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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7월 15일 월요일 성 보나벤투라 주교 학자 기념일
제1독서 : 이사 1,10-17
복 음 : 마태 10,34─11,1
그때에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말씀하셨다.
34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35 나는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게 하려고 왔다.
36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
37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8 또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39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40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고,
나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보내신 분을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41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고,
의인을 의인이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의인이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
42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에게
그가 제자라서 시원한 물 한 잔이라도 마시게 하는 이는 자기가 받을 상을 결코 잃지 않을 것이다.”
11,1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다 지시하시고 나서, 유다인들의 여러 고을에서 가르치시고
복음을 선포하시려고 그곳에서 떠나가셨다.
조명연 마태오 신부
작년 휴가 때, 어떤 자연 휴양림에서 겪었던 일 하나가 생각납니다.
휴양림 안에 아주 근사한 식당이 있다고 해서 예약해서 시간 맞춰 입장했습니다.
그 식당의 자리는 산 중턱에 있었고 경치가 한 마디로 “끝내준다”라고 할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이 식당 주인이 제게 이런 말을 합니다.
“이렇게 여유롭게 혼자 여행도 다니고 좋겠어요.”
솔직히 저는 이 식당을 보고는 이곳의 주인이 정말 부러웠습니다.
이렇게 좋은 경관 안에서 여유를 느끼면서 책도 읽고 글을 쓰면 얼마나 좋을까 싶었던 것이지요.
제가 바라는 것을 모두 누릴 수 있는 주인이 얼마나 좋아 보였겠습니까?
그런데 오히려 이 식당 주인이 저를 부러워하고 있는 것입니다.
가장 평화스러운 곳에 살고 계신 것처럼 보였습니다.
마음이 진정으로 평화로울 것 같았습니다. 하지만 이분의 마음은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이분께서도 저를 바라보면서 평화롭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혼자 여행하면서 평화로울 것으로 생각한 것입니다.
그러나 저 역시 이 식당 주인을 부러워하면서 평화롭지 않았습니다.
평화는 과연 어디에 있을까요?
바로 부러워하지 않는 마음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함을 아쉬워합니다. 그 아쉬움 속에서 평화는 깨지고 맙니다.
하지만 나에게도 남이 가지고 있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 가지고 있는 것을 사랑하고 만족하는 삶에서 평화를 찾을 수 있게 됩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바라보지 못하니 평화롭지 못해서 계속 두리번거릴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의외의 말씀을 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하신 첫 마디는 “평화가 너희와 함께”였지요.
그만큼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평화를 제일 먼저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이 평화는 세상이 가리키는 평화와 달랐습니다.
세상의 평화는 더 많은 것을 가져야만 얻을 수 있다고 유혹합니다.
그래서 남의 것을 빼앗아서라도 더 많은 것을 가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런 평화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세상의 평화를 칼로 잘라버리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주님만을 바라보면서 주님 안에서 진정한 평화를 얻기를 바라시는 것입니다.
이 평화를 우리 마음에 담아야 합니다.
세상의 것을 부러워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함이 진정한 부러움이 될 것입니다.
성령의 칼
반영억 라파엘 신부
칼은 좋은 것입니까? 해로운 것입니까?
칼은 꼭 필요한 것이기에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좋은 것에 쓰지 않고 엉뚱하게 쓰이기도 합니다.
좋은 것이지만 잘못 쓰임을 받으면 좋지 않은 것이 되고 맙니다.
칼은 칼로 존재하는데,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만들어진 목적에 따라 잘 사용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를 당황하게 만듭니다.
더군다나 아들이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갈라서고
집안 식구가 바로 원수가 된다고 하니 정말 귀가 막힐 일입니다.
어찌 구원자 예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시나요?
사랑 자체 이신 분이 이리 무서운 말씀을 하시나요?
그러나 하느님의 나라는 이렇게 옵니다.
죄악을 거부하는 내면의 칼을 써야 합니다.
매 순간 선을 선택하는 결단의 칼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운명은 분명 다르게 나타나게 마련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구원을 원하시지만,
칼을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서 좋기도 하고 나쁘기도 한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께서 주시는 칼은 상대방을 향해 휘두르는 칼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을 향해 있는 칼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칼의 의미를 잘 알아야 합니다.
바오로 사도는
“구원의 투구를 받아쓰고 성령의 칼을 받아 쥐십시오.
성령의 칼은 하느님의 말씀입니다”(에페6,17). 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히브리서 4장 12절에서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냅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말씀 받아들여 참된 경외심과 두려움을 갖는 사람과
그릇된 욕망을 가진 사람을 갈라놓는다는 말씀으로 알아들을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로 향할 것인가? 아니면 돌아설 것인가?
이에 대한 태도는 집안 식구가 다 각 각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 서로의 견해가 다르고 받아들이는 믿음의 정도가 같지 않기 때문에 원수가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예’ 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합니다.
갈라진 마음이나 어정쩡한 결단으로는 결코 아무것도 얻을 수 없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서로의 마음이 상하고 적대감을 지니게 될 수도 있습니다.
실제 악이 기승을 부릴 때는 부모와 자식 간이나 형제간, 부부간처럼 가까운 사이여서
도저히 악이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은 관계 곳곳에 끼어듭니다.
그렇지만 이럴 때일수록 어려움에 타협하지 말고 말씀 안에 꿋꿋하게 서 있어야 합니다.
세상을 살면서 예수님께서 기뻐하시는 것과 인간적인 것이 끊임없이 대치하게 됩니다.
그러나 성령의 칼을 선택한다면 그 모든 것이 하느님 안에서 열매 맺게 되고
주님께서 주시는 평화로 넘쳐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너희에게 평화를 남기고 간다. 내 평화를 너희에게 준다.
내가 주는 평화는 세상이 주는 평화와 같지 않다.
너희 마음이 산란해지는 일도, 겁을 내는 일도 없도록 하여라”(요한 14,27).
더 큰 사랑을 담아 사랑합니다.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이영근 아오스딩 신부
오늘 복음은 예수님께서 사도들을 파견하시면서 하신 말씀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마태 10,34)
분명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왕'일진데, 어째서 평화에 칼이 필요한가?
그것은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화’는 세상의 평화와 다르기 때문입니다.
병든 환자에게는 수술이 필요한 까닭입니다.
우리 심장에 꽂혀 우리의 안주와 이기심을 도려내고,
세상에 꽂혀 세상의 불의와 부정을 절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우리 가슴에 꽂혀 우리를 살리는 칼이요,
이 세상에 던져져 이 세상을 살리는 칼입니다.
죽이기 위한 칼(살인검)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활인검)입니다.
그래서 산상설교에서 말씀하십니다.
"행복하여라, 평화를 이루는 사람들!" (마태 5,9)
평화로운 사람이 행복한 것이 아니라 ‘평화를 위해 일하는 사람’이 행복합니다.
그렇습니다.
당신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칼을 주십니다.
이처럼 말씀은 우리에게 변혁을 요청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복음서는 한 권의 혁명서입니다.
그리고 제자들은 성령을 받고 뒤집혀진 혁명가들입니다.
그리고 '참행복 선언'을 선언하는 진복팔단은 혁명선언서입니다.
그것은 첫째가 꼴찌되고 꼴찌가 첫째되는 혁명입니다.
그래서 프란치스코 교종께서는 강론에서 말씀하셨습니다. (2013.11.15)
“만약 그리스도인이 혁명가가 아니라면, 그는 더 이상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은 은총의 혁명가가 되어야 합니다.
참으로 아버지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죽으심과 부활을 통해
우리에게 주신 은총은 우리를 혁명가가 되게 만듭니다.”
이 혁명은 진리의 말씀인 쌍날칼에 의해 실행되는 혁명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말합니다.
“사실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그래서 사람 속을 꿰 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속셈과 생각을 갈라냅니다.” (히브 4,12)
‘내 칼을 받아라.’
오늘 예수님께서는 우리에게 ‘말씀의 칼’을 선사하십니다.
그것은 ‘타인에게’가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던져라’고 주는 칼입니다.
자기 자신의 심장에 던지라고 주는 칼입니다.
사실 중병에 걸린 환자에게 필요한 것은 금은보석의 값비싼 선물더미가 아니라,
그를 수술할 수 있는 칼인 것입니다.
병든 몸에다 금은보석으로 치장했다 해서 결코 행복해지는 것이 아니듯,
병자는 칼로 병을 도려내는 수술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할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참으로 예수님께서 던지신 칼이야말로 죽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살리기 위한 칼입니다.
평화를 이루기 위한 칼이요, 말씀을 이루기 위한 쌍날칼입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내 목에 칼을 견주시고 말씀하십니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마태 10,39)
이처럼 '제자의 길'은 그야말로 도전입니다.
결코 양다리를 걸칠 수도, 두 주인을 섬길 수도 없는,
아니 자신의 목숨마저 내걸어야 하는 도전입니다.
그것은 사도 요한의 권고대로,
“말과 혀가 아닌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하는 사랑”(1요한 3,18 참조)입니다. 아멘.
<오늘의 말·샘 기도>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마태 10,34)
주님!
제 목에 칼을 견주소서.
당신 영의 칼로 저의 자애심을 내리치소서!
제 심장에 당신 사랑의 불꽃이 타오르게 하소서!
그 어느 것도 당신보다 더 사랑하지 말게 하소서!
말과 혀로써가 아니라, 행동으로 진리 안에서 사랑하게 하소서! 아멘.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
‘임마누엘’은 ‘주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라는 뜻입니다.
우리는 이 말을 이사야 예언서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사야 예언자는 이렇게 이야기합니다.
“주님께서 몸소 여러분에게 표징을 주실 것입니다.
보십시오, 젊은 여인이 잉태하여 아들을 낳고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할 것입니다.”
교회는 이사야 예언자가 선포했던 임마누엘은 마리아를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합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성체성사’를 제정하셨고, 이제는 성체의 모습으로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임마누엘과 관련 된 일화가 있습니다.
전쟁 중에 성당이 폭격을 당했고, 성당 앞에 있던 예수님의 동상도 폭격으로 손이 부서졌습니다.
성당에서 기도하던 군인이 이렇게 적었다고 합니다.
“나는 이제 팔이 없다. 네가 나의 팔이 되어다오.”
성당을 복구하면서 예수님의 동상은 팔이 없는 그대로 보존했다고 합니다.
이제 우리들이 ‘임마누엘’이 되어야 한다는 다짐을 표현하였다고 합니다.
임마누엘과 관련된 이야기가 또 있습니다.
“한 젊은이가 힘겨운 삶을 살다가 하느님의 품으로 갔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젊은이의 지나온 날을 영상처럼 보여 주셨습니다.
그런데 젊은이의 옆에는 발자국이 같이 있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아니 제 옆에 저 발자국은 누구의 것입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네가 가는 길에 늘 함께 있었단다.
젊은이는 감사하는 마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런데 유독 젊은이가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발자국이 하나밖에 없었습니다.
젊은이가 하느님께 물었습니다.
하느님 어째서 제가 가장 힘들고 어려웠을 때는 제 곁에 없었습니까?
그러자 하느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아니란다. 그때는 내가 너를 업고 걸었단다.”
임마누엘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제 우리가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장 헐벗고, 가장 굶주리고, 가장 가난하고,
가장 고통 받는 이들에게 ‘임마누엘’이 되어주는 것입니다.
다른 하나는 고통의 순간에도, 영광의 순간에도, 절망의 순간에도,
기쁨의 순간에도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믿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저는 임마누엘 주님께서 함께하셨음을 믿습니다.
저는 뉴욕에서 2번이나 차와 접촉 사고가 있었습니다.
한번은 인도를 걸어가는데 후진하던 차와 부딪혔습니다.
잠시 정신이 없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또 한 번은 횡단 보도의 파란불에 걷고 있는데 좌회전하는 차와 부딪혔습니다.
응급실에서 치료를 받았지만 주님께서 함께 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이곳 댈러스에 와서 신부님들과 함께 샌안토니오의 미션엘 다녀오는 길에
고속도로에서 접촉 사고가 있었습니다. 서행하던 우리 차를 뒤에 오던 차가 받았습니다.
차 트렁크의 유리가 깨지고, 파손이 있었지만,
주님께서 함께하셔서 이번에도 큰 탈 없이 마무리되었습니다.
주님께서는 힘들고 어려울 때, 저와 함께 계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주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것에는 인색했습니다.
어려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외로운 이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내가 필요한 사람들을 만나려 했지,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여인들에게 천사들이 이렇게 이야기 하였습니다.
“여러분은 왜 살아 있는 사람을 죽은 사람이 있는 곳에 찾습니까?
그분은 예전에 말씀하신 대로 갈릴래아에 있습니다.
그러니 제자들에게 갈릴래아로 가라고 하십시오.”
부활하신 예수님은 무덤에 없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복음을 전하셨고, 표징을 보여주셨던 갈릴래아에 계셨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다시 가난한 이들 곁에 계셨습니다.
제자들이 갈릴래아에 갔을 때 비로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평화를 주셨고, 성령을 주셨습니다.
성령을 받은 제자들은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였습니다.
두려움은 담대함으로 바뀌었습니다. 고통도, 시련도, 박해도 이겨낼 수 있었습니다.
문득 생각합니다. 우리는 진리를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영원한 생명을 어디에서 찾고 있을까?
예수님께서는 화려하고 웅장한 궁궐에서 태어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초라한 말구유에서 태어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율법학자와 바리사이파를 부르시지 않았습니다.
갈릴래아 호숫가에서 고기 잡던 어부들을 부르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유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함께 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가난한 이, 병든 이, 소외된 이들과 함께하셨습니다.
물질과 자본이 가득한 곳에서는 진리를 찾을 수 없습니다.
소유와 욕심에서는 영원한 생명을 찾을 수 없습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사람은
조욱현 토마 신부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려 할 때, 우리가 아무런 어려움 없이 주님의 뜻을,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예수께서는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34절) 하신다.
주님께서는 말씀이라는 칼을 통하여 하느님을 따르는 일치,
참 평화를 이루시기 위해서 오신 분이시다.
우리가 말씀의 힘을 통해 세례의 물로 새롭게 될 때,
우리는 죄와 죄의 근원으로부터 갈라서게 된다.
그리고 죄를 많이 짓고 불성실했던 과거의 나를 벗고 몸과 마음이 성령으로 새로워지면
우리는 죄스러운 옛 삶의 습관들을 혐오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 가족들 간의 분열이란 바로 내 마음 안에 일어나는 갈등이다.
선포된 복음은 평화를 끌어내기 위해 갈등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다.
세상은 하느님께 대한 신앙 때문에 서로 갈라져 있다.
어떤 집안에는 믿는 사람들과 믿지 않는 사람들이 같이 살고 있다.
여기에서 갈등이 나타난다. 예수님은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7절).
이 말씀은 그리스도 안에서 부모님을 자식들을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부모나 자식들은 그분 안에서 함께 할 것이라는 뜻이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지 않는 사람도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38절)
그리스도께 속하는 사람들은 자신의 죄스러운 버릇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사람들이다.
“제 목숨을 얻으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고,
나 때문에 제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39절)
말씀을 통하여 악습을 끊어버림으로써 새로운 생명으로 태어난다. 즉 완전히 변화된 내가 된다.
“너희를 받아들이는 이는 나를 받아들이는 사람이다.
예언자를 예언자라서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가 받는 상을 받을 것이다.”(40-41절)
예언자를 받아들이는 이는 예언자 안에 계신 분을 받아들이는 것이며,
의인을 받아들이는 사람도 같은 상을 받는다.
그는 바로 그들 안에 계시며 그들을 파견하신 그들을 맞아들였기 때문이다.
그는 예언자와 의인에 합당한 영예를 받을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우리의 가장 작은 행위라고 하더라도,
즉 그들 신앙의 겉모습만 보고서 그에 마땅한 친절을 베풀었다 해도
희망을 품은 데 대한 상을 빼앗지 않으시는 분이시다.
“시원한 물 한 잔”(42절)의 의미는 바로 이것이다.
주님께서는 사랑을 베푼 사람의 믿음에 상을 주시는 것이지,
사랑을 받은 사람의 위선에 상을 주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시원한 물 한 잔은 아무리 가난한 사람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오늘의 복음을 잘 묵상하고 주님께서 명하신 것을 실천하는 삶을 노력하여야 한다.
모든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 행하십시오!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오늘 예수님께서는 꽤 납득하기 힘든 의아한 말씀을 선포하십니다.
“내가 세상에 평화를 주러 왔다고 생각하지 마라. 평화가 아니라 칼을 주러 왔다.”
“아버지나 어머니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은 나에게 합당하지 않다.”
오늘 주님의 말씀은 심사숙고해서 잘 새겨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문자 그대로 해석할 것이 아니라
행간에 숨겨져 있는 말씀의 진의를 찾는 일이 중요합니다.
아버지나 어머니, 아들이나 딸들은 어쩌면 우리가 세상 안에서
극진히 섬겨야 할 세상 안의 하느님입니다.
그들을 미워하고 배척할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강조하시는 것은 하느님께 우선권을 두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삶 속에서 하느님의 위치를 가장 중심에 두라는 말씀입니다.
돌아보니 저 역시 제 삶 안에서 하느님의 입지가 참 많이도 위축되어 있습니다.
그리 중요하지 않은 다른 많은 것들이 하느님 앞에 위치 해 있습니다.
중심에 계셔야 할 하느님께서 밀려나고 또 밀려나서
제일 구석진 곳, 한 모퉁이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때로 주방에서, 때로 들판에서 일하면서 부활의 라우렌시오 수사님 생각을 자주 합니다.
그분은 끊임없이 하느님의 현존을 자신의 구체적인 일상 안으로 끌어오려고 무진 애를 썼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은 동료 수도자들을 위해 스프를 주걱으로 저으면서 깊은 묵상에 잠겼습니다.
형제들의 구두를 수선하면서도 하느님과 깊이 일치했습니다.
라우렌시오 수사님의 말씀입니다.
“반드시 큰일만 해야 할 필요가 없습니다.
나는 프라이팬으로 작은 계란 하나를 요리하더라도 하느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뒤집습니다.”
따지고 보니 우리 모두 성인의 길을 걸어갈 많은 가능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 앞에 매일 놓이는 작고 궂은 일들, 남이 하기 싫어하는 일들,
매일 반복되는 별 의미 없어 보이는 일들, 그 일을 하느님 현존 안에서 행한다면
우리 역시 성인의 길을 걷고 있는 것입니다.
요즘 저도 라우렌시오 수사님 비슷하게 지내고 있습니다.
형제들과 아이들을 위한 식단을 짜고, 시장을 봐오고, 지지고 볶고, 끓이고 튀기고 있습니다.
열심히는 하지만, 더 노력할 부분이 있는 것 같습니다.
그 단순한 일들을 기쁜 마음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 작고 하찮아 보이는 일들도 하느님께 봉헌하는 마음으로 행한다면,
아주 훌륭한 묵상기도요 관상 기도가 됨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고 말씀 가운데,
아버지, 어머니, 아들, 딸, 며느리, 시어머니 같은 용어들을 들으면서
진정한 의미의 가족에 대해서 생각해 봅니다.
그들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봐야 하나 고민하게 됩니다.
우리의 부모 형제, 형과 동생, 누이는 대체 어떤 존재입니까?
그들은 우리에게 너무나 소중한 존재들이 확실합니다.
하느님께서 허락하셔서 이 세상사는 동안 연을 맺어주신 선물입니다.
당연히 그들에게 큰 가치와 의미를 부여해야 합니다.
지극정성으로 서로를 보살펴줘야 합니다.
무한한 인내로 서로를 참아내야 합니다. 서로의 성장을 위해 끝없이 노력해야 합니다.
그러나 가족이 아무리 소중하다 할지라도
창조주이자 절대자이신 하느님과는 비교가 안 되는 존재들입니다.
당연히 그 어떤 존재라 할지라도 최고 善이신 하느님보다 우위에 두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오늘 다시 한번 하느님을 우리 삶의 가장 한가운데로 끌어와 모시는 하루가 되면 좋겠습니다.
우리의 보잘것없어 보이는 일상 안에
하느님께서 굳건히 현존하신다는 진리를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평화 대신 칼 : 무엇에 쓰시려는가?
박상대 마르코 신부
오늘 복음은 마태오복음 10장, 파견설교의 마지막 부분이다.
지금까지 예수께서 말씀하신 파견설교의 내용을 미루어 짐작할 수는 있겠으나,
청천벽력 같은 말씀이 오늘 복음을 통하여 선포된다.
예수께서는 이 세상에 평화보다는 칼을 주러 오셨다고 하시며,
집안의 식구들이 각자에게 원수라고 말씀하신다.
이 말씀을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가.
예수께서는 칼을 내리쳐 온 가족을 풍비박산내실 작정을 하신 모양인가.
예수께서 이 세상에 오신 의도가 과연 이런 것인가.
“회개하라, 하늘나라가 다가왔다.”(4,17)고 하시면서
공생활을 시작하신 예수께서 도래하는 하늘나라를 이런 내용과 묶으시려는 것인가.
결코, 그렇지 않을 것이다.
예수께서 선포하시는 하늘나라를 결코 그런 것이 아니라고 분명히 말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진복선언을 포함한 산상설교(5-7장)의 가르침과
수많은 구마기적과 병자치유기적(8-9장)의 행적 등을 통하여 예수님은
“몸소 우리의 허약함을 맡아 주시고 우리의 병고를 짊어지신 분”(8,17)이심을 확인하였고,
그분에게 이 땅의 죄까지 사하는 권한이 있음을 보고 하느님을 찬양하였다.
그렇다면 오늘 복음은 다른 각도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우선 칼의 의미를 살펴보자. 칼은 베고, 잘라 분리시키는 일을 한다.
다음으로 예수께서 온 가족에게 칼을 내리쳐 아들과 아버지를, 딸과 어머니를,
며느리와 시어머니를 서로 맞서게 갈라 세우시려는 의도를 살펴야 한다.
물론 칼로 내리쳐 어느 한 편을 죽이자는 것은 결코 아니다.
칼로 갈라진 아들과 아버지를 보자. 그 관계를 살펴보자는 것이다.
‘아들’이란 ‘아버지’ 없이 있을 수 없고, 아버지 역시 아들 없이 존재할 수 없다.
딸과 어머니, 며느리와 시어머니도 마찬가지이며, 세상의 어느 존재도 다 같은 원리에 속한다.
누구든 자신이 무엇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무엇을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것이 관계의 원칙이다.
따라서 오늘 예수님의 말씀은 곧 우리들의 인간관계를 재삼, 숙고하라는 뜻으로 이해되어야 한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찾지 아니하고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에서 아들이라고 우긴다면, 그럴 수도 없겠거니와
그는 아버지에게 ‘원수’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고 마는 것이다.(34-36절)
내가 예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면 제자로서의 나의 존재는 무엇과 더 관련이 있겠는가?
아버지와 어머니인가? 아니면 예수님인가? 물론 예수님이다.
따라서 예수님의 사람이 되어 그분의 복음을 전파하는 제자가 되려는 사람은
자기 식구들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해야 하고, 세상보다는 하느님 나라를 더 사랑해야 한다.
예수님께서 결국 십자가를 지시고 그 십자가에 목숨을 바쳤으니,
제자들도 그분처럼 십자가를 지고 가야하며, 그 위에 자신을 매달 줄 알아야 할 것이다.
결국 예수님의 제자가 그 외에 다른 방법을 통하여 자기 목숨을 얻으려 한다면 오히려 잃을 것이고,
예수님처럼 아버지의 뜻에 자기 목숨을 맡겨 그 목숨을 잃는다면 오히려 얻게 되는 것이다.(37-39절)
예수님의 부활로 힘을 얻은 제자들이 강림한 성령과 더불어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예수께서 내리신 파견설교의 내용이 빈말이 아니라 현실로 다가왔다.
수많은 이들이 복음 때문에 목숨을 바쳤다.
이렇게 성장한 교회 안에는 어느덧 여러 가지 직무가 생기고 이 직무를 맡은 교역자가 생기게 된다.
사도들로부터 시작하여 주교, 사제, 부제, 신자들에 이르는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 전체가 바로 그것이다.
이들이 비록 죽을 각오를 하고 예수님을 따르며, 그분의 복음을 전하는 제자라고 하더라도
복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그러나 이들이 비록 작고 보잘것없은 자들이라 할지라도
실제로는 예수님의 대리자요, 하느님의 교역자들이다.
예수님의 제자라고 하기에 턱없이 부족한 우리들이지만
서로에게 냉수 한그릇이라도 건네며 복음 선포의 하루를 시작하자.(40-42절)
[출처] ‘벨라수녀 영화방’ : 오늘의 말씀 묵상
첫댓글 아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