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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고의 노래 원문보기 글쓴이: 사람이 하늘이다
낙랑군 재하북성설의 10가지 핵심 근거(여섯 번째)
6. 고조선의 왕검성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滿城에 위치
글쓴이 : 김 봉 렬/『고조선으로 가는 길』저자
왕검성은 천하명산 백석산을 진산으로 삼고,
앞에는 황하와 발해가 넓게 펼쳐진 명승지에 자리하였다.
고조선이 대륙을 경영하던 중심지였다.
1. 『사기』「조선열전」이 왕검성을 말하다.
기원전 108년 고조선과 한나라 사이에 큰 전쟁이 벌어졌다. 흔히 한사군 전쟁이라 부르는 조朝‧한漢 전쟁이다. 한 무제는 6만 명이 넘는 대규모 수륙양군을 파견하여 고조선을 공격하였으며, 고조선은 철옹성 같았던 수도 왕검성을 배경으로 1년이 넘는 긴 세월 동안 유리한 수성전을 펼쳤다. 그러나 고조선 내부에서 주전파와 주화파의 대립이 격화되고, 주화파의 장군과 대신들이 조선왕 우거를 살해하고 한나라에 투항함으로써 긴 전쟁은 막을 내렸다. 한나라는 고조선을 평정하고 낙랑군‧현토군‧진번군‧임둔군 등의 한사군을 설치하였다.
이 조‧한 전쟁의 전모를 상세하게 기록한 것이 바로 『사기』「조선열전」이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조‧한 전쟁 당시 한나라의 사관으로 재직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한 전쟁의 전모를 누구보다도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다. 『사기』「조선열전」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의 위치를 알 수 있는 생생한 1차 기록이다.
오늘날 한국 고대사학계는 왕검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하고 있는데, 그 원인으로는 사료의 부족을 지적하는 학자들이 많다. 과연 사료가 부족하여 왕검성의 위치를 올바로 규명하지 못하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사기』「조선열전」에는 왕검성의 위치를 손쉽게 찾을 수 있는 충분한 사료들이 수록되어 있다. 그 중에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설을 중점적으로 살펴본다. 또 『산해경』과 『회남자』의 조선관련 기록을 통해서 왕검성의 위치를 살펴보기로 한다.
2. 왕검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사기』「조선열전」의 ‘왕험성’에는 아래와 같이 서광, 응소, 신찬 등의 주석이 실려 있다. 왕험성은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말한다.
A-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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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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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A-1에서 『사기색은』은 서광의 말을 인용하여 ‘창려에 험독이 있다’고 하였다. 또 응소의 주석을 인용하여 ‘『지리지』의 요동군 험독현은 조선왕의 옛 도읍이다’ 하였고, 신찬의 말을 인용하여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고 하였다.
조선왕의 옛 도읍인 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응소와 신찬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다. 응소는 ‘요동군 험독현’을 지목하였고, 신찬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을 지목하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서』「지리지」 ‘요동군 험독현’ 주석에는 더 자세한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사료 A-2). 응소와 신찬의 서로 다른 주장에 대하여 안사고는 신찬의 말이 옳다고 하였다.
『한서』에 대한 주석은 후한시대부터 시작되어 삼국시대를 거치면서, 응소‧신찬‧복건‧여순 등 20여명의 주석가를 거쳐 당나라 때 안사고(顔師古, 581~645)의 주석으로 집대성 되었다. 이러한 안사고의 위치를 감안할 때, 왕험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안사고가 ‘신찬의 말이 옳다’고 신찬의 손을 들어 준 것은 상당한 무게를 지니게 된다. 그러므로 강단과 재야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학자들이 신찬의 설을 지지하고 있다. 필자도 신찬과 안사고의 주장에 동의한다.
이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의 설을 토대로 왕검성의 위치를 찾아보기로 한다. 신찬이 말한 낙랑군이 어디인지 알기 위해서는 신찬이 살던 시대로 돌아가야 한다. 신찬은 서진(西晉, 265~316) 시대 사람이다. 그러므로 신찬이 말한 낙랑군은 서진의 평주에 소속된 낙랑군을 가리킨다. 서진 시대의 중국 정사인 『진서』의 기록을 통하여 서진의 평주와 낙랑군의 위치를 살펴보자.
B-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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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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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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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B-1은 공손씨 정권이 차지하였던 고대의 요동과 서진의 평주위치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최초의 기록이다. 『진서』는 서진의 평주에 대하여 ‘평주는 생각건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하였다.
‘우공의 기주지역’이란 중국 하나라 우임금이 중국 천하를 9주(기주, 연주, 청주, 서주, 양주, 형주, 예주, 량주, 옹주)로 나누었다고 하는데, 그 9주 가운데 하나를 가리킨다. 아래 <그림 2>는 중국 남송시대(1209년) 작성된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이다. 우공 9주와 기주지역이 잘 나타나 있다.
<그림 1>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
『사기정의』는 ‘우공의 기주지역’에 대하여 사료 B-3와 같이 주석하였다. 이 주석에 의하면 ‘우공의 기주지역’은 황하로 둘러싸인 현 중국 산서성과 하북성 지역이다. 마찬가지로 ‘주나라의 유주’나 ‘한나라의 우북평군’도 동쪽으로 현 중국 하북성을 넘지 못하는 지역이다. 『진서』의 기록을 통하여 고대의 요동과 서진의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강단사학계는 서진의 평주를 현 중국 요령성과 한반도 북부로 비정하고 있다. 강단사학계의 주장처럼 비정하면 한반도 평양일대가 가마득한 중국 하나라와 주나라 시절부터 중국 땅이었으며, 한나라 우북평군이 한반도 평양에 설치되었다는 말과 같다. 중국 정사인 『진서』의 기록과 전혀 맞지 않는 엉터리 주장을 하고 있는 것이다(<그림 3> 참조).
<그림 2> 필자와 통설이 비정한 서진의 평주 위치
『진서』에 기록된 서진의 평주가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므로 서진의 평주에 속한 낙랑군은 당연히 현 중국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사료 B-2에 따르면 낙랑군에는 조선, 둔유, 혼미, 수성, 누방, 사망 등 6개현이 있었다. 이들 현들의 명칭을 하북성 지역에서 찾아보면, 다행히도 수성遂城이라는 지명이 아직도 남아있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이다.
그러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이 과연 사료 B-2에 나오는 서진의 평주 낙랑군 수성현이 맞는지 살펴보자. 사료 B-2의 낙랑군 수성현에는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는 기록이 부기되어 있다. 그리고 『진서』와 동시대의 사서인 『태강지리지』도 ‘낙랑군 수성현에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일어난 곳이다’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이 『진서』의 낙랑군 수성현과 같은 곳인지 알려면 이곳에 갈석산이 있었는지, 그리고 진나라 장성이 일어난 곳인지 살펴보아야 한다.
먼저 이곳에 갈석산이 있었는지 중국의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갈석산은 이 지역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임을 쉽게 알 수 있다. 『서경』「우공」에서 중국 5대 명산 중 북악인 항산을 지나면 갈석산이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사기집해』와 『한서』「지리지」에서는 ‘항산의 동북쪽에 갈석산이 접하여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항산은 예로부터 중국 5악 중의 하나인 북악으로 너무나 유명한 산이다. 오늘날 중국 하북성 보정시 정주시 곡양현에 위치한 대무산(大茂山, 해발1,898M)이다. 갈석산은 이 대무산과 동북쪽으로 접하고 있으므로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白石山, 해발 2,096M)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리고 중국 고지도인 『우공소재수산준천지도』나 『기주협우갈석도』에도 본래의 갈석산이 잘 나타나있다. 뿐만 아니라 본래의 갈석산은 ‘하나라 우임금 시절 황하 하류 해변가에 위치했다’ 는 분명한 시‧공간적 좌표를 가지고 있는 산이다. 그러므로 현대과학으로도 그 위치를 규명할 수 있으며,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낭아산)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백석산이다’ 참조>.
또 당나라 시대에 편찬된 『통전』은 이곳 수성현에서 진나라가 쌓은 장성이 일어났다고 하였으며(사료 C-1), 송나라에서 편찬된 사서인 『무경총요』에도 이곳 수성현은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므로 수성이라는 이름으로 불렸다고 하였다(사료 C-2).
C-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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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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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C-1과 C-2에서 나오는 전국시기 무수현武遂縣의 땅이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일대라는 것은 학계의 이견이 없다. 이와 같이 보정시 수성일대는 수성遂城이라는 지명과 더불어 갈석산이 존재하며, 『통전』과 『무경총요』를 비롯한 수많은 사서들의 기록에 의하면 이곳에서 진나라 만리장성이 일어났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은 『진서』와 『태강지리지』의 낙랑군 관련기록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이다.
이제 왕검성을 찾는 과정이 막바지에 이르렀다. 신찬이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 하였고, 신찬이 말한 낙랑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임을 알았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도 이 부근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3. 왕검성은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 일대이다.
왕검성의 위치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이 『산해경』과 『회남자』에 나온다. 『산해경』(사료 D-1)에서 ‘조선은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고 하였는데, 서진시대의 학자인 곽박은 주석하기를 ‘조선은 낙랑현으로 기자를 봉한 곳이다’라고 하였다(사료 D-2).
『산해경』과 곽박의 주석을 통하여 낙랑현이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낙랑현은 조선현으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이 위치했던 곳이므로, 왕검성은 ‘바다의 북쪽, 산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D-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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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왕검성이 위치하였다는 ‘산의 남쪽’은 어떤 산을 말하는 것일까? 『회남자』에서 그 힌트를 얻을 수 있다. 『회남자』(사료 D-3)는 ‘갈석산으로부터 조선을 지난다’고 하였다. 동한시대의 학자인 고유가 이 구절을 주석하기를 ‘조선은 낙랑현이다’고 하였다. 『회남자』와 고유의 주석을 통하여 ‘갈석산으로부터 낙랑현, 즉 조선현이 시작되는 것을 알 수 있다. 조선현에는 갈석산이 있었다.
위 『산해경』과 『회남자』의 기록을 종합해보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바다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에 위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살펴보았지만 고조선의 갈석산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또는 동쪽지맥인 낭아산)이다. 현재 백석산의 남쪽에는 만성현滿城縣이 있다.
<그림 3> 갈석산, 만성현, 수성현의 위치
그런데 『산해경』과 『회남자』의 기록에 의하면 왕검성은 ‘바다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에 위치하였다. 현재 만성현은 발해로부터 서쪽으로 500여리나 멀리 떨어진 내륙에 위치하고 있으므로 ‘바다의 북쪽’이라는 왕검성의 조건에 맞지 않는 듯하다. 하지만 <그림 3>에서 보는바와 같이 『산해경』이 기록되었던 고대에는 바닷물이 하북성 보정시 일대까지 들어왔다. 그러므로 보정시 만성현은 ‘바다의 북쪽, 갈석산의 남쪽’에 있다는 왕검성의 기록을 완벽하게 충족하는 곳이다. 이곳의 지명이 조선왕 만滿의 성城이라는 뜻과 같은 만성현滿城縣으로 불리는 것이 우연의 일치일까?
드디어 우리가 애타게 찾았던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을 찾을 수 있게 되었다.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에 위치하였다. 왕검성은 태행산맥의 머리에 해당하는 천하명산 백석산을 진산으로 삼고, 앞에는 대륙을 가로질러 온 황하 하류가 유유히 흐르며 발해가 넓게 펼쳐진 명승지에 자리하였다. 고조선이 대륙을 경영하던 중심지였다(<그림 3> 참조).
4. ‘낙랑군 재난하설’과 ‘낙랑군 재평양설’이 보는 왕검성의 위치
(1) ‘낙랑군 재난하설’이 보는 왕검성의 위치
윤내현은 『고조선연구』에서 왕검성의 위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장하였다.
“『한서』「지리지」<요동군> ‘험독’의 주석에서 신찬은 험독이 조선왕 위만의 도읍이었다고 한 응소의 견해를 부인하고 위만의 도읍인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으며, 이곳은 그곳과 구별하기 위해 험독이라 불리어졌다고 말했는데 안사고는 ‘신찬의 말이 옳다’고 했다고도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응소가 말한 요동군의 험독현과 신찬이 말한 낙랑군의 왕검성은 다른 곳임을 알 수 있으며 신찬과 안사고는 응소와는 달리 낙랑군의 왕검성을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보고 있음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신찬과 안사고가 낙랑군의 왕검성을 위만조선의 도읍으로 본 것은 옳다.
...(중략)...
진제국의 장성은 지금의 난하를 가로질러 난하 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지역까지 이르렀다. 『사기』「하본기」에 주석으로 실린 『사기색은』에는 “『태강지리지』에 이르기를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태강지리지』는 낙랑군 수성현에서 진제국의 장성이 시작되었다는 사실과 함께 그곳에 갈석산이 있음을 말해 주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갈석산이 있는 곳이 진제국의 장성이 시작된 곳이며 아울러 낙랑군의 수성현지역이기도 하다는 것이다.” (윤내현 저 『고조선 연구』일지사, 2004년, 339~347쪽)
윤내현은 왕검성의 위치와 관련하여 ‘요동군 험독현’을 지목한 응소의 견해를 부정하고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과 안사고의 주장에 동의하고 있다. 그리고 『태강지리지』에서 ‘낙랑군 수성현에는 갈석산이 있다. 장성이 시작된 곳이다’ 하였으며, 현재 갈석산이 하북성 난하 하류에 있으므로 이곳이 낙랑군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앞에서 ‘5. 고조선의 갈석산은 하북성 보정시에 위치한 백석산이다’에서 살펴보았듯이 『태강지리지』에서 말하는 갈석산은 고대 황하하류 해변가에 위치하였던 하북성 보정시의 백석산이며, 난하 하류의 갈석산이 아니다.
난하 하류의 갈석산은 ① 수‧당의 고구려 침략을 위한 역사왜곡, ② 요나라 시대의 대대적인 지명이동, ③ 송나라 주자학파들의 ‘구하윤해설’ 등 3단계 과정을 거쳐서 본래의 갈석산인 백석산이 동쪽으로 1천여 리 지명 이동된 가짜 갈석산이다.
그리고 윤내현은 “진제국의 장성은 지금의 난하를 가로질러 난하 하류 동부유역에 있는 갈석산지역까지 이르렀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현재 장성은 난하 하류의 갈석산보다 100여리 북쪽으로 지나가고 있으며 갈석산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또 갈석산의 북쪽을 지나가는 장성도 진나라 장성이 아니라 명나라 때 축조된 명장성이라는 것은 학계의 이견이 없다. 그러므로 진장성이 난하 하류의 갈석산까지 이르렀다는 윤내현의 주장은 옳지 않다. 뿐만 아니라 하북성 난하 하류에 수성현이 설치되었다는 역사 기록도 존재하지 않는다.
『태강지리지』에 기록된 한나라 낙랑군 수성현은 다음 네 가지 조건을 갖추어야 한다. ①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러야 한다. ②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존재해야 한다. ③ 갈석산이라는 산이 존재해야 한다. ④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이다.
위의 네 가지를 모두 갖춘 곳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 뿐이다. 하북성 난하 하류는 갈석산이라는 이름의 산만 존재할 뿐, 이곳으로 황하 하류가 흐른 적도 없으며, 수성현이 설치된 기록도 없고, 진나라 만리장성이 시작되는 곳도 아니다. 그러므로 ‘낙랑군 재난하설’은 옳지 않다.
(2) ‘낙랑군 재평양설’이 보는 왕검성의 위치
국사편찬위원회는 『사기』「조선열전」의 ‘왕험’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주석하였다.
“위만조선의 도읍지인 왕험(『삼국사기』『삼국유사』에는 ‘왕검’으로 표기)의 위치에 대하여『사기집해』에서는 ‘昌黎有險瀆縣也’라는 서광의 말을 인용하고,『사기색은』에서는 ‘遼東險瀆縣 朝鮮王舊都’라는 응소의 주를 인용하고 있다. 한편『한서』「지리지」 <요동군조> ‘험독’의 주에는 ‘朝鮮王滿都也 依水險 故日險瀆’이라는 응소의 견해와 ‘王險城在樂浪郡浿水之東 此自是險瀆也’라는 신찬의 해석이 부기되어 있다.
왕험성의 위치는 고조선이나 위만조선의 강역은 물론, 위만조선 멸망 후 그 지역에 설치된 한사군의 위치비정에 있어서도 중요한 문제인데, 이러한 주석 자료의 차이에 의해 왕검성의 위치에 대한 논의가 분분하다. 고려시대 이후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이르기까지 왕험성의 위치는 현 평양으로, 또 고조선이나 한사군의 위치는 한반도 북부로 이해되어 왔다. (정약용,『여유당전서』「강역고」 조선고)
이에 대해 요동군의 속현인 험독을 조선계 지명인 ‘검터’의 한자어 표기인 검독儉瀆으로 이해하고 이를 왕험성에 비정하여 고조선과 위만조선의 도읍이 계속하여 요동에 있었다고 본 견해가 있는데, 리지린은 이러한 견해를 체계화한 대표적인 학자로서, 실제 현 개평蓋平 지방으로 그 위치를 비정하고 있다. (『고조선연구』pp.83~96)
그러나 왕험성은 패수 이동 진고공지秦故空地 이남에 있었던 위만조선의 도읍지로, 이는『한서』「지리지」의 낙랑군 조선현이 분명하다. 따라서 요동군 험독현이 왕검성이 될 수는 없는 것이며『사기색은』에서 왕험성의 주석에 응소의 주를 인용한 것과『사기집해』에서 서광의 말을 인용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근거하여 위만조선의 도읍을 요동의 험독으로 비정하는 견해는 성립되기 어려운 것으로 보인다.
한편, 고조선의 이동설에 의하면 험독은 고조선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조선계 지명으로서, 고조선의 도읍은 요동의 험독에서 평양의 험독으로 이동하였다고 한다. 따라서 고조선의 초기 도읍지는 요동의 험독이 분명하지만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고 대체로 요하 이동 천산千山 이서의 어느 지역일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사기』의 왕험성은 진고공지秦故空地 이남에 있는 것이 분명하므로 고조선이 요동의 험독에서 그 중심을 옮긴 이후의 도읍지를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대동강 유역의 평양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한 것으로 생각되어진다. (서영수,「고조선의 위치와 강역」).”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는 현 강단사학계도 왕검성이 ‘요동군 험독현’에 있다는 응소의 견해를 틀린 것으로 보고,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과 안사고의 주장을 따르고 있다. 하지만 신찬과 안사고의 견해를 따르면 앞에서 살펴보았듯이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일대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신찬은 서진 시대 사람이므로 신찬이 말하는 낙랑군은 서진의 평주에 속한 낙랑군을 말한다. 서진 시대의 중국 정사인 『진서』는 서진의 평주가 ‘우공의 기주지역이며, 주나라의 유주이며, 한나라의 우북평군에 속했다’고 하였으므로 서진의 평주는 현 중국 하북성 지역이다. 그러므로 신찬이 말하는 낙랑군과 왕검성은 모두 현 중국 하북성지역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수성遂城에는 한나라 낙랑군에 속한 수성현遂城縣이라는 지명이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그리고 보정시 수성遂城 일대는 고대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흘렀으며, 갈석산이 있고, 진나라 장성이 시작된 곳이라는 수많은 기록들과 함께 장성유지도 지금까지 남아있다. 그리고 『산해경』과 『회남자』의 기록을 통하여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현 중국 하북성 보정시 만성현滿城縣이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런데 한반도 평양은 어떤가? 황하 하류가 그곳으로 흐른 적도 없으며, 수성현이라는 지명이 존재했다는 기록도 없으며, 갈석산도 없고, 진나라 만리장성 유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한반도 평양은 『진서』와 『태강지리지』등에 기록된 낙랑군 수성현의 기록을 하나도 충족하지 못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강단사학계에서 ‘왕험성은 낙랑군 패수의 동쪽에 있다’는 신찬과 안사고의 설을 가지고 ‘낙랑군 재평양설’을 주장하는 것은 근본적으로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평양일대가 한나라 낙랑군이었다는 1차 사료는 전무하며, 단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 일방적으로 발굴‧조사하여 발표한 낙랑유물만 존재할 뿐이다. <다음호 계속>
첫댓글 단군 조선이 한국 역사가 맞기는 한지 의문 자기들 국가 역사에 관심 너무없는데 단군 조선이 한국역사 아니라 관심이없는건지 단지 단군조선 영토에 살고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우리나라 역사라는데 금 중국땅에 살았던 이민족도 단군조선이든지 어느민족이 세운 나라에 있었다는 이유만으로 자기역사라고 할수있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지금 한국영토에는 단군조선 백성 후손 하나도없는데 물론 고구리 신라 가야 백제도 마찬가지 근본도없는 인간들을 이성계가 강제로 끌고온것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