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영화 후반부, 독일장교 앞에서 필사적으로 연주하는 스필만
[ 영화 <피아니스트> ]
이 영화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가 자행한 유대인 대학살의 소용돌이 속에서 기적적으로 살아남은 유대계 폴란드 피아니스트였던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의 자서전 <피아니스트 The Pianist>를 영화화한 것입니다.
폴란드 출신의 로만 폴란스키가 감독을 맡았고, 애드리언 브로디, 토마스 크레슈만 등이 출연하였으며, 프랑스·영국·독일·폴란드·네덜란드가 합작하였습니다.
바르샤바 게토(유대인들의 강제 거주지)에서 살아남은 폴란드 유대인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라브 스필만에 관한 이 영화는 사상에 관한 것이 아닙니다. 홀로코스트(대량 학살)에 대한 특정한 관점이 존재하지 않다고 볼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가 겸손하고 지적인 태도로 만들어졌다는 것과, 비록 감독 자신의 홀로코스트 이야기는 아닐지언정 그가 평생을 별러온 영화라는 사실에는 누구나 동의할 것입니다. 파벨 에델만의 촬영은 무척 인상적입니다.
세피아 색깔—오래된 사진의 색, 역사의 색—이 감도는 짙은 갈색은 관객의 가슴을 여러 번 두들깁니다. 주인공 애드리언 브로디는 훌륭하게 절제된 연기를 보여주면서 여러 차례 기적적으로 간신히 죽음을 모면합니다.
그러나 살기 위해서는 여전히 타인의 선의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도망자로서 견딜 수 없는 고립감을 짊어진 스필만을 잘 표현했습니다.
* 유대인 게토에서...
특히 뛰어난 점은 독일병사 개개인의 자의적이고 사적인 새디즘과 나치의 집단적인 잔학성이 혼합된 끔찍한 현실을 폭로한 것입니다. 폴란스키는 아무 평가도 개입시키지 않았습니다. 담담하게 그려 나갈 뿐입니다. 그는 그토록 철저하게 계획된 잔혹함 앞에서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이란 모든 사실을 바로잡아 알리는 일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피아니스트>는 기존의 홀로코스트 영화와는 달리 예술과 인간적인 진실에 더욱 가까이 다가갑니다. 즉, 유대인과 나치는 단순한 선과 악의 대립이 아니라는 것, 인간은 혈통과 이데올로기로 구분짓기에는 너무나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을 영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또 이 영화는 실존 인물인 스필만의 이야기이지만 동시에 폴란드 출신인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자전적 체험이 반영된 영화이기도 합니다. 폴란스키는 어린 시절 유대인 어머니가 강제 수용소의 가스실에서 목숨을 잃는 불행을 겪었던 겁니다.
2002년 제55회 칸영화제 황금종려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 1월에는 전미영화비평가협회(NSFC)가 선정하는 최우수영화상·감독상·남우주연상(애드리언 브로디)·각본상(로널드 하우디) 등을 수상하였습니다.
* 행복했던 시절
[ 간략한 줄거리 ]
1939년 유명한 유대계 피아니스트 블라디슬로프 스필만은 폴란드 바르샤바에 있는 라디오 방송국에서 쇼팽의 야상곡을 연주하던 중 폭격을 당합니다. 독일군이 바르샤바에 진주하게 됩니다.
얼마 뒤 유대인 강제 거주지역인 게토로 쫓겨와 생활하던 스필만과 그의 가족들은 죽음의 수용소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게 됩니다. 그러나 유명한 피아니스트를 알아본 군인들이 스필만을 기차에 타지 않게 함으로써 혼자만 살아남습니다.
* 스필만과 가족들
여러 사람들의 도움으로 나치의 눈을 피해 숨어 다니며 은신처에서 숨막히는 생활을 하던 스필만은 어느 날 독일군 장교에게 발각됩니다. 정체를 묻는 장교에게 스필만은 자신이 피아니스트였다고 대답합니다. 장교는 그에게 연주를 명령하고, 스필만은 혼신을 기울여 어쩌면 지상에서 마지막이 될지도 모를 연주를 시작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 스필만은 친구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독일군 장교의 소식을 듣게 됩니다. 그가 소련군의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는데, 스필만의 이름을 대며 도움을 요청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후 스필만은 그 독일군 장교를 돕는데 실패합니다.
* 실제 스필만
백방으로 수소문한 끝에 그가 소련의 한 포로 수용소에 수감되어 있다는 것을 알았으나 여러 가지 정치적인 상황 때문에 그를 구해내는 데에는 성공하지 못합니다.
* 영화 <택시운전사>에서 독일기자 위르겐 힌츠페터로 출연하였던 독일 배우 토마스 크레취만,
착한 독일군 장교로 나옵니다
* 먹을거리를 들고오는 독일장교 호젠펠트
영화 <피아니스트>로 인해 <쉰들러 리스트>의 쉰들러처럼 착한 독일인으로 영원히 기억될 그 독일군 장교의 이름은 빌헬름 호젠펠트였습니다.
* 빌헬름 호젠펠트
하지만 안타깝게도 운명의 여신은 이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끝내 미소를 보내지 않았습니다. 빌헬름 호젠펠트는 그로부터 몇 년 후, 소련의 한 포로 수용소에서 비참하게 생을 마감했다고 합니다.
* 영화에서 포로수용소 안의 호젠필트
[ 바르샤바 무장봉기 ]
* 바르샤바 시민군들
* 최악의 악당 스탈린의 흉계
1944년 7월 30일, 파죽지세로 동부전선을 유린하면서 독일군을 압박해 오던 소련군은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 동쪽으로부터 불과 70km 남짓한 곳까지 밀고 들어왔고, 이제 조만간 바르샤바가 함락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정작 ‘그 뒤(바르샤바 해방)가 더 문제다’라는 것이 스탈린의 생각이었습니다. 폴란드는 과거의 역사 속에서 러시아의 수십분의 일도 안되는 크기에도 불구하고 사사건건 러시아에 대항해 온 신경쓰이던 존재였고, 또한 이 작은 나라를 집어삼키는 것은 과거 제정러시아의 황제들이 줄곧 꿈꾸어오던 숙원사업이기도 했습니다.
이제 드디어 그 꿈이 이루어질 지척에 놓여있지만 문제는 이 폴란드인들이 독일에 대한 반감만큼이나 소련에 대해서도 강한 반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반소세력이 바르샤바에 남아있는 이상 그것은 두고두고 골칫거리가 될 것이 틀림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 바르샤바 무장봉기 기념관
히틀러가 폴란드를 침공한 지난 1939년, 같은 시기에 폴란드 동부를 점령한 소련군이 15,000여명의 폴란드군 장교와 지식인들을 무더기로 죽여 버린 이른바 <카틴 숲의 학살> 사건도 바로 그런 반공 폴란드인들을 제거하기 위한 것이었던 겁니다. 바로 그 폴란드가 다시 소련의 수중으로 들어오게 되어 있는 지금 다시 한번 그런 카틴숲의 학살이 필요한 때였다고 스탈린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 <카틴숲 학살> 현장, 2차세계대전이 끝난후 소련은 독일군이 학살했다고 날조
했다가 고르바쵸프 정권이 들어서자 자신들의 행위였다고 고백합니다
* 인간 백정들, 카민스키 여단
게다가 이번에는 소련군이 직접 손에 피를 묻힐 것도 없이 독일군에게 그냥 맡기면 된다는 것이 스탈린의 음흉한 계략이었습니다. 물론 한편으로는 영국이나 미국 등 연합군들이 좌시하지는 않을 거라고 계산하고 있었죠. 크레믈린의 대외방송은 소련의 하수인들이나 마찬가지인 폴란드 공상당에 대해 바르샤바의 독일군을 몰아내기 위해 봉기하라고 나팔을 불어대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소련은 폴란드 공산당이 정말 그 일을 해낼 것이라고는 전혀 기대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폴란드 공산당이 바르샤바에서 심어 놓은 저항세력은 500여명 미만에 불과했습니다. 정작 독일점령군에 맞서 봉기를 일으킬 수 있는 힘을 가진 조직은 공산당이 아니라 런던에 있는 폴란드 망명정부의 지휘를 받고 있는 레지스탕스 조직인 <폴란드 시민군>이었습니다.
무려 38만 명의 조직원을 가지고 있는 폴란드 시민군은 바르샤바 시내에만도 4만 명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었습니다. 애시당초 공산당과는 견원지간인 시민군이었지만 이들에게도 크레믈린의 선동은 곧장 먹혀들 수 밖에 없었습니다. 이미 바르샤바에서도 소련군의 포성이 또렷하게 들려오고 있었고, 소련군이 이곳에 곧 진주하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만일 스탈린의 하수인인 폴란드 공산당과 소련군의 힘을 뒤에 업고 바르샤바에서 독일군을 몰아내게 된다면 폴란드는 자연스럽게 친소 공산국가로 전환될 것입니다. 그렇게 된다면 그것은 바로 수많은 폴란드인들에게 독일군의 침략만큼이나 끔찍한 악몽일 수 밖에 없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소련군이 너무 멀리 떨어져 있어도 곤란하다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 장갑차를 탈취한 시민군
왜냐하면 바르샤바에서 일단 독일군을 몰아내면 독일군의 증원 병력이 도착하기 직전에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먼저 입성해야 바르샤바를 온전히 지킬 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르샤바를 공산당이나 소련군이 아닌 폴란드인 스스로의 힘으로 탈취하고 해방시킨다면 제아무리 음흉한 스탈린이라 하더라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것이라고 바르샤바 시민들은 순진하게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1944년 7월 말, 바로 이 시점이야말로 이런 멋진 각본이 전개될 가장 확실한 기회로 보였습니다. 소련군은 최소한 1주일 안에 바르샤바에 들이 닥칠 것이 누구에게도 예견되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바르샤바 시민군은 앞으로 전개될 모든 것이 스탈린이 자신들을 뿌리채 없애기 위한 음흉한 흉계의 일환이라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습니다.
8월 1일 오후 5시, 마침내 시민군이 무장봉기를 일으켰습니다. 거리의 모든 창문에서 독일군을 향해 총탄이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시내의 모든 관공서와 주요시설에서 독일군은 순식간에 포위당했습니다. 지나가던 독일군 차량은 예외없이 화염병의 표적이 되었습니다. 아울러 시내 도처에는 독일군의 증원 병력을 막기 위해 바르샤바 시민들이 설치한 바리케이드가 무더기로 생겨났습니다.
거리 하나하나는 폴란드인 시민군의 손 안으로 되찾아 오기 시작했고, 저녁이 되자 마침내 바르샤바 시내 대부분이 폴란드인들의 수중에 떨어졌습니다. 시내 중심부의 정부기관들을 시작으로 우체국, 시청, 은행에서 독일 국기가 불태워지고 폴란드 국기가 나부끼기 시작했습니다.
이처럼 처음에는 무장봉기가 성공적이고 감격적으로 끝날 것으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을 낙관하기에는 애당초 무리가 있었습니다. 아직도 시내 요소요소에 13,000여명의 독일군은 대부분 자신들의 위치를 꽉 틀어쥐고 있었습니다. 더구나 시민군에게 있어서 꼭 필요한 독일군의 무기고 대부분이 빼앗기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독일군도 결코 느긋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적어도 8,000명의 독일군이 시민군에게 포위당해 있었고, 나머지 5,000명도 곧 시민군에 포위당할 위험에 놓여 있었던 겁니니다.
더구나 바르샤바지구 독일군 점령사령관 슈탈 중장은 겨우 5일전에 현지에 부임 했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이런 시가전에는 전혀 경험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바르샤바 시내에서는 치열한 시가전이 지속되고 있었습니다. 시민군은 소련군이 들이 닥치기 전에 하루빨리 독일군을 몰아내야 했고, 독일군도 이에 맞서 부분적인 반격을 시도했습니다. 그러나 어느 쪽도 상대를 결정적으로 제압할만한 한방이 없는 혼전상태가 계속되었습니다.
봉기가 시작되면서 이미 시민군과 일반 시민의 구별은 거의 없어졌고, 여자와 어린이들까지 전투에 가세했습니다. 베를린에서 이 사태를 보고받은 친위대장관 하인리히 히믈러의 반응은 즉각적이었습니다. 그는 이 더럽고 사악한 도시를 지구상에서 아주 끝장내 버릴 절호의 기회가 왔다고 게거품을 물고 있었습니다.
* 아무거나 걸쳐입고, 쓰고, 신고...
나치의 시각으로 보면 폴란드의 심장인 바르샤바야말로 지난 수백년동안 게르만 민족의 동방진출을 방해해온 최대의 장애물이었던 겁니다. 아주 이 기회에 이 도시와 그곳에 살고있는 폴란드 돼지들을 모조리 없애버리는 것이야말로 기다려왔던 바였습니다.
그러나 8월 5일부터 시작된 독일군의 반격은 잔혹하기 짝이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극히 비효율적이었습니다. 반격작전에 동원된 무장 SS의 디를레방거 여단과 카민스키 여단은 병력 대부분이 소련군 포로와 범죄자들로부터 선발된 2급 부대였습니다. 여단장 디를레방거 대령부터가 정예의 독일장교라기 보다는 깡패 두목으로나 불리울만한 인간 말종이었습니다.
* 인간 말종 디를레방어
* 또 다른 인간 말종 카민스키
전투원이건 비전투원이건 가릴것 없이 바르샤바에서 눈에 띄는 폴란드인은 갓난아이까지 모조리 죽여버리라는 히믈러의 명령은 이들 깡패들에게 있어서 실로 가뭄에 단비와 같은 것이었습니다. 바르샤바 외곽으로 진입한 독일군은 전투보다는 살인과 약탈, 강간에 더 재미를 붙였고, 이날 하룻 동안에만 무려 38,000명의 무고한 시민들을 닥치는대로 잔혹하게 살해했습니다.
하지만 이런 난동에 재미를 붙이는데 시간을 빼앗긴 독일군은 8월 5일 하룻동안 겨우 1km 정도를 진격하는데 그쳤고, 디를레방거 여단 외에 카민스키 여단은 보드카 양조장을 발견하고는 아예 진격을 멈추고 퍼져 앉아 술잔치를 벌이는 진풍경을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약간은 이성적이었던 반격의 총지휘관으로 새로이 임명된 폰 뎀 바흐 중장은 마침내 히믈러의 명령을 아예 무시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인도주의적인 측면도 있었지만, 이런식으로 처형과 전투를 병행하다가는 전투가 언제 끝날지 막연했기 때문이었습니다. 폴란드 시민군에 비교한다면 독일군은 여전히 호랑이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 독일군 폰 바흐 사령관
독일군은 이제 2급 부대가 아니라 헤르만 괴링 사단 같은 정예 기갑부대까지 바르샤바로 진격시키기 시작했습니다. 8월 12일, 마침내 준비를 끝낸 독일군이 전면적인 반격을 개시했습니다. 그동안 거듭된 패배를 화풀이라도 하듯, 독일군은 가지고 있는 모든 화력을 총동원하여 바르샤바를 하나씩 하나씩 폐허로 만들어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소총조차 제대로 주어지지 않은 시민군들의 머리 위로 수백문의 크고 작은 포들과 구경 600m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자주포 <칼>에서 발사된 포탄이 비오듯 떨어지기 시작했습니다. 공중에서는 오래전에 이미 사라진 줄로 알았던 독일 공군의 전쟁 초기에 악명이 자자했던 슈트카 급강하 폭격기까지 가세하여 폭탄을 쏟아 퍼부어댔습니다.
바르샤바 시민군은 결사적으로 저항을 계속했지만 대포와 전차, 항공기를 앞세운 독일군의 진격 앞에 이들의 저항선은 차례차례 무너져 갔습니다. 물론 어린이와 여자는 죽이지 말라는 애초의 명령도 간단히 무시되었습니다.
독일군은 어린이와 여자들을 탱크 앞에 묶고 돌진하기까지 했습니다. 시민군이 총을 쏘지 못하게 하려는 속셈이었으나 결국 시민군들도 동포를 향해 방아쇠를 당기지 않을 수 없는 비참한 상황이 연출되곤 했습니다. 게다가 바르샤바는 열흘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은데다 수돗물마저 끊어진 바르샤바는 사실상 사막으로 변했습니다.
물과 식량이 떨어진 시내에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고 8월의 폭염 속에 방치된 시체들은 순식간에 썩어갔습니다. 9월 초, 무려 3만 명의 시민을 죽인 바르샤바 구시가지가 독일군의 손아귀에 들어갔습니다. 이제 바르샤바가 살아날 수 있는 길은 단 하나, 소련군이 바르샤바로 쳐들어와 독일군을 깨끗이 몰아내는 것만이 살길이었습니다.
이제는 폴란드 공산당은 물론 반소주의자들조차 소련군의 바르샤바 진격을 목이 빠지게 기다리는 지경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본인들은 전혀 모르고 있었지만 그들은 스탈린의 흉계에 완전히 걸려든 셈이 되어 버렸습니다. 로코소프스키 대장이 이끄는 소련군은 바르샤바 동쪽의 비스틀라 강가에서 진격을 딱 멈춘 채 그야말로 강 건너 불 보듯 이 참극을 지켜보고만 있었습니다. 물론 그 뒤에는 스탈린의 지령이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폴란드 시민군들을 무차별 학살하고 있었지만 소련군으로부터 그 어떤 방해도 받지 않았습니다. 슈트카 폭격기들이 시가지를 무차별 폭격을 해대도 그 많던 소련군 전투기는 한 대도 자취를 보이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소련군은 갑자기 비스틀라 강가에서 진격을 멈추라는 이유를 납득할 수 없었지만, 크레믈린 안의 스탈린은 모든 것이 자기 계획대로 돌아가는 것을 지켜보며 음흉한 미소를 띄고 있었습니다.
"그래, 모두 죽여버려라, 폴란드를 영국이나 미국 등 연합국에 갖다 바치고 싶어 안달이 난 폴란드 놈들은 다 죽여 버려라. 폴란드 공산당이란 놈들 역시 아까울 게 하나도 없다. 똑같은 놈들이다. 독일군 역시 이 싸움에서 상당한 피해를 입을테니 이것도 좋은 일이 아니겠는가" 스탈린의 심정이었을 겁니다.
연합군들의 폭격기들이 간간이 바르샤바 시민군에게 무기와 식량을 낙하산으로 떨어트려 주었지만 이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영국본토나 이탈리아에서 출격한 폭격기들이 멀리 떨어진 이곳까지 날아 왔다가 다시 기지로 돌아갈 수 있을만큼 연료를 싣자면 물자는 극히 소규모만 실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만약 충분한 양의 물자를 싣게 되면 바르샤바에서 보급품을 투하한 뒤 가까운 우쿠라이나의 소련 공군기지로 날아가 연료 보급을 받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원칙적으로 보면 연합국인 영,미군 폭격기들은 자유롭게 소련 비행장에 이착륙할 수 있었겠지만 스탈린은 이것조차 악랄하게 거부했습니다.
참다못한 처칠과 루즈벨트가 제발 좀 도와달라고 요청했을 때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애시 당초 이런 일을 저지른 폴란드 시민군의 우두머리들은 권력에 굶주린 놈들이에요, 무고한 시민들의 생명을 앞장 세워 벌인 이 따위 도박은 결국은 당사자들이 책임져야 할 일이고 우리가 아니란 말입니다.“
* 파국을 향해...
이제는 공상당원들조차 스탈린, 이 개자식이라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쪽에서는 여전히 꼼짝도 안하고 있었습니다. 상황은 갈수록 절망의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갔습니다. 굶주림과 질병 등에도 희망을 잃지 않던 바르샤바 시민들도 시간이 흐를수록 점점 원기를 잃어갔습니다.
밀려 들어오는 독일군을 피하기 위해 시민들은 미로처럼 얽힌 바르샤바의 하수도 안으로 숨어 들어갔지만 그곳도 결코 안전하지 못했습니다. 조금만 인기척이 있다 싶으면 독일군은 화염방사기로 불을 지르거나 수류탄을 하수구 안으로 마구 던져 넣었기 때문입니다.
시민군이 점령하고 있던 지역은 9월 초순에 이르자 애초 장악했던 면적의 절반 이하로 줄어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독일군 사령관 폰 바흐가 히믈러보다는 약간 제정신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여자와 어린애들까지 무조건 죽여버리라는 히믈러의 명령을 묵살한 채 바흐는 여러차례 시민군측에 명예로운 항복을 권고하면서, 9월 7~8일에는 국제 접십자의 중재로 비전투원들이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도록 허용했습니다. 그래서 45,000명의 목숨이 살아났습니다.
결국은 바르샤바 시민군도 항복을 위해 협상을 시작했습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악당 스탈린은 당황했습니다. 지금은 독일군과 폴란드 놈들이 좀 더 서로 치고받고 하면서 죽여야 할 땐데... 이대로 끝나면 절대로 안된다고 생각한 겁니다.
이때까지 가만히 있던 소련군의 선전방송이 다시 떠들어대기 시작했습니다. 바르샤바 시민들에게 ‘조금만 더 버텨줄 것을 요망한다. 여러분의 고난은 곧 끝난다! 이제 우리가 독일놈들에게 피의 댓가를 치루게 하겠다’라는 것이었습니다. 헛말이 아니었습니다. 진짜 구원이 동쪽에서 날아오기 시작했습니다.
소련 비행기들이 날아와 무기와 탄약, 식량 등 보급품을 공중투하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둘이 더 치고받고 하면서 희생을 극대화시키려는 계략이었습니다. 드디어 소련군이 바르샤바로 진격하기 시작했다고 판단한 폴란드 시민군은 독일군과의 협상을 즉시 중지하고 다시 피터지는 전투를 재개했습니다.
스탈린은 심지어 그동안 거부했던 미군기의 소련내 착륙을 허용했고, 마침내 9월 18일에는 110대에 달하는 미군의 B-17 폭격기가 보급품을 바르샤바에 투하하는데 성공했습니다. 게다가 9월 16일에는 소련으로 망명한 폴란드인으로 구성된 소련군 부대가 비스틀라강을 건너기 시작했습니다 시민군들은 이제야 앞날에 서광이 비치는가하고 잠깐 희망을 가져 보았지만...
* 화염방사기로 초토화시키는 독일군
하지만 그게 아니었습니다. 음흉한 스탈린이 연출한 이런 움직임은 또 한번의 피비린내 나는 사기극이었을 뿐입니다. 소련군이 떨군 보급품은 다 합쳐봤자 55톤에 불과한 그냥 흉내만 낸 것이고, 미군은 거의 500톤의 물자를 투하했지만 그 대부분이 독일군 지역에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미군 측에서는 이미 시내 대부분이 독일군의 수중에 떨어진데다 정보부족으로 어느 지역이 독일군 점령지역이고 어디가 해방구인지 알 도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나마 공중보급이라도 계속되었다면 다행이었겠지만 소련은 두 번 다시 소련영내 착륙을 허용하지 않았습니다. 9월 18일을 마지막으로 연합군은 더 이상 바르샤바에 물자를 보급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비스틀라강을 건너온 소련군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웃기는 것이었습니다. 6개 대대가 강을 건넜다고 공표되었지만 실제로는 빈약한 무장을 갖춘 몇 개 중대에 불과했습니다. 그나마 이들은 바르샤바 시내로 들어오지도 않은 채 몇주일 동안 총 한방 쏘지않고 외곽에서 빈둥거리다가 다시 강을 건너 자기네 진영으로 쏙 돌아가 버리고 말았습니다.
연합국(영,미)과 그리고 런던에 있던 폴란드 망명정부는 소련에 거세게 항의했습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제 아예 귀를 꽉 틀어막고 모르쇠로 일관할 뿐이었습니다.
* 항복
9월 하순이 되자 모든 희망은 연기처럼 사라졌습니다. 바르샤바 시내에는 이제 식량은 말할 것도 없고 잡아먹을 쥐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탄약과 무기가 완전히 떨어졌습니다. 이제야 스탈린이 노린 것이 무엇인지 분명히 알게 된 지금, 시민군에게 남은 길은 단 두가지 뿐이었습니다. 항복 아니면 죽음!
이번에도 히믈러보다는 약간 더 이성적인 폰 바흐 장군이 뜻하지 않은 구세주로 떠올랐습니다. 그는 애초부터 시민군이 항복해 온다면 가능한 한 사태를 일찍 매듭지을 생각이었습니다. 시민군과는 아예 비교가 안되는 강력한 독일군이었지만, 그 역시 이곳에서 이런 무익한 싸움을 계속해서 좋을 것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이미 독일군 역시 사상자 26,000명이라는 막대한 피해를 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곧 소련군과의 일전을 앞둔 마당에서 이대로 전투를 계속하는 것은 아무런 실익이 없었던 겁니다. 드디어 시민군과 독일군 사이에 항복 협상이 시작되었고, 이처럼 서로가 아쉬운 것이 많은 양측의 교섭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폰 바흐는 시민군의 요청사항을 사실상 모두 받아 들였습니다. 항복한 시민군은 범죄자가 아니라 전쟁포로로 대우하고 이들을 친위대가 아닌 독일육군이 관리할 것, 비전투원 시민들의 안전을 보장할 것...등 등 10월 2일, 마침내 살아남은 바르샤바 시민군 15,000여명은 백기를 들고 포로수용소로 향했습니다.
하지만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도 결코 비겁하지 않았습니다. 어느 누구도 평범한 시민으로 변장하고 숨으려 들지 않았습니다. 심지어 여자와 어린이들까지 시민군 병사로서 독일군의 포로가 되는 길을 택했습니다. 애초부터 통일된 군복이 없었던 대부분의 시민군은 평상복이나 독일군으로부터 노획한 군복 따위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총을 내던지고 일반시민들 속으로 숨어들어 가는 것은 그다지 어렵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아무도 그러지 않았습니다. 거의 20만에 달하는 바르샤바 시민의 생명을 앗아간 봉기는 끝이 났습니다. 비록 살아남은 얼마 안남은 시민군 바르샤바 시민들에게는 약간의 자비를 베푼 독일군이었지만, 이 바르샤바 도시 자체에 대해서는 전혀 그런 뜻이 없었습니다.
* 가루가 된 바르샤바
모든 바르샤바 시민들을 쫓아낸 뒤 독일군은 몇주일에 걸쳐 공병대를 동원하여 얼마 안남은 성한 건물조차 하나씩 하나씩 폭파하면서 바르샤바를 완전히 돌덩어리와 가루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히틀러와 히믈러의 의도대로 바르샤바라는 도시를 완전히 지도위에서 지워버릴 작정이었던 것입니다.
시민군이 그토록 고대하고 기다렸던 소련군이 바르샤바에 들어 온 것은 그로부터 석달이나 지난 1945년 1월이었습니다.
* 박살이 난 바르샤바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에게 있으며, 이를 무단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 등에 따라 법적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