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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일설교.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열왕기상 18장 20~24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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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말씀은 엘리야 선지자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 선지자 850명과 대결한 사건 이야기입니다. 사건의 내용은 많이 알고 계시겠지만 이 사건이 있기 까지 북 이스라엘의 왕국의 역사를 간단하게 살펴 봅니다.
북 이스라엘은 초대왕인 여로보암 이후 200년 동안 총 19명의 왕이 있었습니다. 19명의 왕중에 8명의 왕은 암살 당하거나 반란으로 죽임 당하였습니다. 오늘 말씀에 나오는 아합왕의 아버지는 오므리 왕인데, 오므리 왕은 그 앞전의 왕인 시므리 왕을 죽이고 왕이 되었습니다. 오므리 왕 이후 약 48년 동안 다섯 번의 상속이 이어졌고, 이 시대를 오므리 왕조라고 부릅니다.
오므리가 시므리를 죽일 때 시므리 왕은 당시의 수도였던 디르사 왕궁을 불태우고 자결했습니다. 오므리 왕은 수도를 사마리아로 옮겼으며 이때부터 사마리아 왕궁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오므리 왕은 12년을 통치하다 아들인 아합에게 왕위를 물려주었고, 아합왕은 페니키아 왕인 엣바알의 딸 이세벨을 왕비로 맞이 합니다. 이세벨은 맹신적인 바알과 아세라 우상숭배자였고 남편인 아합왕과 더불어 북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추악한 우상숭배와 온갖 악행들을 저질렀습니다.
아합 왕의 통치 기간은 무려 22년 이었고 백성들은 오랜 시간 동안 핍박과 굶주림에 시달렸습니다. 이렇게 영적으로 어두워진 시대에 아합과 이세벨에 맞선 선지자가 바로 엘리야입니다.
아합과 이세벨은 사마리아 성에 바알과 아세라 신전을 지어 놓고 하나님 면전에서 십계명의 제 1계명을 서슴 없이 어겼습니다. 아합 왕에 대해 평가한 기록을 보면 “그는 그 이전의 이스라엘의 모든 왕보다 심히 이스라엘 하나님 여호와를 노하시게 하였더라”(왕상 16:33) 라고 했습니다.
우상숭배에 지극히 분노하신 하나님은 엘리야를 통하여 예언 하게 하였는데, 엘리야야의 입으로 비가 내린다고 말하기 전까지는 이스라엘에 가뭄이 있을 것이며 이슬비도 내리지 아니하겠다 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3년 동안 지속 된 가뭄은 온 나라에 크나큰 고통을 가져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엘리야를 요단강 근처 그릿 시냇가로 인도하셨고 거기에서 까마귀가 아침 저녁으로 가져다 주는 떡과 고기를 먹게 하셨고, 그릿 시냇가의 물도 마시게 하셨습니다. 하지만 가뭄이 심해져 엘리야가 마시던 시냇가의 물도 말라버렸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버틸 수 없는 극한의 가뭄 상황 속에서 오늘 본문의 이야기가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 있는 열왕기상 18장 1, 2절을 읽어 드립니다.
“1. 많은 날이 지나고 제삼년에 여호와의 말씀이 엘리야에게 임하여 이르시되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 2. 엘리야가 아합에게 보이려고 가니 그 때에 사마리아에 기근이 심하였더라” 아멘.
이 말씀에서 우리는 아주 단순한 진리를 보게 됩니다. 이슬비도 내리지 않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은 이루어져서 가뭄이 즉시 시작 되었고, 엘리야의 입에서 비가 내린다는 말이 나오기 전 까지는 가뭄이 계속 될 것이라는 말씀도 그대로 다 이루어져서 3년 이나 가뭄이 계속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뜻과 계획은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무언가 하시고자 하시면 즉시 시행 하시고, 멈추지 아니하겠다고 작정 하시면 언제까지라도 계속 하십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신실하심이시고, 이 신실하심을 끝까지 신뢰하는 것이 곧 믿음입니다.
하나님은 쉬지 않으시고 졸지도 주무시지도 아니하시고 오늘도 일하고 계십니다. 그 일하심의 대상이 바로 나이고, 우리 가족이고, 우리 교회이고, 우리 나라이고, 세상 모든 민족임을 조금도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를 향하여 비를 멈추게도, 비를 내리시게도 하시는 분임을 믿으시고 항상 하나님 앞에서 겸손과 겸비의 자세로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너는 가서 아합에게 보이라 내가 비를 지면에 내리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엘리야와 같은 사람을 선지자, 혹은 예언자라고 말합니다. 예언자는 하나님이 무슨 내용을, 어디에 가서, 누구를 대상으로든지, 하나님께로부터 말씀을 들은 그대로 전하는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비가 다시 올 때가 언제인지 스스로 알 수도 없었고, 어느 시점에, 어느 곳에서, 어떤 방법으로, 누구에게 예언을 말해야 하는지를 스스로 정할 수도 없었습니다.
이렇듯 예언자는, 하나님의 말씀하실 때까지 무조건 기다리다가 하나님이 들려주시는 말씀 그대로를 들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장소에 가서, 하나님이 정해 주신 대상에게 선포하면 되었습니다. 이것이 예언자(선지자)가 하는 일이었습니다.
진짜 예언자는 하나님이 맡겨 주신 말 씀대로만 행동을 합니다. 하나님은 엘리야에게 아합 왕에게 가서 (얼굴을)보이라고 하셨지 가뭄이 그치고 비가 내릴 것이라는 말을 하라고는 하지 않으셨습니다.
엘리야는 아합 왕에게 나아가면 죽임 당할 것이 분명함에도 가뭄이 그치고 비가 다시 내릴 것이라는 말조차 하지 못하게 되었고, 그냥 가서 얼굴만 보이라고 명령 하신대로 따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비가 내리게 하는 것은 당연히 하나님이 하실 것이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말고 그냥 얼굴만 보이라는 것은 너무 가혹 합니다.
엘리야는 꼼짝 없이 죽임 당하게 되었습니다. 아합 왕이 혹시 목숨 만은 살려주려고 할지 몰라도 악독한 이세벨이 그냥 놔 둘리가 없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러한 사정을 잘 알면서도 아합 왕을 만나고자 거침 없이 왕궁을 향하여 나갔습니다.
아합왕에게 찾아가는 도중에 해프닝이 일어 납니다. ‘오바댜’라는 아합의 신하를 만납니다. 엘리야가 오바댜에게 얼른 왕궁으로 가서 숨어지내던 엘리야가 나타났다는 말을 전하라고 합니다.
오바댜는 깜짝 놀라면서 말하기를, “왜 나를 죽음으로 몰아넣습니까? 아합왕이 당신을 죽이려고 이나라 저나라를 찾아다니며 다른 나라 왕들을 위협하면서 엘리야를 숨겨주지 않고 있다는 맹세를 받아내고 있습니다. 만약 내가 당신을 봤다고 말하면 여호와의 영이 당신을 숨겨줄 것이고, 그럼 나는 거짓을 말한 것이 되어 반드시 죽임 당할 것입니다” 이렇게 말합니다.
엘리야는 오바댜에게 “내가 섬기는 만군의 여호와께서 살아 계심을 두고 맹세하노니 내가 오늘 아합에게 보이리라”(왕상 18:15) 라고 하면서 자신이 도망가지 않을 것이니 아합 왕에게 내가 여기 있다고 전해 주라고 당부합니다.
사실 오바댜는 아합 왕의 신하였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선지자 백명을 굴에 숨겨주고 떡과 물을 주고 있었던 의인 이었습니다. 엘리야는 그가 어떤 사람 인지를 이런 알고 대화를 나눈 것입니다.
이런 이야기 과정이 있은 후에 오늘 본문이 이어집니다. 16, 17절을 읽어 드립니다. “16. 오바댜가 가서 아합을 만나 그에게 말하매 아합이 엘리야를 만나러 가다가 17. 엘리야를 볼 때에 아합이 그에게 이르되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아멘.
오바댜의 말을 들은 아합 왕은 즉시 엘리야를 만나러 갑니다. 만나러 간다기 보다 죽이거나 잡아 오려고 군사를 데리고 간 것입니다. 아합 왕은 엘리야를 보자 마자 인사고 안부고 다 필요 없이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여 너냐” 라고 말하면서 강하고 격한 분노를 표출합니다.
다른 번역을 보면, 공동번역에는 “그대가 이스라엘을 망치는 장본인인가?”, 우리말 성경에는 “네가 바로 이스라엘에 문제를 일으키는 자로구나!”, NIV 성경에는 “Is that you, you troubler(문제, 고통, 말썽, 곤란, 어려움) of Israel?”, 라고 하였습니다.
한 마디 한 마디에서 살의가 느껴지는 매우 적대적이고 공격적인 어투입니다. 아합왕은 모든 문제의 근원이 엘리야 라고 보았습니다. 아합왕이 보기에 엘리야가 이슬도 내리지 않겠다고 예언한 것은 저주를 한 것이라고 보았고, 그 저주 때문에 모든 나라가 고통에 빠졌다고 생각했습니다. 자신이 우상숭배에 앞장서서 이런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습니다.
괴롭게(히, 아카르) 한다는 말은 어떤 사람의 말이나 행동이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주거나 나아가서 민족 전체에까지 고통을 야기한다는 뜻입니다. 야곱의 두 아들인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성에서 살인을 저지르자 그 일로 가족에게 “화를 끼쳤다”(창 34:30)고 했는데, 화를 끼치다는 말이 괴롭게 한다는 말과 같습니다.
또한 아간의 전리품 착복 사건으로 아이성 점령에 실패하고 군사들이 목숨을 잃은 사건이 발생 했을 때 여호수아는 아간에게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냐”(수 7:25) 라고 말합니다. 아간 한 사람의 범죄로 수백 만명의 이스라엘이 위기에 빠진 상황도 괴롭게 한다는 말과 같은 뜻입니다.
“적반하장(도둑질한 사람이 오히려 매를 들고 주인에게 달려든)도 유분수(有分數, 마땅히 지켜야 할 분수가 있음)지”라는 말이 딱 이 상황에 적합한 말입니다. 또 후안무치(厚顔無恥, 뻔뻔하고 부끄러움이 없다), 주객전도(主客顚倒, 주인과 손님의 처지가 뒤바뀐다) 라는 사자 성어도 지금 장면에 적합한 말입니다.
엘리야는 어이가 없어서 이렇게 대답 합니다. 18, 19절을 읽어 드립니다.
“18. 그가 대답하되 내가 이스라엘을 괴롭게 한 것이 아니라 당신과 당신의 아버지의 집이 괴롭게 하였으니 이는 여호와의 명령을 버렸고 당신이 바알들을 따랐음이라 19. 그런즉 사람을 보내 온 이스라엘과 이세벨의 상에서 먹는 바알의 선지자 사백오십 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사백 명을 갈멜 산으로 모아 내게로 나아오게 하소서” 아멘.
엘리야는 우회적으로 말하고 싶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아버지 오므리 왕, 그리고 당신 아합 왕이 우상 숭배하고 악행을 저질렀기 때문에 이스라엘이 괴롭힘 당하고 있는데도 어찌 그리 뻔뻔하게 남에게 덮어 씌우려고 하시오. 말이 필요 없으니 하나님의 선지자라고 일컫는 나는 혼자 나설 것이니, 왕이 아끼는 바알 선지자 400명과, 이세벨 왕비가 아끼는 아세라 선지자 450명을 즉시 나오게 하시오, 갈멜산에서 대결해서 누가 진짜인지 당장 끝장을 봅시다”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도 할말 시원하게 다 하는 엘리야가 참으로 당당하고 멋져 보입니다. 엘리야는 우상을 섬기는 가짜 선지자들이 몇 명인지 숫자까지 다 알고 있었습니다. 엘리야는 이번 기회에 그들을 싹 쓸어 버릴 생각이었습다.
물론 이 상황도 엘리야가 홧김에 한 번 저질러 본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미리 알려 주신 것을 그대로 실행한 일이 분명합니다. 드디어 성경에서 선지(예언)자들의 활동 역사상 가장 놀랍고 극적인 1:850의 갈멜산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갈멜산으로 모인 장면을 보겠습니다. 20, 21절입니다. “20. 아합이 이에 이스라엘의 모든 자손에게로 사람을 보내 선지자들을 갈멜 산으로 모으니라 21.엘리야가 모든 백성에게 가까이 나아가 이르되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하니 백성이 말 한마디도 대답하지 아니하는지라”
아합은 선지자들을 갈멜산으로 모았다고 했습니다. 주목해 볼 것은, 엘리야가 우상 숭배자들을 지칭 할 때는 바알의 선지자 혹은 아세라 선지자라고 표현 하면서 하나님이 아닌 바알과 아세라를 따르는 자들임을 분명히 합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바알과 아세라를 빼고 그냥 선지자 라고 부릅니다. 아합 왕은 자기 옆에 있는 자들이 바울과 아세라를 모시는 우상 숭배자들이었음에도, 그들이 선지자라고 불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선지자만 선지자냐, 내가 모시는 선지자도 당연히 선지자라는 엄청난 과대망상에 빠져 있었습니다. 아합은 이미 우상숭배의 원흉인 이세벨 왕비의 지속적인 가스라이팅으로 인하여 자기가 하나님의 위치에서 판단하고 결정하는 교만의 선봉장이 되어 있었습니다.
이제는 교만이 자랄대로 자라서 하나님의 사람을 무시하고 우습게 여기고 자기도 그만큼 할 수 있다고 착각에 빠졌습니다. 교만함이 이 지경에 이른 사람은 되돌릴 수 없는 진노와 멸망의 길로 빠지게 된다는 것을 아합 왕이 제대로 보여 줍니다.
갈멜산에 바알 선지자 450명과 이를 구경하러 온 이스라엘 백성들이 모이자 엘리야는 피를 토하는 심정으로 아합왕과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하여 일성을 외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여호와가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르고 바알이 만일 하나님이면 그를 따를지니라” 아마 이 말씀은 시내산에서 들려오던 번개와 천둥 소리 같았을 겁니다. 압도적인 권위의 선포에 모든 사람은 돌같이 굳어 버렸습니다. 아무도 단 한마디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모인 사람들이 한 마디도 못하고 입이 닫혀버린 것은 그 동안 하나님 대신에 왕과 이세벨의 눈치만 보고 머뭇머뭇 거리며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당장의 이익과 편리를 위해 이랬다, 저랬다 갈대와 같이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1명 뿐인 엘리야의 음성임에도 폐부를 찌르고 가슴을 요동치게 하며 살아계신 하나님의 임재와 권능 앞에서 무섭도록 떨리는 두려움에 사로 잡혔기 때문입니다. 백성들은 제단에 불이 붙기도 전에 엘리야의 말 한 마디에 압도당한 상태였습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는 말씀과 아주 비슷한 내용이 구약의 다른 장면에서 나옵니다. 혹시 기억이 나시나요?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조상들이 강 저쪽에서 섬기던 신들이든지 또는 너희가 거주하는 땅에 있는 아모리 족속의 신들이든지 너희가 섬길 자를 오늘 택하라”(수 24:15)
누구의 말인가요? 여호수아가 죽음을 앞두고 이스라엘 백성에게 마지막으로 질문 했던 말입니다. 여호수아나 엘리야의 심정은 이제 이 말을 듣고 무엇을 선택하든지 마지막이니, 우상을 선택하여 영원히 멸망 당하든지, 하나님을 선택하여 영생을 얻든지, 지금 이 순간의 선택이 마지막 기회이며 다시는 이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라고 최후의 선택을 요구한 것입니다.
제가 지난 몇 번의 설교에서 우리가 사는 순간 순간은 회개하고 돌이킬 기회라고 말씀 드렸습니다. 그 기회들을 다 놓치고 허무하게 흘려보내던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정말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엘리야와 여호수아 같은 누군가를 보내어 마지막 기회를 선택하도록 분명히 말씀 하실 겁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만일 여호와 하나님을 진짜 섬기려거든 지금 이 자리에서 너희가 섬길자를 선택하라” 압도되는 말씀으로 강력한 요구를 하실 겁니다.
선택을 안하거나, 못하거나, 다른 선택을 하면 심판의 불이 떨어져 모든 것을 다 태워 버릴 겁니다. 이런데도 못들은척 하실건가요? 앞서 여호수아의 말씀을 들은 백성들이 즉시 대답 합니다. “우리가 결단코 여호와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기기를 하지 아니하오리다”(수 24:16) 그러나 엘리야의 말을 들은 갈멜산에 모인 이스라엘 백성들은 계속 머뭇머뭇 거렸습니다.
오늘 말씀의 결론인 22~24절을 읽어 드립니다. “22. 엘리야가 백성에게 이르되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만 홀로 남았으나 바알의 선지자는 사백오십 명이로다 23. 그런즉 송아지 둘을 우리에게 가져오게 하고 그들은 송아지 한 마리를 택하여 각을 떠서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말며 나도 송아지 한 마리를 잡아 나무 위에 놓고 불은 붙이지 않고 24. 너희는 너희 신의 이름을 부르라 나는 여호와의 이름을 부르리니 이에 불로 응답하는 신 그가 하나님이니라 백성이 다 대답하되 그 말이 옳도다 하니라” 아멘.
엘리야가 말하기를 여호와의 선지자는 나 혼자이고 바알 선지자는 사백 오십명이라고 숫자를 강조해서 말합니다. 숫자는 힘이고, 권력입니다. 백성들은 마음에 찔리는 말을 듣고도 여전히 아합 왕의 눈치를 보고 하나님 편으로 즉시 돌아오는 선택을 하지 못했습니다.
당장 강한 자의 옆에서, 당장 편한 것을 취하고, 당장 이익이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눈치 작전을 펴는 이런 모든 모습들이 우리 인간들의 연약함입니다. 아직도 머뭇 거리는 사람들에게 엘리야가 제안 하기를 제단 위 제물에 불이 붙는 자가 이기는 것으로 하자고 했습니다.
그 때 백성들이 다 대답을 합니다. “그 말이 옳도다, 엘리야의 말대로 하자” 이렇게 호응을 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라는 하늘의 무서운 음성이 선포 될 때 납작 엎드려서 즉시로 “우리가 결단코 하나님만을 선택하고, 하나님만을 섬기고, 하나님 만을 예배하겠습니다” 라고 한 것이 아닙니다.
눈으로 보이는 결과를 보고 선택하자는 제안을 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그거 좋네요, 결과를 보고 판단해 봅시다. 이기는 편이 우리 편이죠 그렇구 말구요“ 이런 유보적이고 이중적인 마음의 태도를 보입니다.
말씀을 듣고 찔림, 두려움이 생기면 뭐합니까? 그 때 뿐이면 아무 소용 없습니다. 세상에 나가면 역시나 계속 내가 왕이고, 내가 하나님 이고, 하나님의 일하심을 무시하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자들을 우습게 여긴다면 바뀌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정말 십자가에 매달려서 마지막으로 참회했던 강도와 같이 그런 위태롭고 안일한 마음으로 머뭇머뭇 거려야 하겠습니까? 하나님은 즉시 순종하고, 빠르게 회개 하고, 영원히 돌이키는 자에게 하늘의 상급과 하나님 나라의 입성을 허락하신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오.
그렇게 일하셔야 신실하신 하나님 이시고, 그렇게 일하실 것이기에 우리 하나님은 공평과 정의와 공의의 하나님이 되시는 겁니다. 물론 이 야기의 마지막에 백성들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눈으로 목격하고 바알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 편으로 돌아 섰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도다 라고 하셨습니다. 보이지 않는 말씀만을 듣고 순종하는 자가 정말 하나님 나라에 가까운 사람입니다. 오늘 우리의 몸과 마음은 갈멜산으로 이끌림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 모두에게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선택의 기회를 주시면서 “어느 때 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라는 최후의 선택을 요구 하셨습니다.
우리 각자는 선택하야 합니다. 대답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선택과 대답을 지켜 나갈 수 있어야 합니다. 엘리야의 하나님이 불로 제단에 임하시고 멸망 당할 자에게는 심판을, 구원 받을 자에게는 은혜를 내려 주셨습니다. 우리의 선택과 믿음은 어디로 향하고 있습니까?
“어느 때 까지 둘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말씀이 여러 분의 마음과 양심에 들리신다면, 즉시 “아멘”으로 화답하시고, 나의 구원을 이루어 주시는 하나님 앞에 겸손함으로, 겸비함으로 나아가시는 우리 모두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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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아버지! 하나님의 말씀 보다 사람과 세상을 선택하며 머뭇머뭇 거리고 있음을 불쌍히 여겨 주옵소서. 하나님 보다 앞서지 않고 오직 말씀에 순종하며 하나님만을 선택하는 굳센 믿음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믿음의 주요 우리를 온전케 하여 주시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