Sapphire)와 유사 어근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도 소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주었습니다. 사람들은 이런 그들을 칭찬했을 것입니다. 어떤 사람은 제2의 바나바라고 칭송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모습은 은혜롭지도 아릅답지도 않습니다. 영어사전에 ‘Ananias’를 검색해보면 ‘거짓말쟁이’(liar)로 나와 있습니다. 아나니아는 자기 소유의 부동산을 팔더니 그 값에서 얼마를 감춥니다. 감추고 난 나머지를 교회에 헌금한 것입니다. 또 ‘그 아내도 알더라’는 말씀을 보면 두 사람이 소유를 팔기 전, 함께 공모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자신들 소유의 부동산을 팔아서 다 헌금할만한 믿음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나바처럼 인정받고 싶었던 모양입니다. 바나바가 밭을 팔아 교회에 헌금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칭송했습니다. “세상에 바나바 같은 사람이 어디에 있겠어, 참으로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야!” 이 말을 듣고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도 그와 같은 칭찬을 듣고 싶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막상 소유를 팔아 내놓으려고 하니까 아까운 마음이 들고 노후에 대한 염려도 생겼습니다. 그래서 판 것 중 일부를 감추었습니다. 그러면서도 땅을 판 전부를 헌금했다고 거짓말을 했습니다.
3절을 보십시오. “베드로가 이르되 아나니아야, 어찌하여 사탄이 네 마음에 가득하여 네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느냐?” 겉으로만 보면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행동은 교회에 큰 유익이 되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들이 땅 값 얼마를 감추었는지 상관없이 그들이 헌금한 돈을 가지고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줄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행동을 좋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행동이 뭐가 잘못되었단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마음 중심을 살피시는 분이십니다. 똑같은 봉사와 섬김과 구제를 하더라도 어떤 마음 자세로 했는지를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가난한 자들을 돕기 위해 소유를 팔아 헌금을 했지만 그들의 동기와 자세는 크게 잘못되었습니다. 성령 충만한 베드로는 한눈에 그들의 동기를 파악했습니다. 특히 그들의 행동 뒤에 교회를 타락시키고자 하는 사탄이 있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사탄이 그들 마음에 들어가 성령을 속이고 땅 값 얼마를 감추도록 역사한 것입니다.
4절을 보십시오. “땅이 그대로 있을 때에는 네 땅이 아니며 판 후에도 네 마음대로 할 수 없더냐? 어찌하여 이 일을 네 마음에 두었느냐? 사람에게 거짓말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로다.” 그들이 거짓말을 한 것은 사람에게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거룩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에 한 것입니다. 사탄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마음에 있는 헛된 영광을 구하는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그들을 통해 순수하고 진실한 성도들의 모임인 교회를 깨뜨리고자 한 것입니다. 5절에 보면, 아나니아가 죽게 됩니다. 와~! 좀 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님이 이렇게까지 꼭 해야만 했을까요?
우리가 이 장면을 보면서 가장 먼저 드는 생각은 ‘이게 그렇게 죽을 만큼 큰 죄인가?’라는 것입니다. “아니, 아나니아가 교회에서 헌금을 훔쳐 간 것도 아니고 헌금을 드렸는데. 물론 물질을 좀 감춘 죄가 있기는 하지만 죽게까지 하시는가?” 하나님은 죄인에 대해 오래 참으시고,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긍휼이 풍성하신 분이라고 했는데, 모두가 열심히 헌신하는 분위기 속에서 그냥 좀 넘어갈 수는 없었을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우리도 뭔가를 팔아 헌금할 수도 있고, 특별한 상금이나 보너스를 감사헌금으로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돈으로 자기 필요한 곳에 쓸 수도 있고 급한 일을 대비해 저축해 놓을 수도 있습니다. 베드로의 말대로 그것은 내가 이렇게 저렇게 쓸 수 있는 문제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사탄이 아나니아의 마음을 가득 채우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는 사탄의 도구가 되어 종노릇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탄은 거짓과 속임수의 앞잡이입니다. 요한복음 8장 44절에 보면 사탄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라고 했습니다. 사탄이 아나니아를 통해 교회에 침투해 거짓과 위선의 누룩을 퍼뜨리고자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들의 행동을 그대로 용납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교회는 점점 거짓되고 위선적인 일들이 난무하게 될 것입니다. 사람들이 교회를 다니지만, 삶이 변화되지 않습니다. 세상에 아무런 영향력을 끼치지 못하게 됩니다. 오히려 악영향을 끼치는 존재로 전락합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기뻐하지 않으십니다. 이런 공동체는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3장 16,17절에 보면, “너희는 너희가 하나님의 성전인 것과 하나님의 성령이 너희 안에 계시는 것을 알지 못하느냐? 누구든지 하나님의 성전을 더럽히면 하나님이 그 사람을 멸하시리라. 하나님의 성전은 거룩하니 너희도 그러하니라” 했습니다.
교회의 생명은 진실과 거룩함에 있습니다. 우리도 말씀을 들으면 말씀 앞에 소감을 쓰면서 진실하게 죄를 회개하고자 합니다. 그리고 말씀대로 살고자 노력합니다. 이것이 교회의 힘이요, 생명력입니다. 그런데 교회가 거짓과 속임이 난무하고 인간적인 방법으로 일을 해나간다면 하나님이 기뻐하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그 교회는 쓰실 수 없습니다. 더구나 지금 본문의 시점은 신약의 교회 공동체가 막 출범하는 중요한 시점에 있습니다. 이처럼 중요한 시점에 교회에 거짓과 속임의 불순물이 들어와 교회가 혼탁하게 되면 하나님이 함께하실 수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거짓과 위선 문제를 분명하게 드러내신 것입니다.
5,6절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이 말을 듣고 엎드러져 혼이 떠나니 이 일을 듣는 사람이 다 크게 두려워하더라. 젊은 사람들이 일어나 시신을 싸서 메고 나가 장사하니라” 하나님의 심판하심으로 아나니아가 죽자, 이를 보고 있던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했습니다. 8절도 보십시오. 아나니아가 죽은 후, 아내 삽비라가 들어옵니다. 베드로가 말합니다. “그 땅 판 값이 이것뿐이냐? 내게 말하라.” 삽비라가 대답합니다. “예 이것뿐입니다.” 삽비라는 끝까지 거짓으로 일관했습니다. 이때 사도 베드로가 성령 충만하여 그녀의 죄를 책망합니다. “너희가 어찌 함께 꾀하여 주의 영을 시험하려 하느냐(9)?”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함께 거짓을 꾀하였습니다. 주의 영을 시험했습니다. “하나님이 과연 우리의 거짓을 아시는지 보자. 절대 모르실 거야.” 그들은 하나님을 시험 대상으로 삼았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심히 가증한 죄였습니다. 결국 죽게 되는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을 자초하고 맙니다.
10,11절을 읽겠습니다. “곧 그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러져 혼이 떠나는지라. 젊은 사람들이 들어와 죽은 것을 보고 메어다가 그의 남편 곁에 장사하니 온 교회와 이 일을 듣는 사람들이 다 크게 두려워하니라.” 성도들은 다 크게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속에서도 죄의 누룩이 침투할 수 있음을 깨닫고 두렵고 떨림으로 회개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은 결코 속일 수 없구나” “교회의 주인은 하나님이시구나” 그들은 자신들의 마음에 거짓과 위선의 누룩이 침투하지 못하도록 깨어 기도했을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일은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하나님께 대한 경외심을 심어주어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게 살아가도록 하는 귀한 교훈을 주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도 하나님은 크고 작은 사건들을 통해 경고의 메시지를 보내십니다. 영적으로 민감한 사람들은 이 하나님의 경고의 음성을 듣고 진실하게 회개합니다. 그런 사람은 소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불쌍히 여기시고 용서해주십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죄를 합리화하며 하나님을 시험합니다. “별일 있겠어.” 그러다 큰 징계를 받고 후회합니다. 우리는 회개의 기회를 붙잡아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 심령에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을 주시길 기도합니다.
에덴동산에서 아담과 하와가 사탄의 꼬임에 빠져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따먹습니다. 겉으로 볼 때는 과일 하나를 따 먹은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형벌을 내리십니다. 그들이 인류의 조상, 인류의 대표이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에 등장하는 초대 교회는 모든 교회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이 함께하는 거룩한 공동체입니다. 자발적인 헌신과 사랑의 공동체입니다. 그런데 이 공동체를 사탄이 파괴하고자 합니다. 거짓과 위선, 헛된 영광을 추구하는 공동체로 변질시키려고 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의 일은 아름답고 은혜로운 초대 교회가 막 시작되었을 때 그 흐름에 찬물을 끼얹은 사건입니다. 하나님은 초대 교회가 죄를 멀리하고 진실하고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원리는 초대 교회때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우리 교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 다시 오실 때까지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교회는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고 거룩한 공동체가 되기에 힘써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 와서 하나님의 인자와 사랑, 위로하심을 느껴야 합니다. 동시에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 앞에서 하나님께 대한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다른 말로 하면 경외심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새 힘을 얻기도 하지만 말씀 앞에 자신의 죄가 드러나고 찔림과 죄의식을 느껴야 합니다. 성경을 보면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의 첫 반응은 두려움입니다. 성전에서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선지자가 고백합니다.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사6:5).” 1907년 평양 대부흥 운동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하나님의 강력한 임재를 경험한 사람들이 그동안 감추며 살았던 죄들을 눈물 콧물 쏟으며 고백하고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죄인된 모습을 깨닫고 회개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거짓과 위선은 하나님에 대한 경외심을 깨뜨렸다는 점에서 교회를 파괴하는 무서운 독입니다. 만약 베드로가 아나니아와 삽비라의 위선과 거짓에 속아 그들을 인정하고 높여주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그들의 외식은 순식간에 누룩처럼 각 사람에게 퍼져나갔을 것입니다. 사과의 한쪽이 썩기 시작하면 얼마 못 가 전체가 썩게 되어 나중에는 못 먹게 됩니다. 썩은 부분을 도려내야 합니다. 교회의 위기는 환난과 박해에 있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환난과 박해의 때에 교회는 성장했습니다. 교회의 위기는 거짓과 위선에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 바리새인들이 그러했고 중세 교회가 그러했습니다. 겉으로는 화려하고 아름답고 종교의식은 있었으나 뒤로는 정치싸움을 하고 탐욕과 위선으로 가득찼습니다. 중세 교회는 웅장한 건물과 세상 권력을 가졌지만 교회로서의 생명력을 잃고 타락했습니다. 교회의 생명력은 오늘 말씀처럼 하나님 앞에서 진실하며 거룩하며 한마음과 한뜻으로 헌신하는 그곳에 있습니다. 12절을 보십시오. 교회는 사도들을 통한 은혜와 능력의 역사가 충만하게 일어납니다. 성도들은 성전 솔로몬 행각에 모여 말씀을 듣습니다. 병든 사람들, 귀신 들린 사람들이 사도들에게 나아와 나음을 받습니다. 이로 인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이 날로 늘어갑니다.
여러분! 오늘 말씀에 나오는 바나바와 아나니아 부부의 차이가 무엇일까요? 은혜와 성령이 충만한가? 사탄이 마음에 가득한가입니다. 우리 안에 은혜와 성령이 충만하도록 평소에 말씀을 가까이하고 작은 죄라도 진실하게 회개하기에 힘써야겠습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 앞에서 경외심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그럴 때 주님이 우리에게 은혜와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시고 초대 교회와 같이 진실한 사랑과 섬김이 있는 공동체, 세상에 선한 믿음의 영향력을 끼치는 공동체로 인도해주시리라 믿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