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승
송수권
어느 해 봄날이던가, 밖에서는
살구꽃 그림자에 뿌여니 흙바람이 끼고
나는 하루 종일 방 안에 누워서 고뿔을 앓았다.
문을 열면 도진다 하여 손가락에 침을 발라가며
장지문에 구멍을 뚫어
토방 아래 고깔 쓴 여승女僧이 서서 염불 외는 것을
내다보았다
그 고랑이 깊은 음색과 설움에 진 눈동자 창백한 얼굴
나는 처음 황홀했던 마음을 무어라 표현할 순 없지만
우리 집 처마끝에 걸린 그 수그린 낮달의 포름한 향내를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나는 너무 애지고 막막하여져서 사립을 벗어나
먼 발치로 바릿대를 든 여승의 뒤를 따라 돌며
동구 밖까지 나섰다
여승은 네거리 큰 갈림길에 이르러서야 처음으로 뒤돌아
보고
우는 듯 웃는 듯 얼굴상을 지었다
(도련님, 소승小僧에겐 너무 과분한 적선입니다. 이젠
바람이 찹사운데 그만 들어가 보셔얍지요.)
나는 무엇을 잘못하여 들킨 사람처럼 마주서서 합장을
하고
오던 길로 되돌아 뛰어오며 열에 흐들히 젖은 얼굴에
마구 흙바람이 일고 있음을 알았다
그 뒤로 나는 여승이 우리들 손이 닿지 못하는 먼 절간속에
산다는 것을 알았으며 이따금 꿈속에선
지금도 머룻잎 이슬을 털며 산길을 내려오는
여승을 만나곤 한다.
나는 아직도 이 세상 모든 사물事物 앞에서 내 가슴이 그때처럼
순수하고 깨끗한 사랑으로 넘쳐흐르기를 기도하며
시詩를 쓴다.
-- 시집 [꿈꾸는 섬] (1983)
여승
카페 게시글
◐――풍경이 있는 찻집
여승 - 송수권
미션
추천 0
조회 166
23.07.07 18:52
댓글 2
다음검색
첫댓글
포름한 향내를 남기며 나섰던 비구니
철러덩 멈치 거리던 내 가슴 애워쌓인 눈물 하나가
밤이면 별이되고 이슬로 행랑에 기울이다
독경 소린 붉던 감잎 달빛 눈물로 설 하게 합니다
읽을수록
맑아집니다
어디서 이렇게 고운시를 찾아 올려주시는지요
미션 운영자님께
감사 인사 올립니다~~~