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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4일 연중 제15주간 주일
제1독서 : 아모 7,12-15
제2독서 : 에페 1,3-14
복 음 : 마르 6,7-13
그때에 예수님께서 7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8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9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
10 그리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
11 또한 어느 곳이든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
12 그리하여 제자들은 떠나가서, 회개하라고 선포하였다.
13 그리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에게 기름을 부어 병을 고쳐 주었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책에서 재미있는 글을 읽었습니다.
한 남성이 상체에 ‘타투’를 했습니다.
자기 친구들이 많이 했고, 또 그 친구들이 자신감 넘치게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오랫동안 고민하다가 결정했습니다.
이 남성의 어머니께서 우연히 아들의 타투한 것을 보았습니다. 화가 치밀어 올랐습니다.
그래서 김치 담던 반찬 통으로 아들의 머리를 두들겨 패며
어디 가서 내 아들이라고 하지 말라고 언성을 높였습니다.
사실 이 남성은 부모의 말씀에 늘 순종하며 살았던 착한 아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들은 어머니와 함께할 때마다
긴소매 티셔츠를 입거나 토시를 해서 상체의 타투를 가렸습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운전하다가 전방을 제대로 보지 못해서
신호를 기다리는 앞차에 부딪히고 말았습니다.
잠시 뒤에 앞차의 운전석 문이 열리고 우락부락한 모습의 운전사가 나오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어머니는 아들에게 다급하게 말했습니다.
“빨리 윗도리 벗어!”
숨기고 싶었던 아들의 타투가 이런 상황에서는 드러내고 싶었나 봅니다.
이렇듯 숨기고 싶은 면이 때로는 장점이 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무조건 나쁜 쪽으로만 생각하고 잘못이라고 단정지었던 것이 아닐까요?
섣부르게 단정짓는 마음을 버려야 합니다.
그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인정하면서
그 안에 계신 예수님을 찾으려 노력하면 어떨까요?
그러나 만약 도저히 예수님이 계시지 않는 곳이라면 과감하게 그만둘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합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셔서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십니다.
그런데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하시지요.
부족함 없이 챙겨주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부족하게 다니라는 것입니다.
아마 이 말에 제자들은 모두 실망했을 것입니다.
가뜩이나 부족하고 나약하다고 생각해서 예수님 없이 그 모든 것이 가능할까 싶은데,
예수님께서는 가지고 있는 것까지 놔두고 떠나게 하십니다.
바로 예수님만을 모시고 다녀야 한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것은 모두 내려놓고 주님만을 의지하면서 살아야 할 것을 체험하게 하신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는 평생 제자들과 함께하실 수 없었습니다.
이제 곧 수난과 죽음을 겪으시고 이 세상을 떠나 하늘나라에 자리 잡으셔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이 이 세상을 살아갈 방법을 가르쳐주신 것입니다.
그것은 세상의 가치를 따지는 것이 아닌, 오로지 하늘의 가치를 좇는 삶입니다.
사랑만이 있으면 충분합니다.
세상은 중요하지 않다고 할 것을, 하느님께서는 너무나 중요하다고 말씀하십니다.
한눈팔지 마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찬미 예수님, 사랑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사랑하시고 우리가 오직 당신께 의지하기를 바라십니다.
그리고 의지하는 만큼 주님의 사랑을 체험케 됩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면 실망하고 상처를 안고 살지만,
주님께 의지하는 이는 ‘하는 일마다 잘될 것’입니다.
이 시간 각자에게 주어진 주님의 소명을 일깨우고 그분의 바람을 살 힘을 얻기를 기도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그냥 빈손으로 보내신 것이 아니라,
먼저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어 보내셨습니다.
그런데 제자를 파견한 이유는 “하늘의 온갖 영적인 축복을 주심”과 당신의 가르침,
즉 “하느님 나라 건설”을 위해서입니다.
그 사명은 열두 제자에게 국한된 것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이어집니다.
우리는 이미 주님께 대한 믿음을 고백하였고
마귀를 끊어버리고 허례허식을 끊어버리겠다고 약속했으며
그 기초 위에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렇다면 이미 주님의 능력을 입었고 파견받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선포 해야 합니다.
그리고 세상의 온갖 유혹 앞에서 하느님의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꿋꿋해야 합니다.
사도들을 파견하신 주님께서는 오늘 우리를 파견하십니다.
그러므로 세상 것에 매이지 말고 천상 것을 추구하는 의로움을 통해 주님을 전할 수 있길 바랍니다.
직장에서, 가정에서, 내 마음 안에서 주님은 어떤 존재입니까?
마음을 사로잡고 기쁨을 주며 힘을 주시는 분입니까? 아니면 그렇게 만드십시오!
그분은 우리를 지켜줄 힘과 능력을 지닌 분입니다.
성경은 "네가 하는 일을 주님께 맡겨라. 계획하는 일이 이루어질 것이다"(잠언16,3).하고 선언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둘씩 짝을 지어 파견하셨는데
짝을 지어 파견한 것은 서로의 협력으로 선교의 효과가 크기 때문입니다.
또한 사명 이행의 객관성과 증언 내용에 대한 진실성을 보장해 주는 관례입니다.
이것은 동시에 공동체성을 상기시켜 주며
복음의 선포는 개인이 원하는 방식으로 개인의 영광을 위해서가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물론 홀로 있어도 부끄러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연약합니다.
그래서 함께하면서 서로 부족함을 채워주고 서로의 연약한 마음을 붙들어 주어야 합니다.
둘이 함께하는 것은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가야 할 길을 갈 수 있도록 서로에게 힘이 되어줄 수 있습니다.
우리도 혼자 독불장군으로 일하지 말고 협력자와 함께 일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기에 앞서 예수님께서는 길을 떠날 때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이것은 한마디로 ‘한눈팔지 마라!’ 오직 ‘주님의 말씀에만 의지하라’는 당부입니다.
‘염불에는 관심이 없고 잿밥에만 마음이 있다’는 옛말이 있듯이
주님의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것에 대한 애착을 아예 갖지 말라는 것입니다.
소유하는 것이 많으면 당연히 하느님께 가는데 소홀해지기 마련입니다.
실상 필요한 것은 하나입니다.
주님께 의지하여 도움을 청하고 주님의 뜻을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먼저 하느님의 나라와 하느님께서 의롭게 여기시는 것을 구하여라.
그러면 이 모든 것(먹을 것, 입을 것)을 곁들여 받게 될 것이다”(마태6,33).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성당에 나오면 뭐 좋은 일이 생기지 않을까?
막연한 기대를 하고 왔는데 별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신부님으로부터 잔소리 듣고, 시간을 투자해야 하며
거기다 돈도 내야하고, 다른 사람보다 더 정직하게 살려고 하니 손해 보는 느낌입니다.
좋은 마음으로 기도하러 왔는데 왜 그리 말이 많고 설치는 사람이 많은지…
밖의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런 가운데 하느님의 의로움을 찾는 것은, 정말 어렵습니다.
그래도 그 길이 우리가 가야 할 길입니다.
우리 주님은 눈에 보이는 힘을 비울 때, 눈에 보이지 않는 힘으로 채워주십니다.
더 큰 마음의 자유와 기쁨과 평화를 주십니다.
물론 의로움을 선택하다 보면 예기치 않은 어려움에 접하기도 합니다.
고지식한 사람, 시대에 뒤떨어진 사람이라는 소리도 듣습니다. 그것은 자연스런 일입니다.
세상의 것과 천상의 것은 서로를 거스르기 때문입니다.
세상은 적당히 타협하면서 살아가기를 원하지만,
하느님의 뜻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라고 답하기를 원합니다.
그리고 돌아보면 은총이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에 보이는 당장의 결과나 성과에 얽매이지 말고 삶의 자리에서 충직하길 바랍니다.
최선을 다하고 주님의 뜻을 기다리면 열매는 주님이 주십니다. 그저 주님께 맡기면 됩니다.
내가 흘린 수고와 땀은 주님께서 차고 넘치도록 헤아려 주실 것입니다.
근본을 얻으면 일의 결과 따위에 흔들리지 않는 법입니다.
따라서 농부가 온종일 땀 흘리며 고랑을 파듯
주님의 말씀 속에 있는 생명의 길을 파는 농부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열심히 일해 어떤 좋은 결과를 이루었을지라도
가까운 이들로부터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하게 되면
낙담과 실망에 빠져서 일할 의욕을 잃고 손을 놓아 버리기 쉽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향에서도 환영받지 못했고,
사람들은 음모를 꾸미고 심지어 죽이려고도 하였지만
그러한 상황 안에서도 당신의 일을 한결같이 행하셨습니다.
우리도 누가 무어라 해도 “해야 할 일”은 해야 합니다. 주님의 복음을 전해야 합니다.
우리 가정은 하느님의 말씀과 더불어 사랑의 생활을 하는가?
점검하고 사랑의 삶을 증가시킬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하느님을 모시고 사는가? 데리고 사는가? 자문하며
하느님을 삶의 중심에 모시고 살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하느님의 영적 축복을 전하며 또 누릴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네 길을 주님께 맡기고 그분을 신뢰하여라. 그분께서 몸소 해 주시리라"(시편37,5).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우리는 모두 각자 사명을 지니고 살아갑니다.
‘그런데 그 사명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그것은 신원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니 신원에 대한 각성이 자신의 사명을 충실하게 한다고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오늘 <말씀 전례>는 “말씀 선포의 사명”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리고 그 사명은 “파견받은 이”라는 신원에서 주어집니다.
<제1 독서>에서 아모스는 하느님으로부터 직접 파견 받음에서,
<제2 독서>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께서는 아버지로부터 파견받음에서,
그리고 <복음>에서 열두 제자는 예수님으로부터 파견받음에서 그 ‘사명’이 주어집니다.
<제1독서>는 남 유다의 아모스가 북이스라엘에 와서 예언의 말씀을 선포하자,
사제 아마츠야가 그를 위협하며 쫓아내는 장면입니다.
왕실 사제인 아마츠야가 자신을 반대하는 아모스를 받아들이지 못한 까닭은
자신의 신원과 권한이 침해당하고 위협당한다고 여겨졌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신의 기득권을 놓을 수 없어, 일종의 제도권의 폭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이처럼, 말씀의 선포는 아프게 찌르기에 때로는 받아들여 지지 못하고, 주변부로 내쳐지기도 합니다.
사실, 예수님도 당시의 종교지도자들에게 내쳐졌고, 반대 받는 표적이 되어
성문 밖에서 매달리어 십자가에 처형되셨습니다.
<제2독서>는 사도 바오로가 로마에서 감옥에 갇혀 있으면서,
소아시아의 에페소인들에게 보낸 옥중서한의 서두 부분입니다.
여기에서,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께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를 파견하시어
그분의 피를 통해 당신의 구원 계획을 이루시고,
이 ‘사명’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 성령을 파견하셨음을 말해줍니다.
<복음>은 열두 제자의 파견 장면입니다. 이는 세 장면으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곧 예수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시기 이전의 장면’과, ‘파견하시는 장면’,
그리고 파견받은 제자들이 ‘그 사명을 이루는 장면’으로 나누어져 있습니다.
<첫 장면>에서는, 마치 <제1독서>에서 하느님께서 아모스를 붙잡으셨듯이,
<제2독서>에서 우리를 창조 이전에 이미 선택하셨듯이,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기에 앞서,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에 대한 권한을 주십니다.”(마르 6, 7).
<둘째 장면>에서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복음 선포자가 갖추어야 할 조건과 자세를 가르쳐주십니다.
파견받은 자에게 길을 떠날 때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곧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의 돈도 가지지 말며,
신발도 옷도 두 벌을 가지지 말라(마르 6, 8 참조)고 제시하십니다.
이는 자신의 능력으로 사명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하느님께만 의탁하여 복음 선포의 사명을 수행하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왜 예수님께서는 지팡이는 가져가라고 하셨을까?
성경에서 가장 먼저 떠오르는 ‘지팡이’는 모세의 지팡이를 떠올려줍니다.
양치기 모세에게는 너무도 평범하고 보잘것없는 지팡이였지만,
말씀과 함께 바다를 내려치면 물결이 갈라지고, 바위를 두드리면 물이 솟아나고,
병든 이들이 쳐다보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 지팡이로 인류 구원과 사랑의 역사를 펼치셨습니다.
하느님의 권능인 이 지팡이, 그것은 곧 “말씀의 지팡이”입니다.
지팡이에 매달려 있는 십자가의 말씀이요, 쌍날칼의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나는 하느님의 권능인 이 말씀의 지팡이를 손에 잡고 있는가?
그래서 말씀의 권능에 위탁하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는 파견받은 이들이 한 일에 대해서 전해줍니다.
“회개하라고 선포하고, 많은 마귀를 쫓아내고 많은 병자를 고쳐주셨다.”(마르 6,12-13)
이는 파견 받은 자는 파견 하신 분의 뜻을 선포하고 증거하는 일을 하여야 함을 말해줍니다.
동시에 자기 자신의 능력이 아니라, 그분의 권능으로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오늘 우리는 파견 받은 자임을 돌이켜보고,
내가 지금 파견하신 분께 매여 있는지 살펴보아야 할 일입니다.
그리고 당신 말씀의 지팡이를 꼭 붙들고 있어야 할 일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마르 6,8)
그렇습니다. 주님!
길을 떠나면서 그 어느 것도 가지고 가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가져야 할 것을 이미 가진 까닭입니다.
말씀이신 당신과 당신의 권한을 지닌 까닭입니다.
저의 능력으로 당신의 권한을 가로막지 않게 하소서.
저의 말이 당신의 말씀을 덮지 않게 하소서.
저의 무능함과 허약함 안에서 당신의 선하신 뜻을 이루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예전에는 천동설을 이야기했습니다.
지구를 중심으로 태양이 움직인다고 생각했습니다.
아침에는 해가 뜨고, 저녁에는 해가 지는 것을 매일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구가 움직인다는 것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과학과 기술이 발전하면서 ‘지동설’을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와 금성의 모양 변화가 그것이었습니다.
별의 연주 시차란 지구가 태양을 중심으로 공전 운동하기 때문에
별을 바라보았을 때, 별의 위치가 상대적으로 바뀌어 보이는 현상을 말하는 것으로,
지구가 천동설에서 얘기하는 것처럼 가만히 있다면 연주 시차가 나타날 리가 없기 때문에
천동설로는 연주 시차를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또한 금성을 관측하면 달처럼 다양한 모양의 변화가 나타나는데
천동설에 의하면 금성은 초승달 또는 그믐달 모양으로만 보여야 했기 때문에
금성의 위상 변화 역시 천동설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면 지구는 어떻게 움직일까요?
지구는 1시간에 약 1,670km의 속도로 서쪽에서 동쪽으로 회전(자전)하면서,
태양을 둘러싼 대략 9억 6천 만km에 달하는 타원 궤도를 1년 동안 돌고(공전) 있습니다.
지구의 운동으로 생기는 현상 중 대표적인 것은 일주 운동과 계절 변화인데
일주 운동은 지구의 자전에 의해 생기는 현상이며,
계절의 변화는 지구의 자전축이 기울어진 상태로 공전하기 때문에 생기는 현상입니다.
지구는 태양을 중심으로 움직이는 행성이며,
태양은 우리은하를 중심으로 움직이는 항성이며,
우리은하는 우주의 변방에서 우주를 중심으로 움직이고 있습니다.
지구가 우주의 중심이 아니라는 인식의 변화는 우리의 꿈을 확장시켰습니다.
우리는 달을 탐사하였고, 화성까지 탐사하였습니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반드시 진리는 아니라는 것을 천동설과 지동설로 알 수 있습니다.
제가 있는 댈러스 성 김대건 안드레아 성당은
미주 지역에 있는 한인 성당의 중심은 아닙니다.
댈러스 한인 성당은 중남부 지역에 속해 있습니다.
가장 가까운 성당은 포트워스 한인 성당입니다.
그리고 대략 4시간 거리에 오스틴, 휴스턴, 샌 안토니오 성당이 있습니다.
그리고 10시간 넘게 걸리는 거리에 엘파소, 덴버, 콜로라도 성당이 있습니다.
자동차로 가기에는 먼 거리에 피닉스, 라스베이거스 성당이 있습니다.
이렇게 물리적으로 멀리 떨어져 있기에 사제들이 함께 모여서 연대하는 것이 조금 어렵습니다.
중남부 지역 대표 신부님과 휴스턴, 오스틴, 샌 안토니오를 방문했습니다.
저는 꾸르실료 담당 신부를 맡고 있습니다.
레지오, 엠이, 성령기도회도 담당 신부님이 있으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거리가 멀기 때문에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4시간 거리에 있는 성당이라도 함께 하면 좋겠다고 이야기했습니다.
청년들을 위한 피정도 함께 하면 좋겠고, 성령기도회도 함께 하면 좋겠습니다.
오늘의 성서 말씀은 ‘사명감’을 이야기합니다. 사명감은 목적지와 같습니다.
목적지를 아는 사람은 비록 힘들어도, 고난이 닥쳐도 한걸음, 한걸음 발길을 내딛습니다.
1시간만 더 걸으면 시원한 오아시스가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뜨거운 사막의 열기를 참을 수 있습니다.
곧 더위와 갈증을 피할 수 있는 물이 있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1독서에서 아모스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나는 예언자도 아니고 예언자의 제자도 아니다.
나는 그저 가축을 키우고 돌 무화과나무를 가꾸는 사람이다.
그런데 주님께서 양 떼를 몰고 가는 나를 붙잡으셨다.
그러고 나서 나에게 말씀하셨다. 가서 내 백성 이스라엘에게 예언하여라.”
아모스는 그저 가축을 키우는 사람이었지만 하느님의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이제 아모스는 가축을 키우는 목자의 삶을 포기하였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을 전하는 예언자의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도 제자들에게 특별한 사명을 주셨습니다.
하느님 나라의 기쁜소식을 전하는 것입니다.
마귀 들린 사람을 쫓아내는 것입니다. 병자들을 고쳐 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길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라고 하셨습니다.
빵도, 전대의 돈도 포기하라고 하셨습니다.
신발은 신지만 옷도 두 벌은 입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여행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성공, 명예, 권력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은 세상의 것들을 기꺼이 포기하였고, 예수님을 따르는 삶을 선택하였습니다.
박해와 고난이 있었고, 목숨을 바쳤지만, 천국에서 빛나는 별이 되었습니다.
내가 선택한 것이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내가 포기한 것이 나의 이익을 위한 것인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인지 돌아보면 좋겠습니다.
포기도, 선택도 모두 하느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미 그리스도께 희망을 둔 우리가
당신의 영광을 찬양하는 사람이 되게 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파견하셨다.
조욱현 토마 신부
오늘의 주제는 복음 선포이다.
오늘 우리의 활동들을 통해서도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구원 계획을 실현하고 계시다.
하느님께서는 목자이면서 돌무화과를 가꾸는 농부인 아모스를 선택하셨다.
그는 이제 하느님의 메시지를 전하여야 한다. 그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하느님을 선포해야 한다.
이래서 예언자들은 거부를 당하고 죽임을 당할 수 있다.
그리스도께서 항상 부정과 불의와 부패에 대항하여 용감하게 싸우는 예언자의 전형이다.
십자가의 죽음이란
바로 나자렛의 목수(마르 6,3)인 예수가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왔고(마르 1,14 참조)
세상이 심판받을 때가 되었다(요한 12,31 참조)는 사실을 선포한 대가로 주어진 것이다.
복음에 보면 예수께서 구원 계획을 첫 번째로 실행하시는데 아모스의 경우와 같은 모습이다.
그들의 사명 역시 사람들에게서가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온다는 것이다.
이렇게 사도적 사명이 하느님에게서 오기 때문에
사도들의 파견은 인간적 수단에 의존하지 않고 하느님께 의존하라는 것이다.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8-9절).
이 말은 그 규정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사명을 다하기 위한 열정이다.
그리고 그에게 필요한 모든 것을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리라는 무한한 신뢰를 하라는 것이다.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이제는 사람에 대해 신뢰도 해야 한다.
사람들은 복음을 전하는 자들에게 협조자가 된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 집에 머물러라.”(10절).
때로는 거절당할 수도 있다.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고 너희 말도 듣지 않으면,
그곳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밑의 먼지를 털어 버려라.”(11절).
그것을 각오해야 한다. 복음을 받아들이느냐 거부하느냐 하는 것은,
복음이 선포되어 실현되고 있는 약속의 새로운 땅에 가까이 갔느냐 못 갔느냐를 의미하는 것이다.
주님의 파견을 받은 제자들은 자신들의 전교 활동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복음 선포와 구원의 활동을 계속한다(12-13절 참조).
이렇게 교회는 세상에 주님을 증거함으로써 그리스도를 반영시키고 그분의 모상이 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가 전하는 복음의 성과는
어느 정도 우리의 책임이라고 할 수 있다(현대의 복음 선교 76).
그것은 이런 의미이다.
우리의 복음 선포가 아모스의 경우나 그리스도의 예언적 선포와 같이
권력이나 힘 앞에 항상 자유로운가?
그리고 이 세상 사람들의 마음에 들든 안 들든
하느님의 진리를 선포할 용기를 항상 가지고 있는가?(로마 1,14참조).
하느님의 권능을 믿는가 아니면 우리의 능력을 믿는가?
극단적일 때 발바닥의 먼지를 떨어버릴 각오가 되어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 하느님의 영원한 구원계획이 역사를 통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그분을 머리로 하여 한데 모으는 계획입니다.”(에페 1,10) 말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하나가 될 것이라는 말은,
전에 파괴되었던 것을 다시 일으켜 세운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를 머리로 다시 하나가 되어 그리스도를 통해
하느님께로 나아가는 창조의 근본적 의미가 다시 드러나도록 한다는 것이다.
하느님의 이 구원 계획은 우리들의 협력, 특히 교회가 실현하여야 하며,
이를 이루도록 이끌어주시는 분은 성령이시다.
이 성령의 인도에 따라서 비록 고달프게 느껴져도 우리가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주님께서 제자들을 파견하신 그 사명을 이룰 수가 있을 것이다.
성령 안에서 우리가 온전한 자유를 누리며,
세상에 주님을 증거하고 우리 자신이 그분의 모습을 세상에 보여줄 수 있다면,
우리는 아모스와 같이 어떤 상황에서도 하느님의 진리를 용감하게 선포할 수 있으며,
하느님의 구원 계획을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이루어 갈 것이다.
주님께 파견받은 제자들과 같이 힘차게 복음을 전할 수 있도록
힘과 용기를 청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여행자가 아니라 파견된 자
김찬선 레오나르도 신부
배가본드(vagabond)라는 말이 있지요.
우리말로 여행자라고 번역되는 말인데 이것을 영영사전에서는
‘wandering aimlessly without ties to a place or community’라고 풀이합니다.
풀이하면 어떤 일정한 장소나 공동체에 매임 없이
그리고 아무 뚜렷한 목적 없이 떠도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고,
우리가 흔히 하는 말로는 ‘정처 없이 떠도는 것’이고 할 수 있을 겁니다.
요즘 참으로 여행자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좀 더 고상하게 성지 순례하는 분들도 많습니다.
그래서 한곳에 매인 삶이 답답해서 그런 것이 아닌가?
이렇게 저는 함부로 의심도 하고 비판도 합니다.
아무튼 여행이나 순례나 공통점은 어떤 곳에 매이지 않고,
머물던 곳을 떠나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오늘 독서의 아모스나 복음의 제자들도 이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들은 여행자나 순례자와 다른 점이 있습니다.
여행자와 순례자가 자기 스스로 떠나는 것이라면
예언자와 사도들은 부르심 받고 파견받아 떠나는 것이 근본적인 차이점입니다.
더 적나라하게 말하면 여행자와 순례자가 자기가 좋아서
그리고 자기가 가고 싶은 곳으로 곧 자기가 끌리는 데로 간다면
예언자와 사도들은 가기 싫어도 가라고 하시니 가고,
가고 싶지 않은 곳도 가라고 하시니 가는 것이 다른 것이지요.
실로 저희 수도자와 선교사에게 관건은 파견의식입니다.
여기서 파견의식이란 파견 예절의 뜻이 아니라
나는 파견되는 존재라는 정체성 의식을 말함입니다.
내가 파견되고 안 되고는 파견자의 뜻이고,
어디로 파견되는 것도 파견의 뜻이며,
파견되지 않으면 있는 곳에 계속 있는 것도 파견자의 뜻입니다.
그런데 수도자건 신자들이건 이런 파견의식이 없어
파견자의 뜻을 생각지 않고 ‘셀프파견’을 하려 합니다.
옛날 수도자들은 선교사로 파견될 때
선교사가 될 생각이 없는데도 선교사가 되라고 하니 되고,
갈 곳도 자기 선택이 아니라 가라는 곳이, 갈 곳이 되었는데
지금은 내가 선교사가 되고 싶어서 되고
가고 싶은 곳이, 갈 곳이 되는 경우가 점점 많아집니다.
여행자나 순례자와 예언자나 선교사의 차이는 여행 짐을 봐도 알 수 있지요.
요즘 여행자들은 웬 짐이 그리 많습니까? 짐이 짐스럽지도 않은 모양입니다.
그래서 제가 속으로 비판합니다.
다른 것은 그렇게 짐스러워하면서 여행 짐은 하나도 짐스럽지 않은가 보다고.
오늘 주님께서는 짐에 관한 규정을 파견 규정으로 내려 주십니다.
아무것도 지니지 마라!
아무것도 너에게 짐이 되고 지장이 되지 않게 하라!
아무것도 네가 의존하는 필수품이 되지 않게 하라!
네가 오로지 지녀야 할 것 곧 짐은 주님뿐이다!
주님의 복음과 주님의 평화만 너의 짐이다!
주님의 파견 규정에는 가야 할 곳도 있습니다.
가야 할 곳은 장소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경치 좋은 곳 또는 명승지가 아니라 사람들입니다.
목적이 복음 선포이니 장소가 아니라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파견 규정에는 마무리 규정도 있습니다.
떠나갈 때 파견자의 뜻대로 파견되었듯
마칠 때도 파견자의 뜻대로 마쳐야 합니다.
더 있고 싶다고 하지 않음은 말할 것도 없고,
환영받지 못할 때 뒤 끝이 작렬해서도 안 됩니다.
발의 먼지를 털고 깨끗이 떠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함에는 그곳을 깨끗이 떠나는 뜻도 있지만
더 중요한 뜻은 새로운 곳으로 가라는 뜻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곳도 그리고 어떤 사람도 애착하지 말고,
그저 하느님 뜻에 따라 있기도 하고 떠나기도 하라는 주님의 뜻 말입니다.
어쨌거나 우리는 여행자가 아니라 복음 선포를 위해 파견된 자들입니다.
서공석 요한 신부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분의 죽음과 부활을 겪은 후,
그분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회상하면서 그것을 배워 실천하면,
그들 안에도 하느님의 생명이 살아있어 그들 자신도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런 노력을 하면서, 기록하여 문서로 남긴 「복음서」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들은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돌아가시고 약 40년 후,
곧 西紀 70년경에 기록되었습니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에서 초창기 신앙공동체의 상황도 엿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예수님이 제자들을 파견하면서 당부하신 말씀을 전합니다.
초기 신앙인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이 성령으로 그들과 함께 살아계신다고 믿었습니다.
따라서 「복음서」에는 예수님이 살아계실 때, 실제로 하신 말씀도 있고,
또한 초기 신앙인들의 활동 상황과 그들의 마음 다짐도 함께 들어있습니다.
예수님은 살아계실 때, 열두 제자를 택하여 그들과 함께 살면서 그들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십자가 處刑으로 돌아가시자,
실망하여 흩어져 각자 자기의 生業으로 돌아가기도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부활하여 하느님 안에 살아 계시다는 사실을 각자 체험하면서 다시 모여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고 실천하신 바를 사람들에게 알립니다.
유대교의 律士와 司祭들은 하느님으로부터 권한과 신분을 받았다고 주장하며,
다른 사람들 앞에 우월감을 가지고, 응분의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기들이 만든 조직과 제도를 하느님의 이름으로 절대화하여 경직시켰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우월감도, 그런 경직성도 주장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런 우월감이나 경직성 없이,
하느님의 자녀로 자유로이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부모를 사랑하는 자녀는 서로를 소중히 생각하며, 서로의 의견을 듣고, 서로를 섬깁니다.
그 섬김은 서로의 발을 씻어주기까지 하는 겸손한 것이기를 예수님은 원하셨습니다.
오늘 복음은 제자들이 예수님으로부터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받았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그것은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신비스런 지배권을 받았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 말씀은 제자들의 역할이 인간을 지배하는 나쁜 힘,
곧 더러운 영들에서 사람을 해방시키는 데에 있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으로 말미암은 신앙은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새롭게 정립합니다.
인간 안에 어떤 무질서가 있다는 것을 말하기 위해
그 시대 사람들은 쉽게 ‘더러운 영’ 혹은 ‘악령’이라는 표현을 사용하였습니다.
신체적, 정신적 질병과 사회적 무질서는 ‘더러운 영’의 조화라고 믿던 시대였습니다.
예수님이 하신 복음 선포는 그런 무질서의 害惡에서 인간을 해방시키는 일이었습니다.
「마르코복음서」는 예수님이 하신 첫 번째 기적이 회당에서 정신병자를 고친 일이었다고 말하면서
“권위 있는 새로운 가르침이다.
저분이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시니 그들도 복종하는구나.”(1,27)라고 말합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주셨다는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제자들도 지속한다는 뜻입니다.
오늘 복음에는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가져가지 말라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고...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가라는 뜻입니다.
사실 그 시대 사람들은 여행을 떠날 때 많은 것을 가지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제자들이 그들보다 더 가벼운 차림으로 다닐 것을 원하셨습니다.
가지고 다니는 짐이나 옷차림이 예수님의 제자를 만들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그 시대에 남의 눈에 띄는 복장을 하고, 불편에 대비하여
많은 짐을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권력과 재물을 가진 자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은 그런 사람들의 흉내를 내지 않고,
섬기는 사람답게 단순한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닌다는 말입니다.
‘어디에서나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 고장을 떠날 때까지 그집에 머물러라.’는
오늘 복음 말씀은 얼마든지 민폐를 끼쳐도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초기 신앙공동체는 家庭집 공동체였습니다.
신자들 중 넓은 집을 소유한 사람이 자기 집을 공동체의 집회 장소로 제공하고,
그런 집을 중심으로 신앙공동체가 발족하였습니다.
따라서 집 하나가 집회 장소로 정해지면, 모두 그 집을 이용해야만 했습니다.
여기저기 옮겨 다니면, 그 지역 신앙인들에게 혼란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사도행전」이나 「바울로 사도의 서간들」을 보면,
제자들이 선교 여행 중 거점으로 정한 곳은 가정교회라 부를 수 있는 개인의 집들이었습니다.
오늘 복음은 신앙공동체의 특수 계층을 위한 말씀이 아닙니다.
「마르코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선교는 어느 신분과 관련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신앙인들은 복음을 충실히 살며 예수님의 뒤를 따랐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사람들에게도 예수님의 뒤를 따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그들은 가진 것과 옷차림에 구애받지 않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다니면서
복음을 전하고, 신체적 혹은 사회적 무질서의 해악에 자유로워지도록 사람들을 가르쳤습니다.
그것은 서로 신뢰하고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고 가엾이 여기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었습니다.
오늘의 인류 사회는 조직에 있어서 유연함을 추구합니다.
제국주의, 봉건주의 혹은 공산주의 사회보다 더 유연한 것이 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오늘 민주주의 사회는 자발적 시민 운동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더 큰 유연함을 향한 행보입니다.
앞으로 세계는 인간의 창의력을 존중하고, 모두가 자발적으로 참여하고 기여하는,
더 유연한 조직으로 발전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가 가진 통신매체들은 사람들 모두가 정보를 쉽게 共有하게 해 줍니다.
세상은 상호의사 소통이 원활하고, 서로의 다름은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그런 사회에서는 스스로를 재방하고 유연하게 현실에 대처하는 사람과 단체가 실효성을 지닙니다.
경직된 개인이나 집단은 고립되고, 실효성이 떨어지는 세상이 되었습니다.
오늘 유럽의 많은 지역에서 교회가 신앙인들로부터 외면당하는 것은,
성직자 중심의 경직된 유럽 중세적 조직을 교회가 고수한 데에
그 원인의 하나가 있다고 보아야 합니다.
오늘의 교회는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일을
사람들의 삶 안에 되살려내는 노력을 해야 합니다.
그런 갱신을 하자고 개최된 「제2차 바티칸공의회」였습니다.
과거 유럽 중세 사회에서 얻은 언어와 옷차림과 제도적 경직성을 벗어던지고,
가벼운 옷차림과 홀가분한 마음으로 오늘의 사람들 안에
하느님이 사랑과 섬김으로 살아계시게 하자는 것이었습니다.
높은 冠을 쓰고, 거창하게 입고, 권위주의적 언어로 가르치는 교회가 아니라,
그 구성원들이 함께 토의하며 생각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며,
서로 섬기는 유연한 교회 공동체로 다시 태어나야 할 것입니다.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