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수설에 어긋나는 신비한 능묘, 후한 광무제릉
중국고대에는 이런 말이 있다: "살아서는 소주항주에 살고, 죽어서는 북망(北邙)에 묻힌다" 그 뜻은 바로 북망산이 풍수길지라는 것이다. 사후에 이곳에 묻힌다면 자손만대가 그 혜택을 볼 것이라는 것이다. 특히 북망산의 건너편은 황하(黃河)이다. 이는 풍수설의 사상에 들어맞는다: "배산임수(背山臨水). 개활통변의 지형이고 흉금이 넓고, 만물을 거느리는 뜻을 담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중원에 수도를 둔 황제들은 모두 죽어서 북망에 묻히기를 바랐다. 그리하여 후세인들이 음덕을 입고, 강산이 영원하기를 바란 것이다. 망산에는 전국, 진, 한, 조위, 서진, 북위, 동위, 당, 후량, 남당, 송, 원, 명등 각 왕조의 군왕과 혁혁한 인물들이 잠들어 있다. 그들의 이름을 열거하자면 바로 그것은 중국의 고대사 자체이다: 은왕, 동주의 여러 왕, 동한의 여러 황제, 촉한의 후주, 조위의 여러 황제, 서진의 여러 황제, 진후주, 당명종, 남당의 이후주, 소진, 여불위, 하후영, 진평, 가의, 반초, 하진, 관우, 석숭, 양호, 배해, 적인걸, 두보, 석수신....
그중 북망의 동한 황제릉은 모두 5개이다. 광무제(光武帝)의 원릉(原陵), 안제의 공릉, 순제의 정릉, 충제의 회릉, 및 영제의 문릉이 있다. 그런데, 이 다섯개의 황제릉중 하나는 아주 독특하다. 부지선택이 기이하다. 나머지 4개의 능은 모두 망산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다. 오직 1개의 능만이 망산의 북쪽 황하의 가에 위치하고 있다. 보통백성이더라도 능의 뒤에 산이 있고, 능의 앞에 강이 있어야 길한 명당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런데, 이 궤이한 능묘는 완전히 반대이다. 마치 방문을 열면 앞에 산이 가로막혀 있고, 방문의 뒤에는 황하가 흐르는 꼴이다. 남으로 망산을 보고, 북으로 황하를 등지고 있다. 이 능묘의 주인은 바로 동한의 창업황제인 광무제 유수(劉秀)이다.
광무제 유수는 자가 문숙(文叔)이고, 남양 채양(지금의 호북성 조양 서남쪽) 사람이다. 한고조 유방의 9대손이고, 남돈령 유흠의 아들이다. 갱시3년(25년) 6월에 황제로 즉위하고, 연호를 건무라 한다. 중원2년(57년)에 원릉에 매장된다. 향년 63세이고, 33년간 재위했다. 광무제는 중국역사상 문치무공이 탁월한 제왕이며 일대의 중흥영주이다. 그는 권력을 잡고, 부드러움으로 천하를 다스렸다.
그러나, 이른 중흥의 영명한 군주가 묻힌 원릉의 방향은 확실히 기괴하다. 원릉의 남쪽은 산이다. 북쪽은 강이다. 즉, 소위 "침하등산(枕河蹬山, 강을 베고 산을 밟다)"의 형국이다. 그런데 이것은 풍수학에서 아주 꺼리는 것이다. 풍수설은 중국에서 유래가 길다. 자고이래로 제왕의 능묘는 소위 풍수를 아주 많이 따졌다. 부지선정부터 방향, 건축에 이르기까지 하나도 소홀히 하는 것이 없었다. 그런데, 이 동한의 개국황제는 왜 이렇게 풍수설에 위배되는 장소에 능을 만들었을까?
이 문제에 대하여, 민간에는 이런 전설이 전해진다: 유수는 자식들이 말을 잘 듣지 않았다. 동쪽으로 가라고 하면 서쪽으로 가고, 서쪽으로 가라고 하면 동쪽으로 갔다. 개를 패라고 하면 닭을 팼다. 유수는 생전에 북망이 풍수명당임을 알아 보았다. 그리하여 죽기 전에 자식들에게 "자식을 가장 잘 아는 것은 부친"이라는 듯이 유수는 이번에 완전히 반대로 말했다: 고의로 자신을 황하에 묻으라고 한 것이다. 이렇게 하면 자식들이 그의 묘를 망산에 묻을 것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죽기 전에 자식에게 유언으로 말하기를: "부친의 명에서 물이 부족하다. 죽은 후에 너는 아비를 황하의 가운데 묻으라. 이렇게 하면 목마른 고통이 없을 것이다." 누가 알았으랴 그 자식은 옛날과는 달리 울면서 맹서했다: "불효자식은 지금까지 부친의 말을 들은 적이 없었는데, 이제 예전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고 장례에 관한 것은 부친의 뜻에 따르겠다" 유수는 그 말을 듣고는 웃지도 울지도 못했다.
군주에게 농담은 없는 법. 그저 장탄식을 하고 죽어갔다. 나중에 자식은 유언을 공개하고, 천하의 장인들을 끌어모아서, 용주(龍舟) 영구를 만들었다. 염을 한 후에, 영구를 황하의 가운데 던져버린다. 기괴하게도 강물이 돌연 포효하면서 북쪽으로 몰려갔다. 영구가 떨어진 곳은 순식간에 평지로 바뀌었다. 그리고 구릉이 솟아 올랐다. 원릉은 비록 황하의 가에 놓여 있지만, 역대이래로 황하의 물이 침범한 적이 없다고 한다. 당연히 황하의 하상은 남쪽이 높고 북쪽이 낮다보니 물이 많이 흘러도 북쪽으로 밀려가지 남쪽으로는 오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이것은 전설일 뿐이다. 사람들이 원릉이 이상하게 자리잡은 것을 해석할 방법이 없다보니 만들어낸 이야기일 것이다. 그렇다고 악의가 있는 것은 아니고, 반대로 원릉에 신비하고 재미있는 색채를 더해줄 뿐이다.
사실상 기원50년부터, 유수는 북망산과 황하의 사이에 자신의 능묘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유수가 자신의 능묘를 만들기 위하여 백성들을 많이 동원했는지 여부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는 그저 능묘를 건설하는 책임을 진 두융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그의 능원은 땅이 2,3경이 넘지 못하도록 하고, 산릉으로 하지 말고, 그저 기울어진 땅이어서 빗물의 배수가 잘되면 된다. 이것은 원릉의 규모나 위치에 딱 들어맞는다. 임종전에 유수는 다시 명을 내려 강조한다: 나는 세상에 살아 있을 때 천하의 평민백성들에게 유익한 일을 하지 못했다.
장례를 지낼 때, 문제처럼 도기를 부장하고, 금, 은, 동, 석등 귀중한 물품은 넣지 말라." 그리하여, 그의 능묘는 처음에는 무슨 귀중한 물건을 넣지 않았다. 능원의 백수(柏樹)도 수당시기에 심은 것이다. 유수는 자신의 묘에 돈을 들이지 말라고 했지만, 전통과 후손의 효성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나중에 원릉은 동탁에게 도굴당하고, 조비는 이 일에 대하여 이렇게 평가했다: "원릉이 파헤쳐진 것은 죄가 한명제에 있다." 그 말 뜻은 유수가 죽은 4년후에 한명제는 원릉을 아주 호화롭게 건설했고, 결국은 동탁이 도굴을 하기에 이른 것이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