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치술공주...
울주군 두동면 만화리에 치산서원이 있다.
이곳은 치술공주가 유배된 곳으로 치술공주가 사랑하는 남편인 박제상을 그리워하며 살았던 곳이다.
치산서원도 치술공주에서 따온 이름으로 이곳의 여주인공은 치술공주이다.
치술공주와 박제상의 사랑은 평소 치술공주를 연모하고 탐한 눌지왕의 계락과 질투에 의해 비극적인 결말을 초래하게 되었다.
눌지왕은 실성왕의 딸 아로부인 김씨를 왕비로 맞이하였지만 왕비의 동생 치술공주가 아름다워 탐을 내고 있었다.
그녀를 둘째 왕비로 삼을 수는 없을까 밤낮으로 고민하였는데 당시 신라시대에는 자매가 한 남자와 결혼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치술공주는 실성왕의 공주였고 박제상은 박혁거세의 후손으로 제5대 파사왕의 5세손이다.
치술공주는 당시 삽량주건(현 양산시장 정도의 벼슬) 박제상과 결혼하여 딸 청아와 삼아를 낳고 행복한 가정을 꾸리면서 살고
있었는데, 눌지왕에게 박제상은 눈에 가싯거리였다.
그렇다고 아무리 왕이지만 함부로 치술공주를 자기의 둘째부인으로 맞이할 근거도 없었고
마음대로 좌지우지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신모사(神母祠) 치산서원에서는 충신 박제상과 신모(神母)도 모셔 놓았다.
치술공주를 신격화하여 여신으로 모신 서원은 아마 여기 밖에 없을 것이다.
신모(神母)는 치술신모를 가리키며 치술령의 산신령을 의미한다.
치술공주가 있었기에 박제상이 역사에 기록될 수 있는 고결한 신분적 위치에 치술공주가 있었기 때문이다.
신라에서는 성골만이 왕이 될 수 있는 골품제를 유지하고 있었기에 성골을 유지하기 위해 근친혼이 다반사였다.
내물왕은 미추왕의 동생 김말구의 아들이었고 미추왕의 딸 보반부인과 결혼했다. 사촌끼리 결혼한 것이었다.
이 당시 신라는 국력이 약해서 고구려에 볼모를 보내야 할 처지였다.
제17대 내물왕은 사촌동생인 실성왕을 고구려로 볼모를 보내어 내실을 기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내물왕이 죽자 왕위를 물려받은 제18대 실성왕이 앙심을 품고서 사촌동생인 복호를
고구려로 미사흔은 왜로 볼모를 보냈다.
이에 제19대 눌지왕은 자기 동생들을 볼모로 보낸데 앙심을 품고 사촌형인 실성왕을 죽이고 왕위를 찬탈했다.
눌지왕이 왕이 되었지만 볼모로 끌려간 두 동생을 귀국시킬 방도가 없었다.
고민 끝에 눌지왕은 벌모말, 구리내, 파로 등 측근을 불러 상의한 끝에 충성스러우면서도 우직한 박제상으로 하여금
동생들을 구해오도록 하는 막중한 역할을 떠 맡겼다.
박제상이 동생을 구해오면 다행이고 구해오지 못해도 돌아오지 못할 것이므로 돌아오지 못할 경우 그가 마음속으로 사모하던
치술공주를 취할 수 있을 것이기에 더할 나위 없이 좋은 방법이었다.
이러한 음모를 알지 못한 박제상은 충성스럽게도 복호를 고구려에서 탈출시켜 귀국하게 되었고,
이에 눌지왕은 동생이 생환한 기쁨도 잠시, 왜에 머물고 있는 미사흔을 생각하면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그대의 공은 내가 잊지 않을 것이요. 내 동생 복호를 데리고 왔으니 무엇이라 치하할 수 있겠소. 정말로 고맙소.
그래도 기쁨보다 슬픔이 더 크오. 왜에 잡혀있는 미사흔의 생각에 미쳐버릴 것 같소. 어떡하면 좋겠소?”
“임금께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가 지금 바로 달려가서 왕자를 모셔 오겠습니다.”
“정말이요! 공은 나의 은인이요. 지금 바로 제상공에게 배와 사공을 내어드리겠소.”
치술공주는 이 소식을 듣고 율포(지금의 울산 강동 부근)으로 뛰어갔으나 박제상의 배는 이미 출발하고 말았다.
아련히 떠나버린 사랑하는 님을 애처롭게 부르며 울부짖었지만 님을 실은 배는 속절없이 멀어져 가기만 했다.
"사람아~!!! 임금이 그렇게 중하나,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떠나가다니 무정한 사람아!..."
눌지왕은 박제상과 약속한대로 복호와 치술공주를 묵장산(치술령) 아래에 유배를 보냈다.
그리고 ‘박제상이 복호와 짜고 역모를 꾸미고 눌지왕을 몰아내려다 실패하고 왜로 도망을 쳤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미추왕 때 왜의 사신을 불태워 죽인 일이 있고 나서 왜와 신라는 적국이 되어있었기에 서로가 불신하고 있었다.
왜인들은 이같은 정보를 듣고 박제상을 믿기 시작했다. 그리고 박제상을 이용하여 신라를 정복할 계획을 세우려고 했다.
박제상은 왜인들의 감시가 느슨해진 틈을 타서 탈출을 단행했다.
미사흔이 배를 타고 탈출할 시간을 벌기 위해 자기는 남아서 거짓 정보를 흘렸다.
마침내 발각이 나서 잡혔고, 왜왕은 왜의 사신이 신라에서 불태워 죽었던 것처럼 박제상을 불에 태워 죽였다.
치술공주는 매일 밤낮을 유배마을 뒷산(치술령)에 올라 기도를 드렸다.
미사흔은 돌아왔는데도 박제상은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몇 달 후 박제상이 죽었다는 소식이 들어왔다.
눌지왕은 충신이 죽었다는 소식에 치술공주를 위로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사랑하는 이를 잃은 슬픔에 젖은 치술공주는 더 더욱 아름다워 보였다.
주위를 물린 눌지왕은 치술공주를 겁탈하였고 궁궐을 나가지 못하게 하였다.
그 당시 과부를 취하는 것은 아무런 죄가 되지 않았다.
치술공주는 육촌 오빠인 눌지왕이 자기를 차지하기 위해 박제상을 사지로 몰아 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어찌할 수 없었다. 하지만 님을 향한 그리움은 더욱 간절해졌다.
신라 성골의 세계에서는 지금과 같은 불륜의 개념이 없었을 뿐 만 아니라 권력투쟁에서는 혈육도 없었다.
여성도 남성도 여러 명과 상대해도 후손만 많이 낳으면 상관이 없었다.
또한 성골의 숫자가 줄어들고 있었기 때문에 왕족들은 위기감을 느끼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성골들은 자기들만의 세계를 구축하기 위해 형제끼리 사촌끼리 또는 조카와 결혼하곤 했다.
아버지를 죽이고 남편까지 사지로 보낸 눌지왕은 치술공주의 지아비로 행세하고 있었지만
치술공주의 님 향한 그리움은 날이 갈수록 더해만 갔다.
마침내 치술공주는 세 딸과 함께 님을 기다렸던 그 산에 올라 님이 불에 타 죽은 바다 건너 왜를 쳐다보면서
그리움에 사무쳐 울다가 지쳐 쓰러지니 치술공주의 몸이 굳어지기 시작했다.
이내 그녀의 몸은 바위로 변하였고 그녀의 혼은 새(鳥)로 환생하여 근처 바위굴에 숨었다.
사람들은 치술공주의 죽음에 함께 슬퍼하며 그 산을 치술령(鵄述嶺)이라 불렀고
그 바위를 망부석(望夫石)으로 부르게 되었다.
그리고 혼이 새로 환생하여 숨은 곳을 은을암(隱乙巖)이라고 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는
<신모사에 그 마을 사람들이 지금까지 제사지낸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치술공주와 신모사 치산서원
-옮긴 글-
첫댓글 눌지왕 후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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