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Daum
  • |
  • 카페
  • |
  • 테이블
  • |
  • 메일
  • |
  • 카페앱 설치
 
카페 프로필 이미지
젊은공인중개사의모임
 
 
 
 
 
 

카페 통계

 
방문
20241014
31
20241015
25
20241016
10
20241017
31
20241018
34
가입
20241014
0
20241015
0
20241016
1
20241017
0
20241018
0
게시글
20241014
1
20241015
0
20241016
0
20241017
0
20241018
0
댓글
20241014
0
20241015
0
20241016
0
20241017
0
20241018
0
 
카페 게시글
좋은 글 스크랩 가후(賈珝) - 청렴한 성품의 정치, 전략가
잠실/맥(조문희) 추천 0 조회 53 14.09.05 16:29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가후(賈珝 

 

청렴한 성품의 정치, 전략가

 

가후(賈珝 147~223)는 자가 문화(文和)이고 무위 고장 사람이다. 그는 효렴으로 천거되었다가 질병이 들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아마 이때 동탁과 관계를 맺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후는 동탁의 모사를 거쳐 이각, 곽사의 군사를 지냈다. 동탁이 암살된 후 이각과 곽사가 군대를 몰고 양주로 돌아가려 하자 그들을 설득하여 장안을 공격하여 한수와 마등의 근왕병을 물리치고 장안을 회복하였다. 이각, 곽사의 권력투쟁으로 난이 일어나자 이들을 중재하기 위해 노력했으며, 그것이 실패하자 황제를 모시고 미오궁을 빠져나와 낙양으로 가는 데 중요한 공헌을 했다. 그리고 장수의 막하에 있으면서 장수와 형주의 유표를 도와 신출귀몰한 병법으로 조조군을 대파하였다. 그 후 가후는 장수를 설득하여 중원을 장악한 조조에게 귀순하여 순욱과 더불어 관도대전에 결정적 기여를 하였다. 가후는 적벽대전을 치르려는 조조를 막으려다 실패하고 결국 조조군은 적벽에서 대패하였다. 이로써 천하통일의 과업은 수십 년 뒤로 연기되었다. 이후 가후는 조조의 가장 큰 우환거리였던 마초와 한수 연합군을 ‘이간계’로 물리친다. 그리고 조조가 장로를 공격할 때 큰 공을 세워 방덕을 조조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가후는 이후 중대부가 되었다가 조조의 장자인 조비의 후견인이 되었다. 조조가 후사로 고민하자 원소의 예를 들어서 장자인 조비에게 물려주도록 권하여 이를 성사시켰다. 조조서거 후 가후는 조비에 의해 태위(현재의 국방부장관)에 봉해지게 된다. 가후는 헌제를 설득하여 이름뿐인 황제의 자리를 조비에게 넘기게 하고 조비를 황제의 위에 오르게 하였다. 가후는 77세로 병사했다.

출신배경



가후는 삼국지에 등장하는 가장 탁월한 정치가이자 전략가의 한 사람이지만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것은 그의 출신과도 관련이 있다. 가후가 태어난 무위 고장은 과거 강족, 흉노족의 지역이었다. 이 지역은 낙양 사람들에게 천대를 받던 대표적인 지역 가운데 하나로 여포의 고향만큼이나 낙양에서는 멀리 떨어진 곳이었고 이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후를 반 오랑캐 취급한 것으로 보인다.
가후는 이 같은 출신 배경 때문에 항상 노심초사한 것으로 추측된다. 정사에 나타난 그의 행적은 이를 잘 뒷받침해준다. 정사에 의하면, 가후는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항상 문을 잠그고 스스로를 지켰다고 한다. 그리고 가후는 개인적으로 어떤 교분도 맺지 않았고 자식들도 권문세족과 혼인시키지 않았다고 한다.

정치 이력과 사상적 경향



삼국지전체를 유심히 들여다보면 모든 중요한 사건에는 가후가 개입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후는 거의 무시당하고 있다. 예를 들면 관도대전에서 군량미 부족으로 조조가 철군 문제를 고민하고 있을 때 조조의 마음을 바로잡아준 사람은 가후와 순욱인데 나관중의 삼국지에는 순욱만이 등장한다. 삼국지에서 장량에 비견할 만한 인물이 바로 가후인데 가후의 출신지가 서량쪽이었기 때문에 항상 평가절하 되었다. 정사인 삼국지 위서 순욱-가후전에는 “천하의 지혜를 논하려고 하는 자는 가후에게로 온다”고 되어 있다.

삼국지에서 그가 관여한 사건을 모으면 그것이 바로 삼국지가 될 정도로 그는 중대사에 빠짐없이 등장한다. 가후의 정치적 경력을 보면 삼국지의 그 어떤 등장인물보다도 화려하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동탁이 낙양 입성시 태위의 속관으로 평진도위에 임명함.
。이각.곽사의 군사로 좌풍익에 임명된 한수와 마등의 근왕병을 격파함.
。이각과 곽사가 제후로 봉하려 하자 사양하고 상서복야도 사양함.
。광록대부에 제수됨. 이각은 가후를 선의장군으로 임명함. 이각과 곽사의 권력투쟁으로 난이 일어나자 이들을 중재함. 황제를 모시고 미오궁을 빠져나와 낙양으로 옮기는 데 결정적으로 공헌함.
。장수의 막하에서 신출귀몰한 병법으로 조조군을 대파함. 조조가 원소와 대치할 때 장수를 조조에게 투항시킴.
。조조는 가후를 집금오에 추천하여 도정후에 봉함.
。기주목으로 승진.
。관도대전 때 조조를 도와 원소권을 격파함.
。관도대전 후 조조는 가후를 태중태부로 임명함.
。가후가 적벽대전을 말렸으나 조조는 무리하게 출병하여 대패함.
。조조의 가장 큰 우환거리였던 마초와 한수 연합군 격파함.
。방덕을 조조의 휘하로 끌어들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함.
。위 문제 즉위 후 태위로 승격, 위수향후에 봉해짐. 장자인 가목은 부마도위가 됨.
。조조가 오나라를 토벌하려고 하자 가후는 오와 촉을 모두 토벌하기 어려우니 지키고 있다가 변화가 생기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 조비가 그 말을 듣지 않고 출전하여 대패함.
。시호는 숙후(肅侯)

인물평



정사에 나타나는 기록으로만 보면 가후는 성실하고 합리적이며 청렴하고 탁월한 재능을 겸비한 인물이자 신뢰를 중시하고 명리를 좇지 않는 소탈한 성격의 소유자로 그려져 있다. 그의 시호인 숙후에서 보더라도 가후는 스스로에 대해 매우 엄정하고 철저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장수의 막하에 있을 때 조조의 권유를 받고도 의리를 들어 이를 거부했다. 동탁이나 이각, 곽사가 정권을 잡았을지라도 가후와 이유가 건재하거나 권력자들이 이들을 신뢰할 때는 아무런 문제가 없이 정권이 안정되었다. 그러나 권력자들이 도를 넘어 가후와 이유의 말을 무시하면서 비극이 시작되었다.

조조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조조가 손권을 치기 위해 남정군을 일으키자 가후는 “이미 조조군의 군세가 천하에 떨치고 있으니 초나라의 풍부함을 틈타 선비들을 포상하고 백성을 위로해주며 편안한 땅에서 즐겁게 일하게 하면, 군대를 동원하지 않아도 손권은 투항할 것”이라고 권고하였다. 그러나 조조는 가후의 권고를 듣지 않고 군대를 일으켜 적벽대전에서 대패함으로써 유비에게는 회생의 기회를 주고 그 바람에 천하통일은 70년이 늦추어졌다.

가후는 자신에 대해 매우 엄격했으며 청렴한 성품을 지니고 있어 여러 가지의 벼슬을 주려 해도 사양했다. 예를 들면 이각과 곽사가 가후의 공을 높이 평가하여 제후로 봉하려 하자 사양하였고 상서복야를 제수하자, “상서복야란 모든 관리의 사장이며, 천하 사람들이 우러러 받드는 직책인데 저는 다른 사람을 설복시킬 수 없을 것”이라며 사양하였다. 가후는 워낙 탁월한 식견과 학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을 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서 항상 경계하면서 살얼음판을 걷듯이 살아간 것으로 보인다. 말썽이 나는 것을 꺼려하여 사사로이 어떤 교분도 맺지 않았고 권문세족과 혼인관계도 맺지 않았다. 이것은 그가 주류사회에 얼마나 적응하기 힘들었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참고로 이문열은 가후를 지조 없는 사람의 대명사로 그리고 있는데, 이는 역사인식이 결여된 소치이다. 가후의 경우에는 주류에서 벗어나 있는 사람이기 때문에 춘추필법만을 가지고 그를 평한다는 것은 모택동이 마르크스 이론으로 중국 역사 전체를 재단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가후는 천하의 안정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으로 황제의 권위와 한나라의 사정을 그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는데, 그에게 한실에 대하여 절대적인 충성을 요구하는 것은 지나친 생각이다.

지조를 지킨다는 것이 단순히 자신을 고용해준 사람을 위해 죽는 것이라면 그 지조는 필부의 만용에 불과하다. 심배가 원소와의 의리를 위해 죽은 것을 지조라고 하면 문제의 소지가 있다. 지조는 조선시대의 삼학사가 조선이라는 조국을 위해 적으로 간주되는 청나라의 회유를 거부하고 죽을 때 쓰는 말이지 이미 사멸해가는 한 사람의 군벌을 위해 죽는 것을 지조라고 하는 것은 곤란하다.

지조로 말하면 유비는 매우 위험한 사람이다. 유비는 한실을 처절하게 옹호한 듯하지만 그 실상은 전혀 그렇지 못했다. 그는 헌제를 위해 죽지도 않았고, 퇴위된 헌제를 모시고 와서 황제로 복귀시킨 사람도 아니었다. 유비는 단지 자신이 한실 종친이기 때문에 그것을 이용하여 천하의 주인이 되려 했을 뿐이다.

 백성(百姓)을 뿌리치지 못한 유비(劉備)

 

208년 7월, 조조는 보병과 기병 10여 만을 이끌고 형주(荊州)를 치기 위해 출진했다. 그의 천하 통일을 가로막는 장애는 이제 오나라의 손권뿐이었다. 조조는 지금까지 몇 번이고 손권과 소전투를 벌였으나, 번번이 오의 수군 앞에 맥을 못 추곤 했었다. 그래서, 하북 지방을 평정한 뒤에는 현무지(玄武池)라는 저수지를 만들어 거기서 수군을 훈련하여 준비를 갖추고 남정(南征)에 임했는데, 그 첫 목표지가 형주의 공략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형주는 오늘날의 호북성(湖北省)과 호남성(湖南省)에 걸쳐 장강 중류의 기름진 땅을 영유하는 독립 왕국 같은 존재였다. 한제국 황실의 일족인 유표(劉表)가 토착 세력과 결탁하여 강력한 지배체제를 형성하며 조조를 중심으로 벌어진 전쟁에도 참가하지 않고 한동안은 평화를 누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천하 통일을 노리는 조조가 언제까지나 형주를 방치할 리 없었다. 또한 손권도 이곳을 판도에 넣어 중원진출의 발판으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바로 그 무렵(184년), 시골에서 거병하여 겨우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유비가 같은 황실의 일족이라는 연줄로 유표 밑에 들어 번성(樊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북방의 조조에 대비한 성이었다.

유표가 죽자, 둘째아들 유종(劉琮)이 중신들의 추대를 받고 뒤를 이었는데, 조조가 온다는 말에 질겁한 나머지 싸우지도 않고 형주를 넘겨주고 말았다. 그야말로 유비의 머리 위에서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한 것이었다.

멍청하게도 뒤늦게 이 사실을 알았을 때, 조조는 이미 이웃 성에까지 이르러 있었다. 유비는 버림받은 몸이라 부랴부랴 형주를 철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뜻밖의 사태는 그때 일어났다. 유종의 부하와 형주 땅의 백성들이 유비의 인덕을 흠모하며 따라나선 것이다.

유비는 남으로 급행해서 강릉을 차지하여 그곳을 자신의 근거지로 삼으려 하고 있었다. 지형적으로 요충지이며 동정호 이남의 곡창 중심지이자, 장강을 사이에 두고 서쪽의 촉과 동쪽의 오와 직결하는 군사 거점이기도 했다. 유씨가 촉의 황제가 된 것은 221년으로서, 이때는 아직 제갈량도 그의 휘하에 들어오기 전이었다.

유비는 그러나 미처 강릉까지 갈 수가 없었다. 그가 떠난다는 소문을 듣고 따라나서겠다는 백성들은 하루가 지날수록 늘어, 그가 가는 길에 모여 있다가 그의 뒤에 꾸역꾸역 따라붙어 말 그대로 장사진을 이루었다. 당양(當陽)에 이르렀을 때는 수십만 명에 짐수레가 수천, 그들이 걸리적거리는 통에 유비는 하루 10여 리(약 5km)밖에 진군할 수가 없었다. 부하가 유비에게 진언하기를, “어서 바삐 가셔서 거점을 구축하셔야 합니다. 이러다가 조조의 추격이라도 받는 날이면, 무장한 병력이라곤 손꼽을 정도이니 큰일 날 것입니다.”

그러나 유비는 들은 체도 않았다. “무슨 소린고, 대업을 이루려면 무엇보다도 백성이 첫째로다. 백성들이 이 몸을 따라주는데, 어찌 이들을 버리리오.”

유비의 뜻에도 일리는 있었다. 문제는 조조가 그의 강릉 점거를 허용치 않으려는 데 있었다. 강릉을 점거당하길 원치 않는 조조는 전투 부대만 이끌고 추격하여 유종이 있던 양양에 이르렀다. 그 길로 정예 5,000을 이끌고 300리(약120km)를 밤낮없이 치달려, 당양의 장판(長阪)에서 유비의 기묘한 피난민 부대와 마주쳤다.

어떤 사태가 벌어졌겠는가. 유비에게 설혹 충분한 병력이 있었을지라도, 걸리적거리는 백성들의 틈바귀 속에서 충분히 응전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유비는 대패하여 간신히 도주에 성공했다. <애민>에 구애된 나머지, 무고한 백성들마저 난전에 휩쓸리게 했으니 작전상의 실수는 결코 작다 할 수 없었다.

<손자병법-군쟁편>에는, ‘투구를 벗어버리고 이틀길을 하루도 낮밤 가림없이 강행군하고, 백 리 앞의 전략적 요지를 점거하려 하면 삼군의 장수는 모두 사로잡힌다’라고 되어 있는데, 이결과도 경우에 따라서 좌우된다. 만일 유비가 당시 충분히 휴식을 취하고 피로한 조조의 정예 5,000이 오기를 기다리는 태세를 취해 응전했던들, 조조는 드디어 영락없이 전멸당했을 것이다.

<손자병법>에 능한 조조가 그런 만일의 사태를 예상 못할 리 없었을 테니, 유비가 보나마나 <애민>으로 시달림 당한다는 장수의 다섯 가지 위험을 범할 줄 뻔히 내다보고 그런 임기응변의 추격전을 감행한 것이었다고 보여지기도 하지만...

 

제목 : 영한대역 칼라 만화 삼국지 20권 / 영한대역 칼라만화 세계문학 20권

저자 : 21세기 영어교육연구회 (21st C.E.T.A.)

출판사 :  (주) 파우스트 칼리지

문의 전화 : 1599-9039 

E-mail : faustcollege@naver.com / ceta21@hanmail.net

Blog : http://blog.daum.net/ceta21

       http://blog.naver.com/ceta211

Cafe : http://cafe.daum.net/21ceta

Web-site : www.faustcollege.com / www.ceta21.com

 

 

 
다음검색
댓글
최신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